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소동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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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81회 작성일 2014-04-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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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라령

해설 이기용

 

■ 소동라령(所冬羅嶺) - 파워포인트로 설명 후 현장 실사

『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要害, 自本府西去麟蹄境所等羅嶺三十六里”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 국여지승람』제45권 강원도(江原道) 간성군편에 보면“미시파령(彌時坡嶺)은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 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다 하 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산천조에도“소동라령(所冬羅嶺)은 부 서 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소동라령이라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영로가 있었으나 길이 험하여 성종 24년 국가가 관 리하던 영로를 폐지하고 지금의 미시령으로 옮겼다.

그런데 인제군에서는 한계령의 옛 이름이 오색령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 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소동라령의 위치가 한계령이 아니라 북암령이며, 일제의 창지개명으로 바뀌었음을 입증시킴으로써 2012년 강원도문화원연합회에서 실시한 향토문화연구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소동라령의 위치

– 옛 지도에서 본 소동라령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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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들은 영동에서 영서로 통하는 백두대간을 넘는 영들이기 때문에 지도상에도 북에서부터 남으로 순차 적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도는 한눈에 볼 수 있어 글로 기록된 문헌에 비해 영의 좌우관계를 그르 칠 우려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모든 고지도에서 소동라령은 오색령 남쪽 위치에 표 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수파(박달령)와 구룡령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 문헌기록에서 본 소동라령의 위치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년)』와『관동읍지(1871)』의 양양 관애(關●)편에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조 침령·구룡령·형제현·양한치 등의 일곱 항목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오색령은 설악 남쪽가지에 접하고 인제와 경계를 이룬다. 필여령은 오색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있으며 춘천 기린과 경계를 이룬다. 소동라령은 필여령 남쪽가지에 접해 있고 기린과 경계하며, 구 유로로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 금은 폐지되었다. 조침령은 소동라령 남쪽가지에 접하고 기린과 경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양양군읍지 2(江原道襄陽郡邑誌二)』에도“소동라령은 부 서쪽 60리에 있다. 즉 필여령 남쪽 가 지로 기린과 경계를 이루며, 옛날 서울로 통하던 길이였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종합하면 소동라령은 필여령과 조침령 사이에 있었던 영임을 확인할 수 있어 필여령 북쪽에 위치한 현재의 한계령은 소동라령과 같은 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위 기록뿐만 아니라『대동지지(大東地志)』1866년 양양 영로조(襄陽嶺路條), 『만기요람(萬機要覽)』군 정편4(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편, 『관동지』13권에 모두 오색령은 인제와 경계한다고 하고 있으나 소동 라령은 기린과 경계한다고 하고 있어 인재군 기린면 진동리를 경계로 하는 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소동라령은 양양에서 남대천을 따라 올라오다 망령고개(望靈峙)나 한령을 넘고 소천이나 소어리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을 넘어 기린현내 진동리와 곰배령을 거쳐 귀둔, 추동, 고사촌, 합강정을 경유해 인제로 연결되는 영로였던 것이다.

 

 

 

■ 오색령(五色嶺)

– 한계령의 옛 지명은 소솔령

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具思孟)의『팔곡집(八谷集)』에 한계산(寒溪山) 시(詩)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어 인제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계사(寒溪寺: 장 수대 인근의 절)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추강 남효온(秋江南孝溫, 1454~1492년)의『유금강산기 (遊金剛山記)』에“오색역(五色驛)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 이 아니구나, 하고서 영(嶺)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을 지나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라는 기록이 있 다. 이를 종합하면 오색에서 장수대(한계사)를 지나 인제를 통하는 지금 한계령의 옛 이름은 소솔령이었음을 알 수있다.

 

– 소솔령이 오색령이 된 근거

문헌에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72(宣 祖實錄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戊戌)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적병이 경상도의 영해(寧海) 연해를 따 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여 적병이 깊숙 이 영동(嶺東)으로 침입하면, 추지령(楸池嶺)·미수파[(彌水坡)·오색령(五色嶺)·백봉령(白鳳嶺) 등의 곳은 모두 영(嶺)을 넘는 길이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토록 이용이 많았던 소솔령(所率嶺)이라는 고개명은 이때부터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라지고 오색령(五 色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복잡한 고개명칭(소파령, 소솔령, 소어령, 소동라령 등)의 혼돈으로부터 오색역을 지나는 영로라는 지명을 통해 고개의 위치를 쉽게 기억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김수증(金壽增)의『한계산기(寒溪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기문(記文) 중에“한계사(寒溪寺) 옛터를 지나니 북쪽편의 모든 산봉우리들 은 곧게 솟아 있고, 나무들이 무성하여(생략)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고서,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오색령(五色嶺)을 경유하여 양양(襄陽)으로 가는데 거리는 약 80리가 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양양에서 오색을 거쳐 한계사 터를 지나 인제로 가는 영이 소솔령임을 기 록을 통해 확인했었다. 그런데 한계사 옛터를 지나면서 지나는 스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오색령을 거쳐 양양으로 간다고 하고 있다. 이로서 소솔령이 오색령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계사에 투숙객이 많아 이를 감내할 수 없어 절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던 소솔령 지명이 모든 지도에서 사라졌다면, 문헌상에 필여령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모든 지도 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오색령이 과거의 소솔령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며 오색령은 당시에도 양양과 인 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영로로 지금의 한계령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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