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6호

연암 박지원과 양양의 역사문화유적지 연계방안 - 주제발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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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08회 작성일 2015-06-0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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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2]
연암 박지원과 양양의 역사문화유적지 연계방안
양언석 (강원도립대학 교수)

 

목차

 

Ⅰ. 緖論

 

Ⅱ. 시대별 문화유적

    1. 신라시대

        1) 불교

           (1) 香城寺 (2) 洛山寺 (3) 陳田寺 (4) 沙林寺(禪林院) (5) 靈穴寺 (6) 五色石寺

        2) 화랑도의 순례지와 소나무

     2. 고려시대

        1) 安軸(1282-1348)과 향교

        2) 東海神祠

    3. 조선시대

        1) 관음굴 담론

        2) 양양전통시장

 

Ⅲ. 복원해야 할 문화유적

    1. 梨花亭

    2. 襄陽都護府 官衙

 

Ⅳ. 연암 박지원과 연계하는 문화콘텐츠 활성화

 

Ⅴ.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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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緖論

 

양양은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 그리고 담론(談論)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인 시대, 양양의 문화는 우리의 기억과 삶과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聖地로,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었다. 신라의 고승인 慈藏(건평왕32, 610-태종무열왕1, 654), 元曉(진평왕39, 617-신문왕6, 686), 義湘(진평왕47, 625-성덕왕1, 702), 道義(출생연도 미상), 梵日(헌덕왕2, 810-진성여왕3, 889) 등이 향성사, 낙산사, 영혈사, 진전사 등 사찰을 창건하여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中心地 이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신라의 정책이었다. 불교를 통한 一心과 佛國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

이처럼 양양지방은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장이 되었으며, 5세기 말엽에서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영향력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양양은 신라의 영역에 편제되어 익령으로 수성군의 속현에 편제되었다.

조선조에는 왕조의 外鄕으로 양양을 부로 승격하고 특별히 관리해 왔다. 『擇里志』 山水條에 의하면 산수의 승지는 당연히 강원의 영동이 제일이다(山水之勝 當以江原嶺東第一). 『新增東國輿地勝覽』 樓亭條 形勝條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다(我東韓 山水之勝 關東爲最)

儒家사회에서 연암이 景觀祿俸錄을 언급하기 이전부터 선비와 문인들이 風光 좋은 양양을 찾아 은둔하거나, 유람하며 심회를 표현한 시와 山行記는 양양의 역사이고 문화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양양은 오랜 역사와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도시 브랜도로 이미지를 창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연암 박지원이라는 유명인물을 활용한 역사문화콘텐츠 확충방안을 제시 하고자 한다.

 

 

Ⅱ. 시대별 문화유적

 

1. 신라시대

 

1) 불교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를 수용하면서 사찰이 건립되었고, 사찰의 상징인 불전과 탑이 양양을 중심으로 건립되어 불교의 聖地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자장을 비롯하여 의상, 원효, 도의 등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은 대부분 입당구법(入唐求法)으로 중국의 선진문화와 불교로 敎化에 힘썼다. 대표적인 사찰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香城寺

진덕여왕 6년(652) 창건하였고, 효소왕 7년(698)에 소실되었다가 효소왕 10년(701)의상대사가 향성사 능인암터에 중건하고 選定寺하였다. 그 후 인조22년(6144)에 신흥사라고 하였다.

자장(건평왕32, 610-태종무열왕1, 654)이 활동했던 7세기 중반은 선덕여왕이 재위했던 시기이다. 여자가 왕위에 올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40여개 성을 빼앗기면서 위태로워졌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선덕여왕의 귀국령으로 유학 중이던 승려들이 귀국하여 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불교로 민심을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자장은 진골출신으로 조정의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를 실행하였다. 이때, 왕명으로 위협하자 “백년을 파계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겠노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승려의 꿈을 굽히지 않았다.

자장의 사상 중에 眞種說을 주장하였다. 진종설은 인도의 석가모니를 탄생시킨 왕실과 신라왕실이 같다는 신성성의 주장이다. 석가모니 종족이자 전륜성왕(인도의 이상적인 정복군주)이 다스리는 신라사회는 현재 부처와 보살이 머무르는 신라불국토설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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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규대, 양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 박문관, 1994, P27

2) 『新增東國輿地勝覽』

본래 고구려 翼峴縣인데(伊文縣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翼嶺이라 고쳐서 守城郡의 屬縣이 되었다. 고려 顯宗 때 縣令을 두었다. 高宗 8년(1221)에 거란군사를 방어한 공이 있다고 하여 읍호를 襄州로 하고 防禦使를 파견하였으나 고종 44년 적에게 항복하여 德寧으로 읍호를 바꾸고 강등하여 監務를 두었다가 元宗 원년(1267)에 다시 양주로 회복하고 知襄州事를 파견하였다. 본조 太祖 6년(1397)에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府로 하였으며 太宗 13년(1413)에 예에 따라 都護府로 하였고, 태종16년(1416)에 지금의 명칭인 襄陽으로 고쳤다.

 

 

이러한 사상으로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상주처이고, 설악산을 雪山이라고 명칭한 것(영혈사, 억성사, 오색석사)은, 설산이 석가모니가 득도한 신성한 장소로 자장에서 비롯되었고, 설산(설악산)의 지류인 오봉산의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상주처가 되었고, 신라시대 양양을 불교 聖地의 토대로 만든 것이 자장이다.

양양지역은 불국토사상과 호국불교사상으로 불교의 성지로 확인되어 화랑도와 승려들의 중심수련장과 순례지가 되었다.

 

(2) 洛山寺

671년(문무왕11) 의상이 관음보살을 親見하고 낙산사 창건하였고, 그 후 범일선사가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 모셨다.

문무왕이 대당전쟁을 승리하고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경주의 王城을 새롭게 하고자 의상에게 묻자 의상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성곽을 새롭게 하여 화려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政敎를 밝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자 왕은 이에 공감하여 역사를 그만두었다.

이러한 의식에서 의상은 변방의 양양지역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인식하여 성지로 정착하고자 낙산사를 창건하였고, 이 지역을 불심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해용왕에게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은 설정은 불교의 성지임을 확인하고 있다. 변방이지만 군사적이고, 교통 중심인 양양을 중심으로 불국토 사상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이 가능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통일 후에도 불교를 신앙체계로 하여 변방의 기층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어 신라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우수한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의 관음보살 상주처를 확인하고자 찾아온 원효가 낙산사에서 비찬한 시련을 겪게 된다.

낙산사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고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가 또다시 가다가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했다. “휴제호(休醍醐), 화상아!”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아래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이에 원효는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는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떠났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자, 원효는 그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던 곳을 냉천이라고 한다.

이 냉천을 문화유적으로 활용하면 흥미로울 수 있다.

의상과 원효는 동학이면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루면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왕실에서는 원효의 자율적인 사상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위해 의상의 체계적인 사상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은 당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의 제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화엄교학을 펼쳤다.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경전 중심의 교종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통해 마음과 마음으로 도를 계승하는 선종이 중시되었다. 이 선종이 도의에 의해 진전사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양양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과 조계종의 개시조인 도의선사가 개창한 진전사가 불교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일연국사가 저술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과 원효의 담론과, 조신전, 그리고 범일선사의 정취보살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된 것은 일연국사가 낙산사에서 가까운 진전사에 출가하여 직접 들었던 연유로 보인다.

이처럼 양양의 불교는 신라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그 활용가치는 무한하다. 불교의 성지순례로, 그리고 낙산사의 조신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그 가치와 소설사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가치도 활용 하여야 한다.

 

(3) 陳田寺

창건 년대 미상으로 道義선사가 창건하였고, 九山禪門 중 迦智山門의 개시조이다. 그리고 일연스님 14세에 진전사로 출가하였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 『조당집』 권17에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전(도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고, 북한군인 이었다. 임신하기 전 그의 아버지는 흰무지개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어머니는 한 승려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부모들은 반드시 聖子를 얻을 꿈이라고 하였는데 임신한지 39개월만에 도의가 태어났다. 출생하는 날 아침에 異僧이 錫杖을 짚고 문 앞에서 “금일 낳는 아기의 태를 강과 산으로 첩첩이 둘러쌓인 곳에 묻어라”하고 사라졌다. 이에 태를 묻으니 큰 사슴이 와서 지켰는데 해가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아도 해칠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상서로움으로 법호를 明寂이라 하였다.

建中 5년(선덕왕5, 784)에 당나라에 입당하였다. 곧바로 오대산에 들어가 文殊의 감응을 받았는데 허공에서 聖鐘의 소리를 듣고 산 속에서 神鳥가 높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廣府의 寶壇寺에 머물면서 구족계를 받고 曹溪에 가서 祖師堂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하자 갑자기 문빗장이 저절로 열렸고 예배를 세 번 드리고 나니 저절로 닫혔다. 그로부터 江西 洪州의 開元寺에 가서 西堂智藏(735-814)을 참문하고 의문점이 해결되고 막힌 체증이 풀리게 되었다. 지장이 그를 맞이함이 마치 石間에서 美玉을 줍는 듯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내는 듯하여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그 누구랴”라고 말하고 법명을 道義라고 고쳐주었다. 이에 頭陀의 길을 떠나 百丈山 悔海和尙(749-814)의 처소를 찾아가 서당에게하는 것과 똑같이 하니 백장이 탄복하여 江西(馬祖 道一)의 禪脈이 모두 東國으로 돌아가는 구나“ 라고 하였다. 신라의 선승들은 거의 마조도일의 제라로 서당지장과 백장회해도 마조계의 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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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증동국여지승람』냉천(冷泉) - 오봉산 아래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관음보살이 여자로 변해서 벼를 베고 있는데 원효대사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웃으며 농지거리를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관동읍지, 『현산지』냉천_ 부 북쪽 15리 오봉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덕녀로 변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원효대사와 냉천의 물을 마시면서 함께 실없이 말로 농지거리를 하였다고 한다. 鄭樞의 시에“덕녀의 옛터엔 잔디가 섬돌을 덮었고 원효의 남긴 자리에는 나무가 하늘에 연했네”하였다. 

 

 

37년 정도 중국에서 보내고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의 심인을 전해 받은 도의는 헌덕왕 13년(821)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교종에 의해 불교계에서 魔語라고 배척 받으며 북산(설악산)에 은거하여 산문을 열고, 법을 廉居禪師(?-884)에게 전하였다.

雪山 億聖寺에서 조사의 심인을 전하고, 도의의 가르침을 펴다가 普照禪師 體澄(804-880)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염거가 설산 억성사에서 행화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참문하여 조사의 심인을 얻었다.

체징은 희강왕 2년(837)에 입당하여 문성왕 2년(840) 귀국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창하여 도의의 선풍을 계승하였다. 그의 비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선문은 제1은 도의이고, 제2는 염거, 제3은 체징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마조도일의 영향으로 원적도의ㅡ염거ㅡ보조체징ㅡ 백장회해로 법을 이어 왔다.

진전사지와 3층석탑, 석조부도, 불좌의 중대석 및 많은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도의가 진전사를 개창한 이후, 가지산문의 토대가 되었다. 의상은 낙산사를 중심으로 낙산사에서 화엄사상을 널리 선교하였지만 신라 말부터 고려조에 도의가 진전사를 창건하여 선종사상을 선교하였다.

普覺國師 一然(1206-1289)은 충열왕 9년(1283) 국사에 책봉되어 불교계의 상징이었다. 일연국사가 진전사로 출가한 것은 역사적인 사상사의 흐름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양지역은 신라 불교문화의 중심축으로 군사적, 교통적 중심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국가적인 관심을 갖고 관리해 왔다. 변방이지만 삼국통일과 통일 후 중심지로서 의상이 귀국하여 처음으로 양양에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것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통해 민심을 일심으로 하여 중앙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의상이후 원효가 다시 불교의 성지로 확립하였다. 그리고 조신전은 깨달음의 공간으로 승려들에게 구도적인 의미와 양양인에게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강화하였다.

도의는 당에서 유학하여 중국선종을 수용하여 진전사를 개창하여 선종의 개창자로 추앙 받고 있다.

진전사에서는 선종의 개시처로, 그리고 일연국사와 『삼국유사』를 통한 학문적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4) 沙林寺(禪林院)

사림사는 애장왕 5년(804)경 창건 되었고, 황이리 미천골에 있었던 사찰로, 후에 억성사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선림원을 창건한 弘覺선사의 비가 억성사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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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億聖寺

廉居화상이 道義에게 법을 이어 이곳에서 머물면서 보조 體澄에게 법을 전수하였고, 홍각선사 비가 있다.

 

 

貞元 20년 갑신(804) 3월 23일 當寺의 종이 만들어졌다. 古尸山郡 仁近 大內末과 紫草里가 시납하신 古鐘은 쇠 280廷과 當寺 고종 의 쇠 220廷으로 토대로 삼아 十方의 旦越(檀越)들을 권하여 이루었다. 기원하는 것은 法界有情이 모두 佛道에 이르러 감이다. 서원할 때, 들으신 님은 信廣夫人이다. 上坐 令妙寺의 日照和尙이고, 당시 감독(時司)은 元恩師고, 종을 만드는 伯士(기술자)는 당사 覺智師, 上和尙 順應和尙, 良惠師, 平法?, 善覺師, 如於?, 宣司 禮覺師, 節唯乃 同說이다.

선림원 종은 고시산군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한 고종과 당사의 고종인 500정으로 건립하였다. 고종이라는 표현에서 이 절은 804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만들 때, 참여란 인원을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화상인 순응은 의상의 제자인 神琳의 제자이다. 혜공왕 2년(766)입당한 인물로, 애장왕의 지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한 화상이다. 순응이 선림원에서 있었던 이유는 의상과의 관계로 보아진다. 당시 당이나 신라의 불교계의 경향은 화엄종에서 선종의 영향으로 교선일치의 경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엄종의 승려이면서 선림원에서 선종을 받아들였던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선림원 종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기록을 고찰해 보면 이 시기에 양양을 중심으로 교종에서 선종으로 사상적 경향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불교가 선림원은 홍각선사 利觀(813-880)이 창건하기 보다는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선승이었던 홍각선사는 억성사의 염거화상과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순응은 화엄종의 승려이면서 당에 유학하여 의상의 직계제자인 神琳에게 牛頭禪을 익혔다.

홍각은 해인사에서 화엄학을 배우다가 가지산문으로 나가 선승이 되어 선림원에 비문에 세워졌다. 이처럼 신라 하대의 화엄학 중심에서 선종의 세계로의 흐름이 양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선림원의 존재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부도(보물 447호), 석등(보물 445호), 삼층석탑(보물 444호)로 보아 규모와 역사를 인지할 수 있다.

사림사비_부 서쪽 30리 사림사 遺墟地에 있다. 石碑는 김시습이 王羲之體의 글자를 모아 弘覺禪師를 찬한 것이다. 비의 자체가 매우 오래되고 훌륭하여 보물로 삼았는데 중년에 들불로 불에 타게 되었다. 일찍이 남은 돌조각을 府中에 두어 남게 하였다.

 

(5) 靈穴寺

신라 신문왕 9년(689) 기축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조선 숙종14년(1688)무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왕 16년(1690)경오에 절의 중 聚遠이 중건하고 영천사로 개칭하였다. (절 서쪽에 영천이 있다) 고종 18년(1881) 信士 김중욱이 중수하고 다시 영혈사로 이름 하였다.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설악산 관모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원효가 낙산사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와서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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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沙林院鍾名,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6) 최치원비문

7) 『관동지』

 

 

(6) 五色石寺

서면 오색리 있었고, 成國寺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찰에는 朗慧和尙碑文이 보인다. 비문에 의하면 雪山 오색석사로 되어 있다. 조당집권 17에 無染傳에도 기록이 보인다.

성주산문의 낭혜 무염(880-888)은 12세인 헌덕왕 3년(811)에 오색석사에 출가하였고, 스승인 法性선사에게 법문을 배우고 浮石寺의 釋登대덕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법당지와 층계난간석, 3층석탑, 석사자, 연화대석, 석탑기단 등이 전해 오고 있다.

교종사찰: 낙산사, 관음굴

선종사찰: 선림원, 진전사, 억성사, 오색석사

활동한 스님: 자장, 의상, 원효, 범일, 도의, 염거, 홍각,

양양의 불교는 처음에는 관음보살의 상주터로 의상의 화엄종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불교의 성지가 되었지만 도의선사 이후 가지산문의 선승들이 선교하여 선종의 성지가 되었다.

 

2) 화랑도의 순례지와 소나무

요즈음 길의 명칭이 유행하여 해파랑길, 둘레길 등이 있다.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 들이다. 동해안의 길 명칭은 양양에서는 순례길로 명 했으면 한다. 신라 화랑도가와 승려들의 국토순례가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랑도의 교육방법은 1.道義相磨, 2.歌樂相悅, 3. 遊娛山水이다.

 

在昔誰家子 옛날 어느 집안 자제들

三千種碧松 삼천 명이 푸른 소나무를 심었던가

其人骨已朽 그들의 뼈는 이미 썩었건만

松葉尙이容 그 잎은 지금도 푸르네

 

황장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양양은 소나무의 고장이다. 이 소나무는 신라 화랑도가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화랑도가 소나무를 심었을까. 이는 소나무가 화랑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을 후대 선비들에 의해 맥을 이어 왔다. 화랑과 선비들의 상징인 이 소나무를 양양의 가로수를 심는다면 백년 후 쯤 양양은 새롭게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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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원도지』

9) 『孤雲集』 권2 碑

무염 화상 비명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無染和尙碑銘 竝序 奉教撰 下同〕

-생략-

마침내 설산(雪山)의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입은 불경의 약 맛을 보는 데에 정통하였고, 힘은 터진 하늘을 기울〔補天〕 만큼 왕성하였다. 법성 선사(法性禪師)는 일찍이 중국에서 선종(禪宗)인 능가종(楞伽宗)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는데, 대사가 몇 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면서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이 모두 탐색하였다. 이에 법성이 탄식하면서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다〔迅足駸駸 後發前至〕는 말을 내가 그대에게서 확인하였으니, 나는 흡족하기만 하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팔 남은 용기〔餘勇可賈〕가 없으니, 그대와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을 하니, 대사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생략-

 

 

2. 고려시대

 

1) 安軸(1282-1348)과 향교

안축이 양양향교를 건립하면서 양양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안축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양주공관의 시운을 따라서

 

이름 있는 길 가는대로 앞길은 기약 없고

이 누각에 오간지 벌써 두 해다 되었네

난간 덮은 대 숲에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고

문을 가린 용나무는 푸른 연기 흔드네

백성 일 두루 보고 내 나라 걱정하니

헛되이 임금 은혜 저버려 하늘에 부끄럽네

졸렬한 계책 아직 이로운 길 일으키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여 계곡의 샘물같이 좋은 생각 연 이으리.

 

존무사로 온지 2년이 지나 양양공관에 머물며 지은 작품으로 환로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도모하지 않고, 공관의 누에 올라 심회를 노래하고 있다. 목민관으로서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며 임금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양양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이 졸렬하다며 부족함을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좋은 계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자신의 심회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양양에 향교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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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謹齋全書』

11) 『謹齋全書』

* 「襄陽新學記」

관동은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한데 양양이 그 가운데 위치해 있다. 그 빼어난 정기와 맑은 기운이 반드시 헛되이 축적함이 없다. 백여 년 동안에 뛰어난 재주와 덕이 있는 선비가 이 고을에서 나서 인륜을 상서롭게 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 했다. 이는 산수의 기운이 영험 없어서이지 고을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이 고을은 예부터 국경에 인접하여 변란이 자주 일어났고 학교에서 도를 닦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국토가 통일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 하게 되었으니 성학이 거듭 자제가 날마다 번성하니 마땅히 학교를 세원 인재를 양육하여야 할 것인데 이 고을에 부임하는 관리는 오직 문서를 닦는 것을 급하게 여겨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 어찌 고을 사람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고을에 와서 옛일을 아는 늙은이에게 들으니 고을 북쪽에 마을이 있어서 文宣王洞이라 하니 틀림없이 옛날 학교가 있었던 터이며 폐허가 되어 오래된 것이라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즉시 고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곳에 학교를 짓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뜻이다”하고 기쁨으로 수고하는 것도 잊었다. 이에 과거 동기생인 통주수정랑 진군(通州守正郞 陳君)에게 부서(符書)를 보내어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사가 시작되자 고을 수령 정랑 박군이 부임해 왔는데 박군은 또한 글하는 선비 상문의 아들이다. 실상은 그의 힘으로 내 이루었으니 이 어찌 고을 사람들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대저 땅의 기운이 쇠하여 오래되면 그 왕성 하는 것도 빠르고 축적된 것이 오래되면 발하는 것도 성하나니 이제부터 집에는 재주와 학문이 있는 손자가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산수의 수치를 씻을 수 있다는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거칠고 소략하여 공사에 빠진 점이 있으니 바라건대 뒤에 오는 군자는 한번 눈 여겨 보아 주기를 바란다.

 

안축의 양양신학기는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강원도 존무사로 와서 양양에 향교를 세운 것은 양양문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역사적으로 황폐화된 시기이다. 산수가 아름답고 수려하지만 백여 년 동안 재주와 품위 있는 선비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방이라 변란이 자주 일어나 배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존무사 안축의 생각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면 집에 재주와 학문 있는 손자가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한 풍속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양양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고을마다 미풍양속이 전해오고 있다.

안축의 관동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00여년 앞선 작품으로 안축의 선양사업 중에 관동별곡도 주목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양양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2) 東海神祠

양양의 동해신묘는 역사성과 정체성을 위해 동해신사로 정정해야 한다. 신묘는 신사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신사는 황해도 풍천의 西海神祠, 전라도 나주의 南海神祠와 함께 우리나라 三海의 海神에게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웠했던 곳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왕이 친히 향과 축을 보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元宗元年 陞知襄州事 別號襄山 有東海神祠

名山雪嶽 在府西 新羅時爲小祀 東海神祠堂 在府東 春秋降香祝 致祭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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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東邑誌』

文廟- 부 서쪽 3리에 있다. 大成殿 9간, 東西廡 각 6간, 神門 7간, 奠祀廳 3간, 東西齋 각4간, 明倫堂 14간, 祭器庫 1간 書籍庫 1간

12)『謹齋全書』 「관동별곡」

-생략-

설악산의 동쪽, 낙산의 서쪽에 빼어난 양양의 경치

강선정, 상운정,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구나

자줏빛 봉황새와 붉은 난새 타고 내려오는 우아한 신선들

아! 붉은 거문고 다투어 타는 광경 그 어떠 합니까

옛 고양땅 술꾼들 객사는 연못가에 늘어서 있으니

아! 사계절 놀아 봅시다.

-생략-

雪嶽東 洛山西 襄陽風景

降仙亭 祥雲亭 南北相望

騎紫鳳 駕紅鸞 佳麗神仙

爲 爭弄朱絃景 幾何如

高陽酒徒 習家池館

爲 四節 流伊沙伊多

13) 지현병 외, 양양 동해신묘, 강릉대박물관, 1999, P13

14) 『高麗史』 卷58, 志, 第12, 地理3, 翼嶺縣

15) 『世宗實錄』 卷153, 地理志, 襄陽都護府

 

 

동해신단: 동쪽 13리에 있다. 고려 때 동해이므로 中祀에 실려 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동해묘: 부 동쪽 10리 바다 가에 있다. 正殿 6간, 신門 3간, 奠祀廳 2간, 東西齋 각 2간, 百川門 1간으로 매년 초에 別祭를 지내고 2월,8월 常祭를 지낸다. 향과 축은 모두 서울에서 내려온다.

동해묘: 부 동쪽 10리 바닷가에 있다. 창건 연월을 기록으로 밝힐 만한 것은 없으나 매 초봄에 별제를 御諱(임금의 이름)로써 친히 향축을 내려 지내는데 일의 형편에 따라서 존중하고 중시 하였다. 여러 산천의 제사의식이 더욱 요원하게 되었다. 별제를 2월과 8월에 하고 또 상제도 있다. 경종 2년(1722) 임인에 부사 채팽윤이 중창하였고, 동해묘와 백천문 등의 편액도 채팽윤의 글씨이다. 지금의 임금 임신년(영조 28년-1752)에 부사 이성억이 또 새로 지었다.

 

동해신사: 군 동쪽에 있다. 봄가을로 향축을 내여 제사 지낸다.

 

동해신사(東海神祠): 봄가을 降香使가 내려와 致祭를 한다.

 

오늘은 바다가 생명의 중심으로, 인류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수협이나 해양관련 정부부처와 함께 해양축제로 발전시켰으면 한다.

 

 

3. 조선시대

 

1) 관음굴 담론

우리 翼祖께서 貞淑王后와 함께 여기에 와서 후사를 점지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은 善來이다. 하였다. 얼마를 지나서 조도가 태어나니 선래라 이름 하였다.

아들 낳는 신성한 장소로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흥미를 활용하였으면 한다.

 

2) 양양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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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新增東國輿地勝覽』

17)『關東誌』

18)『峴山誌』

19)『江原道誌』

20) 『輿載撮要』

21) 『新增東國輿地勝覽』

 

 

 

Ⅲ복원해야 할 문화유적

 

1. 梨花亭

 

삼천 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雲垂雪嶽三千丈

구만 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 月湧東溟九萬尋

이화정 위의 오늘 가진 이 모임에 今日梨花亭上會

한 가락 아양곡은 고인의 마음이어라 峩洋一曲故人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 멀리 이화정이 있거니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유흥이 절로 난다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낙산기유(洛山記遊)로 암 노석(嵒老釋)에게 주다

 

설악산 높아높아 창공에 꽂혔으니                                               雪嶽之山高揷空

일만 옥이 다투어 푸른 놀에 솟았구려                                        萬玉爭聳靑霞中

한줄기 꿈틀거려 오봉을 지어내니                                               蜿蜒一脈作五峯

바다 위에 금부용이 우뚝이 빼어났네                                         海上秀出金芙蓉

영도는 암암리에 보타와 어울려라                                               靈圖暗與寶陁合

유궁은 예부터 원통이 장엄하이                                                  幽窟自古莊圓通

용천팔부들이 법종을 베푸니                                                        龍天八部設法從

백호(白毫)는 빛을 내쳐 동쪽 바다 비추네                                 白毫光照滄溟東

금산의 장로는 부처님의 후신이라                                              金山丈老佛後身

석장 짚고 여기 와서 이궁을 얻었다네                                       一錫來瞰得異宮

백의의 대사가 진상으로 나타나서                                             白衣大士現眞相

마니 구슬 내려주어 묵은 업장(業障) 없앴다오                        投下摩尼除宿障

전단이 옥을 바쳐 대가 땅에 솟아나니                                       旃檀貢玉竹湧地

경각 사이 화궁이 구름 밖에 세워졌네                                        頃刻花宮雲外創

채색 노을 창에 비쳐 벽에 어린 붉은 색깔                                 彩霞射牖丹寫壁

나는 듯 솟은 누각 빽빽이 마주보네                                           飛樓聳閣森相向

일곱 겹의 구슬발이 주전을 가리웠고                                        七重珠網鎖珠殿

세 발 달린 금오가 금방으로 날아들어                                        三足金烏翥金牓

향화에 정근한 지 자그마치 천 년이라                                        精勤香火一千年

장엄한 그 공덕 진실로 끝이 없네                                               功德莊嚴信無量

어느 해에 임금께서 자해를 순행했나                                        何年淸蹕慈海巡

암자마다 연이어 채장을 옮기었네                                              嵒竇聯翩移彩仗

임금께서 만월의 용모를 알아보니                                             重瞳親識滿月容

법뢰는 소리 흘려 공악이 울렸어라                                            法雷流音空樂響

새는 꽃비 머금어 천의에 떨어지고                                            鳥銜花雨墮天衣

용은 향운을 뱉어 어장을 감쌌다오                                             龍吐香雲籠御帳

그 향운 그 꽃비가 공중으로 사라지니                                        香雲花雨入空去

임금 행차 아득아득 물을 곳 없네그려                                        縹緲宸遊問無處

산문의 성사가 이보다 더할쏜가                                                   山門盛事此最雄

노승들 이야기 지금도 들려주네                                                  只今猶聞老僧語

내가 온 때 바야흐로 팔월달 맑은 가을                                      我來正値淸秋節

죽장에 짚신 신고 숲 속을 걸어가니                                           竹杖芒鞋步林樾

바다에 부는 천풍 산악을 뒤흔들어                                            天風吹海動雲根

바라보니 놀란 파도 불골에 침노하네                                        笑看驚濤侵佛骨

이화정 가에서 달 뜨기를 기다리니                                            梨花亭畔待初月

옥바퀴 돌아돌아 하늘로 떠오르네                                             玉輪輾出琉璃滑

계수나무 그림자 금계를 뒤덮으니                                             桂影婆娑遍金界

일천 바위 변하여 구슬 굴이 되는구만                                      千巖變作瓊瑤窟

선들선들 마치도 바람탄 열자인 듯                                            冷然似馭列子風

황학의 등에 올라 부구를 붙들고자                                            欲挹浮丘跨黃鶴

함께 간 풍류승이 티끌 생각 벗어나니                                       同遊韻釋出塵想

총채를 휘두르며 선 이야기 싫지 않아                                        揮麈談禪也不惡

법라의 혀끝으로 인천을 다 흔드니                                            人天掉盡法螺舌

부생이란 주착이 없다는 걸 깨달았네                                        頓覺浮生無住著

사리가 재촉하여 오경종을 두들기니                                      &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