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4. 군정의 필요성(軍政必要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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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95회 작성일 2016-03-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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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군정의 필요성(軍政必要性)


미군정이 시작되던 1951년 7월 4일 유엔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지역은 강원도의양양군과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화천군, 철원군, 김화군과경기도2개군의 연천군과 북포천군이다. 그 지역 가운데 전선과 접하지 않은 양양군에만 민간인들이 거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양양지역에만 군정을 실시했던 것일까? 좀더구체적인군정실시의필요성을알기위해서1952년38°이북지역인 양양과 속초지역을 방문했던 첩보원‘오스본(J. Osborne)’의 보고서를 보자 18) 이 보고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점령과 통치의 목적은 한마디로 각종‘실험’ 이다. 즉주한미군은그지역에대해정보실험과교육실험, 공산주의행정연구, 피폐한 지역 재건 등을 목표로 군정을 실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군사전략적 거점(軍事戰略的據點)


미군정(美軍政)이실시된이유는크게두가지로집약된다. 첫째는이지역이 군사·전략적거점의중요성이며, 둘째는과거공산주의지역의사회주의요소 제거 및 재건문제에 대한 실험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군사 전략적 거점으로서의후방군수지원을위한특성은수많은인구를필요로했고동시에군정의 실시를필요로했다.
속초에서원산에이르는동해전선에는미제8군사령부제10군단을비롯한국군1군단사령부, HID 동해사령부, 해병대, 커크랜드(Kirkland)특수
임무부대, 아벤리(Avanlee)부대, 토치라이트(Torchlight)부대, 켈 로(KLO)첩보부대 등과 같은 미군과 국군유격대가 주둔 해있었 다. 따라서 적게는 몇 만 명에 달 하는 군인들이 속초를 거점으로 동해안지역에 급작스럽게 배치되어 군부대 지원할여 러종류의 민간인 군노무자가 필요했다.
속초에는100여단 군노무단 부대(부대장오광선대령)가 창설되어 몇천명이 복역(服役)하다가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9월에야 해산되었다. 노무부대는 수송, 보급, 잡역을 겸한 1인 3역을 담당하였으며 전후방에서 국군뿐 아니라 미군에도 배속되어 수많은 탄약과 식량, 무기를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특히 무더웠던 날씨에 치러졌던 산악고지전에서 매우 중요 한역할을했다.
노무단소속의 노무자외에도 속초의 미10군단 은급작스럽게 4곳의 부두를 만들어 미군의 군수 물자를 운반할 수 있도록 했다.(엄기호 증언 재인용) 하역 및 운송을‘상호운수주식회사’라는 미군의 용역하청회사가 담당했다. 이 회사에는 평균500~600여명의 노무자가 고용되었다.
노무자의 70~80%는 월남인(피난민) 이었으며 국군1군단도 수많은 민간인들을 임의로 고용했다. 1951년 7월 4일부터 양양군에 미군정을 실시하였지만 원 주민(原住民)이 아닌 타 지역민들은 임의로 양양군에 진입할 수 없도록 통제되 었고 연고없는 이주민들은 추방당하는 일도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그런데도 군부대는 군 후생사업(軍厚生事業)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 들을 고용하게 되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월남인[피난민]들이 포함되었다. 민간 인들의 임무는 첫째 군부대의부식으로 쓸 어류를 잡아주는 일, 둘째 원산앞 여도, 함북의 성진 앞 양도 등의 도서에 주둔해 있던 국군이나 유격대, 첩보부대 등에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일, 셋째 육군첩보부대(HID)나 미군부대, 육군 소속 첩보부대 활동을 지원하는 일, 즉 첩보원들이 북한지역에 침투 하거나 작전을 수행한 후 돌아올때 배로 실어주는 일 등이었다.19)
월남인[피난민]들이 1951년 이래로 양양군으로 들어오게 된것은 바다와 관련 된‘군후생사업’의 특성과 관련이있다. 일제 강점기 양양 군속초에는 어업종사자는20% 미만이었으나 그들에 비해 농업종사자 는68%로 훨씬 더 많아 속초는 농업지역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955년 직업별인구를 보면 속초 전체인구 2만 3,699명 가운데 농업인 구가4,901명(20.7%) 어업 인구는5,666명(23.9%)이었다.20)
특히월남인[피란민]들이주로거주했던속초청호동의경우에는거주민의과 반수가어업에종사했다.
양양군에 수많은 군부대가 들어오자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동해안 전선에 전직어부출신의 노무자들을 필요로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있는 노무자로서 월남인(피난민)의 상당수가 충원되었다. 또한 양양군, 특히 속초가 군사전략적 거점이 되자 그와 동시에 수송산업과  같은  기간산업이나 군인, 민간인을 상대로 한 상업 등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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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군노무자 활동>



2) 사회주의사상 순화(社會主義思想醇化)


종래공산주의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적성(赤性)을 제거하고 순화시키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실시하려는 기획은 군정을 요구했다. 유엔이 점령한 38°선 이북 양양지역은 역사적으로 3·1운동으로 민족사상이 급진적으로 팽배하여 주민의 자주정신은 계몽되어 군내 청년회와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순수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였으나, 소련에 유학파가 귀국하면서 사회운동은 소련 예찬파가군내모든기관을점유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이 주민에게 파급되어 있었다. 이렇게 5년간 사회주의 혁명[민주개혁]을 맞던 중 한국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1946 년 토지개혁을 통해 5정보 이상 되는 지주의 토지는 모두 무상 몰수되어 모든 농민에게일정한점수에따라무상분배되었다. 또한한인소유중소규모상업 이나 수공업의 경우에는 개인소유가 허용되지만 일본인이 소유했던 산업의 경우에는 국유화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일부 지역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북한 영토를 점령하고자 희망했던 유엔군이나 이승만정부로서는 점령지역 주민을 어떻게순화시킬것인가가중요한사업이되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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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J.Osborne, "Field Report on Yang Yang Gun. North Korea"Liaison Officer.USIS.1951.),pp. 19~222.김귀옥 위의 글 재인용“나는 이 지역이 많은 정보실험과 교육실험이 수행될 수 있는 곳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곳을 계속해서 공백지역으로 내버려두는 상태에 대해 의문시한다. 물론 그 곳은 철의 장막이 몇 마일 뒤로 밀리게 될 러시아제국의 주변부에 속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행정연구와 공산주의 지역의 재건을 위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19) 김귀옥『, 경제와 사회 여름호』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2000. 손봉만(남, 90세, 청곡2리), 면담 (2015. 4. 17)
20) 『읍세일람』(속초읍난민구호상황, 1955. p. 14)
21) 김귀옥『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총서[12]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p. 198~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