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6호

[특별기고] 양양부사 연암 박지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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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413회 작성일 15-06-0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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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양양부사 연암 박지원을 만나다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연구원 김양식


최근 연암 박지원부사를 양양군 문화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 되면서“연암 박지원 문화콘텐츠 조명 심포지엄”이 2012년 6월에 이어, 2014년 11월 24일 강원도민일보사와 양양문화원이 주관하고 양양군과 양양군의회의 후원으로 양양군문화복지회관에서 두 번째로 열렸다. 그러면 과연 연암 박지원은 누구이며 양양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고,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1. 시대적 배경

조선왕조 18세기 지성사에 3대 축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정조대왕이 있었고 집권세력인 노론학통의 연암그룹과 또 한편으로 재야 남인의 다산학파가 있었다. 연암그룹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명말청초의 양명학을 지향한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정철조 등이 병자호란 이 후 북벌론이 만연하던 시기에 청나라의 앞선 문명과 기술을 배우자는 북학파 모임이었고, 다산학파는 서양과학과 천주학을 내세우는 정약용,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이벽 등의 남인그룹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왕조 건국이래 세계화로 접어드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2. 연암 박지원은 누구인가?

<유년기>

영조 13년 1737년 2월 5일 서부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박사유(朴師愈)의 4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연암의 5대조는 선조의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노론학통의 왕실가문이었지만 조부 장간공 필균(弼均)은 40세가 넘어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고 부친은 당시 심한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아예 관직을 포기하였다. 이에 가세가 기울어 유년기의 연암은 조부슬하에서 성장한 관계로 학업에 열중하지 못했다.
1752년 16세에 전주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고 홍문관 교리였던 처 삼촌인 이양천(李亮天)에게 맹자(孟子)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문장 쓰는 법을 배웠다. 장인은 당시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뛰어난 학자였으나 청빈을 가문의 트렌드로 내 세우는 바람에 살림은 어려웠다.
체격은 아주 건장하고 양기 충만한 성격에 목소리는 얼마나 컸는지 면천군수 시절에는 담 너머 귀신이달아날 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세에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현실 적응이 어려워 울화병으로 고생한다. 아버지는 백방으로 약을 구했지만 별 차도가 없자, 마침 남양에 사는 민유신을 만나 함께 거리로 나간다. 여기에서 분뇨장수, 도사, 건달, 장사꾼 등 다양한 천민들과 소통한다. 이들은 의외로 양반들 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해박했고 이치에 밝았다. 이들과 의기투합하면서 병도 났고 인생을 새롭게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연암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에서 완전히 탈주하고 새로운 글쓰기에 몰입한다.
2~30세 전후에 당시 양반들의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생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기록한“양반전”과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금신산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마장전(馬駔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과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총 9편이 방경각외전(防璚閣外傳)에 수록되어 있다.

 

<중년기>

1759년 10월에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8월 조부 장간공 마저 상을 당하자 1760년에는 북한산 암자로 입산하여 학문에 몰두한다. 1761년 25세 때에는 성균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고목과 노송만 그려놓고 퇴장하여 과거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평생 프리랜서로 학문에 매진한다.
1765년 가을에는 천재 음악가이자 과학자인 홍대용(洪大容), 괴짜발명꾼인 정철조(鄭喆祚), 유언호 등과 금강산을 유람한다. 그 때 “총석정관일출 叢石亭觀日出)”을 짓고 만폭동에서 이름을 새기고 삼일포(三日浦)의 사선정(四仙亭)에 현판을 세웠는데 현재는 북한땅이라 현존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의현감 퇴직 후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우려 했으나 완강히 거절하였다는 기록과 최근 설악산 계조암 좌편 암자에 아들 종간(宗侃)과 유학금(柳學金)이라고 새긴 음각이 유일하다.(2013.10 양양문화원에서 현지 확인)
1767년 6월 31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가족들을 경기도 광주석마 처가로 보내고 파고다 옆 원각사지 10층 백탑(白塔) 근처 전의감동 우사에 기거하면서 북학파의 대가 박재가(朴濟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서상수, 무사 백동수 등과 만나 낙후된 조선을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매일 밤 한쪽에서는 풍류와 명상을 또 한 쪽에서는 학문과 토론으로 지성의 향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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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계조암 암각> 

 

1770년 34세에 지인들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초, 종장에 장원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회시에는 결국 시권을 내지 않고 또 다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 등과 송도, 평양, 가야산, 단양 등지를 유람한다. 이 때 개성 부근의 연암골을 발견하고“연암(燕巖)”이라는 자호를 얻는다.
1776년 우여곡절 끝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공이 큰 홍국영이 실권을 잡자 반대편을 하나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연암도 위기를 느끼고 형님인 희원가족과 함께 황해도 연암골로 신하였다. 당시 개성 수유였던 유언호의 도움을 받아 농사, 과수, 목축, 양봉을 치며 농업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 때 쓴 농서의 기초본이 1799년 면천군수 재직 시 정조의 농서를 구하는 교서에 의해 쓴“과농소초(課農小抄)”의 기초가 된다.
2년 후인 1778년 실권을 남용한 홍국영이 갑자기 실격되었다. 연암은 다시 백탑으로 돌아 왔지만 옛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유로 모두 떠나고 없었다. 하루하루를 아주 답답한 심정으로 암울한 시절을 보내던 차에, 정조 4년 1780년 44세에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황제(고종)의 만수절(칠순잔치)에 사절단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자제군관(개인 비서격)으로 동행하여 한양에서 열하까지 약 3천리 길을 6개월 동안에 걸쳐 다녀 온 여행후기를 일기형식으로 쓴 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연암은 체격이 아주 크며 무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면서도 여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하고 기록 또한 더욱 왕성하였으며 유머가 넘쳤다. 천리까지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에 들어서자“아, 참 좋은 울음터로 구나. 크게 한번 울어볼 만하구나!”라며 요동이 옛 우리의 고조선의 땅임을 한탄한다. 「호곡장론(好哭場論) 중에서」또한 청나라의 화려한
문물을 접하자“청나라의 장관은 버려진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구나”라든가, 정진사와 일찍 식사를 마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성을 쌓는데는 벽돌이 돌보다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걷는 잠고대 장면은 유머가 흘러 넘치면서도 후일 이용후생의 실학문으로 정립된다.
당초에는 연경(북경)길에 올랐으나 황제가 여름피서 산장인 열하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연경에서 다시 7백리 길을 역참도 건너뛰면서 무박나흘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며 가야만했다. 때는 여름철이라 변화무쌍한 기상, 찌는듯한 무더위가 계속되었다. 아뿔사! 연암의 병마잡이가 부상을 입는 바람에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직접 말고삐를 잡는다. 협곡사이로 흘러넘치는 강물을 하룻밤에도 몇 번씩 건너면서 모래톱에 갇히기도 한다. 이 때 남긴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조선에 한문이 유입된 지 5천년 이래 가장 뛰어난 명문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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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이동로>

 

“그토록 길길이 날뛰며 싸우던 전쟁터건만, 지금은 온천하가 조용하여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어, 수많은 골짜기들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그 빛이 싸늘하게 버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뽀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반쯤 관문 안쪽으로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 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하다.
누군가 말했다. 고니 소리네”
- 야출고북구기 중에서


열하는 청나라가 북방 오랑캐들을 제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자 황제가 방어 차원에서 자주 머물게 되자 하루가 다르게 연경보다 더 화려하게 발전되었다. 연암은 웅장한 성지와 온갖 특이한 인간 군상들과 코끼리나 낙타와 같은 기이한 동물들도 이곳에서 처음 만난다. 그리고 중국 선비들과의 고담준론(高談峻論)도 아주 진지하게 펼친다.
건륭황제가 티베트의 법왕 판첸라마의 황금 전각을 지어 아주 특별히 대접하고 있었는데 우리 사절단에게 크게 인심을 쓴답시고 예를 표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우리 사절단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왜냐하면 성리학을 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삼던 조선인에게 티베트 불교는 이단 중에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대충 적당히 때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본 황제는 나의 성의를 무시했다면서“그 나라는 예를 아는데 그대들은 어찌 예를 모르냐”고 화를 내는 바람에 6일 만에 쫓기듯 연경으로 귀환한다. 여기에서 열하일기는 막을 내린다.

<만년기>


노년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는데 음관으로 얻은 벼슬이다.
50세 1786년 정조 10년에 종 9품 선공감 감역으로 제수받고,
53세에는 사복시 주부로 승진하고,
54세에 의금부 도사직으로 임명되었다.
55세 1791년에 한성부판관에서 안의현감(경남 함양군)으로 부임한다.
61세 정조 21년 1797년에는 면천군수(충남 당진군)로 부임 후 농업 진흥책인“과농소초”15권과“한민명전의”를 부록으로 저술하였다.
64세 1800년 6월에 정조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동년 7월 4일 순조가 즉위하면서 8월 18일 양양부사로 승진 부임한다. 그리고 정조임금의 황장목을 쓰기위한 진영(鎭營)이 설치되었다. 연암부사는 필요한 황장목을 보내고 나머지 판자를 강가에 모아놓고 매년 장마기에 고충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서 황장목 패다리를 튼튼하게 놓아줌으로서 몸소 이용후생을 실천하였다.
65세 1801년 순조의 천주교(신유사옥) 대 탄압으로 정국이 혼란해 지고 건강이 나빠지자 10개월간의 부사직을 사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요양과 독서로 노년을 보낸다.
69세 1805년 10월 20일 가회방 재동 자택에서 약을 물리친 후 옛 친구들을 불러 술자리 만들게 하고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3.“ 연암 박지원 문화콘텐츠 조명 심포지엄”에 관한 내용 (2014.11.24일자)

 

1) 토론 배경

최근 양양문화원에서는 앞으로 디지털의 유동화 시대에 맞는“지역 문화콘텐츠”를 찾는데 주목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을 활용해서 관광산업으로 연결하자는 인문학적 창발상인 셈이다. 이것이 1800년에 양양부사를 지낸 연암 박지원의 “경관녹봉록”이다. 연암이 사임을 하고 퇴직한 사또들의 모임에서 저마다 녹봉에 관한 이야기 나왔다고 한다. 서로 많고 적음을 얘기하던 중에 연암은 일만 이천냥을 받았다고 했다. 모두 놀라며 의아해 하자, 연암은 “양양의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만냥은 될 만하고 고을의 봉급이 이천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일만 이천봉과 서로 나란하다 할 만 하지요”라고 한 양양의 자연경관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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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문화 콘텐츠 심포지엄> 

2) 지정 토론자의 의견

이날 토론회에서는“양양군 발전과 연암 문화콘텐츠 확장”이라는 주제로 김중석 강원도민일보 사장의 기조발표가 있었고 주제발표로는 이학주 강원대학교 강사의“연암 박지원과 양양군 스토리텔링”이라는 명제로 2016년 8월 10일(음) 양양군 정명 600주년을 기념하는 마을 박물관 개념의“연암 테마거리”를 조성하자는 내용과 양언석 강원도립대학 교수의“연암 박지원과 양양의 역사문화유적지 연계방안”으로“양양도호부 관아 및 이화정 복원”의 필요성을 발표하였다.
또한 천남수 강원사회조사연구소 연구위원의 사회로 여러 교수들과 진종호 양양군의원의 지정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근세 국민대교수는 열하일기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주영아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소나무길 조성을, 엄찬호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경관녹봉론”우선적 홍보방안을, 엄현섭 강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연암 실학사상과 문학 연계성을, 진종호 양양군의원은 “탁장사 고을 전통문화축제”와 연계한 구룡령 옛길, 현남면 입암상여소리와의 스토리텔링 개발과 관리소홀로 유실된 황장금표 발굴 조사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였다.

3) 종합 토론 내용
양양군에서는 지난해에 오색령 정상에 포토존을 설치하였다. 그곳에“연암부사의 경관녹봉론 포토존”이라는 입간판을 연암 초상화와 함께 설치하여 양양의 이미지 브랜드로 홍보하자는 의견과,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에서 2013년에 발표한“양양의 루정대”를 보면 33개소의 루, 정, 대 터와 이에 관련된 165수의 시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루, 정, 대 복원사업과 연암 문학관, 문예 창작마을을 지정하자는 의견과,해마다 시월이면 마을단위 축제인“탁장사 고을 전통문화축제”가 원일전리 일원에서열리고 있는데“양양 패다리놓기”재연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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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양양패다리놓기 재현> 

 

이것을“연암 패다리놓기”로 명칭을 변경하여 양양현산문화제, 송이축제, 연어축제에 연암 부사도 함께 등장시켜 전통민속놀이로 확대 재연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에서 2013년도“양양지방의 황장금표에 관한 연구”에 대한 내용을 보면 현재 현존하여 확인된 금표 표지는 없으나 1996년도 까지 현존하였던 현북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의“금표”는 그 후 교량 확장공사 시에 교각밑에 매몰되었다고 하며 (구술자:김진목 법수치리장) 현북면 원일전리 강변에 있던“금표 5리”는 2009년도 경까지 현존하였으나 그 후 새농촌건설 하천정비사업 시 훼손되었다고 하며(구술자:박상우 원일전리) 현북면 어성전리“금표 10리”는 1984년도 까지는 원일전-어성전간 구 도로 길가에 현존하였으나 그
후 군도 확장공사 시 도로 지반 밑으로 매몰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구술자:박상우 원일전리) 기념사업으로는 연암 기념비 설치, 연암 열하일기 둘레길 조성 등이 논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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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전, 어성전 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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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치 금표 탐방> 

 

 

4. 맺는 말

조선왕조 5백년을 대표하는 대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이 1800년 양양부사로 재직 후“경관녹봉론”을 주창했다. 이 컨텐츠를 확장하여 힐링 양양의 새 브랜드로 창조하고자 한다. 최근 제3차 산업혁명시대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폴 호큰의 자연자본론”보다 약 200년이 앞선 것이다. 앞으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면 세계의 많은 체육인과 관광객이 강원도를 찾을 것이다. 이 기회에 오색 케이블카와 연계하여 하늘이 내린 지역의 보물로 활용하여 식어가는 강원관광에 새로운 불씨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문화융성의 시대에 양양의 문화유산으로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방안을 창조해 내자는 연암부사의 실학사상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거듭나기를 기대 한다.

<參考文獻>

燕巖集, 過庭錄, 日省錄, 熱河日記, 防璚閣外傳, 襄陽의 樓亭臺, 襄陽地方의 禁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