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권진(權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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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63회 작성일 2015-04-2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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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府權使縉善政碑(부사권진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광해 2년(1610년) 2월 ~ 광해 3년(1611년) 2월 [1년1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99cm, 너비 37cm, 두께 18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구교리와 연창리 사이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권진(權縉, 1572∼1624년)비는 재직 중 혹정(酷政)을 하였기에, 부민이 먼저 선정비를 건립하여 그 뜻을 전환시키려고 하였더니, 부사는 이 비석을 본 후 과연 일기호전(一機好戰)하여 청렴관후 (淸廉寬厚)하여져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 비는 참으로 선정비가 되었다고 한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경(雲卿), 호는 수은(睡隱)이다. 선조 30년(1597년) 알성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ㆍ수찬(修撰)ㆍ형조정랑(刑曹正郞)ㆍ장령(掌令)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지낸 후 1609년 경주부윤에 승진되었다. 광해 2년(1610년) 2월에 양양부사로 부임한 후 사헌부의 계(啓)로 1611년 2월에 파직되었다. 이임 후인 광해 5년(1613년) 3월 29일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제수 받고 계축옥사에 연루된 인목대비의 동생이며 김제남(金悌男)의 아들인 선(瑄)의 감형을 청하였다. 1616년 수원부사가 되고, 이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621년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우참찬(右參贊)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162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지 않아 수차 탄핵을 받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대신고관이 모두 도망쳤을 때, 김류(金瑬)·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을 받고 홀로 제위(諸衛)의 군사를 모아 궁궐을 호위하여 공을 세웠으나, 그의 유능함을 질시한 반정공신들로부터 계축옥사 때 형방승지로 김제남을 곤욕 시켰다는 무고를 받고 양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관찰사) 민성휘(閔聖徽)에 의해 왜인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였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 뒤 조정에 보고되었다.
  권진 부사에 대한 광해 3년(1611년 辛亥) 4월 30일(기해) 사헌부의 계를 소개한다.
  “양양 부사(襄陽府使) 권진(權縉)은 사람됨이 거칠고 교활하며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도임한 뒤로 술에 빠져 세월만 보내면서 오직 제 뱃속만 채우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그 명을 견딜 수 없어 온 경내가 원망하고 있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권진(權縉) 이하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襄陽府使權縉, 爲人麤猾, 不念國事。 到任之後, 沈湎度日, 惟以肥己爲事, 民不堪命, 闔境怨恣, 請命罷職。 權縉以下依啓。”


參考文獻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기언』, 『국조인물고』,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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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權使縉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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