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19. 여운포 들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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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62회 작성일 2016-03-2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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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운포 들판이


유승일 (남, 81세, 양양읍 남문4리)

면담일 : 201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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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13 수해가 나서 여운포 들판이 휩쓸렸다 .
6 · 26 동란이 터지자 하루는 세포위원장이 와서“제국주의자들이 폭격이 심하니 삽이나 괭이를 가지고 나오시오 ! ”라고 하여 따라갔다가 영

문도 모르고 인민군에 들어갔다가 기회를 보다가 탈출하여 유엔군에게 투항해 서울서 유엔군 버스로 부산을 가서 LST 배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도착 2 월부터 수용소 생활이 시작하다가 , 나중에 육지 지역인 여수 , 광주 , 논산 , 마산 , 부산 , 부평으로 갈라 수용하였는데 나는 광주에 수용되었다 .


1953 년 6 월 18 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 명령으로 수용소를 뛰쳐나왔다 . 새벽에 갑자기 나오니 갈 곳이 없어 민가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마을 이장을 찾아가니 경찰서에서 연락이 되어 도와주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 다 .

집에 돌아와서 얼마 후 9 · 13 수해가 나서 여운포리 들판이 휩쓸렸다 . 산에서 목상들이 쌓아놓은 목재들이 떠내려 와 여운포리 , 상운리 , 동호리 , 중광정리 주민들은 나와서 떠내려 온 목재를 주워 겨울 화목을 하였다 . 이때 남대천 다리도찰랑 찰랑하였다 .

양양 장에 다닐 때는 걸어서 다녔는데 마을마다 장에 팔 물건을 이고 지고 걸어가는데 마을마다 모여 길을 메웠다 . 여운포리에서 홍성철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1 만평을 농사하는 부잣집이었다 . 그가 장 구경하러 가자고 하면 감자 2 말을 짐을 만들어 지고 걸어서 양양에 가면 1 말에 100 환에서 200 환을 팔아 밥 먹고 술 먹고 저녁 어두컴컴할 때 동네 주막에 들러 왜면 국수 먹고 왕소금에 막걸리 술을 부어 마시고 그랬는데 그때는 그것이 삶이자 낭만이었다 . 몇 십리를 걸어 다녀도 멀다 생각지 않고 다녔다 . 지금은 다리건너 월리만큼 걸어도 멀다하지 않은가 !


1953 년 9 · 13 포락으로 상운 벌은 피폐해졌다 . 나는 수해 직후 양양으로 왔다 .

그때 제방은 현재 남문리 빗물펌프장까지만 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나면 양양시내도 물이 휘돌아 흘러 피해가 심하였다 . 나는 제방공사에 학꾸띠기 [ 비속어 : 개인이 사각나무판자통에 흑을 채우는 일 ] 일을 하며 임금을 받고 제방공사를 하였다 . 양양에는 형님도 있었다 . 형님도 총각으로 직업이 없이 친구와 하숙을 하고 있었다 . 두 분은 켈로부대 (8240 부대 ) 에 3 년 계약하고 입대하였다가 해산되어 현역으로 복무하고 제대하여 있었다 . 후에 친구 분 인 김귀연 씨는 영어 교사가 되고 형님은 학교 서무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


- 광목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고 군복을 염색하여 팔기도 했었다 .

형님에게 오니“승일아 너 학교에 다녀야지”하여 형님을 따라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쳐서 2 학년에 편입시켜 주셨는데 그때 강진천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셨다 . 나는 북한에서 고급 중학교 2 학년을 다니다 말았었다 .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어서 찬찬이 생각해 보니 포로수용소에서 통역관을 하면서 포로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백상락씨 이었다 . 수용소에서 모두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이놈아 하라면 했지 , 말이 많아”하던 그 사람이 영어 선생님이 되어 계셨던 것이다 .

학교 다니면서 동창생 집인 중앙포목점 물건을 지게로 장에 팔 물건을 지고가서 자리를 잡고 작대기를 세워 광목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다가 비가 오면 파장을 했고 또 군복을 염색하여 팔았다 . 장날만 장이 섰다 . 금강상회 , 민천상회 , 형제상회 등이 있었는데 그때 양양시장은 강원도의회 의원을 지낸바있는 박융길씨 숙부가 판자 집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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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 모습 195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