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향토사료 / 日帝强占期創地改名事例硏究 (襄陽을 中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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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23회 작성일 2014-04-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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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期創地改名事例硏究 (襄陽을 中心으로)

 

襄陽文化院附設鄕土史硏究所

<발표 : 이기용 연구원>

 

1. 들어가는 말

 

사람에게 인명(이름)이 있듯 땅에는 지명이 있다. 사람은 이름이 있어 이를 통해 그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듯이 지명은 그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이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지역의 역사, 형상, 풍속, 의식, 도덕, 종교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물은 땅에서 근원한다. 땅은 인간의 삶을 감싸고 있는 환경으로 땅이 있어 사람이 살 수 있고, 사람들 의 삶을 이어준다. 이러한 땅은 인간과의 만남 속에서 그 땅에 걸 맞는 이름이 지어진다. 마치 좋은 경치는 그곳에 걸 맞는 이름이 있듯이 그 땅에 어떤 상징적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지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명은 이 땅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생겨났고 지명의 유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신과 생활의 뿌리를 이루어 왔으며, 오랜 역사의 시간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살아있는 생 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명은 인류가 살았던 생활문화의 자취요, 역사의 사회적 소산이기 때문에 향토사나 향토문화를 연구, 개발, 보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국어학, 역사학 연구에서도 주요 연구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의 지명에는 ○○골, ○○거리, ○○말 등 이름만 들어도 그 지역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정겨운 지명들이 많았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땅의 맥에는 쇠말뚝을 박고,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 식으로 바꾸게 했다.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유의 지명까지도 강제로 바꿔 우 리의 정체성, 혼을 빼앗아가 버렸다. 이른바 창지개명(創地改名)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연구조사기록을 보면 2006년 국토지리정보원의『강원권 일본식지명의 조사 및 정비 방안 연구』등 수차례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 졌을 뿐으로, 그나마도 과거의 지명을 찾아 이를 비교하는 체계 적인 조사가 이루어 지지 못함으로서 지명 중 왕(王)자가 황(皇)자나 왕(旺)자로 바뀐 것을 밝혀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에 양양을 중심으로 역사기록을 추적하고 자연지명을 찾아봄으로써 지명의 변천과 일제의 지명 개명 실태를 알아보고 이를 정리해 다시 고쳐 바로잡고자 한다.

 

 

 

2. 양양의 역사와 변천

 

우리지역 역사문화의 사회적 소산인 옛 지명을 찾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고 주변 상 황은 어떠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연혁(沿革)을 보면, 고구려의 영역으로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하였고, 신라 삼국 통일 후 경덕왕 16년(757년)에 익령현(翼嶺縣) 고려 성종 때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익령현은 삭방도(朔方道) 에 속하게 되었고, 현종 9년(1018년)에 지방을 5도 양계로 고치면서 동계(東界)에 속했으며 현령이 파견되 면서 동산현(洞山縣)이 내속되었다. 고종 8년(1221년)에 거란군을 격퇴시킨 공으로 양주(襄州)로 승격되고 방어사(防禦使)가 임명되었으나, 원종 원년(1260년)에 다시 양주(襄州)로 회복되었고, 조선에 이르러 태조 의 외향이었던 까닭으로 태조 6년(139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고 태종 13년 도호부(都護府)로 태종 16년 양양(襄陽)으로 개칭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강원도 양양군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1914년에 12개 면 중, 군내면(부내면), 부남면, 위산면이 양양면으로, 동면, 남면이 손양면으 로, 강선면, 사현면이 강현면으로, 도문면, 소천면이 도천면으로 통합됨으로써, 서면, 현북면, 현남면과 더 불어 7개면으로 재편되었다.

 

1919년 간성군이 고성군에 통합되면서 그 관할 하에 있던 토성면과 죽왕면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고, 1942년 속초면이 속초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38도선 이북 지역인 죽왕면, 토성면,속초읍, 강현면, 양양면, 손양면과 현북면, 서면의 일부가 북한에 예속되었고, 현남면과 현북면, 서면의 일 부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현남면은 명주군에 편입되 고, 현북면과 서면은 양양군에 복귀되었으며, 1963년 속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죽왕면과 토성면이 고성 군에 편입되었고, 명주군 현남면이 양양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서면의 명개리가 홍천군 내면에, 손양면 상왕도리의 일부가 양양면 월리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1979년에 양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강현면 상복리 일부(설악동 C지구, 권금성, 장재터 등)가 속초시로 편입되어, 1읍 5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일제의 창지개명과정

 

지명은 인간과의 만남 속에서 그 땅에 어떤 상징적 의미가 부여됨으로서 지명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해 지어진 지명은 지역 공동체에서 공유되어 장소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지명은 유기체와 같은 생명력을 지닌다. 따라서 환경이 변화하거나 다른 문화가 유입 되면 과거 지명은 변화 혹은 소멸되고, 새로운 형태의 지명이 형성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구 전 지명은 지도나 문서에 기록됨으로써 시간적인 지속성을 갖는다.

 

일제 강점기 초 일본은 우리의 민족혼과 정체성을 말살하고 자원 수탈을 위해 우리의 행정구역을 재편하 고 토지조사 사업과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글 지명이 일본식 한자 지명으로 바뀌었고, 새로운 일본식 지명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이전의 한자 지명도 정체성을 없앨 수 있는 일본식 한자로 바뀌기까 지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10년 우사미(宇●美) 내무장관이 각도 장관에 지시하여 정리한「조선지지자료」일 것이 다. 그 내용은 각 군의 동리명칭은 물론 산천, 제언, 역, 계곡, 주막, 명승, 고적 등을 상세하게 조사한 것이 었는데 28책 10,378매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지명들이 새로이 생겨났고, 일본식 한자로 바뀌는 등 민족혼이 살아있는 수많은 지명들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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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토지조사이다. 일제는 1912년 8월 13일 토지조사령을 공포했다.3)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동리 (洞里)를 구획함에 있어 단순히 사람이 사는 곳의 자연지명을 붙여 ○○동, ○○리 등으로 골짜기 마다 자 연지명을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일제는 토지조사와 함께 지적을 측량하고, 지번을 부여하고, 이를 공 부에 기입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마을을 일정규모로 구획하고 이전의 마을들을 통합하거나 분리하여 마을의 경계를 새롭게 정하면서 마을명도 자연스럽게 정체성이 없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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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많은 동리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하나의 마을로 통합됨>

 

 

 

다음은 1912~1919년 사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된 지형도와 이를 바탕으로 만든 일본 육군의 군사지 도이다. 지명이 기록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지도이다. 지명은 지도위에 기재됨으로써 장소의 명명에 대해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초 일본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자원 토 지조사 사업과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글 지명이 일본식 한자 지명으로 바뀌었으며, 새로운 일 본식 지명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 지도에는 일본에 의해 정리된 지명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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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령이 단목령으로, 소동라령이 북암령으로 지도에 표기됨으로서 지명이 바뀜)

 

다음은 행정구역의 개편이다. 1914년 3월에는 부.군의 폐합을, 4월에는 면의 폐합을 통하여 역사성 있는 지명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지명들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은 1914년 군은 97개, 30.6%가 폐 합되었고, 면은 1,834개 42.2%, 리·동은 34,233개, 54.7%가 폐합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36,134개, 53.8%의 행정구역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명에 남아있는 민족혼과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기 위한 일련의 사업들이 이른바 창지개명(創 地改名)이다.

 

 

 

4. 양양지역의 창지개명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제가 우리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자행한 일이 창지개명이었다.

 

창지개명은 일제강점과 함께 자행되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기록이 1911년경에 조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지자료」와 1912년 토지조사령에 의거 토지를 측량하면서 붙여놓은 현재 지적도상의 마을명(일명 법정리명), 그리고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 기록된 지명들일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창지개명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지명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 시대의 지명에 대한 기록으로는「여지도서」,「 관동읍지」등에 실린 마을명, 고지도에 표기된 고개(嶺)명과 산(山) 이름, 족보에 표기된 묘지 위치 등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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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757년의「여지도서」와 1871년의「관동읍지」를 비교해 볼 때 1백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마을명 등 지명의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11년경 일제에 의해 발간된「조선지지자료」를 보면「관동읍 지」에 10개면 61개리이던 마을 수가 120개리로 조정되었고, 마을명칭도「관동읍지」에 기록된 61개 마을 중 21개 마을의 명칭이나 한자가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종전의 기록을 확인 할 수 없는 새로 분리된 마을 56개 마을 중 상당수도 본래의 고을명과 다른 마을명으로 이와 같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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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수는 줄이고 마을 수는 늘인 이유는 주민 통제가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마을을 나누거나 지적측량을 하면서 마을명을 새로이 기재하고, 지도에 표기하면서 창지개명은 자연스럽 게 이루어졌다. 창지개명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 졌으며 같은 유형이 전국적으로 나타남에 비추어 볼 때, 일제의 체계적인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양양지역의 창지개명(創地改名)유형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먼저 조선 왕을 나타내는 왕(王)을 일본과 왕을 합친 의미의 왕(旺)자로 고친 사례이다. 이는 녹 색연합이 문제를 제기한 바도 있다.

 

조선 세조가 낙산사에 거둥할 당시 잠시 쉬어간 마을이라는 손양면 왕도(王道)리가 왕도(旺道)리로 바뀌 었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신라복원운동 하였다는 왕승동(王勝洞)을 왕 승동(旺勝洞)으로 고쳐놓았다. 이러한 현상은 설악산 토왕성(土旺城)폭포, 강릉 왕산면(旺山面), 문경 왕릉 리(旺陵里), 논산 왕전리(旺田里), 서울 인황산(仁旺山) 등 전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손양면 상왕도리, 하왕도리(王道里) ⇒ 旺道里

- 서면 갈천리 왕승동(王勝洞) ⇒ 旺勝洞

- 서면 갈천리 왕승령(王勝岺) ⇒ 旺勝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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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기록해 뜻이 달라진 사례

강현면의 작은 마을이라는 小(작을 소)洞은 순수한 우리말인 적은 골에서 積(쌓을 적)銀(은 은)里로 바뀌 었고, 해안의 굴곡이 심한 마을인 손양면 屈(굽을 굴)浦(개 포)里는 순수한 우리말인 굽은 개가 굴개로 다 시 구리개로 그리고 銅(구리동)湖(호수 호)里로 바뀌었으며, 예로부터 양양경계로 손님을 배웅하던 고개 마 루 마을인 손양면 古(옛 고)送(보낼 송)古介里7)는 고송(古送)을 늙은 소나무로 잘못 해석되어 松(소나무 송) 峴(고개 현)里로 바뀌었고, 앞산에 수리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수리말이라고 하였으나 수리가 술로 바 뀌고 수리로 바뀌었다

.- 강현면 소동(小洞) ⇒ 적은 골 ⇒ 積銀里(적은리)

- 손양면 굴포리(屈浦里) ⇒ 굽은개, 굴개, 구리개 ⇒ 銅(구리동)湖里(동호리)

- 손양면 古送古介里⇒ 고송고개 ⇒ 松(소나무송)峴(고개현)里(송현리)

- 현남면 수리 말8) ⇒ 술(酒) ⇒ 酒里(주리)

 

 

 

3) 마을명을 한자로 바꿔 역사적 정체성을 왜곡시킨 사례

남대천(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越(넘을 월)里가 月(달 월)里로 바뀌었고, 신선이 산다(쉰다) 는 의미의 捿(깃들일 서)仙里는 西(서녘 서)仙里로 바뀌었으며, 호랑이가 나오는 언덕이라는 虎(범 호)阜里 는 凡(무릇 범)阜里로, 갈대가 많은 버덩으로 갈골, ●(갈대 가)坪里가 柯(자루 가)坪里로 바뀌었다. 또한, 물이 남아 넘쳐 무너미라고 불리던 水餘(남을 여)里는 水余(나 여)里로 바뀌었고 하조대해수욕장 넓은 해변 이 있는 廣(넓을 광)汀(물가 정)里가 光(빛 광)丁(고무래 정)里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이래 인구역이 있었던 ●(강건할 린)丘里는 仁(어질 인)邱里로 바꿔놓았다.

 

- 양양읍 越里(건너마을, 월동) ⇒ 月里(월리)

- 서면 捿仙里⇒ 西仙里(서선리)

- 서면 虎阜里⇒ 凡阜里(범부리)

- 손양면 ●坪(갈골, 갈평) ⇒ 柯坪里(가평리)

- 손양면 水餘里⇒ 水余里(수여리)

- 현북면 廣汀里(넓은 물가) ⇒ 光丁里(광정리)

- 현남면 ●丘里⇒ 仁邱里(인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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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인이 같은 음을 지닌 한자로 바꿔 놓은 사례

 

창고가 줄지어 있고 역이 있다고 하여 連(잇닿을 연)倉(창고 창)驛(역참 역)里가 連昌(창성할 창)里로 바 뀌었고, 선비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士(선비 사)川里역시 仕(벼슬 사)川里로 바뀌었으며, 쇠처 럼 강하다는 金剛(굳셀 강)里는 金崗(산등성이 강)里로 바뀌었다. 또한, 밝은 곳이라는 明(밝을 명)之(갈 지) 洞이 밝은 못이 있다는 明池(못 지)里로 바뀌었고, 날아갈 듯 높은 산이 길게 이어진 마을이라 하여 이름 지 어진 면비치리(綿飛峙里)는 면옥치리(綿玉峙里)로 바뀌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 동산현(洞山縣)의 포구 였던 洞(고을 동)山津은 銅(구리 동)山里로 바뀌었으며, 또한 동산현의 창고가 있었던 倉(창고 창)里도 昌 (창성할 창)里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고개가 험하면서 베게처럼 긴 영이라는 의미의 阻(막힐 조)枕(벼게 침)嶺은 鳥(새 조)● (砧)(잠길 침)嶺으로 바뀌었다.

 

- 양양읍 連倉驛里⇒ 連昌里(연창리)

- 양양읍 士川里(사래) ⇒ 仕川里(사천리)

- 서면 長性(牲)里⇒ 長承里(장승리)

- 손양면 金剛里⇒ 金崗里(금강리)

- 손양면 烏山里⇒ 鰲山里(오산리)

- 현북면 明之洞⇒ 明池里(명지리)

- 현북면 綿飛峙里⇒ 綿玉峙里(면옥치리)

- 현남면 洞山里⇒ 銅山里(동산리)

- 현남면 倉里⇒ 昌里(창리)

- 서면 백두대간 阻枕嶺⇒ 鳥(새조)●(잠길침)嶺(조침령)

 

 

 

5) 마을을 통합함으로서 지명의 정체성을 없애버린 사례

 

신선이 내린 곳이라는 강선면(降仙面)과 모래언덕이 있다는 사현면(沙峴面)을 합하여 강현면(降峴面)으 로 개편함으로서 본 의미가 사라졌으며, 낙산사 앞 포구는 앞나루(前津), 뒷 포구는 뒷나루(後津)로 불리었 으나 후진을 전진리와 통합하여 전진리만 남음으로서 전·후의 의미가 사라져버렸다.

 

- 降仙面+ 沙峴面= 降峴面(강현면)

- 강현면 前津+後津= 前津里(전진리)

 

 

 

6) 마을명을 바꿔버린 사례

 

기사문리는 본디 안 포구는 초진(草津) 바깥 포구는 기사진(寄沙津)이라 하였으나 기사문리(其士門里)로 바뀌었고, 거말리(居末里)는 거마리(車馬里)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을 형국이 곰이 누워있는 형국이라하여 곰밭으로 불리던 웅전리(熊田里)는 둘로 나뉘어 윗 곰밭은 용천리(龍川里)로 아랫 곰밭은 북평리(北坪里)로 바뀌었으며, 두리는 동산현 뒤에 있으므로 후동(後洞)이라 하였으나 두리(斗里)로 바뀌었고, 낙산사 뒤편, 뒷나루의 위의 뒷골은 용호(龍湖)리로 바뀌었다.

 

- 양양읍 居末里⇒ 車馬里(거마리)

- 서면 熊田里⇒ 龍泉里, 北坪里(용천리, 북평리)

- 현북면 草津+ 奇沙津= 其士門里(기사문리)

- 현남면 後洞⇒ 斗里(두리)

- 강현면 後洞⇒ 龍湖里(용호리)

 

 

 

7) 일본식 지명으로 바꿔 놓은 사례

 

조선시대 양양 오색에서 인제 진동리로 넘던 고개명은 박달산을 넘으므로 박달령(朴達嶺)이라고 하였으 나 박달나무 단(檀)자를 써서 단목령(檀木嶺)으로 바꿔놓았고, 조선시대 대로였던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영 서쪽 마을명을 따서 북암령(北巖嶺)으로 바꿔놓았다. 양야산봉수대가 있었던 양지바른 포구라는 뜻의 양 야진리(陽也津里)도 남쪽 물가라는 비슷한 이미지의 남애리(南涯里)로 바꿔 놓았으며, 높고 추운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兩(둘 량)寒(찰 한)峙(산 우뚝할 치)는 兩峨(산 이름 아)峙로, 소량치(所良峙)가 선을 치(仙乙峙)로 바뀌었다.

 

- 서면 백두대간 朴達嶺⇒ 檀木嶺(단목령)

- 서면 백두대간 所冬羅嶺⇒ 北巖嶺(북암령)

- 현남면 陽也津里⇒ 南涯里(남애리)

- 서면 兩寒(찰 한)峙(양한치) ⇒ 兩峨(높을 아)峙(양아치)

- 서면 가라피리 所良峙(소량치) ⇒ 仙乙峙(선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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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연지명을 음에 맞추어 한자만 변경된 사례

소래(所川)와 소어(所魚)가 송천리(松川里)와 송어리(松魚里)와 같은 형태로 바뀐 경우도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기록을 보면, 이외에도 송천리의 사당골을 祠堂谷이 아닌 四當谷로 기록하거나 영덕 리의 복지개영을 福注岺(복주령)으로, 연창리의 대밋재를 죽담치(竹潭峙)로, 감곡리의 북동재를 고산(鼓山) 으로 표기하는 등, 순수 우리지명을 일제가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왜곡 표기한 곳도 많이 있었으나 정확 한 자료가 사라진 현실에서 이를 공식화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오랜 시간이 흘러 새로 명명된 지명의 옛 지명을 확인할 수가 없다.

 

 

 

5. 지명기록의 변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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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명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

 

일제의 창씨개명은 일제가 떠난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생활에 불이익이 있다 보니 광복과 동시에 스 스로 옛날의 한국식 이름으로 모두들 바꾸었고, 쇠말뚝도 여러 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제거된 상태 이다.

 

그러나 창지개명의 경우 지적공부나 지도 등에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고, 이러한 기록들은 등기부, 가족 관계증명서, 주민등록부 등 다양한 공부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노력도 없다보니 다시 되돌리지 못한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 아니라 서울 숭례문이다. 보물 제1호도 동대문이 아닌 서울 흥인지문이 다. 문화재위원회는 1996년 11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재평가작업의 하나로 남대문·동대문의 이름을 바 꾸기로 했었다. 까닭은 남대문·동대문이 고유 명칭이 아니라 단순히 방향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일제가 처음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조선시대에 원래 사용하던 이름을 되찾아 준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두 이름을 바꾸려면 행정 기록 200여 가지를 변경해야 하므로 전면 교체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에서 꼬리 부분으로 꼽히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는 장기갑(長●岬)으로, 1995년부터는 장기곶으로 불리다가 2002년 들어 호미곶(虎尾串)으로 이름을 확정했 다. 이 곶은 16세기 이래 남사고·김정호·최남선 등의 학자가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상 으로, 백두산이 코라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지목한 땅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호랑이 상이 아닌 토끼 모 양으로 왜곡하면서 땅 이름도 장기갑으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제의 잔재이고 우리 땅의 역사를 왜곡시킨 지명은 하루라도 빨리 되돌려야 마땅할 것 이다.

 

현재 행정단위인 시, 군, 읍, 면, 동, 마을의 이름인 행정지명은 안전행정부의 소관이고, 자연적으로 형성 된 지형이나 지역에 붙여진 이름인 강, 포구, 고개, 골, 곶, 나루, 산 등의 지명인 자연지명은 국토교통부 국 토지리정보원 소관이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양, 해협, 만, 포구, 수로 등의 이름과 해저지형의 지명은 수 로업무법에 근거하여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소관이다.

 

안전행정부는 2006년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명칭, 왜곡 가능성은 적으나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 로 명칭이 붙여져 고유 명칭으로의 복원이 필요한 명칭, 어감과 의미가 나빠 주민들이 변경을 희망하는 명 칭, 단순히 방위를 나타내는 등 지역 특수성 표현이 부족해 정비가 필요한 명칭 등을 대상으로 조사 정비를 시도한 바 있다.

 

녹색연합에서도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22개 땅이름을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두 체계적이지 못한 1회성으로, 조사라기보다는 왕(旺), 황(皇) 등 특정 단어가 들어간 지명 을 조사하거나 주민들의 신고에 의존하는 등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 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치단체의 명칭은 지방의회의 의견청취를 거처 법률로, 읍면동과 리의 명칭은 당해 지방자 치단체의 조례로 변경하게 되어 있고, 기타 지명의 경우 자치단체에서 위촉한 지명위원회에서 심의 의결을 거쳐 자치단체장이 관련기관에 변경을 신청하여야 함에도 자치단체장의 의지 부족과 공부를 정리하는데 많은 예산이 소요되다보니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일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고, 새로운 이름으로 인한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명을 호감이 가는 한자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체계적인 지명기록을 찾기 어렵고, 일제에 의해 지명이 바뀐 후 이 미 고착된 상태여서 창지개명된 지명을 되돌리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7. 맺음 말

 

오피니언의 기사에 의하면 1913~1914년에 걸쳐 군 이름 97개, 면 이름 1천834개, 이·동 이름 3만 4천 233개가 없어졌고, 새로 생겨난 지명만도 전체의 35%인 1만 1천여 개에 이른다고 하니, 창지개명은 우리 의 정신에 대한 침략이요, 핍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본바와 같이 조선시대 고을 명, 산, 하천, 계곡 등 자연 지명들이 기록으로 충분히 남아있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순수한 우리말 지명조차 남아있지 않아 일제가 새로 만든 지명에 대한 검증 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광복 이후 국토지리정보원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일본식 지명을 정비하려는 시도 가 있었으나, 쉽게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는 일본식 지명이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국토에 깊이 스며들어 고착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되면서 국민의 먹고 사는 일부터 걱정해야하는 어려운 국가경제 현실에서 각종 공부를 고치기 위한 새로운 재원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 친일 잔재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 는 상황에서 시급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행해진 일본식 지명의 정비 사업은 과거 청산 차원에서 일회성 기념행사로 행해 진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그동안 이들 자료에 대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일제 강점기 때 새로 만들어진 지명의 파악이 어려웠던 이유도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지명이 더 이상 굳어지기 전에 국가의 정체성 회복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전후 지명의 자료를 구축하고, 지역단위로 지명변천과정을 조사하고 지명의 기록관리 등을 통해 체계적인 조사와 노력 이 필요하다. 일본식 지명을 성급하게 청산 대상화해서는 그 실상을 정확하게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지명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언어 형태적 특성은 물론, 지명이 생성된 지역의 지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또한, 오색령, 박달령, 소동라령, 조침령, 양한치 등 산이나 고개와 같은 자연지명의 경우에는 지 명위원회를 개최하여 지명을 고친 후 국토교통부(국토정보지리원)에 지명의 변경을 신청해 이를 지도에 고 처 표기하고 표지석을 세우는 등 노력을 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오늘 일제에 의해 바뀐 것으로 밝혀진 지명 중 대부분은 행정구역인 마을 명으로, 이러한 마을명 은 주민등록, 등기부 등 모든 공부에 등재되어 있고, 이미 백년이 넘도록 사용해 온,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 고 고착화된 지명들로 이를 고칠 경우 많은 비용과 함께 실익보다는 혼란이 더 클 수도 있으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지명에 대한 근원, 정체성을 찾아 주민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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