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12. 하루에 쌀 2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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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53회 작성일 2016-03-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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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루에 쌀 2 되


이주희 (남, 78세, 손양면 수여리)

면담 : 201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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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는 살 수 없어 굴을 파고 온돌을 놓고 1 년 동안 살았다 .
1950 년 6 · 25 한국전쟁 당시 나는 14 살 이였고 양양 초급 중학교 2 학년생이었다 .


6 월 25 일 10 시경 동네 인민위원회장이 우리 군대가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주문진까지 진격했다고 알렸고 , 양양에는 38 경비대 3 대대와 4 대대가 주둔해 있었고 남한은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


1950 년 전쟁 중에도 학교 공부는 9 월까지 하였다 . 양양초급중학교에 미군 폭격이 있어서 양양인민학교 뒤 밤나무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추석이 가까울때 각 면으로 분산하여 다녔는데 나는 손양으로 다녔고 , 조산리 아이들도 같이 며칠간 공부하다가 현북중학교가 폭격에 맞아 학생들이 많이 죽어 선생님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하여 집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도하고 벼 추수도 도와 드렸는데 , 농사짓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

함포사격이 심해지면 학포 산골짜기에 들어가 2 일 동안 피란하였다 . 함포사격이 심해져 집에서는 살 수 없어 굴을 파고 온돌을 놓고 1 년 동안 살았다 .


- 부역을 나가서 하루에 쌀 2 되를 받았다 .


1951 년부터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미시령 닦는 데 인부로 나가라고 하여 면사 무소에 가니 소령이 인솔 책임자로 왔는데 인원이 모자란다고 나이 많은 면장 에게“권총으로 쏴 죽이지도 못하고 애가 난다 . ”고 하며 인부들을 더 모으라고 닦달을 하였다 . 미시령에 가서는 발파 후 돌 , 흙을 치우는 일을 했다 . 아침에 차를 가지고 와 태워가고 저녁이면 태워다 주었다 . 큰 장비는 없고 부대에서 삽과 괭이를 준비해주었다 . 7 번 국도를 닦는데도 여자들이 인부로 나가 일을 하였다 .

마을에서 평균을 처서 많이 나간 집은 쌀을 하루 2 되로 처서 받고 덜 나간 집은 쌀을 내 놓았다 . 당시 농촌 품값은 1 일 쌀 3 되 , 가을 품값은 5 되씩 하였다 . 머슴이 1 년 동안 일하고 받는 새경은 4 가마이었으며 , 잘하는 머슴은 쌀 7 가마 이상을 받는 머슴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