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15. 첩보부대가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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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08회 작성일 2016-03-2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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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첩보부대가 침투


손봉만 (남, 92세, 양양읍 청곡2리)

면담일 : 201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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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단을 결성하고 4863 첩보부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

가평리에서 출생하였다 . 양양소학교를 16 회로졸업하고 춘천농업학교 5 년을 졸업하여 1942 년 양양군청에 근무하다 해방이 되었다 .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어 프로레타리아 정책 수법을 알고 이를 싫어한 이복길 , 박세각 , 손봉환 등은 새 천지를 만들려면 월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47 년 38 °선을 넘었다 . 우리는 세계 2 차 대전 후 미국의 민주주의를 알고 있었다 . 우리는 남한에서 정착하려고 가족을 데리고 왔다 .
1950 년 전쟁이 났다 . 원주에 살 때 함기성 ( 전 국회의원 함종빈 부친 ) 이 군수를 하였는데 재향 양양군민이 똘똘 뭉쳤다 . 그 때 공산당 지하조직이 대단히 방해를 하여 한 달 간 피해 다니기도 했다 .

우리는 원주에서 이복길 , 박세각 , 손봉환과 대관령을 걸어서 양양에 들어와 청년단 읍면지부를 결성하는데 200 명이 조직하여 제 1 군단 수도사단 제 1 연대의 민사처의 지원을 받아 함흥기 , 이인영등과 교육을 시켰다 . 겨울이 돌아와 1 · 4 후퇴를 하는데 눈이 많이 내려 어려웠다 .


1951 년 5 월 1 일 G2 HID 가 4863 부대 첩보대로 개편되었다 .

민간인 신분으로 적정 탐지 과업을 받았다 . 기관총과 대포 등의 화기교육을 1 주일 받고 침투 , 양양 사람들이 고향 친척이 있고 산악 지형에 익숙하여 전과를 올려 칭찬을 많이 받았다 . 특히 박세각씨는 Korea Army( 한국육군 ) 첩보 넘버를 부여받고 활동하였다 .


- 민정관 박종승씨의 민사처 첩보 제공으로 첩보부대가 침투하였다 .


1952 년 군정당시 박종승씨가 민정관으로 있는 민사처에서 작전에 도움이 되는 첩보를 제공하여 , 1952 년 5 월 30 일 고성지역으로 전 부대가 침투하였다 . 발동선 3 척 , 목선 2 척 , 명칭은 수도지대였다 . 고성 봉수리에 진을 치고 2 박을 했다 .

만약 포로가 되면 신분이 공개되니“민간인으로 잡혀와 노역된 사람이다 . ”라고 하라고 했다 .

고성 남강 다리에서 2 일째 되는 날 밤 징후가 좋지 않았다 . 그때 조명탄이 올라갔다 . 새벽 4 시 40 명이 습격을 받아 후퇴하는데 육군 중위가 전사하고 16 명이 부상이 났는데 , 그 중에 이복길도 부상을 당했다 . 우리는 평소 군사훈련으로 군사 작전과 응급처치법 등을 배워 민첩하게 응급처리를 했다 .


100 고지인 봉우리에서 대피했는데 시간이 안돼서 집중사격을 받았다 . 통신병이 수도사단에 알렸다 . 해군 함대와 연락이 되어 조명탄이 올려주어 간신히 빠져나오는 도중에 인민군이 배에 사격을 가해왔다 . 전사자는 목선에 덮어서 나 왔다 . 이복길 대원과 부대장이 팔에 관통상을 입어 군사훈련에서 배운 대로 옷을 찢어 지혈을 하고 나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 미 해군 함대가 3 척이 나타나 고성 봉수리에 함포사격을 할 때 현역 하사와 둘은 ( 포항고 2 년 ) 영어를 배워 글씨는 알아도 대화는 안 되었다 . 함대에 오르니 우선 작전 5 만분의 1 지도도 보고 지형설명 , 정보 보고서를 작성해 주니 고맙다고 했다 .

새 군복을 받았는데 커서 걷어가지고 입었다 . 함포사격으로 외곽을 쏘니 아니라하니 알았다고 하며 외곽부터 쏘아대고 나중에 중앙을 쏘려고 했다고 했다 . 거진으로 우체국으로 와서 중위 , 대원 3 명과 밤중에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니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나가 살펴보니 , 전사자를 화장하여 가정으로 보내 난후 지대장이 지프차 타고 왔다 .

상부에서는 사단 위치보다 너무 깊이 들어가 작전을 했다고 김광 지대장이 징계를 받았다 .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징발되어 27 세에 들어가 30 세에 나왔다 . 특수임무 법령으로 박세각 등 5 명이 국가 유공자가 되고 2004 년 위로 보상금을 받았다 . 반면 나머지는 유공자가 안 되어 재심청구를 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