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동해신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018회 작성일 14-04-29 15:21

본문

동해신묘

해설 이기용

 

013_01.jpg

 

● 동해신묘에 대한 문화재청의 기록

- 종 목 : 강원도기념물 73호

- 명 칭 : 양양동해신묘지(襄陽東海神廟址)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 소재지 : 강원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39외 (면적 1,316㎡)

- 지정일 : 2000. 01. 22.

-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강원도 양양군에 위치한 동해신묘는 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안녕을 기원하 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천과 바다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 원하였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고려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나타나 조선 초기에 국가 제사 장소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서쪽으로 대나무와 솔밭이 있고, 서쪽은 민가와 접해있다. 남쪽과 동쪽은 밭으 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정전이 1동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철폐되었다가 199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전의 서북쪽에 정조 24년(1800년)에 강원관찰사 남공철이 글을 지은 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 비(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가 있다.

 

● 제사의 기원

삼국시대 :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를 지냄

 

(삼국사기 기록들)

- 고구려 :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이후 왕들도 이하 같이 행하였다. 고구려는 귀신, 사직, 영성에 제 사지내길 좋아한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크게 모이니 명칭을 동맹이라 일컬었다.

- 백 제 : 온조왕 20년 2월에 단을 세우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이후 왕들도 이와 같이 행하 였다.

- 신 라 : 2대 남해왕 3년에 비로소 시조의 사당을 세워 춘하추동 제사하였으며 22대 지증왕때에 는 혁거세 탄강의 땅인 내을에 신궁을 설치해 제향하였다. 제36대 혜공왕때 이르러 처음으로 5묘 의 제사를 정하였으며 제37대 선덕왕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 동해신묘 제사의 기원

당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의 제도를 받아 들였다. 통일신라의 동해묘는 경주의 동쪽인 흥해 에, 북해묘는 삼척에 있었다.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기록)

「제지(祭志)」명산 대천(名山大川)을 나누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하였는데, (중략) 사해 (四海)는 동은 아등변(海東阿等邊)이고,〔 퇴화군(退火郡) 지금의 흥해(興海)이다.〕남은 형변(兄邊)이며,〔 칠산 군(漆山郡)에 있다. 지금의 동래(東萊)이다.〕서는 미릉변(未陵邊)이고, 〔히산군(屎山郡) 지금의 임피(臨陂)이 다.〕북은 비례산(非禮山)이다.〔 실직군(悉直郡) 지금의 삼척(三陟)이다.〕(이하생략)

 

(고려사 기록)

생각건대 정치를 옳게 하는 데는 반드시 예(禮)에 기본을 두는 것이다. 여러 사전(祀典)을 상고한 후에야 오 악(五嶽), 오진(五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을 봉하는 일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존중하는 아 름다운 칭호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추가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 양양의 동해신묘

고려때 개성의 정동인 양양에 동해신묘가 있었다.

 

(고려사 기록)

翼嶺縣

本高句麗翼峴縣[一云伊文縣] 新羅景德王改今名爲守城郡領縣

顯宗九年置縣令高宗八年以能禦丹兵陞襄州防禦使

四十一年降爲縣令四十四年以降賊又降爲德寧監務

 

元宗元年陞知襄州事別號襄山有東海神祠 屬縣一.”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사해(四海) 가운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 를 내렸다고 하고 있고, 현종 9년(1028년) 남해신을 사전에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사직단을 세운 성종10년 (991년)부터 남해신을 사전에 올린 1028년 사이에 건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임

 

(고려사 기록)

숙종 원년(1096년) 5월에 날이 가물었다. 무신일에 건덕전에서《금강경》을 외우는 도량을 열고 비를 빌었 다. 3년 4월에 날이 가물었다. 기해일에 5해신(海神)에게 비를 빌었다. 4년 5월 을사일에 여러 신사에서 비를 빌었다.(이하 생략)

숙종 3년(1098년) 기해일에 5해신(海神)에 비를 빌었다.(이하 생략)/『(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동해신묘 (東海神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있으며, 사해(四海) 가운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

 

(여지도서의 기록)

동해묘(東海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모시고, 서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서해단(西海壇)을 황해도 풍천에 모셨 으며, 남해를 다스리고 지키는 남해신사(南海神祠)를 전라도 나주에 모셨다.

그리고 북쪽은 바다가 없어 해신을 모시는 대신 강의 신을 모셨으니 강신을 봉사한 사당으로는 북동편은 함경북도 경원에 두만강신사(豆滿江神祠)를, 북서편에는 편안북도 의주에 압록강사(鴨綠江祠)를 모셨다.

 

(증보문헌비고)

(생략)현종 19년(1028년)에 남해신(南海神)을 사전(祀典)에 올렸는데, 그것은 정안현(定安縣)에서 다시 산 호수(珊瑚樹)를 바쳤기 때문이었다.(생략)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대동지지의 기록)

그 전고로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8권, 14년(1414년)

삼가《당서(唐書)》《예악지(禮樂志)》를 보니,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하였고, 산 (山)·임(林)·천(川)·택(澤)은 소사(小祀)로 하였고,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宋)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 (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 천(山川)의 제사는 등제(等第)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境內)의 명산 대천(名山大川)과 여러 산천(山川)을 빌 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等第)를 나누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嶽)·해(海)·독(瀆)은 중사 (中祀)로 삼고, 여러 산천(山川)은 소사(小祀)로 삼았다.

 

고려사에 동해신묘는 양양 땅에 있다고 기록된 이래 세종, 중종, 중종, 인조 숙종, 영조, 정조 시에도 양양 땅에 있었음이 확임됨

 

(세종실록 오례(五禮)편 기록)-1454년

“大祀: 社稷,宗廟 中祀: 風雲雷雨【山川, 城隍附°】嶽, 海, 瀆【智異山, 全羅道南原南; 三角山, 漢城府中; 松嶽山, 開城府西; 鼻 白山, 永吉道定平北°東海, 江原道襄州東; 南海, 全羅道羅州南; 西海, 豊海道豊川西; 熊津, 忠淸道燕●; 伽倻 津, 慶尙道梁山°已上南°漢江, 漢城府中; 德津, 京畿臨津; 平壤江, 平安道平壤府; 鴨綠江, 平安道義州°已上 西°豆滿江, 咸吉道慶源°】, 先農, 先蠶, 雩祀【句芒木正, 祝融火正, 后土土正, ●收金正, 玄冥水正, 后稷°】, 文 宣王, 朝鮮檀君, 後朝鮮始祖箕子, 高麗始祖”

(세종실록 지리지 양양 도호부편 기록) - 1454년

“襄陽: (중략) 東海神祠堂°在府東, 春秋降香祝致祭, 中祀°”

(세조실록 권38 기록) - 1466년

“命祭東海神”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 기록) - 1530년

“海在府東十三里祀典祭東海神于此載中祀”“東海神祀在府東春秋降香祝致祭”

(여지도서 양양부편 기록) - 1757년

“海在府東十三里祀典祭東海神于此載中祀”; 江陵鎭管所屬襄陽府, 壇廟“海在府東十里海上正殿六間 神門三間, 奠祀廳二間, 東西齋各二間, 百川門一間, 每歲首別祭仲春仲秋常祭香祝皆自京下來.”

(기언 권35 미수(眉●) 허목(許穆)의 글) -1667년

“旌善稱孝弟鄕溟州●國壽春貊國襄陽海上有東海神祠”

(정조실록』권54 기록) - 1800년

“襄陽洛山津, 有東海神廟, 享禮在於國典,(이하 생략)

 

● 잘못된 강릉 이전 논란

인터넷에서 동해신묘 검색 ⇒ (지식백과)디지털강릉문화대전(강릉시)

동해신묘

[정의]

우리나라 동해안·강릉 정동의 동해신을 모신 곳.

 

[개설]

동해신묘의 창설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명나라 태조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고려에 사절을 보내서 국내산천에 제사를 행하고 임금이 목욕재계하여 친히 축문을 고하였다 한다. 조선왕조가 세워지면서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명나라 법전에 따라 동해묘를 중건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사해(四海)가운 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이러한 방증으로도 동해신묘의 창 건시기를 이 시기로 상정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동해신묘의 건립 연대를 고려 공민왕 19년 즉 137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초기 사전(祀典)이 정비되면서 동해묘는 중사(中祀)로 제정되었다. 태종 14년(1414) 8 월 예조에서는 동해는 양양, 남해는 나주, 서해는 풍천으로 정하고 치제를 관에서 주관하였다. 동해신묘의 본 래 위치는『양주지』에 의하면 강릉 안인포에 있었으며 성종 21년(1490)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양양읍 조산리로 이전함에 따라 이건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관우의 신위를 봉 안하고 분향을 했으며, 일체의 예법을 중국·명나라 광덕왕의 예법에 따랐다고 한다. 애초에 정동촌에 있었 던 당시 관우신위를 봉안한 것인지, 옮겨지면서 그와 같이 된 것인지 또는 본래 정동촌에서는 용왕신위였는 데 관우신위로 바뀐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건립경위]

동해신묘의 건립 연대를 고려 공민왕 19년 즉 137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허균이 쓴「중수 동해용왕비문」 에 의하면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즉“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 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우리나라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이 되는 곳을 가려 설 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正東)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한 곳에 위치 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 불렀으며,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지냈다.”고 한 내용으로 미루어 동해 정동에서 제사를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치]

동해신묘는 본래 정동진에 있었으나 현재는 양양 조산리에 이전되어 있다.

 

[형태]

고려 공민왕 19년(1370) 강릉부 정동촌에 세워진 동해신묘는 조선조 성종 21년(1490)에서 중종 31년 (1536) 무렵에는 이미 양양으로 옮겨졌다. 또한 동해신묘의 신위도 허균 당시에는 동해 용왕으로 봉안되었 다. 그것은 정동진에서 신라시대부터 동해 용왕을 신으로 모신 제의가 행해졌으므로 이곳에 동해신묘를 지었 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영조[1724~1776] 연간에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양양부」의“동 해묘는 정전(正殿) 6칸, 신문(神門) 3칸, 전사청(奠祀廳) 2칸, 동서재(東西齋) 각 2칸, 백천문(百川門) 1칸으로 그 규모를 기록하고 매년 정초 세수(歲首)에 별제(別祭)를 거행하고, 중춘과 중추에는 상제(常祭)를 올린다. 제사에 쓰일 향축은 나라에서 보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동진의 동해신묘도 이러한 규모로 유추되나 전 하는 자료가 없다.

 

[금석문]

허균이 1605년에 쓴「중수동해용왕비문」은 글만 남고 비석은 없어졌고 남공철(南公轍)에 의한「동해신묘 중수기사급명(東海神廟重修記事及銘)」(1800년)만이 양양 동해신묘에 있다.

 

[현황]

『양주지』에 의하면 동해신묘가 본래는 강릉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경술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강릉 으로부터 대포성(大浦城)에 이전할 때에 양양 조산으로 같이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현재 강릉 정동진· 동해신묘가 있던 곳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양양 조산리 동해신묘에서는 매년 정초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해신묘는 동해를 지키는 신에게 국가에서 중사의 격으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우리나라의 정동인 강릉 정 동진에서 그 제사를 지냈다. 정동진이 국가적인 치제의 중심이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江原道民俗硏究)』(국학자료원, 2002)

 

이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있는 소설같은 얘기가 잘못 해석된 것임

 

 

 

● 동해신묘 이전관련기록

세조 2년 집현전 직제학인 양성지가 왕에게 동해신묘를 개성의 정동인 양양에서 한양의 정동인 강릉으로 옮겨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옮겼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음.

만약 옮겼다면 서해와 남해도 함께 옮겼어야 함에도 옮겨지지 않았으며 방위가 맞지 않은 양양으로 다시 옮겼다는 말도 맞지 않음.

(세조실록 3권의 기록) - 1456년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중략)

一, 岳, 鎭, 海, 瀆°蓋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本朝岳鎭海瀆名山大川之祀, 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 多 有可議者焉°(중략) 且東, 南, 西海神祠, 皆自開城而定之, 亦乖方位, 乞命禮官詳加考定, (중략) 又移祭東海神 於江陵, 西海於仁川, 南海於順天, 北海甲山, (중략) 以新一代祀典°是則 山川之載祀典者, 古今皆三十四, 而仍舊者十七, 移祭者四, 新陞者十三, 可 永革者亦十三矣°(이하 생략) 上嘉納°”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중략) 악진해독입니다.(중략)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는 모두 개 성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에게 명하여 고정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중략) 또 동해신을 강릉에, 서해는 인천에, 남해는 순천에, 북해는 갑산에 이제하고, (중략)일대의 사 전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 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 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생략) 하니 임금이 기꺼이 들었다.

013_02.jpg

 

 

 

● 허균의 성소부부고 내용

만력 갑진년(1604, 선조37) 7월 양양부(襄陽府) 동산(洞山)에 사는 어부 지익복(池益福)이 배를 타고 바다 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一晝夜)를 달려 동쪽 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왕궁에 나아가니 궁 뜰에 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江陵)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 에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므로 너의 힘 을 빌어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牧民官)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 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되어 동해 가에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히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 하고 향임(鄕任) 이석림(李碩霖)에게 말하여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

부사(府使) 홍여성(洪汝成)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전고(典故)를 들어 상고해보니, 가정(嘉 靖명 세종 연호) 병신년(1536, 중종31)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正東村)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인용하지 못하고 폐해가 많다는 이유로 옛 문서를 돌려주기를 방백(方伯)에게 청하 였으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해 을사년(1605, 선조38) 7월 관동(關東) 지방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안변(安邊)·통천 (通川)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安東)까지 수십 군이 혹독한 수해를 입어 백성과 가축의 죽은 수효는 수만에 이르렀는데, 강릉이 특히나 심하였다. 부사 홍공(洪公)은 더욱 이상히 생각하여 지방 관리와 백성을 불러 의 논하기를,

“귀신이, 사당을 옮기지 않으면 해를 내린다고 우리에게 경고한 지 1년 만에 수해가 이 지경이니, 이는 과 연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의 힘으로는 옮길 수 없으나, 그 사당을 보니 퇴락하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 지 않고 있다. 어찌 우리가 서로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우리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렇게 우리 의 할 일을 수행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하니, 모두‘그렇다’하고 드디어 녹봉을 떼내어 공장이와 인부를 모아 향임에게 이를 감독케 하여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 쌓 고, 신문(神門)을 만들고, 마당을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 니 이때부터 양양이 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 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저 내게 글을 청하기에 나는,

“우리나라는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되는 곳을 가려 설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앞이 탁 트여 밝은 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지냈다. 그런데 공희왕(恭僖王중종) 때에 강릉부 사람 으로 장원 급제한 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 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든다 하여 방백에게 말하여 상께 글을 올리고, 까닭없이 옮겨버렸다. 요즘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동해 용 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평안 히 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하니, 귀신의 노여움도 당연하다 하겠다. 언광 형제의 몰락도 이것 때문일 것이 며, 을사년 바람과 비의 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밝게 고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람들 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부사의 사당 개수(改修)는 예에 들어맞는 처사니, 어찌 그를 덮어 둘 것인가.”하고, 갖 추어 기록하고 이에 송(頌)을 드린다.

바다는 천지 간에 가장 큰 것이온데 그 누가 왕이 되어 바람 불고 비 오게 하는가. 강하고 강한 용왕신이라 하늘의 용은 이것 같음이 없네 복 내리고 화 내리매 신령스런 응보 매우 진실코야 그 누가 그곳 낮은 데에 내 집 옮기게 하였는가 적은 비용 아끼니 신의 노여움 마땅하네 귀신의 계신 곳은 조개집 구슬 궁궐인데 세상의 오두막집 뭐라 연연하여 섭섭해 하겠는가 아니로다. 정성은 신의 흠향하시는 것이니 불경한 자 방자하고 불 성하면 게으른 법 땅을 쓸고 물 떠 놓아도 정성껏 공경하면 강림하지만 좋은 자리 좋은 음식 차려 놓아도 방 자하면 흠향하지 않는다네.

옮겨 놓고 더럽힘은 게으르고 방자한 일 어찌 제수의 많고 적음에 기뻐하고 탄식할까 알려줘도 안 따르니 홍수 피해 마땅하네 온화한 원님이 공경으로 신 받들어 새로 사당 단장하고 제수 차려 제 올리니 신이 돌아보 고 기뻐하여 바람같이 와 흠향하네 공경을 다하여 정성껏 받든다면 어찌하여 강릉(江陵)ㆍ양양(襄陽) 가리겠 는가 원컨대 이곳에 길이 진정하시어 해마다 풍년들게 도와주시고 백성들 상하지 않으며 전란이 미치지 못하 게 하여 길이길이 만년토록 우리 고을 도와주소서.

 

 

 

● 동해신묘 훼철과 복원

 

훼 철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통감부 훈령으로 순종 2년(1908년) 12월 26일

군수 최종낙(崔鍾洛)이 동해신묘를 훼철(毁撤)

구전에 의하면 최종낙 군수는 동해신묘 훼철(毁撤) 후 3일 만에 급사하였다고 함

 

복 원

1993년 정전 1동(6칸) 건립.

정전의 북·서쪽에 두 토막이 났던 동해신묘중수기사비(東海神廟重修記事碑)를 다시 세워 놓음.

2000. 1. 22. 동해신묘지(東海神廟址)와 남공철의 중수기사비는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

 

복원의 문제점(위치 및 방향)

세종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보면 악해독의 신은 북쪽에서 남향으로 앉아야한다(嶽海瀆神座在北 南向)고 기록되어 있어 남쪽을 향하여 복원됨

그러나 옛지도, 발굴도면, 구 지적도, 문헌기록 등을 볼때 세밀한 발굴 조사가 필요함

013_03.jpg

 

013_04.jpg

< 관련 기록들>

삼국유사

문무대왕을 동해 대왕암에 상사한 후, 해룡(海龍)이 된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 데 아들 신문왕이 용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금당계하(金堂啓下)에 동향한 한 구멍을 냈다

 

 

『연재선생문집』에 보면

“동해신묘는 좌우 송림속에 있다.”

 

『관동읍지』와『여지도서』에 보면

“동해묘는 양양부 동쪽 10리 해상에 있다.”

 

『기언』35권 미수 허목의 글

“양양에는 해상에 동해신사가 있다

 

결 론

- 동해신묘는 중사로서 고려 6대 성종 10년(991년)에서 고려 8대 현종 19년(1028년) 사이에 양양에 건립 되었다.

- 왕이 내린 향과 축으로 매년 새해 별제와 2월, 8월 상제를 행했던 곳으로 정전 6칸, 신문 3칸, 정사청 2 칸, 동·서재 각 2칸이 있었다.

- 고려때 양양에 건립된 이래 강릉으로 이전하거나 강릉에서 이전된 적이 없었다.

- 방위문제는 일부 이견이 있으므로 정전을 분해한 후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발굴조사와 역사성을 정립하여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킨 후 복원하여 역사과 관광자원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