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임목(林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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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63회 작성일 2015-04-2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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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都護府使林候穆淸德善政碑(도호부사임후목청덕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세종 15년(1433년) 8월 ~ 세종 18년(1436).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60cm, 너비56cm,두께23cm / 갓 높43, 너65, 두33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청곡2리 도로변 속칭:비석거리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임목(林穆, 1371∼1448년)비는 부임 후 세종임금의 명을 잘 이행하여 부민들에게 선정
을 펼쳐 이 청덕선정비가 세원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고려 명관 임숙(林淑)의 후손으로, 부친은 부안임씨(扶安林氏) 중시조(中始祖)이고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임난수(林蘭秀)이다. 세종 때 충신의 표창을 받고 나성리(羅成里) 강산에 있는 토지를 하사받았다.
임목은 생원시와 진사시 두 과거에 합격하고, 태종 6년(1406년)비인현 감무와 태종 18년(1418녀) 순승부판관을 지냈으며, 세종 9년(1427년) 음죽현감(陰竹縣監), 세종 13년(1431년) 홍주판관 등 여러군의 수령을 역임하고 세종 15년(1433년) 윤8월 2일 양양도호부사로 제수 받았는데, 세종임금은 양양부사로 부임하는 임목에게 이르기를, “그 도내가 근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계가 염려되니, 은혜를 베풀고 구제해주기에 마음을 극진히 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하고 또 형벌 하는 일을 삼가서 하라.”하였다.

“襄陽都護府使林穆辭, 上引見
命穆曰 其道近年凶歉, 民生可慮, 盡心賑恤, 俾無飢民, 且愼刑罰“

『여지도서(輿地圖書)』공주목 인물 편에 임목이 양양도호부사로 재직 시 청백리로써 사심이 없이 깨끗한 정치로 부민을 다스렸고, 창흥학(倡興學)에 힘써 인재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난 임목은 나성리의 장원으로 돌아가 부친 임난수(林蘭秀) 장군의 가묘(家廟)옆에 정각(亭閣)을 짓고 ‘독락정(獨樂亭)’이라고 편액 하였다.
임난수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세속에서 벗어나 금강 월봉(月峰) 아래에 은거하여 16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독락정은 세종 19년(1437년)에 그의 둘째 아들인 임목이 부친이 원정(園亭)을 지어 독락(獨樂)하시다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절의를 지킨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이 정자는 금강팔경(錦江八景) 중의 하나로 일컬어질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 장군의 제일(祭日) 음력 6월 20일과 모친의 제일인 음력 12월 20일에 제사(祭祀)를 지내면서 거기서 여유롭게 즐기며 생을 마감하였다. 정자 내부에는 남수문(南秀文)이 지은 정자기와 서거정이 지은 독락정 찬시 3수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공주목 고적조에 모두 전하고 있다. 또 임재무(林再戊)의 중수기 채지홍(蔡之洪)의 중수기가 있다.



《參考事項》
  도호부사 임목(林穆)은 지금으로부터 약 580년 전 세종조의 양양부 수령인데 위의 선정비가 최근에 제작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석재 전문가에 의하면 예전에 세웠던 비를 최근(약 50여 년 전)에 다시 다듬고 음각(陰刻)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자)


參考文獻

 『세종실록』, 『여지도서』, 『조선인명사서』, 『양양군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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