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운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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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67회 작성일 2013-04-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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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서선리 이국형74세)
사례 1
끈기가 요구되는 광석의 운반
광석의 운반은 광차에 댓방[산테미-함석으로 만든]으로 퍼 담아 서 슈트에 부으면 슈트를 다시 뽑아 올려 전차로 옮긴다. 힘든 건 말할 수 없고 위험하기도 했다. 만천판은 동발이 없는 굴을 말하며 그 안쪽에 들어가서 동발을 해서 쉬고 그랬는데 항내에 나무를 지탱 하는 일을 했으며 때로는 돌이 내려 떨어질 수도 있었다.
운반은 로다로 해서 실어주면 운반부들이 광차만 밀고 다녔다.이 때 광차에 찧거나 하는 건 부주의에 의해 일어나지만 광차에 의해서 운반하는 데는 동발을 세우고 안전하게 해 놓았다.
운반부들이 슈트에 옮기기 전에 작은 구멍으로 떨어지고 큰 광석 은 망치로 깨트려 구멍으로 떨어뜨렸다.
펌프공은 굴 안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모아 놓은 뒤에 펌프를 이 용해서 물을 퍼내는 작업을 하였다. 광석을 파다보면 아래로 파 내 려가서 도목항,양양항,논화항의 물이 서로 이어져 수항이 가장 낮 은 곳에 위치하므로 물이 수항으로 내려가면 30마력, 70마력,100마 력짜리가 펌프가 물을 퍼 올렸다.


사례 2
노름과 춤바람
광산 굴에서 작업을 마치고 장승리로 나오면서부터 술을 마시고 화투놀이(도리짓고땡)을 많이 했다. 그때 월급을 봉투에 넣어 주었 는데 월급일에 술값으로 탕진하기 전에 아내들이 가서 월급봉투를 받아왔는데 아내들이 여럿이 패가 되어 속초에 장을 보러가서 춤바 람이 나는 경우도 있어 이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 남편들이 월급날 술도 마시고 담배 내기 화투와 놀음에 빠져 들게 되면 광산의 부인들은 가난하게 살았다.
광업소에서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관광을 가는데 비용은 매 달 일정금액을 적립하여 경주 불국사 등 전국 유명지로 갔다. 송년 회도 회비를 내서 넓은 가정집(이국형 집)에서 큰 가마솥을 걸어놓 고 돼지를 잡아서 노동자들이 함께 하였다.


(구술자 북평 이상억78세)
사례 1
선광장 폐석운반
광석 상차반에서 대시미라고 어레이[철사로 만든 들것]같은데다 광석을 담아서 차에다가 싣는데 한 학구[통]가 가득 차면 감독한테 검사 받는다.
그리고 광석을 광차에 싣고 나와서 쏟아 놓으면 이제 폐석장 여자 들이 나와서 그걸 골라 철은 철대로 선별하고, 폐석은 폐석대로 골 라 따로 모아놓고, 선별 해 놓은 철광석은 일산도요 타 차에 실어서 속초로 나가면 막 바로 일본으로 싣고 갔다.
철을 고르면 차에다 학구를 놓고 차에 철을 상차하고 4톤이 되면 차가 출발했다. 그 때에는 태평실이 없었고 그냥 학구로 상차해서 나갔고 12톤 츄레라도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대시미 하던 사람들이 일을 했었다.
선광에는 자성이 있는 기계가 있었는데 여기도 여자들이 한 4~50 명씩 있었고 나는 그 밑에서 구르마 끄는 운반하는 일을 할 적에 3,000원씩 받고 일을 했는데 고입이 되고나니 선광에서 기계를 보라 고 했다.
선광장은 습식이라고 해서 철가루는 철가루대로 빼고 폐석은 폐 석대로 빼 내는데 그 폐석은 농로길 포장용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 리고 철은 포항으로 나갈 때가 제일 힘이 들었고 일본 갈 때가 더 쉬웠다.
그것도 계약조건이 선광에서 철을 포항 나갈 때는 배가 와가지고 철을 일주일 안에 다 채워서 보내야 되는데. 그걸 못 보내면 하루 보너스를 깎이고,일주일에 갈 거를4일만에채워주면 보너스를 받 았었다.


사례 2
광석운반도 도급을
운반부는 구르마를 끌고 항내로 들어가 하루에4개만 하면 된다. 그런데 굴에서 발파 해 놨다가 무너지면 막장이야 거기를 들어갈 적에는 만천판이라는 데가 있는데 하도 넓게 뚫어 놓아서 혼자가면 찾아오지도 못 한다 아무튼 둘이 들어가서 4구르마를 하고 그랬는 데 굴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알아야 무섭지 모르곈험하고가 나 보아야 내가 죽는 줄 알지 뭘 알아, 그래서 거기에 발파하고 쏟아놓 은 거 푹푹 실어가지고 4광차를 실어 내놓으니까 항내 사람들은 자 기 책임량이 있잖아, 그거 하고 나서 돈을 더 받으려면 더 하고 그 랬는데 그럴 때에는 특근을 해서 도급으로 계산하고 돈을 별도로 더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광차가 잘 나가는데, 선광장에 나가서 띄워 놓으면 빨리 내려가니까 편했었고,광차에 브레이크가 있어.그런데 비가 오 면 말을 잘 안 들어서 광차를 둘이서 힘을 맞춰서 딱 뛰자 할 적 에 얼른 뛰어야 달랑 거리던 고리가 착 내려앉으면서 그래야 폐석이 쭉 밀리니까 쏟아지는데, 이게 맞지 않고 웃 고리가 안 맞으면 중량 이 실리니까 내리 박힌다. 거기서 오야가 브레이크를 잡고 내려가면 서 장난삼아 막 내 몰다가 담당자가 또 그렇게 했다고 막 질책하였 다.
폐석을 나르는 횟수가 한 20 ~ 25번. 선광장에서 이아래 식품상 이라고 마지막(양잿말)까지1km 이상 거리였다.
광차로 폐석을 버릴 때 선광장에서 다리까지 가면 개울이 있고 거 길 지나가면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데 거기를 지나 내리 달리면 서 젖히면 저쪽으로 턱 갖다 붙여 가다가 키를 젖혀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한군데다 갖다 붓게 된단 말이야.그럼 주임이 그다음에‘디 질라고 이자식이 키를 안 바꿔놓고 갔니’하면‘죄송합니다’하는 경 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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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7>광차운반 오른쪽이 구술자 이상억1970년경
광차로 폐석을 버릴 때 선광장에서 다리까지 가면 개울이 있고 거 길 지나가면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데 거기를 지나 내리 달리면 서 젖히면 저쪽으로 턱 갖다 붙여 가다가 키를 젖혀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한군데다 갖다 붓게 된단 말이야.그럼 주임이 그다음에‘디 질라고 이자식이 키를 안 바꿔놓고 갔니’하면‘죄송합니다’하는 경 우가 많았다.
레일을 잡는 그 사람이 고리를 개운 다는 것이 잘 못 개워서 그게 탁 주저앉으니까 넘어가는 거야. 그때는 동작이 빨라야 살지 안 그 러면 끝에 가서 부을 때 조수는 뛰 내리고 나 혼자 내려가지. 레일 을 내려가면서 반동을 잡아서 출렁출렁하다가 딱 고리를 젖혀야지. 그러지 않으면 차가 가고 싶은 데로 가고 만다.


사례 3
탑동 출근길
탑동에서 일을 할 때에 출근은 경비실까지만 태워다 주고 탑동까 지 걸어 올라갔는데 기계장화(뚱뚱한)를 신고 걸을 때 힘이 들었고 안경다리에서 초소로 건너가면 한 3~40분 정도 걸렸다.
신은 통일화가 제일 나은데 물 묻으면 발이 시리다. 그러면 이제 워커를 신는데 얼어버리면 발을 잘 벗지 못하니까 힘들었지. 어떤 때 보면 눈 때문에 앞이 안 보일때도 있다.근데 그런 게 좋았어.
언제 한번 밤에 눈이 많이 왔는데,상평 어딘가에 빠져버렸어,그 래서 어디서 빠져서 자다가 새벽녘에 온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마 루에다가 눕혀놓고 옷을 벗기려고 하였더니 팔이 얼어서 옷 이 잘 안 벗겨지는 일도 있었다.


사례 4
출근여직원 히야까시
선광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버스에서 내려서 올라오면 광차를 돌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올라오면 퇴근하는 남자들이 히야 까시(희롱)를 하는 그 재미로 밤에 일했던 피로가 확 풀리는데 그때 그 여자들은 대부분 화장을 하고 예쁘게 차리고 출근을 했다.


사례 5
빈봉투만 만지는 광부 아내들
임금에서 내가 쌀을 신청하면 쌀값을 제외하고 받았고, 광업소에 쌀을 주는 데가 따로 있었으며, 내가 광업소에서 사택까지 갖고 오 면 집사람이 쌀을 머리에 이고 북평 까지 내려왔데. 그 때에 광업소 버스는 일반인과 임시직은 못 탔어요.
돈을3,000원씩 타가지고 임시부는 쌀도 제대로 안주고, 고입된 사람들은 쌀 주고 그랬는데.식품상이라는 공급소가 있는데,고입자 들은 사인만 하면 술도 주고 과자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그랬다.근 데 임시부들은 그런 것이 없어서 고입된 사람이 술을 끊어서 우리한 테 주면 봉급타면 고입한테 돈을 줘야했다. 그런데 고입되니 그런 것이 없어서 편 했고.고기는 한 달에 두 근씩 나왔다.
월급봉투를 두 개 가져가서, 거짓으로 봉투를 하나 더 만들어서 갖다주고 다른 돈 내가 갖고 용돈으로 쓰고 그랬지.
항내 사람들 중에 어떤 집은 신랑 월급봉투만 만진다는 거야. 돈 은 다 술집에 갖다 붓고 빈 봉투만 만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월급을 아내들이 가서 타 왔다.


사례 6
잠을 자고나니 옆집 여자가 있었다
부인들은 남편이 밤에 일하고 아침에 들어오면, 부인들은 남편이 낮에 잠 좀 자라고 조용히 바깥에 나가서 있다가 오기도 하였고,
낮에 술 마시고 다른 사람 집 들어가서 자고 그런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술을 먹고 자다가 일어나서 출근을 하려다가 내가 뭘 안 갖 고 나와서 가서 문을 막 두드리니까 내 마누라가 아니고 엽 집 여자 가 나오 는거야.
그래서 알고 보니 우리 집은 아래인데, 내가 윗집에서 문을 두드 렸는데 처음부터 내가 잔 곳이 내 집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안보고 그렇게 넘 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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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8> 당시 광부사택 1957년경


사례 7
밴또 대신 라면으로
병반 할 때 벤또(도시락)를 계속 싸가지고 다니다가 라면이 나오 고부터는 야채를 잔뜩 가져가서 같이 끓여먹었는데 그때는 라면이 별미였다.
사택에는 한 줄에 4호 빼고1호부터9호까지8세대가 살았으며, 사원들 사택이 고입들 사택보다 좋았는데 주임만 되면 관사가 따로 있었고 크기가 달랐고 주임, 과장들 사모님들이 노무자 아내들을 무 시하는 경우도 없을뿐더러,사택도 따로 있고 그러니까 부딪힐 일도 없었다.
방은 한3평정도 되고 말소리는 정확히 안 들리지만,애기 우는 소리는 들렸다.
비 오는 날에는 남자들이 나가서 뚜거리 잡아오면 여자들이 끓여 서 주변에 나눠주고 주었다.


사례 8
이웃사촌 내가 정월에 결혼을 하고 입대 날이 단오 날 인지도 모르고 군대 를 나갔는데 그날 아침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같이 밥을 먹고 나서 군대를 갔다. 내가 군인에 갔어도 이웃에서 잘 도와주어서 집 사람 이 잘 지낼 수 있었고 군무를 마치고 제대하고 와서 다시 양양광산 에 들어갔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서는1년에 제사를9번10번씩 지냈으며, 제사 지낼 때 마다 애들은 옆집에 맡겨놓고 제사 준비하고, 지내고 애들 데리고 오 고 그랬다.이웃에서 모든걸 서로 도와주고 정답게 지냈다.
내가 광업소에서 돈을 벌어가지고 땅을 사가지고 집을 지었을 때 도 이웃에서 도와주었고 광업소에서 쉬는 날 이웃이 모여 남자들끼 리 가서 미꾸라지 뚜거리 잡ㅈ고 부인들은 끓여먹는 것이 재미있게 그때는 큰집 작은 집처럼 놀았지만 지금은 정이 없게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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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9> 구술중인 이상억 2011.8


(구술자 북평 이충덕74세)
사례 1 광차의 사고
디젤카 운전수가 우리 껄 안 끌어가잖아. 그 원 거기 본광 꺼만 그러고 우리는 하청을 받은 사람들 꺼는 뭐 우습게 생각했다.
우리 동네 엄용길이라고 그 사람과 둘이서 그저 그거만 끌어놓으 면 하루 한 공수 씩 먹는 건데, 그디젤카 운전수가 우리가 다섯 광 차인지 실어놨는데 안 가져가잖아. 그래서 광석을 실어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열 받아 가지고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생각 끝에 우리 힘. 밀고 나가자고 마음먹고 그가 오야삥에 나간 사이에 광차 를 밀고 레일(궤도)위에다가 놨지.그런데 나도 착각을 했어.광차 가 있으면 끌고 나갈 그 생각만 하고 쭉 늘어 내놨지. 그런데 얼마 후 그 광차 들어오는 소리가 나더돈 꾼당탕 하더라고. 그 디젤카 기 사가 김찬래인데 아아..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여. 그러니까 디 젤카도 광차 실어놨던 게 막 들이 달리고 넘어지고 그랬다.
잘못하여 그 아래로 내 달리면 큰 사고 난다. 난 그 생각을 안 하 고 그냥 끌어다 놓은게 사고를 불렀다. 디젤카 운전수가 욕을 막 하 더니 내가 간다니까 그러지 말고 좀 일으켜 달라고 그래서 일으켜 주고 그랬다.


사례 2
통일화가 뭉청 뭉청 끊어져서 큰일 날 뻔...
폐석 실어 보낼 때 미나미골로 보낸다. 그거 끌어 올리는데 한번 은 중간 더 올라가가지고 권양실에서 이렇게 보면 일하는 것이 보인 다.그수리실에서 작업하려고 산소통 등을 실어 보냈다.그런데 밑 에서 폐석 빼가지고 신호한다고 그거 듣고 끌어 올리는데, 이쪽 대 고 빼 낸 것하고 소개 빼 낸 것하고 두 개가 있었는데, 내리라는 신호가 있고 올리라는 신호가 있는데 한번은 수리실 사람들이 산소 통 이런 것을 올려 보내는데 중간에 우리는 그게람들이보여요. 그때 권양기 그거 하는 사람이 서문리 계시는 분(최선권)이야.장난하는 줄 알았어.와이어가 까딱까딱하더라고 근데 내가 앞에 허공이야. 이종민이라는 사람이랑통 이런일하는데, 그 사람은 뒤에서 들고 난 앞에서 거진 들었는데 느닷없이런광차가 올라오는 거야. 근데 산소 통이랑통 이런넘어 진거야.한1초만 늦었으면 여기가 끊어지는 거 였다.그래 가지고 한쪽은 발만 넘었어.그때 통일화 새거 신었는데 그게 뭉청 끊어졌더라고 큰 일 날 뻔 했지요.
그리고 선광장에서는 선광벨트 손이 빨려 들어가지고 죽은 외지 사람 도 있고. 겨울에 슈트 빼다가 그게 얼었으니까 그 안에서 곡괭 이질 하다가 콱 무너져서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연창에 김광균이라 는 사람이 그때 슈트에서 죽었어요.


사례 3
광산 폐광과 퇴직금
그때 임금인상 때문에 문을 닫았는데 이제 임금을 좀 올려 달라고 했는데, 회사에서 못 올려준다고 하고 광업소가 문 닫기 직전에 선 광은 몇 년 더 하게끔 해놓았다. 그러나 나중에 선광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 싹 다 안한다고.그래서 폐광이 되었다.그때 몇 년 안 한사람도500만원받았고. 나이가 같아도 생일이 빠른 사람은 받았 는데,나는 생일이 늦어서180만원인가 그거밖에 못 받았다. 나는 몇 년 더 벌어먹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해서 180만원 받았는데, 한 달 도 안되어서 문을 닫아버렸어. 나보다 일을 더 조금 한 사람은 500만원 받았는데, 나도 320만원 더 달라고 하니까 못준데,이퇴직 금을 다른 사람들도 다 500만원 받았는데, 나만 제대로 못 받았다.


사례 4
캄캄한 굴로 출근
3교대 하다가 2교대도 했는데 임천에서 통근버스가 다녔다. 그게 아니면 광석을 옮기는 트럭 얻어 타고 다녔다. 그리고 밤에는 걸어 도 많이 다녔다. 밤에 자다가 늦잠자서 통근차를 놓치면 그럼 거마 리 굴로 혼자서라도 들어가야 하는데.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은 그 안에 들어가면 절벅절벅하였고, 굴 벽 밑의 물고랑으로 안 빠지려고 작대기 들고 굴 벽에다가 지-익 그으면서 갔다.
그 때는 동네 여자들도 저 골짜기로 올라가서 나무해오고 멀리 가 서 묵 나무도 해 오 고 그랬지요. 농사짓는 사람이 광산 다니는 사람 을 부러워 했다. 광부들도 부모재산 받아서 떵떵 거리며 사는 농부 들을 부러워했다.우리는 잠을 못자고 일하고 그러는데,농촌 사람 들은 자유롭게 다니고 일하니까.


사례 5
술에 취해 제방 둑에서 새벽 4시까지 잠을...
광산 다니면서 색시집에 외상이 얼마 있어서, 월급 받아서 갚으면 색시를 들이밀면서 술이랑 안주랑 막 갖고 온다.그럼 그만큼 또 외 상을 지고 오고 그랬다.
술 마시고 집 가는데, 그땐 임천에서 북평으로 건너가는 나무다리 가 있는데 그 나무다리 위에서 두번 떨어지기도 하고, 제방 둑에 올 라서가지고 내려가다가 철조망에 걸려가지고 계단에까지 내려 굴렀 는데 사방이 긁혀서 한 이틀 일 못나갔다.
그리고 어느 봄인가 밤 12시쯤 술을 마시고 가다가 제방 둑에서 굴러서 사방이 긁혀서 피가 나는데,새벽한4시쯤까지 자다가 술 이 깨어 집에 갔다가 아침에 보니까 지갑이 없어. 그래서 애들 둘이 보내서 찾긴 찾았다.



(구술자 서문리 김명렬68세)
사례 1
도급 채광
채광과는 광석을 캐는 임무인데 개인별 책임량이 부여된다. 책임 분량은 2인1조가 되어14대가 책임량이었는데 다하고 더 하는 것 을 도급제라 한다.
도목항에서 처음에 시작하였고 수항하고 빵창(맞고임)이 난 도수간 (도목항에서 수항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도수간에서 다 파먹고 물량이 없어 수항으로 이동해 갔다.
도급은 대당 40원(현 2~3000원 정도)했는데 광차(리어커 두대정 도)한 대 채우는데 동떨이(쇳돌)로는 5분정도, 분가루로 된 철은 15~20분 정도 걸렸다.
로다(지금 페루다 식)는 뒤에 광차를 달고 앞에서 뒤로 넘기면서 광석을 광차에 실었는데 임금이 착암공보다 많았다.
로다가 막장에서 광차에 가득 싣고 내려놓으면 착암부들이 쌓여 있는 철광석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를 해 큰 돌을 떨구는 경우도 있 었다.
책임량을 다 채우고 도급량을 늘리기 위해 일을 하는데 그 당시 땀이 줄줄 흘러 신고 있는 장화 속을 채울 만큼 땀이 흘리며 열심히 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나오면 저 꼭대기 식품상서부터 집 까지 술집이 13곳 있는데 내려오는 길에 이집 저집 들려서 한잔씩하고 오니 엄청나게 술을 먹게 되어 거나하게 취하여 집에 돌아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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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앞 철길 위에서의 조덕용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