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유득일(兪得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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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02회 작성일 2015-04-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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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監司兪公得一永世不忘碑(감사유공득일영세불망비)             

시대 : 조선
재임기 : 숙종 22년(1696년) 12월 ~ 숙종 24년(1698년) 1월 [1년1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152cm, 너비 49cm, 두께 18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구교리와 연창리 사이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소재 현산공원의 유득일(兪得一,1650∼1712년)감사 비는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당시 재해를 당한 고을에 상납할 쌀을 줄여 주는 등 진휼[賑恤: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정책에 힘을 기울였다하여 불망비가 세워졌다.
  본관 창원(昌原), 자 영숙(寧叔), 호는 귀와(歸窩)이며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참판을 지낸 유창(兪瑒)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웠다. 숙종 1년(167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7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으며, 1679년 부터 보안찰방(保安察訪)ㆍ주서(注書)ㆍ예조(禮曺),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1682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되어 이듬해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때 서인의 과격파인 김익훈(金益勳)이 남인을 제거하려고 모반 설을 조작하자,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 그 간계를 폭로하고 처벌을 주장하다가 진도군수로 좌천, 이어 파직되었다.
  1686년 부수찬(副修撰)으로 기용되었고,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평산부사(平山府使)ㆍ김제군수(金堤郡守)ㆍ집의(執義)ㆍ검상(檢詳)ㆍ승지(承旨)를 역임하고, 1695년 대사헌(大司諫)이 되었다. 1696년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흉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강원도지역의 진구(賑救)할 자료를 요청하였는데, 이에 보리 종자 6백석, 쌀 2천석을 진구하는 자료로 받았으며 재해를 당한 고을에 상납할 쌀을 줄여 주는 등 진휼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변장(邊將)을 취재(取材)하는 것과 교생(校生)의 고강(考講)도 다음 해 춘등(春等)까지 임시로 기한을 정지하여 주었다.
  이후 전라도관찰사ㆍ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대사성(大司成)ㆍ대사헌ㆍ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704년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승차되어, 이정청당상(釐整廳堂上)을 겸임하여 군정(軍政) 쇄신에 힘썼다. 1706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공조판서(工曹判書)ㆍ형조판서ㆍ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고, 1709년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가 1710년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죽인 이만운(李萬運)의 송사처리가 지연되고 있다는 죄인의 처남 심일년(沈一寧)의 격고(擊鼓)로 파직되었다.
  저서로는 『연행일기초(燕行日記草)』가 있다. 이 책은 1694년 인현 왕후가 복위되어 왕비로 책봉한 사실을 청나라에게 알리기 위한 사절단에 서장관으로 참여하여 연경에서 보고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해 8월 2일 서울을 출발하여 9월 28일 연경의 대불사(大佛寺)에 도착해 5~6일간 머무는 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사와 관련한 지명 유래, 연혁에 대한 설명도 있다.


參考文獻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강원도사』, 『양양군지』


 關聯金石文

 監司兪公得一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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