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Ⅷ. 맺는 말

페이지 정보

조회 2,148회 작성일 2015-04-27 16:44

본문

  지금까지 우리고장의 금석문(金石文)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금석문이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에 기록한 석문(石文) 등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번의 증보판 작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2008년도 양양문화원에서 발간한 『양양의 전통석조물 도감』을 바탕으로 이미 조사 기록된 내용에 새로 찾은 내용을 더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는 작업이다.
  본 작업 과정에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금석문 중에는 오랜 세월속의 풍우(風雨)로 마모(磨耗)가 되어 상당수의 비석들 중에 판독이 전혀 되지 않는 석문이 있는가 하면, 그 동안의 사후관리의 소홀로 조선시대 부사 비 중 12기는 문헌상으로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현존되고 있으나 실체가 없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선조들이 금석에 글을 새겨 행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절대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원래는 금석문을 처음 만들어 새운 곳에 그대로 보존되어야 사적(史的)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개발이라는 미명(美名)아래 마구잡이식으로 옮겨놓은 비석이 많다. 그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양양읍 구행리 현산공원에 보존되고 있는 19기의 비 중 조선시대 채팽윤(蔡澎胤)부사비는 1989년도에 양양군의회 앞마당에서 정원조경 작업과정 중 출토되어 이설되었다. 이광식 부사비는 손양면 상양혈리 7번 국도변에서 이설, 이상일 부사비는 양양초교 체육관에서 연창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가에서 이설, 유경시 부사비는 2003년 5월 후손들이 스스로 이곳에 건립하였다.
  그 외 나머지 15기는 양양읍 청곡2리 비석거리(속칭 비선거리)에서 8기, 연창리에서 7기가 각각 옮겨져 온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번조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관계기관에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조속한 시일 내 노출된 문제점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봄은 물론 여타지역의 잘 관리하고 있는 우수사례를 도입하여 조기에 보완대책을 강구함으로써 향토문화유산 보존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