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권용규(權用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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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40회 작성일 2015-04-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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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權公用圭善政碑(부사권공용규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고종 8년(1871년) 6월 ∼ 고종 10년(1873년) 1월 [1년7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52cm,너비43cm,두께13cm / 갓 높37, 너48, 두20
저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시변리 구 7번국도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구 7번국도 도로변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의 권용규(權用圭,1793년∼미상)부사 비는 재직 중 부민(富民), 호상(好商), 오리(汚吏)들이 사용하던 도량형기(度量衡器)가 공정치 못하여 세민(細民)들을 착취하므로 민간의 도량형기를 몰수하여 엄금케 하였다.
  본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익(仲翼)이다. 순조 34년(1834년) 식년시 3등으로 생원이 되고, 고종 28년(1891년) 증광시 3등으로 진사가 되었다. 헌종 15년(1849년) 산릉참봉(山陵參奉), 철종 즉위년(1850년)에 숙릉참봉(肅陵參奉)이 되었다가 철종 3년(1852년) 장락주부(掌樂主簿), 이듬해 장영전령(長寧殿令)으로 승차하였다. 1860년 충청도 논산인 노성현감(魯城縣監)으로 부임하였고, 1864년 전적(典籍)을 지내고 고종 2년(1865년) 장릉령(莊陵令)으로 있다가 1867년 사도첨정(司䆃僉正)으로 승차한 후 같은 해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1869년 내직으로 들어와 어영중군(御營中軍)이 되었다.
  고종 8년(1871년) 6월 20일 襄陽府使로 제수 받고 부임하였다. 고종 10년(1873년) 1월 13일 전라도 담양의 창평현감(昌平縣監)으로 이임하였고, 1875년 황해도 신천군수(信川郡守)에 이어 고종 13년(1876년)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에 있는 조선시대 현감 권용규의 영세불망비 비석 앞면에 ‘현감권후용규영세불망비(縣監權侯用圭永世不忘碑)’라고 각자(刻字)되어 있다. (디지털논산문화대전)

 

 

《參考事項》
  2008년에 발간한 『襄陽의 傳統石造物圖鑑』에 시변리에 위치한 "府使朴公00 善政碑"는 이름자가 마모되었는데 풍화현상이 아닌 인위적으로 훼손 되었던 것을 2013년 향토사연구소에서 조사한바, 고종 8년(1871년)에 부임한 權用圭 府使의 善政碑로 판명되었다. 조선시대 양양부로 부임한 府使 중에 朴씨 姓을 가진 부사가 선정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당시 양양부사와 강원도관찰사의 赴任年度를 보면, 헌종 2년(1836년)에 부임한 沈宜晉 府使이후의 양양부사와 강원도관찰사의 선정비가 대부분 현남면 시변리에 소재하고 있고, 양양읍지(襄陽邑誌)에 권용규 부사의 선정비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어 금번 『襄陽의 傳統石造物圖鑑』증보판에 등재하게 되었다.


參考文獻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팔도총록』,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디지털논산문화대전


關聯金石文

 府使權公用圭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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