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동명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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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954회 작성일 14-04-2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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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서원

해설 이기용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 1328~1393년))을 주향으로 삼고 있는 서원으로 후일 넷째아들인 조사가 함께 배향되었다.

후손인 조위한과 노경복, 최정립, 이현일 등 향인이 힘을 합쳐 인조 6년(1628년) 만들어진 서원이다.

조인벽이 사망한 후 200여년이 지난 인조 6년(1628년) 양양도호부사로 부임한 조위한(趙緯韓)이 쓴 동명 서원 창건기를 보면“열읍(列邑)에서도 모두 서원을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지어 많은 선비들이 수업하는 장 소로 삼고 있는데 유독 이 고을만 서원이 없으므로 비분탄식하여 재물과 목공을 모아 백록동서원의 옛 제도 를 본받기를 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이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 영(嶺) 밖의 궁핍한 이 시골이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아끼는 고장이 될 것이라 기원”하고 있다.

대포영에 있던 만호의 관사를 활용하여 동명서원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재방(齋房)과 강당(講堂)을 갖추 고 있다고 적혀있다.

 

대포영

부 동북방 10여리 조산리에 있다. 조선조 성종 21년 경술 강릉 안인포로부터 이영하여 수군 만호를 두었다. 중종 14년 경진에 축성 주위가 1,469척, 높이가 12척이었다. 인조 4년 병인에 방어위치가 못된다하여 폐하였다.

 

서원 운영의 재원은 양양부사 조위한이 소금가마 한자리와 어선 한 척, 그리고 둔전 7석지기를 마련해 주 어 춘추향사의 제수와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쓸 양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1680년 병란으로 동명서원이 소실되자 정조 10년(1786년) 제자와 후손들이 경상북도 와란(臥蘭)에 이건하 였으나 고종 5년(1686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폐철되었다.

고종 36년(1899년) 강원도관찰사 조종필이 동명서원을 창건했던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조인벽의 절개를 기리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1982년 양양유림과 한양조씨의 후손들에 의해 충현사(忠賢祠)와 강당을 복원하고 1982년 5월 2일 조인벽 선생과 조사선생의 봉안식을 거행하였으며 2005년 산불로 소실되었나 2010년 다시 복원되었다.

서원의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있고, 그 왼쪽엔 양렬공 우계조선생신도비가 서있으며 오른쪽엔 강원도관 찰사 조종필이 쓴 동명서원유허비와 1982년 건립한 동명서원중건기념비가 서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강당이 있고, 그 위에 충현사가 있다.

 

● 조인벽(趙仁壁)

관향은 한양이며 고려 검교밀직부사 용성군(檢校密直副使龍城君) 돈(暾)의 아들로서 공민왕조(恭愍王朝) 에 부친을 따라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 유인우군(柳仁雨軍)에 속하여 쌍성(雙城)회복의 공이 있었고 조선 태조대왕의 매부이다.

공민왕조 삼중대광용원군(三重大匡龍源君)에 이르렀고, 아들 온(溫)과 연(涓)은 조선조(朝鮮朝)창업의 공을 세웠다.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은 여조훈신(麗朝勳臣)이라 고려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불사이군(不事二君)이 라 하여 양주(襄州) 동쪽 10여리에 와서 은퇴하던 중 삼징칠벽[(三徵七●) : 벼슬을 주려고 자주 조정에서나 지방관아에서 부름]을 하나 가지를 않았다. 그 동리의 이름은 시상[(柴桑) : 지금의 조산]이고 그 동쪽 대포성 (大浦城)의 동쪽 기슭에 해월정(海月亭)을 짓고 소일했다. 사후에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그 굳은 의 지와 절개는 일조일석에 모든 고을에 전해지고 양양유림에서는 예를 후히 갖추었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동 명서원(東溟書院)을 건립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군민은 절의를 추모하여 춘추에 제향을 올린다.

대대로 용진(龍津: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에 살았다.

1356년(공민왕 5) 쌍성 회복시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그 공으로 호군이 되 었다.1363년에는 김용(金鏞)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372년에는 가주(家州)에서 난동자들이 지방 관리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판사(判事)로서 이들을 토벌하 였다. 그 해에 만호가 되어 함주·북청에서 복병으로 왜구를 대파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밀직부사로서 충혜왕의 아들을 자칭한 중 석기(釋器)를 잡는 데 공을 세우고, 다시 동북면 원수로 출정해 왜구를 토벌하였다.

1377년에는 신주·옹진·문화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공격했으나 적세가 완강해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를 사용해 수군을 훈련시켰으며, 1379년에는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 이듬해에는 강릉도상원수(江陵道上元帥)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훈을 세웠다.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도체찰사가 되고, 1385년에는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 그리고 곧이어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가담해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된 뒤 수차 유폐된 우왕을 찾아 의대(衣帶)와 향연을 베푸는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1389년(공양왕 1)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환조(桓祖)의 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혼인했던 까닭에 조선왕조 개국 후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 졌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조인벽 선생의 시 한수가 낙산사 의상대에 있던 것을 동명서원으로 옮기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내 용 또한 선생의 마음과 생활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海月亭遺詩

공훈과 명예는 나비 날개와 같이 얇기만 하고 용뇌 같이 여기는 부귀는 가볍기만 하더라

모든 일은 싸늘한 가을 밤 꿈에 놀다 깨는 것이니 다 잊고 동창에 비칠 바다의 달이나 쳐다보세

서산에 걸친 달은 히끄무레하고 공중에 구름이 길게 뻐쳤네

산사람이 범도 두려울 것 없어 밤새도록 문도 닫지 않네

 

蝶翊勳名簿 龍惱富貴輕

萬事驚秋夢 東窓海月明

淡淡西山月 靄靄空中雲

山人不畏虎 永野不庵門

 

이렇게 탈속하고 대자연과 함께하는 시예는 한폭의 그림과 같고 음악과 같다고 하였다.

선생의 집터 앞을 흐르는 물을 魯連灘(노연탄)이라 하였으니 물이 흘러 바다로 가면 중국의 산동 옛날 공자 가 학문을 일으킨 노나라에 통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며 흥학(興學)의 결심을 표시한 것이며 바닷가의 바위를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였으니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술 마시던 심정이 상통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다. 현재의 조산리를 자상촌(紫桑村)이라 한 것은 도연명이 살던 중국의 산서성 자상산을 뜻한 것으 로 모든 물욕과 명예를 버리고 후생교육에 힘쓰고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낙천으로 생을 마쳤다.조인벽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고려말 정몽주, 이색, 길재 등 3은과 함께 숭앙되고 있는 선비의 귀감이다.

이태조가 고려말 충신에게도 충절을 표창할 때 선생은 사망 후였는데 추성양절익위보이우공신보국숭녹대 부문하좌정승판도평의사사영경연사한산백(推誠亮節翊衛輔理佑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司事領 經筵事漢山伯)이라 하고 시호를 양열(陽烈)이라 하였다. 선생은 충의, 도덕의 모범이 됨으로 서원에 모시고 관리와 유림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아마 선생의 뜻이라면 아마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 을 것이다.

 

● 조사(趙師)

호는 가천제(嘉川齋), 조인벽의 넷째 아들, 태조의 친생질의 관례에 따라 통정대부 중추원사에 제수되었으 나 이를 사양하고 양양으로 내려와 양친과 수학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운곡 원천석과 교분이 두터웠다.

임종할 때 자손에게 유언하기를“내가 죽거든 정몽주선생 무덤근처에 묻어서 지하에서라도 따라 노닐게 해 달라”고 하여 자손들이 그대로 따랐다 한다.

 

● 교육적으로 본받을 점

젊어서부터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김용의 난을 평정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힘써 유비무환의 가르침을 주었으며, 또한 바쁜 국토방위의 임무중에도 지역 백성을 배려하고 풍속과 문물을 일깨워 수 백년 후에도 덕만이 전해졌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모든 벼슬을 버리 고 낙향하여 우리 고장의 후생들을 가르치고 풍속을 순화시키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처남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면서 여생를 마치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옳지 않은 일이면 따르지 않고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하며 평화롭게 살아 가는 귀감이 되고 있다.

 

● 관련 행사

유적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동명서원

행 사 : 매년 춘계(음력 3월중 丁日)과 가을 두 차례 양양의 유림들과 한양조씨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조 인벽 선생의 뜻을 기리며 얼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으며 매월 삭망일 (1일, 15일)분향하고 있다.

 

●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 성균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 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 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務●)·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 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 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 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 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 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 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 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 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 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 향 교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 (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민들이 기숙하였 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 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 도록《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 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 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 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어서 1900년 에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정하여 그 재산을 부윤·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다. 1918년 조사된 바로는 당시 향교의 총수는 335, 소관토지는 48만 평이었으며, 그 재산은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사업의 시설에 충당하 였다.

 

>>> 서 원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 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 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陽)·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이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 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 (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 (道洞書院)이 15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1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 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 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 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 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 (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 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 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 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 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 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송악서원(松嶽書院)·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萬東廟)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 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 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 서 당

학당(學堂)·사숙(私塾)·학방(學房) 등이라고도 한다. 서당에 관한 기록은 한국 사기(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堂)이라는 부락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서당의 기록은 1124년(인종 2)에 왔던 송나라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서긍(徐兢)이 저술한《고려도경(高麗圖經)》에“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두(書杜) 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未婚子弟)가 무리를 이루어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하여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講習)하고 아래로 졸오(卒伍)·동치(童稚) 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서당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서당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된 민중교육기관으로 신교육이 실시될 때 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다.

이 서당은 완전히 사적(私的)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기본자산이나 인가(認可)를 요하는 것이 아니 었으므로 흥폐가 자유자재였으며 뜻있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서당이라 불리는 사숙이 성립되는 데는 사족(士族) 자제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는 경우, 가세가 풍족한 집 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약간명의 이웃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는 경우, 훈장(訓長) 자신 이 교육취미나 소일(消日)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경우, 향중(鄕中) 의 몇몇 유지 또는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키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자기가 직접 설립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입학하는 날 훈장에게 나아갈 때는 흔히 술·닭 등의 예물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예의였다. 학동이 맨 처음 대하는 책은《천자문》이나《유합(類合)》이다. 이 책을 통하여 단자(單字)에 대한 음훈의 의식을 깨우치고, 이 단자를 붙여 음독(音讀)하는 법을 배운 다음《계몽편(啓蒙編)》이나《동몽선습(童蒙先習)》또는《격몽요결(擊 蒙要訣)》《명심보감(明心寶鑑)》등을 통하여 초보적인 구두와 문장의 뜻을 해독하는 훈련을 쌓는 한편 책 속 의 교훈적인 내용을 터득하게 된다. 다음은《십팔사략(十八史略)》《통감(通鑑)》《소학(小學)》등을 배워 문리 (文理)가 트이고 견식(見識)이 열리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게 된다. 옛날 선비들은 이 단계를 거쳐 향교 (鄕校) 또는 사학(四學), 이어서 성균관으로 진학하였다. 서당은 근대식 학제가 시행된 후에도 보통교육의 보 조기관으로 유지되다가 쇠퇴하였으나 지금도 산간 벽지에서 서당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