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대

Ⅱ. 歷史的인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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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35회 작성일 2014-06-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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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구는 누·정·대 가 인간이 자연 속에 잠시 머물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서 산수유람(山水遊覽)의 거점 역할 을 했다는 것을 찾기 위해 우선 역사적인 기록부터 고찰하 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정·대 가 언제 어느 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는지는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누정에 관한 기록은 신라 소지왕(炤知王)10년(488년)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擧動〕하였다는 것이『삼국유사』 와『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그러나 누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보다 조금 앞선 475년의 일로 백제 개로 왕(蓋鹵王)때 궁실,누각,대사를 장려하게 지었다는 기록 이다.누각의 기록이13년 앞선다고 해서 누각이 먼저 있 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 보다는 누각과 정자가 기록 보다는 먼저 앞선 시대에 있었을 가능성이다. 백제시대의 주택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고구려 부경(桴京)등의 예로 475년 이전에 누각과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누각과 정자는 다양한 양식 으로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 들어서서 더 욱 한국의 양식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누각은 고을 수령이나 관찰사가 만들었고, 정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가 훼철되는 이유는 누각과 정자의 건물 구조가 고상 식(高床式)인 까닭에 비바람에 약해 자연적으로 쉽게 쇠진 되는데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임 진왜란,정묘호란,6.25한국전쟁 등의 전란으로 인한 피해 가 많았고 특히 일제강점기를 통한 사회적 변화는 누각의 경우 가장 큰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안계복 교수 홈페이지)

 

조선 세조9년(1463년) 9월 3일(기미)에 “공조(工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여러 도 여러 고을에 누각을 짓지 말라” 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11책 31권11장A면),이는 수령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누각을 지어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등 풍류에만 빠져 있음을 걱정하여 전국 각도 각 읍에 누각을 짓지 못하도록 영을 내렸다는 기록과, 조선 성종 12년(1481년)6월25일(무진)에 중국 사신들의 폐단이 우려되어 한강변에 지은 정자들을 일체 헐어없애뒷 날의 폐단을 막게 하였다.

 

우리지역의 누·정·대 로는 신라 문무왕 671년에 의상대사 가‘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관음보살을 친견한해안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전설로 보아 신라시대에 이미‘낙산사’ 와 함께‘의상대’가 존치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외『여지도서』에 관음굴 남쪽으로 바다에 붙어있어 매우 가파른데 의상이 지내던 곳이라 한다.『대동지지』에 관음 굴 옆에 있어 동쪽으로 창해를 조망할 수 있다.라는 기록 들과,송강 정철(1580년)의 관동별곡 중 의상대 기문에 나 타난 다수 자료에 의하면 18세기 이전에 의상대가 있었다 는데 이의가 없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