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Ⅵ. 鐵鑛山의 生活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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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83회 작성일 2013-04-2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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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鑛夫의 日課
1) 鑛夫의 分類 광부는 크게 막장에서 일하는 坑內夫와 난장에서 일하는 坑外夫 로 나눈다. 갱내부는 다시 직접부와 간접부로 나눠지는데 직접부에 는 채광공과 굴진공 등이 있고 간접부에는 보갱공, 보선공 운반공 등이 있다. 그리고 갱외부는 선광공 기계공 기타 기능공 등으로 이 루어져 있다.
2) 勤勞者의 日課
    (1) 出勤 철광에서 일하고 있는 광부는 모두 하루8시간씩3교대로 일한다. 광산촌에서 이것을 갑방,을방,병방 출근한다고 한다.
갑방(甲方)은 오 전8시에 막장에서 교대하는 작업조를 말한다.이 들은 대개 집에서 오전 6시 30분에 출발하여 통근버스를 타고 철광 현장에 도착한다.입갱하기 전까지 옷을 갈아입고,도구를 챙기고, 감독으로 부터 작업배치를 받는다. 작업 배치를 받은 다음 막장까지 걸어들어 가거나 인차(人車)를 타고 가거나 한다.점심시간이 되면 갱 속에서 가지고 간 도시락과 물을 먹고 오후 4시가 되면 을방과 교대한다.
을방(乙方)은 오후 4시에 갱내휴게소에서 교대하는 작업조를 말 한다. 이들은 오후 2시 30분쯤에 집을 떠나며, 자정에 막장에서 병 방과 교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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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1>갱내휴게소
병방(丙方)은 자정에 막장에서 을방과 교대한다. 그러기 위해 광 부들은 밤 10시 30분에 집을 나서야 한다. 그리고 아침 8시에 갑방 이 갱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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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2> 탑동 작업배치 현장 1956년경
이렇게 하루 삼교대로 일을 하는 광부들은 보통 한 달에 2-3번씩 밖에 휴일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중노동에 지쳐 결근하는 일이 있 는데,철광회사는 이것을 막기 위해 만근수당제라 하여 라면1박스 와 밀가루1포씩을 지급하였다.

   (2) 入坑
감독은 작업배치를 하면 광부들은 맡은 일에 따라 막장에 들어 가거나 갱 밖에서 일하게 된다. 갱 속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입갱하 기 전에 광차(鑛車)에다 그 날 할 일 만큼의 동바리(갱내 지주목)판 자조각 등을 싣는다.
   (3) 鑛石作業
굴진공은 높이 2m 정도의 수평갱을 뚫고,광석공은 산줄기를 따 라 좁은 굴을 뚫게 된다. 이때 천공소리 때문에 막장은 다소 시끄럽 다. 보통 2명이 한 조가 되어 막장에서 일하는데1개조가15〜20톤 의 철광석을 캐낸다.
   (4) 退坑
근로기준법상의8시간을 마치면 퇴갱 하였다.
   (5) 勤勞者의 賃金制度
광부들의 임금은 다수가 월급제이며 도급제 근로자도 있었으나 극소수였다.

2. 鑛山村의 生活相
60년대 70년대의 우리나라는 일자리가 없어 생활이 넉넉하지 못 하였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양양의 광산촌에 모여들었 다. 농사일보다 힘들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월급이 많아 공무원보다 광산에서 일하기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광산촌도 어렵기는 비슷하 여 광부들은 힘든 일에 종사해야 했고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일반미도 타 먹기 힘들었고,납작 보리쌀,알락미 일반 미 해서3개를 한 달에 한번 배급을 타서 먹기도 했다.

1) 광산촌의 주거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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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3>사택전경년19경56
수복후 양양광산이 활성화되자 전국에서 갑자기 모여든 광부들이 많아 제대로 된 가옥이 많지 않았고 골짜기마다 흩어져 있던 집들을 회사에서 사택을 지어 혼자 와 있는 광부들이 살도록 하였는데 사택 이 150세대가 넘었고 한 줄이 8집이고 전체가 아마도 250세대는 넘 었다 사택은 8칸씩 따로 지어졌는데 집들이 비슷비슷하여 술을 마 시면 자기 집을 잘못 찾아 들어가 남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 었다.
사택은 건물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게 없었는데 사람들은 특이 한 게 많았다.전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각자 사는 방식 이 천태만상이었다.
붕화료(노무자),설악료(사원)라는 사택이 있었는데 독신자들이 사 는 기숙사도 있었고 임시직 광부는 사택으로 입주하기가 힘들었다.
상시부(고입)만 여기에 얻을 수 있어 사택 한 칸 다락방에서 자고 애 둘 셋 있는 사람들은 고생이 심했다.
사택에는 한 줄에8세대가 살았다.(4호 빼고 1호부터 9호까지) 사 원들 사택이 고입들 사택보다 좋았는데 주임만 되면 관사가 따로 있 었고 크기가 달랐고 주임, 과장들 사모님들이 노무자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없을뿐더러, 사택도 따로 있고 그러니까 부딪힐 일도 없었 다.
방은 한 칸은3평정도 되었고 말소리는 정확히 안 들리지만,애기 들 우는 소리는 들렸다.
아동들은4학년 이상은 상평초등학교에,1,2,3학년 까지는 장승분 교로 걸어서 다녔으며, 학년 당2개 반씩6학급이 편성돼 있었다.
광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 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텃밭도 가꾸고 산에서 땔감을 해다 집에서 불을 때고 이웃집에 팔기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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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4> 장승분교 가을운동회1960년경

2) 광업소의 봉급날
월급을 현금으로 줄때인데 빈 봉투를 하나 더 얻어서 월급봉투를 다시 써서 술값을 아내 몰래 만들기도 하고 공급소에서 생활비를 미 리 땡 겨 쓰다 보니 봉급날은 빈 봉투인 경우가 있었고, 봉급날 술 집 마담들이 술값을 받으려고 공급소에서 죽치고 대기하는 것이 다 반사였다.
광산에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유상종이라고 자주 만났다. 그 래서 매달 가불하고 딸린 식구가 있으니까 잔업도 하여 돈을 만들어 야 했다.
월급날이면 외상 술값 갚으러 가서 술집에 들어서면 눈치 빠른 주 인마담이 그렇게 반가워 할 수 없다. 아가씨들은 양팔을 잡고 방으 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면 신발을 벗기며 맥주 딱 한잔만 하고 가라고 하면 거절을 못하고 마지못해 문턱을 넘어서면 미리 준비라도 해 두었는지 과일안주에 맥주 두병을 들고 주인마담 왈 어떻게 외상값을 받고 그냥 보내 야는 것이다. 아가씨 의 아양이 도움이 되어서 한 병 더 안주 하나 더 하다 일어설 때는 갚은 외상값만큼 달아놓고 술집을 나서게 되면 매번 반복되는 생활 이 이어지게 되어있다.

3) 광산촌의 휴일
광산의 휴일은 따로 없고월2회이다. 쉬는 때는 같이 일하는 팀 들과 냇가에 나가 뚜거리를 잡아 뚜거리탕을 끓여 안주로 해서 술을 마시며 보냈다.
때로는 농촌에서 돼지를 사서 잡아 슬레트 조각에 올려놓고 밑에 불을 때고 구워먹으며 친목을 도모하였고 고기는 나누어 가지고 가 서 가정에 가서 먹었다.
광업소에서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관광을 가는데 비용은 매달 일정금액을 적립하여 경주 불국사 등 전국 유명지로 갔으며 당일치 기로는 설악산,하조대,그리고 오색령을 넘어 장수대로 일일 관광 을 갔으며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남대천 강가의 용천 범부 내현 등지로 가서 천렵을 하는 것이 가장 많았다.
송년회도 회비를 내서 넓은 가정집을 빌려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돼지를 잡아서 노동자들이 함께 잔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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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5> 선광과 직원 용천 야유회
광산 업무가 끝난 후에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당일 여행도 가 고 소장 이하 간부급들은 광산에 있는 술집에 가면 소문이 나기 때 문에 속초 또는 설악산,낙산,그리고 기사문리로 자주 나갔다.

4) 멋쟁이 여자광부
선광장에서 100여명이3교대로30여명 정도씩 일했다. 선광장에 서 일하는 동안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소음이 매우 심해서 바깥으로 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선후배 차이는 없었지만 임시와 고입의 차이가 있었고. 대 부분의 선광장 여자 노무자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할 때 선광장을 그만 둔다.
그 당시 광산 다닐 때 눈이 맞아 사내 결혼하는 커플도 있었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여자 노동자는 멋을 부리기 위해 작업복을 다 려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멋쟁이 가는 아가씨들이 많았다. 선광 장 자체에서 노동자의 의욕을 불어 넣기 위해서 당일 관광으로 하조 대,설악산 등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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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6>사무실 여성 근로자 1979년 경
광업소에서는 미인대회도 있었는데 미인대회에 입상한 처녀는 많 은 총각들이 사귀려고 시도하였고 여러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 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었다.

5) 광부들의 신용
광업소내 복지시설로는 광부사택,영화관,목욕탕,병원, 이발소, 약방(개인 약방), 당구장이 있었으며,
공급소는 노무자들의 직번이 있었는데, 1번2번.직번만 대면 공 급소에서 돈이 없어도 물건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고, 쌀도 직 번만 있으면 계속 받을 수 있고 임금에 일정부분 쌀을 신청하면 그 금액 을 제외하고 월급과 쌀을 함께 받았지만, 임시부들에게는 그러한 혜 택이 없었다.
양양읍내에도 없는 70년대 후반 목욕탕이 발전실 옆에 있었는데 그 발전실에서 나오는 온수를 이용하여 목욕탕을 운영했다. 종업원 들한테 한 달에 몇 장씩 목욕표를 끊어 주었다. 그러면 양양에 사는 종업원들 가족들이 목욕을 하러 많이 오 게 되는데 종업원 아니더라 도 표만 내면 목욕을 할 수 있었다.

6) 광산촌의 삶이였던 목욕탕
1950년대 말에 양양시내에도 없었던 목욕탕이 광업소에 있었다. 그만큼 양양광업소가 한때,번성했던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당시에 는 광업소를 공급하는 전기를 자체 발전기로 발전했다. 그래서 발전 소 옆에 엇붙인 목조건물이 목욕탕이었다. 발전기 터빈에서 나오는 온수를 목욕탕내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때 광부들에게 목욕은 밥 먹 는 것 만큼이나 필요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광부들에게 무료 목욕 이용권을 내 주었다. 그러니 양양에 사는 광부가족들도 광산까지 가 서 이용했다.그뿐만 아니라 양양에 소재해있는 학교에서도 목욕하 는 날을 정하여 걸어서 광산으로 정기적으로 목욕을 다니기도 했다.
목욕탕에 대한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들이 전해지는데 한 번은 짓 굳은 어느 직원이 천정갓쇼(당시 목조건물은 남,여탕을 판자로 칸 막이만하고 천장마감은 하지 않았음 너머로 여탕을 넘겨보다가 그 만 균형을 잃고 목욕하고 있는 여탕바닥에 그냥 떨어지자 마침 간부 사모님들이 다수 있었는데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고 여탕과 남탕 사 이를 막은 판자 옹이구멍으로 여탕을 들여다보다 여탕에서 미리알 고 들여다보는 눈을 찔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 후 한전에서 정식으로 변전소를 세우고 전력을 공급하던 ’70년 도말경에 양양의 시공업자인 주춘명씨가 하청을 맡아 사택부근 장 승 유아원 옆으로 2층 브럭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1층은 목 욕탕으로 사용했고 2층에는 이발소와 당구장이 개설됨으로써 광부 들에 처우개선에 이익을 담당했다.그후 폐광된 후 계속 흉물로 남 아 있다가 2011년 대한광물이 다시 개광을 시작하면서 2012년8월 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양양광업소의 한시대의 삶이 녹아있는 생애 에 한편의 추억의 터로만 남아있다.

7) 광산촌의 문화시설인 극장
1963년경 속초 제일목재소에서 캔 제목으로1,2층에 관람석이 100석 규모의 영동지역의 최고의 시설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텔 레비전이 없던 시절이라 광산 그로자들에게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 는 유일한 휴식처였으며, 또한 처녀총각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 다. 이렇게 광산극장은 노무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문화공간이 었고 영화의 스토리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연일 성황리에 운영하 던중1969년12월경화재사고로 전소되었다.

최고의 영사기로 필름을 돌리므로 화면이 깨끗하고 중간 중간 필 름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양양읍내는 물론 광산과 인접했던 거마 리, 파일리 사람들을 횃불을 만들어 깜깜한 거마리 굴을 빠져나온 후에 불을 끄고 부근에 보관하였다가 극장이 끝나면 다시 불을 붙여 굴을 빠져 다녔고,인근속초지역에서도 많은 관람객이 모여들어 광 업소의 명물이 되었다.당시에“돌아오지 않는 해병(황해 주연)”, “푸 른하늘 은하수(김지미 주연)”, “팔도강산(김희갑, 황정순 주연)”그리 고 벤허 등이 최고의 인기리에 상영되었다. 이 무렵 서울가는 금강 운수가 광업소에서 출발하여 양양정류장을 들렸고 양양군 선거 제1 투표소가 광업소였으리 만큼 유권자(약3천명)가 제일 많았고 자철 광 품질과 생산량에서 최고를 자랑하여 국내 전체 수출금액의 10/1 을 차지할 만치 전성시대였다.

8) 직장 경조사
자녀 결혼이나 부모 또는 동료가 사고가 나면 경조사는 회사에서 선광이면 선광단체에서 하고,개인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상 을 당한 장사집이 생기면,한사람이 조금 더 일하고,기계를 하나 쉬 는 일이 있어도 장사집에 직원을 보내서 이틀에서 사흘정도 도와주 워 상조가 더 잘됐다.부모상이 생기면3일간 휴가를 주고, 아들결 혼식에도 휴가를 주고 같은 반에 있는 반원들 끼리 장사를 봐주다 가 시간되면 출근해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반원들이 와서 서로 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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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7> 직원 결혼식 1968년경

9) 월급봉투 와 공급소
임금에서 내가 쌀을 신청하면 쌀값을 제외하고 받았고, 광업소에 쌀을 주는 데가 따로 있었으며 식품상이라는 공급소가 있는데, 고입 자 들은 직 번을 대고 사인만 하면 술도 주고 과자도 주고 음료수도 주었는데 임시부들은 그런 것이 없어서 고입된 사람이 표를 대신 끊 어서 입시부에게 주면 봉급타서 고입한테 돈을 줘야했다.
월급봉투를 두 개 가져가서, 거짓으로 봉투를 하나 더 만들어서 갖다 주고 다른 돈 본인이 갖고 용돈으로 쓰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어느 집은 신랑이 돈은 다 술집에 갖다 붓고 빈 봉투만 만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월급을 아내들이 가서 타오는 경우가 많았다.

10) 이웃사촌
부인들은 남편이 밤에 일하고 아침에 들어오면, 부인들은 남편이 낮에 잠 좀 자라고 조용히 바깥에 나가서 있다가 오기도 하였고, 낮 에 술 마시고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서 자고 그런 일도 있었으니 나 중에 알고 보면 남에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처음부터 다 른 집에 가서 쉬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어서 그런지 전혀 그런 일을 이상하게 안보고 그렇게 넘어갔으며,
또한 비가 오 는날 광부의 아낙들은 처마 밑에 죽 늘어앉자 빗물 에 연탄재를 섞어가지고 그릇을 닦는 풍경을 요즈음 세대들이 보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지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비가 와서 강가에 물이 불어나게 되면 광부들이 남대천에 나 가서 뚜거리 잡아오면 광부의 아내들이 뚜거리 국을 끓여서 주변에 나눠주며 이웃 간에 친목을 도모하였고 가난한 광부들의 삶이지만 인정이 매 마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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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8> 당시 유행한 월남치마 1970년경

11) 임시부 와 상시부
임시부들은 밥 먹을 때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는데, 밥 도 상시부 먹는 시간이 따로 있고, 임시부는 다른 곳에서 빌빌 놀다 가 들어와서 먹던가, 아니면 구석에서 하이바 깔고 앉아서 먹다가 상시부들이 다 먹고 가면 그 자리에 가서 먹고 물도 임시부들의 먹 는 물통에 물 받아서 갖다놓아야 했다.
당시에는 차별이 엄청 심했는데, 상시부는 트럭이나 버스타고 출 근을 했지만,임시부들은 걸어 다녔으며,또한 임시부들 에게는 쌀 도 주지 않아 나중에 임시부들이 하도 항의하니까 그때부터 옷 도주 고 그랬으며,상시부들은 작업복을 한 벌씩 내 주었는데,임시부는 바지하나 줄때 있고 윗도리 하나 줄 때 있었다.
광업소에는 영업하는 식당은 꽤 많았으며, 정육점이 있었는데 채 광부만 한 달에 고기 두 근 나누어주고, 임시부들은 고기 전표도 안 나왔다.

12) 체육행사
체육행사는1년에 한번 있었고,개광기념일(매년7월1일)에 장승 분교 학교 운동장에서 했으며. 광부들을 위한 특별한 위로 행사는 없었고,체육 행사 때 사은품 없이 경기 상품을 주었으며,막걸리는 회사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체육 행사는 축구,씨름,배구,육상 마라톤 등을 했고,채광.선 광.총무가 팀을 이루며 전체 공휴일로 정하여 행사를 하였다.노 동조합에 문화부라고 있어서 연극을 초가을에 많이 했다. 광부들이 라든지 관리부서에 의한 행사로 광부들의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배구는 67년도에 축구는 61년 이전서부터1~2년간 했고 야구는 63~4년도에 사무직원들이 친선경기를 했다.
광산근처 거주 가족은 모두 참가하고, 과 별로 특별 음식물 준비 하여, 장승분교에 모여서 했으며 마라톤은 양양시내 로터리 왕복하 는 코스를 돌아왔다.
또한 4H 재건 촉진회의 서울 직장대항이 배구시합이 있었는데, 대한철광 팀, 인천 중공업 팀등6~7개회사가 모여 체육대회를 실 시하였으며, 양양광업소 2명을 포함해 대한철광 본사 직원들이 대회 에서1등을 하게 되었다.
울산 광업소에서도 울산 시내 직장 대항 배구 시합이 있었는데 경 찰등7개회사 간 체육대회에서 양양광업소2명을 포함한 울산광업 소이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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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9> 운송부 대 선광 출하부 축구시합 1972.6

13) 광부들의 여가 시간
근로자들은 휴일이(공휴)한달에 두번,교대 자체로 쉬었다고 보 고,일반 사원들은 일요일과 공휴일에 쉬었다.
광업소가 잘 될 때에는 양양에 술집으로 성이 안차서 속초 나가서 도 먹고 들어왔으며. 갑, 을, 병3교대 할 적에 갑이 아침에 출근해 서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집으로 안 들어가고 술 마시다가 자고 아침 에 출근하는 경우도 많다.
광산 육고점 밑에 막걸리 집 있었고 육고점에서 회사에서 두 번, 한 달에 돼지고기 두 근씩 끊어 주는데 목구멍에 먼지하고 때를 베 껴내라고 주는 고기를 술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고기 바꿔주고 돈 받 아서 술을 먹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플라스틱 댓 병 이지만 그때는 유리로 만든 댓 병을 갖다 놓고 슬레트를 뚝뚝 잘라서 불판을 만들어서 가지고 고기를 구어 먹 으면 진짜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고 한다.

14) 고단한 광부들의 아내들
그 시절에는 시계가 없어서 밤에는 도시락을 싸주기 위해 밖에 나가 하늘의 샛별을 보고 밥을 지었으며, 애기가 울면 남편이 잠을 설칠까 봐 저녁에 바깥에서 애기를 달래며 재우고, 시계가 있는 집에서 시간을 물어보고 통근 버스시간(밤12시)을 맞춰 집에 들어와 남편의 잠을 깨워 출근 준비를 해 주고 그제 서야 부인들은 잠을 잘수 있었다.
봉급날은 술값을 제하고 납작한 봉투를 가져다주거나 아주 적은금액을 주어 살림살이가 어려웠다.어떤 광부는 다른 봉투를 만들어비자금을 만들기도 하였고 봉급날은 술집 마담들이 경비실 앞에 죽치고 기다리다 봉급을 가로채는 일도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인감증명원을 제출하고 인감도장을 찍고 월급을 내주었다.
가정 살림을 돕기 위해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남의 일을 해 주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파는 부인들도 있었으며, 적은월급이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산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5) 광산 1세대들의 모임활동
당시 장승리에 사는 광산 1세대들이 친목과 화합을 위해서 삼우 회 라는 모임을 가졌는데 광업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 래된 모임으 로 확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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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0> 삼우회 광산분회 결성식 1970.2.26

16) 토속신앙
    (1) 산신당(山神堂)
우리 조상들은 예전부터 산신을 귀히 여겼는데 이는 산에서 모든 양식을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되며 매년 가을이면 광업소의 안전과 각 갱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는데 도목갱 입구에서 통 돼지를 잡아 성대하게 지냈다.
당시에는 도목갱 입구 좌측에 평산신씨의 열여각이 세워져 있었 는데 현재 화약고로 들어가는 길옆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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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1> 산신제 직전 모습

   (2)서낭당(城隍堂)
장승1리1,2반에는 약60여 가구가 살았는데 마을입구에는 수백 년 묵은 서낭목인 노송3그루가 있었는데 그중 두 그루는1960년경 에 고사하였고 나머지 한 그루만 남았는데 최근 급격한 기후변화와 주변 환경오염과 2004년 겨울 강풍에 견디지 못해 고사하고 말았으 며, 현재는 서낭 터와 쓰러진 서낭 목 잔재와 서낭 단만 썰렁하게 남아있다.
시멘트로 축조된 서낭당 안에는 마을 서낭계원 약 30여명의 명단 만 목판위에 새겨져 보관되어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삼일 자정에 부정(不淨)이 없는 집을 선정하 여 도가(都家)로 돌 아가며 정하여 제주가 되어 제물을 차렸다.
정해진 도가는 마을 뒷산의 맑은 우물물을 제수로 쓰고 통돼지를 잡아 제물을 준비 하여 제단에 진설하여 놓고 마을 남자들 약 15~20여명이 참석하여 서낭제를 성대히 올렸으며 점차 경제적 부 담으로 나중에는 돼지머리만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끝나면 제사에 썼던 돼지고기와 떡과 과일을 골고루 마을 주 민들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서낭제는 2004년 서낭목이 고사하자 중단되었다.
이 서낭당은 마을 아이들이 학교(당시 상평초등학교)로 가는 길목 에 위치하고 있어 귀신 나오 는공포의 장소가 되었으나 짓 굳은 아 이들에겐 용돈도 얻고 연줄로도 아주 요긴하게 쓰여 졌다고 하며, 이곳을 지날 때에는 겁도 나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돌을 세 번 던지고 침을 세 번 뱉고 왼 발꿈치로 땅을 세변 쿵쿵” 구루면 서 도망치듯 지나가기도 했다.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서낭이 1900년대에 들어와서 소문이 나자 무속 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서낭 목에 칼을 꽂고 술을 부 으며 살풀이 장으로 변했다고 하며, 무속 인들은 서낭 목에 금줄을 띄우고 울긋불긋한 천을 말아 끼우기도 하고 때로는 돈도 끼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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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2> 당시 서낭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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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3> 현재 서낭단 모습

   (3) 열여각(烈女閣)
이 비각은 정용관의 처 평산 신씨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신 씨는 본래부터 행실이 착실 하였으며 어느 날 남편이 서 당에서 귀가하던 중 범에 물려 갔으나 가족이나 이웃사람들은 무서워 서시신을찾을생각조차 못했다.
그러자 아내인 신씨는 단신으 로 깊은 심산까지 끝까지 추적 하여 시신을 찾았다. 그 후 남 편의 시신을 잘 안치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받쳐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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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14>열여각 모습


3. 厚生福祉施設
1) 복지시설 현황 양양광산의 광부들의 복지후생시설현황은 <표 6-1>에 나타나 있다.
    (1) 병원시설

병실은 20평정도 였고 원장1인 의사 2인, 간호사2명, 보조원 남 자2명,병실이4개에사체실이 1실이 있었다. 환자는 허리 아픈 환 자가 많았으며 광석을 다루기 때문에 손을 다치는 환자가 많았으며 1일10명에서15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병실에 입원하면 물 리치료가 많았으며 약은 병원에서 바로 주었다.
<표6-1> 襄陽鑛山公共및福祉厚生施設現況 Ⅵ. 鐵鑛山의 生活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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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5> 병원직원 및 수술광경 1957년경

   (2) 사택시설
사택은55동에230세대가 살았다. 사택은 방 2개,부엌이1개로 좁은 편이다. 과장 사택은 약 20여평,주임사택은17~18평정도 이었 고,사원급은 약15여평, 그밖에 독신자 사택 4~5평정도 이였으며, 가족이 있는 광부가 신청하는데 총무과에서 방을 배정하면 입주가 시작되는데 무료이다. 독신자는 합숙소를 이용하였는데 2개동 있었 는데 42명이 있었다. 방세는 무료이나 식대는 자기가 먹은 수를 체 크하였다가 월급날 갚았다.

   (3) 극장
극장은 약 100석이 운영하였는데 하루 저넉에 1회 상영하고 낮에 는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는 양양읍내는 물론 그 외지역과 속초에서도 구경하러 왔고 속초보다 프로가 더 빨리 와서 많은 관람자들이 왔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들어오고부터는 극장은 관람객이 없어 폐쇄되었다.

   (4) 목욕탕시설
목욕탕은 24시간운영하였는데 무료이기 때문에 양양은 물론 그 외지역과 관부의 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목욕하러 왔다. 광부들도 갱 속에서 먼지와 함께 일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자가 많았다.

   (5) 당구장 시설
당구장은1개소에 대가4개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별다른 오락시 설이 없어 당구를 많이 처서 늘 북적거렸다. (6) 이발소 이발소는 개인이 운영하였는데 자유롭게 이발을 하고 외상으로 이름을 적어 놓았다가 월급날 계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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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6> 당구치는 근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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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17> 이발하는 근로자들 참고적으로 60년도에는 쌀 한1말에 150원~200원이였고, 노무자 월급은 3,900원에서 4,000원이었다. (쌀 2가마 정도) }


2) 건강증진을 위한 새마을사업 추진
1961년5.16일 군사혁명 직 후 박정희대통령 (당시 국가재건최고 회의의장)이 국영기업체인 양양광업소를 시찰할 당시 미 군사고문, 차○○.이○○를 대동하고 선광장을 방문하였으며,그 후 정부의 시책으로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바람이 불자 산업체이며 국영기업 체인 양양광업소도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광산일과 새마을사업을 병행 하였는데 사업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선광과 에서는 여자 종업원들이 선광수선작업을 시작하기 전 1~2시간정도 선광과 새마을 방에서 면장갑을 만들어 종업원들에 게 지급하였고 일부는 회사에 납품을 하였고, 면장갑을 만드는 실은 서울에서 구입을 해서 편물 장갑기계로 짜서 공급 하였는데 약 3~4 년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종업원들에게 공급 할 미꾸라지 양식을 시도하였는데 미꾸 라지가 살 수 있는 환경조성 미숙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선광과 사무실 앞에 토끼장을 만들고 토끼를 키웠는데 번 식률이 높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대 100~200여 마리까지 사육되어 효과를 보자 공작실을 비롯한 타 부서에서도 따라서 키우기도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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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18>선광과 사무실 앞 토끼장1970년경

   (2) 도목갱에서 염소를 키웠는데 그 염소가 선광과에서 토끼에 게 먹이려고 준비하여 둔 먹이를 먹어치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3) 조사과에서는 수박을 재배와 꿀을 체취하려고 벌을 키우기 도 하였다.
   (4) 그밖에 장승리 광산촌에는 미용실이 없으므로 상평학교에 서 주부교실을 운영 양양군수 사모님과 함께 광업소 직원 사모님들 이 식생활 개선 및 미용기술을 배워 광산촌 부녀자들의 미용관리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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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19>식생활개선 전달교육19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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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20> 주부교실 미용강좌 교육 1976. 3

4. 廢鑛以後삶의 모습

1) 퇴직자들의 모임
양양광산에서 정년이 다되어 퇴직을 하였거나, 본인의 의사에 따 라 회사를 그만둔 경우와, 점차적으로 광업소 기능이 축소되면서 폐 광으로 인하여 퇴직한분 들은 가정에서 농사일과, 각종 취로사업 또 는 다른 직장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업으로 전환한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근래에 이르러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자 아파 트 경비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양양광업소에 재직을 하다가 퇴직 후에 퇴직자들이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고자 정기적인 관광행사,건강을 위한 야유회 활동, 회원 간 경조사 및 복지에 관한 사항 등을 위한 모임(회)을 결성하 였는데 지역별로는 양양지역,강릉지역,서울지역 등의 지역에서 모 임을 가진 회의 명칭을 조사하여 구분하였다.

   (1) 양양지역 양광회
양양지역은 양광회 라는 명칭으로 1994년경에 30~40여명으로 시 작을 하여 10여 연 동안 회(모임)를 운영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6년(회장 최병호)에 회원이 12명정도 남았을 무렵 모임의 활성화가 결여되자 해체되었다. <구술자 최병호 전 항장>

   (2) 강릉지역 양광회 강릉지역의 양광회도 양양 양광회와 비슷한 시기에 결성되었고 회원은 최대 25명까지 등록하여 존속하다가 지금으로부터13년 전 인 2000년도에 해체 하였다고 함. <구술자 김영록 전 총무과장>

   (3) 서울지역 대철회 서울 대철회는 1985년경에 사원급 이상 중역진을 주축으로 편성 하여 발족했으며 최대 15명까지 등록하여 회를 운영하다가 생을 마 감 또는 건강상의 이유로 소멸 되었으며, 서울의 다른 모임이 합류 를 권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술자 김정수 전 선광과장>

   (4) 서울지역 양광회 서울 양광회는 1990년 발기하여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현 회 장 김재직 이하 20여명의 회원이 있다. <구술자 김재직 전 속초사무소장>

   (5) 서울지역 선공회 서울의 선공회 라는 명칭은 양양광업소 선광과 와 공무과에 재직 하였던 퇴직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다른 여러 모임 중 가장 먼 저인 1984년 에 최초로 발기하여 회의(모임)를 운영하여 오고 있으 며 회원은 통상 20명에서 최대35명까지 등록된 적이 있었으며 현 재는 회원20명이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모임이 잘 이어저오 고 있다.퇴직당시 기술 부소장이었던 리수실(현 낙산사 법사)씨가 1985년 도에 작성된 회칙을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회칙” 내용을 소 개하며 현 회장 이호만(선광 분석실)이하 회원은 다음과 같다

김덕성(선광감독)
김동훈(선광수리실)
김영진(선광기계)
김정수(선광감독)
김창훈(선광주임)
남상택(공무과장)
리수실(기술부소장)
맹주태(선광분석실장)
박순신(공무사원)
안홍근(선광기계)
양한구(공무사원)
이갑수(공무과,소장)
이유재(공무 전기계장)
이은호(선광주임)
최기집(선광기계)
함길준(공무사무)
함동길(선광감독)
허남욱(선광기계)
홍원석(공무주임) 以上

<구술자리수실전기술부소장>




회 칙

제 1 장 총 칙

제1조(명 칭)본회의 명칭은 선공 친목회 라 칭한다.

제 2 조(목적) 본회는 회원 상호간의 협조와 친목을 도모함을 목 적으로 한다.

제3조(구성) 본회는 대철 양양광업소 선광.공무 출신으로 구성 한다.

제4조(집회 및 장소) 본회 정례회는 격월제로 한다. 집회는 월 2주 토요일(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집회장소는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 제2장임원및임무

제5조(임원) 본회 운영상 필요한 임원을 다음과 같이 둔다. 회장.총무.감사.홍보.각1명 고문.약 간 명

제 6 조(임원 선출) 본회 임원은 총회에서 선출 하고 임기는 2년으 로 한다.단.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제 7 조(임 무)
회장-본회를 대표하며 회무를 통활 한다.
총 무 - 서무전반 및 회계업무를 관장하며 회장 유고시에는 임무 를 대행한다.
감 사-회계업무를 감사하며 그 결과를 총회에 보고한다.
홍보-회원의 근황 및 새 소식을 수시로 전파하고 총무 와 협 조 한다.
고문-회장자문에 응하고 임원회에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한다.

제3장재원

제8조(회 비) 회비는 일만원 으로 한다. 단.중도에 가입을 희망하는 자는 회원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 야 하며 입회금3만원을 납부하여야 한다.

제9조(종 류) 본회 운영상 필요한 재원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월 회비. 입회금. 찬조금. 기타

제 10 조 (금전 관리) 본회에 수납되는 금전은 총무가 관리하고 은 행에 예치하며 필요한 금액은 회장의 사전승인을 받는다.

제 4 장 회의 및 의결

제 11 조 (회의 구분) 정기총회. 임시총회. 임원회.월례회. 로 구분한 다.

제 12 조(회의 시기) 정기총회 - 매년12월중개최한다. 임시총회-필요에 따라 개최한다. 임 원 회-수시로 개최한다. 월 예회-월2주토요일에 개최한다. 단.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며 회장은 제반회의의 의장이 된 다.

제13조(임원회) 임원회는 회장.총무.감사.홍보.고문으로 구 성하며 필요에 따라 회장이 지명하는 회원의 참여도 가능하다.

제 14 조(의결) 제반회의 시 의결사항은 재적회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회원의 과반 수 찬성으로 결정한다. 단. 찬반동수일 경우에 는 의장이 결정한다.

제5장 사업 제 15조(사업구분)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위한 관광행사, 건강을 위한 야유회 회원 경조사 및 복지에 관한 사항 기타 의결된 사항

제 6 장 지출 및 상조

제 16 조(회비 사용) 본회 기금은 다음사항에 한하여 사용 한다 각종 회의 시 소요되는 경비 회원 및 직계존비속의 경조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위한 행사

제 17 조(경조금 지급)회원 및 직계손 비속의 경조사에는 전회원 이 참여하고 다음과 같이 경조금을 지급한다.

1) 회원(본인)의 결혼. 회갑. 사망 100,000원
2)직계 존비속의 결혼.사망 50,000원 단. 전회원은 각자 의사에 따라 개별적인 부조는 제한하지 않는 다.

제7장 부칙 제 18 조(벌 칙)
1) 회원 중 특별한 사유 없이 제반회의에 걔속 불 참하는 자는 직.간접으로 참석을 권유하며 본인의 의사를 타진한 후 임원회 결의를 거처 처리한다.
2) 회원 중 회칙을 준수치 않고 규율을 물란케 하거나 품위를 손 상시키는 자는 임원회 결의를 거처 제명 처리한다.
3) 상기 각항에 의거 제명된 자는 재차 가입할 수 없으며 이미 납부한 회비는 일체 반환하지 않는다.

제 19 조 본회칙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통상관례에 준한다. 제 20조 본회칙은 임원회에서 수정 통과된 날로부터 시행한다. -끝-

1. 선공회칙

제 1 장 총칙

제 2 장 임원 및 임무

제 3 장 재 원

제 4 장 회의 및 의결

제 5 장 사업

제 6 장 지출 및 상조

제 7 장 부칙



5. 鑛山村鐵鑛文化祝祭

1) 축제목적

(1) 폐광으로 인한 낙후 된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로운 관광명소 로서 마을 주민의 소득 증대
(2)영화 알바트로스의 영화 촬영지로도 활용되었고,일제시대 부터 양양철광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를 관광 자 원화 하여 낙후된 마을의 이미지 제고 필요.
(3) 차별화된 철가루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지역 특색 을 알릴 수 있다.

2) 축제개요

(1) 축 제명:추억의 양양철문화 축제
(2) 축제기간 : 6.30 ~ 7.1(2일간)
(3) 축제주관 : 강원도 양양군(장승2리)
(4) 축제시행 : 철산마을 축제추진위원회(양양군 서면 장승2리) * 후원기관 : 한국농어촌공사 강원지역본부
(5)위 치:양양군 서면 장승리270번지 일원

3) 축제연혁

(1) 축제연역 및 역사

① 장승리 철산마을은 일제 때 처음 광산이 생기면서 번성했 던 마을 이었으며 특히 60, 70, 80년대에는 각종 문화시설 (목욕탕,병원,교회,상가 등)등이 즐비하여 양양의 생활 중심지로 그 명성을 알렸다고 함.

② 90년대 이후 폐광으로 인한 그 명성이 사라 졌지만 낙후된 지역 이미지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민들의 열망으로 인하여 2011년에 제1회 철문화 축제를 개최하여 큰 성과를 얻기도 하였음.

(2) 지명유래

① 장승리의 유래 장승리(長承里)는 임천리와 수상리와의 경계에서 수상리 뒷산 능선으로 오색령으로 가는 큰 길이 있는데, 진등을 이어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장승리라 명명하였다. 우리나 라 제일의 자철광 산지로 유명했던 장승리는'여지도서'양 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장생리로 불렸던 기록이 있음.

② 양양광산 역사 장승리의 양양광산은 생산량이나 규모 면에서 국내 최대의 자철광산(磁鐵鑛山)으로, 평균품위 Fe 58% 정도의 철광석 을 생산하였다. 지질은 편마암·섬장암·변성퇴적암과 후 기 관입암류(貫入巖類)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접촉광상 (接觸鑛床)으로 광맥이 일정하지 않고 변동이 심하며, 경 사는 북동(北東)으로50∼70°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소규모로 개발 되다가, 1941년부터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조달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채광된 철광석은 속초항 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8·15광복 후 폐광되었다가 1956년 국유화되면서 다시 가동되었다. 이후 일본 수출,포항종합제철소로 반출 되는 등 연간35 만 톤의 생산량을 유지하면서 국내 철광석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였으나 광업의 침체와 인력 부족으로 생산량 이 격감하여 1991년에는 13만 톤만이 생산되었다가 폐광 되었다. 최근에는 액정표시장치(LED)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희소 금속인 희토류(稀土類·rare earth metal)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 2012년부터 다시 양양철광이 재가동 될 예정 임.

4) 주요행사내용

(1) 체험프로그램

① 광산체험
-행사내용 : 광부복장 착용,갱차밀기 체험,폐갱도 견학 등
- 기대효과 : 광부복장 착용과 갱차밀기 체험을 통하여 옛 추억과 과거 광부들의 노고를 경험할 수 있음.
- 철가루와 자석을 이용한 그림그리기 체험
- 행사내용 : 철가루를 이용한 그림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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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21> 철광문화축제장
- 추진방법 : 만들어진 작품은 코팅처리하여 개인이 소장할 수 있도록 함.

② 추억의 놀이체험
- 행사내용 : 쇠구슬치기,제기차기,굴렁쇠 굴리기, 투호놀 이 등
- 추진방법 및 기대효과:추억의 놀이를 통하여 어린시절 추 억을 느낄 수 있도록 행사추진

③ 거꾸로 가는 모래시계 만들기 체험
- 추진내용 : 일반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래시계 를 자석과 철가루를 이용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모리시계를 만듬.
- 기대효과 : 특색 있는 과학 원리를 이용한 모래시계로 현 재 특허청에 특허를 출원한 상태임.

④ 자석달리기 대회
- 추진내용 : 자석을 이용한 달리기 대회 개최
- 기대효과 : 자석을 이용한 과학체험 및 침착성을 배울수 있음.

⑤ 철부지 철들기 체험
- 추진내용 : 화강암과 철광석의 무게를 비교 체험함.
- 기대효과 : 철이 없는 아이들이 철광석을 들면서 철의 무 게를 느낄 수 있도록하여 철들기(철을 들게 함)를 할 수 있음.

⑥ 카바이트와 간드레(과거의 랜턴)사용하는 체험
- 추진내용 : 광부들이 갱도 또는 집에서 카바이트 와 간드 레를 활용하여 했던 각종 삶의 방식을 재현하 는 체험
- 기대효과:과거의 광부들이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음.

(2) 행사프로그램

① 추억의 영화상영 및 강연
- 행사내용 : 60, 70연대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

② 무성영화 상영 및 변사 경연대회
- 행사내용 : 전문변사를 통하여 무성영화 상영하고 관람객 들이 직접 변사 경험을 하는 행사

③ 마술공연 및 경연대회
- 행사내용 : 마술사를 초청하여 진행하며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마술 대회도 개최

④ 자건거 타고 폐광지역 견학, 추억의 보물찾기 행사
- 행사내용 행사장을 출발하여 폐광지역을 돌아보면서 보 물을 찾는 행사이며 보물을 찾는 체험객들에게 각종 기념 품 제공

⑤ 기타행사
- 행사내용 : 사진전시회, 도독놈 밥상 먹기 등

5) 축제지역 내 인구 및 가구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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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상 내방객 및 축제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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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제효과

① 계량적 효과
- 농산물 판매량 증대로 인한 직․간접적 농업소득 향상 : 12 백만원
- 도농교류 활성화 기여 (1사 1촌 자매결연 증가) : 6개업 체․기관/17회 * 정선 하이원과 한전산업개발과 협의중
- 축제행사 개최로 인한 지역을 찾는 관광객증가: 5천명 /2011년도

② 비계량적 효과
- 자연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외지인들이 양양철광의 옛 명성을 느낄 수 있는 체험위주의 관광 자원을 개발하여 시너지 효과 극대화
- 축제로 인한 지역 홍보효과 : 귀농․귀촌지로 선호도 증가
- 체험프로그램 개발로 농외소득원 개발
- 마을단위 축제로 마을 주민 간 화합도모 ※ 강원도주관 새 농어촌건설 우수마을로 선정 (상사금 :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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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22)철문화축제마을 연말총회(201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