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정기풍(鄭基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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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14회 작성일 2015-04-2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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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鄭公基豊善政碑(부사정공기풍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효종 2년(1651년) 8월 ~ 효종 4년(1653년) 8월 [2년]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30cm,너비49cm,두께19cm / 갓 높40, 너57, 두30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청곡2리 도로변 속칭:비석거리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정기풍(鄭基豊,1594년∼미상)비는 훼손이 심하여 공적을 확인할 수 없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형백(亨伯)이다. 증조부는 정숙(鄭淑)이고, 조부는 정종영(鄭宗榮)이며,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충무위부호군(行忠武衛副護軍) 정약(鄭爚)이다. 형은 정기광(鄭基廣)‧정기성(鄭基成)‧정기평(鄭基平)이며, 부인은 이박(李璞)의 딸이다.
  광해군 7년(1615년) 식년시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그 후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인조 17년(1639년) 부사과(副司果)를 지내다가, 1640년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제수 받고 재직 중 인조 20년(1642년) 암행어사(暗行御史) 정치화(鄭致和)를 통해 그의 선정(善政)이 보고되어 임금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았다. 【이암행어사정치화서계,신계현령정기풍사표리일습(以暗行御史鄭致和書啓, 新溪縣令鄭基豐賜表裏一襲)】같은 해 공조정랑(工曹正郞) 으로 제수 받고 내직으로 들어왔다가, 11월에는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부임을 하였다.
  효종 원년(1650년) 옥천군수로 재직하던 중, 문학(文學)에 기용되었으며, 이후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을 엮임하고 효종 2년(1651년) 8월 17일 효종임금이 정기풍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직접 불러 유시하고 임지로 보냈다.【임술/양양부사정기풍, 사조, 면유이견지(壬戌/襄陽府使鄭基豐、辭朝, 面諭以遣之)】 효종 4년(1653년) 8월 1일 필선(弼善)으로 제수 받고 이임하신 후 집의(執義)ㆍ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654년 7월 나주목사(羅州牧使) 나아갔다가 1758년 내직으로 들어와 집의(執義)‧우부승지(右部承旨) 역임한 후, 현종 3년(1662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부사의 비(碑)는 구름모양의 비(碑) 갓이 특징이나, 비문(碑文)의 훼손이 심하여 그의 공적(功績)을 확인할 수가 없다.


參考文獻

 『인조실록』, 『효종실록』, 『국조문과방목』, 『사마방목』,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역대인물중앙정보시스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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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鄭公基豊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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