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5. 나의 6·25한국전쟁 참전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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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61회 작성일 2016-03-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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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6·25한국전쟁 참전수기

 

■ 전 무공수훈자회 양양군지회장 최홍제(崔弘濟, 8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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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에 자진 입대하였다.


1945년8월15일우리조국이일제로부터해방되자38°선이북은쏘련군이진 주점령하고, 그이남은미군이진주점령하여혼미를거듭하던중쏘련군은조
선은 자치능력이 없다며 신탁통치를 들고 나오고 남한은 통일조선을 주장, 또 다시 남북이 갈등이 심화되자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수차 개최 되었지만서로의견대립결열남한의좌익세력들은신탁통치를찬성우파세력 은이를반대서로대립속에연일소요사태가벌어졌다.
이곳대전역광장에서좌익계의찬탁집회가대대적으로거행되던날공주에 서 살던 나는 학교 선후배들로 구성된 우익세력들은 곤봉으로 무장 타 지역에 서모여든우익단체와합류하여곤봉을휘두르며집회를완전봉쇄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우리일행은 우리나라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국가의 앞날이 공산화가의심된다며 대전비행장에서 창설된국군의모체인 국방경비대 제2연 대에자진입대하며군생활은이때부터시작되었다.
그 후 도처에서 좌익 불순분자들은 파업 폭동을 일으켜 처음으로 김천 폭동진압을 마치고 수색에서 창설된 특수부대인 수색학교에 입교, 교관은 미군이 총검술 대검던지기 폭약 연결법 기타 유격전법 등을 배우고 그때 대원들은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 출신들로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왕성 하였고 육본 직할부대로서울유격대라고명명하였다.


* 낙동강방어선을 구축 전투에 참가하다.


38°선 접경지에서는 연일 북한군이 침입 교전상태였다. 우리부대는 가장 교전이 심한 옹진지구에 출동했다. 해주는 북괴군 사령부가 있는 요충지다. 우리부대는 이를 폭파할 목적으로 기습하여 적 차량과 식량창고를 불태우고 포로 2 명은잡고, 그여세를몰아더깊숙이침투유격전을전개하기위해지원을요청 하였으나, 철수 하라는 명령으로 적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귀환 부대를 정비 후, 공비출현으로 위협을 받는 전자도 임실에서 순천 간의 철도 경비작전 을수행하였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에 있던 제3사단 22연대와 23연대에 편입 전투 중 낙동강전투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부대는낙동강최후의방위선으로철수하였는데3사단김석원준장은철수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자 육본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온 LST 수송선 4척을 보내와 야음을이용전사단이포항구룡포로철수하게되었다.
부족한 병력은 학도 지원병으로 보충되어 구룡포 초등학교에서 사단장의 군장검사시김석원준장은내앞에와서“소대장용감하게생겼다며”나를칭찬 하자나는“육군소위최홍제입니다.”라고하자곧UN군이상륙하는데, 그전에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저 고지를 점령 하여야하는데 갈만한 소대장이 없단 말이여”하며나를처다보자나는이최소위가하겠다고하자“어그래하며그럼이따만나자”며어깨를툭툭치며... 연단에올라가다음과같은훈시를하였다.


* 김석원 제3사단장의 훈시에 모든 장병들이 감명을 받다.


“내가누군줄아느냐내가사단장김석원이다. 우리부모형제들은평소먹을 것 도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도 제대로 못 입고 국가에 세금을 바쳐 나라가 위 기에처했을때우리들에게나라를잘지켜달라고세금을냈다. 저바다를보라 이제우리는더이상후퇴할곳도없다.”
“만약사단장이후퇴하면느이들은M-1소총으로날쏴라... 그대신느이들이 명령 없이 후퇴하면 차고 있던 군도로 뽑아들고 목을 치리다. 그리고 느이들은 중고등학교를 다 다녔고 복장도 미 작업복에다 소총도 우수한 M-1소총에다 식사도 인민군보다 더 잘 먹는다. 싸우다 탄알이 떨어지면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총검으로 찌르고 총검이 부러지면 입으로 물어뜯어라”는 훈시에 모두 감명을 받았다.
얼굴은팔자의카이젤수염에잠바스타일에철모는큰왕별이달려있고, 그리고 군인의상징인 일본도를 차고, 허리에는 유사시 자결용인 조그만 모젤 권총과 신발은 돌격 시에 신는 오가다비차림과 눈은 반작반작한 왕 눈에 나무랄 데가없는멋쟁이장군이다.


* 국가를 위해 용감히 싸워다오 행운을 빈다.


사단장 실에 불려간 나는“국가를 위해서 용감히 싸워다오 행운을 빈다.”는 격려의한마디를하달받고나는바삐공격준비를위해서둘렀다.
중대로돌아온나는아직어린채피지못한꽃봉우리들이아직총도제대로쏘아보지 못한 학생들이지만 싸우겠다는 의지가 보이며 서둘러 공격대기지점 에도착했다.
우선사병들에게안도감을주어야하기때문에우선훈련이안된학병을심리 적으로나는어려운일이있으면기도하라는말이떠올라먼저소대원들에“내 고향은공주인데나는이미각오한몸이다.” “내가이세상에없어도우리부모님을만나면국가를위해잘싸우다전사하 였다고전해주기바란다.”며각오를다졌다. 하느님저는이미각오하였습니다.
이병사들은다귀여운아들들입니다모두임무를수행하고모두무사하도록은 혜를베풀어달라고기도하는순간눈물이나오며내가선두에서공격할터이니 나를엄호하며뒤따르라고약속하고공격시작약2시간만에걸쳐적진앞에도 달우선수류탄을한발던지고한발을마저던지기위해수류탄안전핀을깨물어 뽑는순간포탄이먼저작열내몸은공중에둥실떠실신하게되었다.
순간 황금 찬란한 금빛이 눈앞에 스쳐가는 장면을 목격 앗 하고 소리치며 실 신되고말았다. 잠시후정신이들자수류탄생각이나정신을차리니배로덮치 고있는것이아닌가? 순간몸을굴렸다가일어나서돌격을하자뒤따르던소대 원들이함성을지르며고지점령임무를완수하기에이르렀다.


* 남편에게 주려던 떡보따리를 내던지고 울부짖는 미망인.


포항지구전투에서전상을입고부산제3육군병원에5개월간입원하는동안 병원은 부산 남일 초등학교는 전상환자로 인산인해로 복도까지 발 디들 틈도 없었다.
사방에서신음소리가진동하는아비규환문자그대로생지옥이다. 특히중공 군의 개입으로 야기된 1·4후퇴로 전상환자들은 환부가 얼어 새까맣게 썩어가 는 팔다리를 야간작업으로 톱으로 잘라낸 팔다리가 매일 3-4가마니에 담아 실 어내는참상은언론필설로는표현할방법이없다.
우선환자를들것으로실려오면잘라내지않는다고안심시키고마취후썩어 가는 팔 다리는 잘라내고 입원실로 돌아오면 마취에서 깨날 무렵이 되면 손이 잘려있고다리가없으면내다리를내놓으라고여기저기서고성통곡을한다.
그러다가결국힘이다빠져기진맥진하고지치다가그친다. 두다리무릎 관 절위를절단한환자를면회온젊은부인의경우울다가울다본인도모르게살
아도못살아하며실신하는장면, 시골에서면회온젊은부인환자들은가족이면회왔나하고운동장에서서성대다가한동네친구부인을만나내남편은어데 있느냐며물어보자슬금슬금피한다.
그이유는어제숨을거두고영현을모신천막에있으니피할수밖에없어못들어가게 말리지만 통할 일이 없다. 확인하고 남편에 먹이려고 가져 온 떡보다 리를 공중에 내던지고 꽁꽁 얼러붙은 운동장에 때굴때굴 둥그는 이 슬픔 뭐라 고하야되는지?
나는이런장면을보고더이상병원에머물수없어적과싸워야하겠다는일념으로 퇴원신청을 하였지만 미완치 상태라 안 된 다는데 결국 부산동래 온천에서일주일간요양후퇴원하기로하고정양원으로옮겼다.
나의전상부위는좌족관절및우하퇴부우골반부우흉부파편장이여서모두 기동 하는데 중요 부위다. 우 하퇴 부는 파편이 상위로 10cm 이동 우골반부는 파편이 네 개가 잔류중이며 불편하며 밤에는 통증이 심하지만 살아있다는 자체만해도행복하며감사할뿐이다.


*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수료후 대위로 진급 중대장이 되다.


정양원에서 요양이 끝날 쯤 해서 서울유격대 시절 같이 근무한 전우가 현재 우리부대가 창설중이니 같이 가자기에 따라간 부대가 제5사단 이였다. 전차공 격대대가 창설중이라 몸이 아직 불편하여 행정업무인 대대부관으로 근무하다 몸이불편하자이기회를이용하여육군보병학교초등군사반과정에입교수료후, 대위로진급중대장으로사병들의강병육성에정력을다하였다. 교육시한 사병이“전차가 나타나 3.5인지 로켓 포 발사 시 폭염과 흙먼지가 나면 적 전차 에서90미리직사포로쏘면우리는한방에날아가는데요.”한다.
그래서 정확히 전차의 무한궤도와 엔진부위를 명중시키고 재빨리 이동 하야 하는데이게쉽지않은일이며, 방법은딱하나대전차지뢰를등에메고호에대 기하고 있다가 전차가 나타나면 전차 밑에 기어들어가 전차를 폭파 하는 것이 며, 또한 전차가 통과할 지점에 미리 대전차지뢰를 매설 해놓고 기다리면 전차 들은우리를제일무서워한다. 라고철저히교육을시켰다.
그러나그후전차가나타나지않아우리임무의아쉬움만남기고직업전환을 하게되었다. 한동안소강상태였던통일전망대앞351고지에검은전운이감돌 기시작해연일밀고밀리는전투가계속이어졌다.


* 빼앗고 뺏기는 전투에 351고지가 5cm나 낮아졌다.


전차공격 대대는 해체되자 나는 제27연대 제55수색중대장에 보직되어 대원 들과 수색을 나갔다가 인민군 두 명이 침투 엄습하는 것을 사살하고 소지품을 조사하니 지리산 빨치산본부로가라는사령장을소지하고가던중 이었다.
우리 부대는 적이 공격하면 적의 측면으로 찔러서 공격 사살하는 역할을 해서 351고지 전투에서 27연대 예비대를 투입 사단에서 전투경험이
많은고참중대장4명을차출하여전투에나갔다.
53년1월에휴전이임박하였다는사실이감지 되였는데 왜 5사단을 전투경험이 부족한 ○○사단과 임무교대를 하였는지? 의문이다. 이 치열한전투로 351고지는 피아간 포격으로 5cm가 흙먼지로 공중에 날아갔을 거라 생 각을해보며치열한전투에서산화하신전우들의명복을빈다.
우리 중대는 351고지 옆에 무명고지에 배치되어 적이 351고지를 공격해오면 역습으로 몰아내고 그 일대를 수색하며 병력이 많이 손실될 경우 병력이 보충될 때 까지 지켜 주어야한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로 351고지하면 그 부근에서 가장전략적인고지다.
그렇기때문에산내부는요새화되어적이대대적인공격이감행될때는진내 사격 즉 배치된 병력은 신속히 진지내로 대피하고 시한포탄으로 고지상공에서 폭발하는 사격이 실시되며 동해안에 배치된 미 순양함에서도 함포사격과 예광탄으로지원사격도해주며한미협동작전이잘이루어진곳이기도하다.
351고지는 현동부전선의 가장 중요한 고지이며 김일성이도 351고지의 중요 성을강조한곳이다.
특히 휴전을 앞두고 서로 전략적인 요충지 확보에 혈안이 된 351고지가 52년 7월 10일 351고지가 북괴군에 탈취 되여 재탈환에 실패하자 전투경험이 많은 중대장으로 임명하고 당시 도요다 트럭을 야간 라이트를 켜고 고지 하단부에 진입 나갈 때는 소등하고 수차 반복 대병력이 투입을 기만 하여 7월 12일 재탈 환에성공하였고, 53년1월20일제5사단과○○사단과임무교대후중동부전 선으로이동후53년6월다시북 괴군에 피탈 6차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실패 결국은 351고지를 적에 내주고 후사 면으로 철수 하였다.
53년 1월 적과 피아간 치열한 전투 포격으로 고지 5cm가 흙먼 지로 날아간 상태라고하며 휴전을눈앞에두고왜사단의교대가이루어졌을까? 거듭의문이되는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비록 빼앗겼지만 이 351고지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먼저 산화 하신전우들에게삼가명복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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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고성 351고지앞의 최홍제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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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 탄환 작전 모습>


* 지리산 공비토벌대 중대장으로 전임되었다.


나는부대가임무교대전공비출현으로치안상태가불안한지리산지구공비 토벌부대가양양에서창설되자아쉬움을남기고지리산으로떠나야했다.
5사단은전투경험이많은부대인데중동부인화천에배치15사단과교체하였 다. 당시 윤필용 대위가“최 대위, 공비토벌 부대로 가. 너 여기 있으면 죽어! 그 러니 후방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나는“부대원과 맹세해서 갈수 없다.”라고 버텨보았지만발령이나서갔는데갈때책[보병대대교본]을가지고갔는데사 병이 그 교본을 찾으러 와서 하는 말이 부중대장이 중대장을 맡았는데 포탄이 떨어져전사했고, 당번병도호에있던여러전우가전사했다고말했다. 내가있었으면내가전사했을것이다. 순간에운명이바뀐것이다.
지리산 공비토벌 연대가 새로 창설되었다. 연대 부관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부관을안하고일선중대장으로나가겠다고했다. 육본직할로1~3대대7중 대장과2대대부대장이입원하여대대장대리를맡았다.
지리산 남원, 산청, 구례, 노고단에서 빨치산들이 양민을 잡아다 경찰과 내통 한다고잡아다목을자르고나무와나무사이에줄을걸고매달아놓았다.
빨치산을 잡으려고 지리산을 이 잡듯 헤집고 다녔다. 땅속에 굴을 파고 위장하고 그 속에 살면서 낮에는 숨어살고 밤에는 마을에 내려와 약탈한다는 정보를 받았다. 생포해야하는데 생포하면 잡힌 놈들이 수색안하고 햇볕만 쬐고 이만잡더라하고일러바치면지휘관이문책을당한다. 생포하면나도죽을수있으니피해방지를위하여사살하라고명령하달하였다.


* 소령으로 예편한 후 내곡리에서 보따리를 내려놓고 살게 되었다.


내가 양양과 인연이 된 것은 양양 사람들은 전쟁터로 다 나가고 남자가 없을 때인데공비토벌을하려고서면지역에서작전을수행하기도했었다.
그런데 마을 이장이 병이 나서 군의관을 불러 주려고 하다가 그보다는 강릉 병원에가면낫겠다싶어마침강릉병원으로가고자했으나그아버지는“군의 관이고치는병이아니고딸을보면병이나아지겠지”하여그때마침강릉병원 의 간호사인 그의 딸이“원장님 저를 집으로 보내주세요”하고 부탁하여 2박 3일 동안 집으로 보내주어서 지프차에 태워 오가면서 정이 들어 잘 해보라 해서 아버지가날짜를잡아서결혼하였다. 그리고공비토벌때도아내와같이갔다. 공비가족도치료해주고약도주고 담요도 주었더니 공비가 가족이 걱정되어 와 보니 현실이 좋아 귀순한 사례도
있었다. 그후아내는비전투대원참전자로지정되었다.
1960년 12월 30일 소령으로 예편하여 내자가 외동딸이어서 내곡리에 보따리 를내려놓고살았다.


* 30대초반에 2년간 양양면장을 지냈다.


1961년6월초순강원도지사가양양면장에임명하여2년간근무하였다.
그 당시 지방자치를 할 때인데 월급도 재대로 못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루 는 상급부서에서 시찰을 나와 보고서를 차드로 작성하여 브리핑을 잘하였더니 만누군가가새파란놈이와서면장을한다고말이있었다.
나는“야! 우리같은군인들이죽기로싸워서이나라를찾은거야”호통을치 며당당하게2년간근무를한후보안사일도하였다.
퇴임후김인기국회의원이도와달라고하여국회에가서비서관을4년간근 무하며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 하는 업무를 하였다. 양양에는 월북자가 많아 강 릉에끌려갔는데이사람은그럴사람아니라고설명해주기도하였다.
상훈으로는화랑무공훈장외다수의훈장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