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강선(姜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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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18회 작성일 2015-04-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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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觀察使姜公銑善賑蠲役永世不忘碑
                (관찰사강공선선진견역영세불망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숙종 31년(1705년) 3월 ~ 숙종 32년(1706년) 4월 [1년 1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160cm, 너비 63cm, 두께 21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구교리와 연창리 사이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소재 현산공원의 강선(姜銑,1645∼1710년)관찰사 비는 강원도관찰사로 재임기간 빈민의 구휼과 부역 감소에 노력하여 불망비를 세웠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화(子和)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백년(柏年)이다. 현종 10년(1669년) 식년시로 생원이 되었고, 숙종 1년(167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로 시작해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ㆍ전적(典籍)ㆍ정랑(正郞)을 지내고 1678년 경기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가 수찬(修撰)ㆍ정언(正言)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지평(持平)을 역임했으며, 1679년 홍문록(弘文錄)ㆍ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1680년 지평(持平)으로 재직 중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삭직(削職)되었다.
  1685년 인동부사(仁同府使)ㆍ1687년 김포군수(金浦郡守)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校理에 등용되고,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나국(拿鞠)할 것을 청하였다. 이 해에 형조참의(刑曹參議)ㆍ승지(承旨)를 역임하고, 16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 예조참의(禮曺參議)를 지내다가, 이듬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파직 당하였다.
  1698년 판결사(判決事)로 기용되고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한 후 1699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차하였으며, 동지사(冬至使) 동평군(東平君), 서장관(書狀官) 유명웅(兪命雄)과 함께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ㆍ좌윤(左尹)ㆍ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처 1704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1705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고, 이듬해 도승지ㆍ형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도승지에 기용 되었다.

 

《參考事項》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는 1685년 1월부터 1686년 4월까지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지낸 강선(姜銑)을 기리기 위해 숙종 13년(1687)에 세운 ‘부사 강후선청덕인정화민영세불망비(府使姜侯銑淸德仁政化民永世不忘碑)’가 있다.


參考文獻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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