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이경용(李景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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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04회 작성일 2015-04-2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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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李公景容仁政碑(부사이공경용인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인조 8년(1630년) 7월 ~ 인조 10년(1632년) 11월 [2년6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10cm,너비48cm,두께17cm / 갓 높38, 너55, 두20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청곡2리 도로변 속칭:비석거리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이경용((李景容, 1580∼1632년)비는 재임당시 어질게 정사를 펼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부민이 인정비(仁政碑)를 세웠는데 장구한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풍마우세(風磨雨洗)하여 문자가 인멸(湮滅)되어 그 기록을 알 수 없어 병조참의(兵曹參議) 안경운[영조21년~영조23년까지 양양부사 재임]이 농언(弄言) 몰자비(沒字碑)라 한 후 중구동칭(衆口同稱)으로 몰자비가 되고 말았다.
  본관은 덕수(德水,지금의 경기도 개풍), 자는 여복(汝復),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이다. 함(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상(獜祥)이고, 아버지는 군수 통(通)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8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을 받고,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으며, 곧이어 저작(著作)을 거쳐 주서(注書)가 되었다. 반정 초기에 조정의 대소의 글씨를 잘 써서 왕으로부터 상으로 『동문선』 한 질을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다. 곧 승진하여 전적(典籍)ㆍ감찰(監察) 등이 되었고, 1624년 병조좌랑(兵曹佐郞)ㆍ정언(正言)ㆍ지평(持平)이 되었다.
  이해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언관으로 금령을 대대적으로 행하여 난 후의 처리를 잘하여냈고, 1625년에 수찬(修撰)ㆍ직강(直講)등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폐지를 진언하였다. 이어서 헌납(獻納)을 지내다가 외직인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에는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서울과 가까워서 귀족공경(貴族公卿)이 많은 지방이었으나 일을 공정하게 잘 처리하여 칭송을 들었다. 곧이어 승지(承旨)를 지낸 후 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가 되어 이이(李珥)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수백 본 만들어 올려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게 한 일이 있다.
  그 뒤 승지로 재직하다가 인조 8년(1630년) 7월 15일 양양부사(襄로陽 府使)로 제수 받고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인 11월 26일 조정으로부터 진향사(進香使)의 소임을 받기도 하였으며, 인조 10년(1632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하며 반정 초기인 1623년 승문원 주서로 있을 때 교서 등을 잘 쓴 공로로 인조로부터 ≪동문선≫을 한 질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경용 부사의 碑는 현산공원에 보존되어있다. 이 비는 2010년 양양군지를 편찬할 당시 향토사 연구소 이종우(李鍾㝢) 소장이 비문을 확인하고 고문헌[峴山誌, 江原道誌]에 기독되어 있는 몰자비를 발굴 양양군지 금석문 편에 李景容 府使의 仁政碑[몰자비.沒字碑]로 등재하게 되었다.


參考文獻

『인조실록』,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關聯金石文

 府使李公景容仁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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