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이상일(李尙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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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59회 작성일 2015-04-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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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李公尙逸善政碑(부사이공상일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인조 22년(1644년) 6월 ~ 인조 27년(1649년) 3월 [4년9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38cm,너비52cm,두께20cm / 갓 높50, 너58, 두27
전 소재지 : 양양군 양양읍 구교리 양양초교에서 연창리로 가는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이상일(李尙逸, 1600∼1674년)비는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제수 받고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면서 법률에 밝고 정사에 청렴하고 농상(農桑)에 근려(勤勵)하여 빈궁한 자를 구휼함으로 당시 부민들이 관아 동편 구교리에서 연창리로 가는 길가에 선정비를 세웠다.
  본관 벽진(碧珍: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자 여휴(汝休), 호 용암(龍巖), 승지 유번(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석명(碩明)이고, 아버지는 현령 민선(敏善)이며, 어머니는 김봉(金崶)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광해 10년(1618년)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 2년(1624년)에 생원이 되고, 인조 8년(1630년)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다. 입시(入侍)해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쓰니 왕이 매우 기뻐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5년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1636년 황해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감사를 대신해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고, 적병 100여 명을 잡았으나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했다 한다. 1637년 전라도사에 이어 1638년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지냈으며 인조 22년(1644년) 6월 6일 사헌부 장령(掌令)에서 양양부사로 부임한 이래  백성들이 원통한일이 있으면 백지소장(白紙訴狀)을 지참하고 비 밑[碑下]에서 눈물로써 탄원을 하였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고도 했다. 이는 백성들이 궁할 때나 억울한 일이 있을시 비석을 안고 애걸을 하였다니 이상일 부사가 베푼 선정의 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타루비 라고 일컫는 것은 중국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의 양호(羊祜)가 일찍이 중국의 지명인 양양에 있을 때 늘 현산에 올라가 쉬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 자리에 비(碑)를 세우고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를 보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타루비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인조 27년(1649년) 3월 15일 양양부사에서 문겸(文兼)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4월 3일 부사직(副司直)ㆍ장령(掌令)ㆍ헌납(獻納)을 엮임하고, 효종 원년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가, 외직으로 진주목사ㆍ안동부사ㆍ정주목사ㆍ영해부사를 지내고 효종 5년(1664년)부터 형조참의(刑曹參議)ㆍ호조참의(戶曹參議)ㆍ승지(承旨)ㆍ경상감사 등을 역임한 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황해감사가 되었다.
  이 후 호조참의ㆍ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현종 10년(1669년)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내면서 주민을 위한 구휼사업ㆍ수리 개발로 수도전(水稻田)을 개척해 농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고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다음은 이상일이 양양부사 와 원양감사 재임 시 『승정원일기』 내용을 소개한다.

[襄陽府使 在任時] 인조 23년(1645년) 8월 18일. 
  襄陽府使 李尙逸이 상소를 올렸는데, 입계[주문을 올림]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매우 가상하게 여기니, 진달한 일에 대해서는 내 체념[體念:깊이 생각하여]하여 채택해서 시행하겠다.” 하였다
襄陽府使李尙逸上疏。入啓。答曰, 省疏具悉。深用嘉尙, 所陳之事, 予當體念而採施焉

[原襄監司 在任時] 현종 8년(1667년) 10월 4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시[引見時:불러들이어 볼 때]에 이상일 감사가 입시하여 강원도의 피재(被災) 상황, 요역ㆍ토산ㆍ매를 잡아 바치는 문제, 진휼[賑恤: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와줌]·전결[田結:논밭의 구실]의 다소(多少)·벌목의 금단·궁협[窮峽:깊은 산골]에 은피[隱避:숨어서 피함]하는 사람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왕을 희정당으로 원양감사 이상일을 인견코자 우부승지 이태연, 가주서 조근, 서기관 이인환, 이환. 완이 모셨다.
  왕이 이상일에 대하여 경이 들은 바 그 곳의 입은 피해의 경중이 어떤가? 물으니, 이상일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양양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지방의 풍토를 잘 압니다. 왕이 어느 해인가? 상일 왈 무자년간(戊子年間)입니다. 그 지방의 토질은 척박합니다. 비록 비비바람이 순조로워 곱게 풍년이 들 때였습니다.
왕이 더욱이 금년은 어떠한가? 대체로 그 피해와 재앙이 어떠한가? 이상일이 왈 특히 영서가 심합니다. 지난해에는 종자(씨앗)가 없어서 남쪽지방에서 곡식을 옮겨와서 파종하였으나 풍토이 이상이 있어서 제대로 여물지 않았습니다.“

上御熙政堂, 引見原襄監司李尙逸, 入侍, 右副承旨李泰淵, 假注書趙根, 記事官李寅煥·李藼。上謂尙逸曰, 卿聞其處被災輕重乎? 對曰, 臣曾經襄陽府使, 素知此地風土。上曰, 何年乎? 尙逸曰, 是戊子年間也。此地土瘠, 雖風雨和調, 鮮有豐登之時, 況今年乎? 上曰, 大槪被災, 何如云耶? 尙逸曰 嶺西之凶, 特甚云矣。上年無種子, 以南方移粟播種, 風土有異, 不能成實云云。


參考文獻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효종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 『송자대전』, 『국조인물고』, 『연려실기술』,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關聯金石文

 府使李公尙逸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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