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6호

襄陽獐里와“校界岩刻文”의 關聯性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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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20회 작성일 2015-06-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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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발표 ●

襄陽 獐里와“校界岩刻文”의 關聯性 硏究

이규환(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Ⅰ. 序言

. 獐里의 由來

. 노루의 生態

. 禁標·校界의 岩刻文 考察

Ⅴ. 맺는 말

  

 

 

 

 

 

襄陽 獐里와 “校界岩刻文”의 關聯性 硏究

이규환(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Ⅰ. 序言

 

장리(獐里)의 명칭에 관한 기록은『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장동(獐洞)” 우리말로는 “노루골”이라 기록되어 있고,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 “부연산봉산북지장동(釜淵山封山北至獐洞)”이라 한 것으로 보아 “장동(獐洞)”마을 칭호는 일제강점기부터가 아니라 18세기 이전부터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의 자연환경은 앞쪽으로는 주문진읍 부연동(釜淵洞)계곡에서 발원하여 법수치리·원일전리를 거쳐 양양읍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뒤쪽으로는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정족산(鼎足山)줄기에 둘러싸여 산세가 비교적 험준하고 경사면이 급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며, 산세로 보아 노루나 산양 등 산짐승들이 서식하기에 걸맞다고 사료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루사냥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부터 수렵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유리왕 2년(기원전 18)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민중왕 3년(46)에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기사에 “태조가 화살 한 개로 노루 두 마리를 사냥하다.”와 연산군실록기사에 “입으로 소리를 내어 노루와 사슴을 잘 잡는 산간고을 사람을 올려 보내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양양도호부의 토공(土貢)편에 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 등이 기록되어있다. 효종실록기사에 “함경도 회령(會寧)과 종성(鐘城) 두 고을에 두만강을 건너온 노루가 수없이 많아 거주민들이 손으로 잡아먹기도 하였다.”란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들어 자연보호운동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는 역사기록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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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을 출간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2) 卷第十三 高句麗本紀 第一> 瑠璃王> 二年秋九月 西狩獲白獐

3) 卷第十四 高句麗本紀 第二> 閔中王> 三年秋七月 王東狩獲白獐

4) 태조 1권총서 53번째 기사

5) 연산 56권 10년 12월 10일 (병인) 5번째 기사

6) 地理志 / 江原道 / 江陵大都護府/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토공(土貢)은 꿀·밀[黃蠟]·잣·호도·북나무충영·지초·석이·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대구·문어·상어·연어·전복·홍합·숭어·상멱·자리·시우쇠요,

7) 효종 3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2월 5일(무자) 3번째 기사

 

 

는 숙종 11년(1691년)의 변산금송절목(邊山禁松節目)과 정조 12년(1788년)에 송금사목(松禁事目)의 규정을 제정 소나무 보호 육성에 힘썼다.

반면 야생동물보호와 관련한 시책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성종 1년 4월 17일 기사에 “사노(私奴) 구질금(仇叱金)이 노루를 바치니 상을 주고 이후 산 짐승을 사사로 바치지 말도록 하다.”라 하였고, 성종 1년 8월 25일 기사에 “후원에 있는 노루와 사슴을 경릉(敬陵)에 방목하도록 명하다.”와 성종 1년 9월 16일 기사에는 “후원의 노루와 사슴을 놓아주도록 명하다.”란 역사기록들이 있다. 이로보아 조선 성종(成宗)은 동물애호심이 역대 어느 임금 보다도 강하였던 임금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013년부터 양양문화원주관으로 향토사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양양지역을 대상으로 금표 암각문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총 6개소(서면 2개소, 현북면 4개소)인 것으로 밝혀졌다. 금표 암각문 대부분은 문서로만 확인되었지 현장답사 중에는 한건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산촌지역 주민숙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구 파헤쳐 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는 것을 현지주민의 증언을 통해 알았다.

또한 금번조사과정에서 놀라운 성과라면 “교계 암각문(校界岩刻文)”발견이라 하겠다. 당초 주민제보와 사진자료를 확보할 때만 해도 막막한 상태에서 발굴대상 현장에 도착하였는데 세월교 가설공사와 홍수로 인해서 암석이 싸여있어 허탈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싸인 암석을 하나하나 치우고 바위에 싸인 흙을 물로 닦아내는 순간 또렷한 “교계암각문(校界岩刻文)”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교계 암각문(校界岩刻文)”의 낱말과 뜻을 찾기 위해 학계·언론계·전문가 등에 문의한바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양양군에서 교환근무를 하고 있는 중국 후베이성 공무원에 까지 물어보았으나 중국어사전에 교계(校界)란 단어와 뜻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 양양문화원 향토사 연구원들은 교계(校界)와 관련한 낱말과 뜻을 찾는 과정에서 교렵(校獵)이란 낱말을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서 찾았다. 그 뜻은 “짐승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말뚝을 치고 사냥을 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조선왕조실록·중국고전·한문사전 등을 중심으로 교계의 낱말과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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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선 정조 12년(1788년)에 소나무를 보호, 육성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집. 

9) 성종 4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4월 17일(을축) 8번째 기사

10) 성종 7권 1년 8월 25일 5번째 기사

11) 성종 7권 1년 9월 16일 4번째 기사

 

Ⅱ. 獐里의 由來

옛날에 이 마을에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하여 장리(獐里)로 칭하였는데 속칭 “노루골”이라고 한다. 또한 뱃터말[舟基洞] 근방에 겨울에 눈이 내려도 항상 눈이 녹아 없어지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곳에 노루가 자주 머물다 가는 좋은 터에 “장흥사(獐興寺)”라는 절을 지었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고도 전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 때 당산동·연화동·주기동을 병합하여 장리라 한다.

 

Ⅲ. 노루의 生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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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몸길이는 135㎝, 뒷다리의 길이는 36.5㎝, 귀의 길이는 12.7㎝이다. 여름철의 털 색깔은 황갈색 또는 적갈색을 띠고, 겨울털은 점토색(粘土色)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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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치리 소나드리 노루> 

 

겨울털에는 엉덩이의 백색 반점이 크다. 윗입술의 자반[髭色斑]은 없고, 아랫입술에는 지극히 작은 암색(暗色) 반점이 있다.

노루는 고산·야산을 막론하고 우리나라 전역의 산림지대에 서식하는데, 다른 동물과 습성이 다른 점은 겨울철에도 양지(陽地)보다 바람만 심하지 않으면 음지(陰地)를 선택하여 서식하는 것이다.

노루가 음지에 사는 것은 그 체질의 천성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등에가 초가을에 노루 피부에 알을 품어 겨울철에 피하에서 자란 유충이 양지바른 곳에서 활발히 움직이기 때문에 노루는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음지를 찾게 된다.

노루의 짝짓기는 10월에 이루어지며 교미 후 즉시 임신되는 것이 아니라 정자가 일정기간 암컷의 자궁에 붙어 있다가 생육조건이 맞으면 수정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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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

13) 등엣과, 노랑등엣과, 동애등엣과, 재니등엣과 등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파리와 비슷하고, 몸빛은 누른 갈색으로 흉부, 복부에 털이 있으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는 착상(着床)지연현상을 갖고 있는 동물이며 총 임신기간은 290일 이나 이중 150일은 착상지체기간으로 본다.

서식장소(棲息場所)는 초목이 우거져서 숨을 곳이 많은 10월경까지는 산 중턱 이하에서 서식하고 겨울이 되면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12월 하순부터는 먹이 때문에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다음해 4월이 되면 암컷은 새끼를 낳기 위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5월 단오를 전후하여 한배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생후 한 시간이면 걸어 다닐 수 있다하는데 2∼3일이 지나면 사람이 뛰는 힘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야생에서 수명은 10∼12년이고 최대는 17년 정도이다.

노루는 원칙적으로 일부일처(一夫一妻)제로 만약 짝이 포수에게 잡히면 짝 잃은 노루는 그 근처를 떠나지 않고 수일간을 울며 돌아다닌다고 한다. 한번에 6∼7m를 뛸 수 있을 정도의 빠른 질주력을 가지고 있어서 적의 추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적이 보이지 않으면 정지하여 주위를 살펴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Ⅳ. 禁標·校界의 岩刻文 考察

 

1. 禁標 岩刻文

 

1) 槪 要

금표는 일정한 구역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경고등을 나타낸 표지(標識)로서, 넓은 뜻으로는 금송(禁松)·금줄 등도 포함되고 있다.

금표(禁標) 또는 봉표(封標)에는 사찰이나 태봉(胎封)등 신성하고 권위 있는 구역을 막는 것, 유배지에 임의로 출입을 금하는 곳, 좋은 재목을 마련하기위하여 지정된 숲의 출입을 금지 하는 곳, 사냥을 하는 구역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 산삼을 임의로 채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중요시하여 이를 손상시키는 일을 금지해 왔으며, 또 자연환경을 보존한다는 뜻에서 가축을 함부로 놓아기르거나 재를 아무데나 버리는 자를 처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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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포유류의 수정란이 자궁벽에 붙어 모체의 영양을 흡수할 수 있게 되는 현상

 

 

2) 禁標의 分包

양양지역의 금표분포실태조사(禁標分包實態調査)는 2013년부터 양양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향토사연구원들이 기존에 확보한 문헌과 구전자료를 바탕으로 탐문 및 현장실사를 하였다. 총 6개소인데, 서면 2개소[오색리 금표, 갈천리 전림산황장봉산금표(箭林山黃腸封山禁標)]와, 현북면 4개소[장리 금표(淵山自北界七十里), 원일전리 금표, 어성전리 금표, 법수치리 금표]이다.

고문헌의 기록에 조선시대 18세기에 군국사무(軍國事務)를 관장하던 비변사(備邊司)에서 만든 양양부(襄陽府)의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와 조선의 지리학자인 ‘김정호(金正浩)’가 19세기에 편집한『大東地志』토산편(土産編)에「황장봉산이처(黃腸封山二處)」“황장봉산 두 곳이 있다” 라고 기록한 현북면 법수치리 일원의 “부연산황장봉산(釜淵山黃腸封山)”과, 서면 갈천리 일원의 “전림산황장봉산(箭林山黃腸封山)”은 자료를 편집한 시기만 다를 뿐 같은 내용으로 보여 진다.

문제는 금표실태조사결과 현존하는 금표(禁標)는 한곳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부수립이후 개발붐이 일면서 산촌지역의 주민숙원사업 해소차원에서 제방·암거·농로 등 시설물들의 기초 작업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고 당시상황을 생생히 전해준 현지주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문헌들은 위의 고문헌『대동지지(大東地志)』와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외에 강원대학교에서 발간한 『박물관지(博物館誌)』에 소개되었던 장리 금표[淵山自北界七十里]와, 1996년도까지 보존 되었던 현북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의 금표, 원일전리 및 어성전리에 소재하고 있었던 금표(원일전리 거주 박상우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자료 2건), 서면 오색리 금표암(禁標岩)이며 읍면지역별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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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박봉우는 『숲과 문화 연구회』논문에서 黃腸과 관련된 용어를 정의하고 전통시대에 禁松政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禁山은 국가적으로 필요에 의하여 목재자원 특히 소나무를 배양하기 위하여 가꾸는 산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황장목은 우리나라의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부분이 누런색을 띄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그 심재부를 취하여 조제한 목재는 주로 왕실의 관을 만드는 梓官用으로 쓰이고, 각 도에서는 주로 兵船의 제조 및 수리에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禁山은 숙종 25년(1699년) 이후부터 封山으로 개칭되어 소나무를 배양 육성하였다.

16) 오색리 금표암에 관한 자료는 “표준 지명 사용에 관한 건(국무원 고시16호)”을 1961년 4월 22일 관보에 고시하였는데 금표암의 경위도는 128°25′-38°05′이다. 금표교를 가설하면서 교량 명을 금표교로 하였고 현재사용중인 우리나라 전도에 금표암과 금표교량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1) 五色里 禁標

오색리 금표는 양양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서면 오색령 뱡향으로 오르다보면 서북주능선의 석고덩굴 골에서 발원하는 물과 오색령 정상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금표교(禁標橋)이다. 이 다리의 인접지역에 예전부터 해가지면 고개를 넘지 말라는 경고의 뜻으로 금표가 있었다고 한다. 백과사전에 수록된 한계령(寒溪嶺)에 대한 글을 살펴보면 글 내용은 우리정서와는 맞지 않게 편성한 부분이 많다.

높이 1,004m.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과거에는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 설악산이라 하고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했다. 고개의 이름은 한계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양양군에서는 오색령.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도 했으며, 양양군 사람들이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산도둑이 들끓어, 해가 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의 길목인 양양군 서면 오가리의 길 옆 바위에 금표라고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곳에 바위가 있으며, 한계령에 오르는 길에는 금표교가 있다.

남동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오색천은 많은 지류를 합류하며 계곡과 폭포를 이루고 동해로 유입하는 남대천에 흘러든다. 서북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 또한 일대 계곡을 형성하면서 소양강 상류를 이루는 북천으로 흘러든다. 내설악은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아름답지만, 내륙 깊숙이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등산객 외에는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1971년 한계령을 지나는 44번 국도인 한계령도로가 닦이고, 설악산 및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에 대비하여 1981년 인제군에서부터 양양군과 속초시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확장, 포장됨으로써 설악산의 북쪽으로 돌아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던 자동차들이 이 고개를 이용하게 되었다. 한계령도로를 따라 옥녀탕·대승폭포·장수대·소승폭포·여심폭포·십이폭포·발폭포·오색온천·오색약수·선녀탕 등의 명승지가 이어지며, 서쪽 기슭 안산의 남쪽 사면에는 한계산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도로는 설악산을 지나기 때문에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서울에서 한계령까지는 서울-양평-홍천-인제-한계령 코스와 서울-가평-춘천-홍천-인제-한계령 코스가 있다.

 

지난 2013년 4월 4일 양양문화원직원 및 향토사연구원 등 11명이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금표교 일대 現場實事를 하였으나 금표암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2) 葛川里 箭林山 黃腸封山 禁標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 나타난 황장봉산 2곳 중 하나인 ‘전림산황장봉산(箭林山黃腸奉山)’은 서면 구룡령(九龍嶺)일대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지역도 황장목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사료되며 설악여중 손병섭 선생의 구술에 의하면 장리 부연산 금표를 집중적으로 조사할 무렵 전림산 금표는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였지만 문헌기록을 본 기억이 있었다 하나 확실한 근거자료는 접하지 못했다.

서면 황이리 이춘우(86세 전 이장)는 46번 국도를 따라 송천리로부터 갈천리 구룡령까지의 여러 마을의 지리에 밝은데 “구룡령 방향의 마을들에서 금표 표지는 못 보았다”라고 증언하였다.

갈천리에 거주하는 엄익환(77세)은 오랫동안 심마니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룡령 지리에 밝은데 “갈천리 지역은 물론 홍천 내면 명개리 방면에서도 금표 암각은 못 보았다”라고 같은 증언을 하였다.

 

(3) 獐里 禁標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원 일행(이기용, 김양식, 김재환)은 지난해(2013. 10. 22. 15:00∼17:00)현북면 장리 속칭 배터마을 입구 하천변에서 황장금표가 거꾸로 촬영된 사진(1990년 경 촬영)을 가지고 있을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당시 황장금표가 있었다고 하는 곳은 이 마을 서쪽방향에 위치한 연화동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300m지점의 배터골 개울가에 최근까지 소재하였으나 2002년 강원도 동해안을 강타한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유실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손병섭(56세)교사의『장리금표에 대한 조사보고서』의 “연산자북계칠십리(淵山自北界七十里)”라는 암각문은 문맥상으로 보면 금표라기보다는 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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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속초시 설악여자중학교 교사 손병섭(56세)은 강원대학교 박물관지 제6호(1999년)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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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인방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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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 금표〉

 

 

표일 가능성이 높다. 두 자료를 비교해보면『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의 “북지장동팔십리(北至獐洞八十里)”와 “연산자북계칠십리(淵山自北界七十里)”는 거리(獐洞八十里(-)北界七十里)로는 10리 차이가 나며, 마을명도 장동이라 하였고 암각문이 발견된 곳도 현북면 장리이다. 두 자료의 방향도 지금의 주문진 부연동에서 북쪽방향에 위치한 장리로 보아 암각문은 금표라기보다는 이정표로 보아야 한다.

 

(4) 元日田里 禁標

이 금표는 장리에서 발견된 금표 지점에서 약 5리(2km) 위쪽에 위치한 원일전리 마을 앞 하천변이다. “최초발견당시 암각문은 크게 훼손되지 않아 또렷이 볼 수 있었으나 2009년 경 새 농촌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하천정비사업을 할 때 훼손되었다.”고 원일전리 거주 박상우(78세)는 증언 하였다.

현재 박상우가 소장(所藏)하고 있는 원일전리 금표자료는 1975년도에「포토코리아」에서 책자를 간행할 당시 편집부 관계자들이 탁본하여 소개한 글이며 이 금표는 당시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암각문 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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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전리 금표〉

 

(5) 漁城田里 禁標

원일전리에 소재하고 있었던 금표 위치에서부터 어성전리 방향으로 약 5리(2km) 지점인 어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