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8호

문화가 있는날 행사(양양600년의 꿈을 찾아서) : 양양의 명칭과 성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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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89회 작성일 2017-03-1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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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명칭과 성씨 유래

朴道植


양양은 예로부터 익현(翼峴), 이문(伊文), 익령(翼嶺), 덕녕(德寧), 양산(襄山), 양주(襄州), 현산(峴山) 등으로도 불렸다. ‘양양(襄陽)’은 본래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수연안(漢水沿岸)에 있는 지명이었다. 그러면‘양양’이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불렸을까? 이에 대해서는 태종 16년(1416)에 양양(襄陽)으로 개칭됨으로써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런데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세워진 『충선왕비순비허씨묘지명(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에‘양양군(襄陽君)’이라는 봉작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양양이라는 명칭은 태종 16년(1416)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금년은‘양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양양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본 강의에서는 양양의 역사 연혁과 명칭 유래, 그리고 양양지역의 성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양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1. 양양의 역사 연혁

양양은 오랫동안 독특한 문화를 간직해 온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동안 학계의 역사적 유적·유물에 대한 지표조사와 발굴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양양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철기시대의 단계로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양양에는 도화리의 구석기유적, 오산리·지경리·가평리의 신석기유적, 포월리와 범부리의 청동기유적, 가평리의 철기유적 등 선사시대의 문화 흔적이 확인된다.
영동지역 일대는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漢)의 임둔군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군현 경영의 어려움으로 인해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의 15개 현 가운데 일부는 현도군에 이속되고 나머지는 폐지되었다. 그 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자, 현도군에 이속되었던 현 가운데 단단대령의 동쪽 영동7현은 새로 설치된 낙랑동부도위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가 낙랑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중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정치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양양에는 동예(東濊)라는 초기국가가 있었다.
동예에 대해서는 3세기 후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동예의 위치는 북으로 함경남도 정평에서 남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에 걸치는 동해안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이 형성되면서부터 영동지방은 신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차례로 받기 시작한다. 신라는 일찍부터 영동지방으로 진출해 오기 시작하였다. 양양일대가 언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시기는 내물왕 42년(397) 이전의 어느 시기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북변의 하슬라(何瑟羅, 강릉)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이 죄수들을 놓아주고 1년 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내물왕대(재위 356∼402)에 신라는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가 377년에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할 때 고구려의 사신과 동행한 것이라든가, 381년에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위두(衛頭)를 파견한 것, 고구려와의 우호의 대가로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낸 것은 이를 말해준다. 400년에 왜병이 신라 왕경을 침범해왔을 때에는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광개토왕은 왜병을 격퇴한 후 그 군대의 일부를 신라 영토 내에 계속 주둔시켜서 왕위계승과 같은 신라의 내정(內政)에까지 간섭하였다. 『충주고구려비』에는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인 당주(幢主)가 주둔하며 군사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눌지왕대(재위 417∼458)에 들어와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이에 대비한 나제동맹의 체결 이후 양국 사이에서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눌지왕 34년(450, 장수왕 38) 7월에 하슬라 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고구려의 변장을 실직(悉直) 들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신라왕이 사과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그후 자비왕 7년(464 장수왕 52)에 신라군이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인 100명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양국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는 장수왕 56년(468)에 말갈 군사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장수왕 69년(481, 소지왕 3)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동해안 일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삼국사기』지리지에 통일신라 때 명주를 구성한 간성·고성·영덕·흥해·울진·청하 등 동해안 지역과 임하·영월 등 영서의 일부 지역들이 본래 고구려의 군현(郡縣)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양양은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하였고, 동산(洞山)은 혈산현(穴山縣)이라 하였다.
신라가 고구려에 빼앗긴 동해안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것은 6세기 초 지증왕 때 와서이다. 지증왕 6년(505)에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실직주를 설치하고 거기에 신라에서 가장 명망하는 인물인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파견하였고, 7년 후에는 실직보다 북쪽에 위치한 하슬라주(강릉) 군주로 파견하였다. 진흥왕 17년(556)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 성종(成宗)을 그 군주(軍主)로 삼았다. 그러나 비열홀주가 설치된 지 12년 후에는 이를 폐지하고 달홀주(達忽州, 지금의 고성)를 설치하였다.
무열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의 통일전쟁은 문무왕 때에 이르러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그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의 영토 모두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게 되어 영토와 인구가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신라의 중대 왕실은 신문왕대(재위 681∼692)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9주의 분포를 보면, 옛 고구려 땅에 3개 주, 옛 백제 땅에 3개 주, 소백산맥 이남 원래의 신라 땅에 3개 주를 두었다. 오늘날 강원도는 삭주(朔州)와 명주(溟州)에 속해 있었는데, 영동지방은 명주에 속해 있었다.
명주는 강릉을 주치(州治)로 한 직할지와 곡성군·야성군·유린군·울진군·내성군·삼척군·수성군·고성군·금양군 등 9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에서 보면, 영동지방 대부분과 평창군·영월군·정선군, 경상북도 북부의 해안쪽 대부분, 함경남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금의 양양은 익령현(翼嶺縣)으로 편제되었으나 독립된 현이 아니라 수성군(守城縣)의 속현(屬縣)이었다. 수성군은 관할 영역은 오늘날 고성군에서 양양군까지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라말 이래 강력한 지방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초기에는 한동안 지방세력의 자율적 지배를 인정했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정부의 의사를 지방에 직접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초에는 다만 서경(西京,평양)을 비롯한 몇몇 요지에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조세수취를 위해 금유(今有)·조장(租藏)과 전운사(轉運使) 등으로 불린 비상주 관원을 파견하였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50년 가까이 지난 성종 원년(982) 6월에 주요 거점지역에 12목(牧)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12목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해주·진주·상주·전주·나주·주·황주였다. 성종대에 12목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민정적(民政的) 지방행정관 파견의 시초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이는 지방 호족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에 나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강원도 지역은 12목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지방호족의 세력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 14년(995)에는 처음으로 전국을 10도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12목이 설치되었던 큰 주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이보다 작은 주에 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鍊使)·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목종 8년(1005)에 절도사만 남고 양계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단련사·단련사·자사는 혁파되었다.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양양은 익령현으로 삭방도(朔方道)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현종 9년(1018)에는 전국을 5도와 양계(兩界)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을 위시하여 군(郡)·현(縣)·진(鎭)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형태로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5도의 위치와 관할지역 범위는 양광도가 지금의 경기도·충청남북도와 강원도 영서지방의 남부지역 일부를 포함하며, 경상도가 지금의 경상남북도, 전라도가 지금의 전라남북도, 교주도가 지금의 강원도의 영동지방을 제외한 영서지방의 대부분 지역, 서해도가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었다. 양계 중 북계(北界)의 관할 범위는 천리장성 이남의 평안남북도 지역이었고, 동계(東界)의 관할 범위는 지금의 영동지방 대부분과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남 지역이었다.
동계의 관할 하에는 1도호부(都護府)·방어군(防禦郡)·10진(鎭)·25현(縣)이 있었는데, 25현은 주현이 8곳이고 속현이 17곳이었다. 익령현(양양)은 동계의 행정구역 가운데 준남도지역에 속해 있었다. 동산현은 본래 고구려 혈산현(穴山縣)이었으나 통일신라 경덕왕 때 동산현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속현으로 하였던 것인데, 현종 9년(1018)에 익령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익령현은 고종 8년(1221)에 몽골군을 격퇴시킨 공으로 양주(襄州)로 승격되었으나, 고종 44년(1257)에 적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덕녕현(德寧縣)으로 격하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원종 원년(1260)에 다시 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는 태종대를 전후한 15세기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고려의 다분히 신분적이고 계층적인 군현체제를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속현과 향·소·부곡 등 임내(任內)의 정리, 규모가 작은 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등 지방제도의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은 토지와 인구의 규모에 따라 주·부·군·현으로 구획되었고, 거기에 대응하여 부윤(종2품)0104대도호부사(정3품)·목사(정3품·부사(종3품)·군수(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양양은 태조 6년(1397)에 태조 이성계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종3품의 읍격(邑格)인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태종 16년(1416)에 양양(襄陽)으로 개칭됨으로써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양양도호부는 광해군 10년(1618)에 역난(逆亂)에 연루되어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원년(1623)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인조 6년(1628)에 역난으로 재차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15년(1637)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정조 7년(1783)에 역적 이경래(李京來)가 양양 임천리에 거주하였던 사람이라 하여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강원도를 대표하던 강릉과 원주가 정치적·사회적 사건으로 일시 격하될 때에는 도의 이름을 원주와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원양도’, 또는 강릉과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강양도’로 바뀔 정도로 도를 대표할 만한 위치로까지 부각되었다.
강원도의 도명은 태조 4년(1395)에 도내의 거읍(巨邑)인 강릉의‘강(江)’자와 원주의‘원(原)’자를 취하여명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릉과 원주의 읍호 승강(昇降)에 따라 도명이 무려 10여 차례의 변경과 복칭이 반복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불효(不孝)·패륜(悖倫)·역모(逆謀) 등 강상(綱常)에 위배되는 중죄인이 발생하였을 때 그 죄인 뿐 아니라 그 지방 군현의 등급까지 강등하였기 때문이다.
현종 8년(1667)에 강릉지방에서 박귀남(朴貴男)이라는 사람이 전염병이 걸리자 그의 처와 딸, 사위가 공모하여 그를 산곡(山谷)에 생매장한 일이 발각되어 딸과 사위는 처형되었으며, 부사는 파직되고 강릉대도호부는 강릉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리하여 강원도는 강릉의‘강’자를 빼고 대신 양양의‘양’자를 취하여 원양도로 개칭되었다가, 9년 후인 숙종 2년(1676)에는 다시 강원도로 복구되었다. 숙종 9년(1683)에는 원주에서 강상죄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강원에서‘원’자를 빼고 양양의‘양’자를 취하여 강양도로 개칭되었으나, 동왕
14년(1688)에 양양이 역적의 태향(胎鄕)이라고 해서‘양’자를 빼고 춘천의‘춘’자를 넣어서 강춘도로 개명되었다가 동왕 19년(1693)에 이르러 강원도로 복구되었다. 이같은 읍호(邑號)의 승강(昇降)으로 도명의 개칭은 있었지만, 도명은 대개 10년 이내에 복구되었다.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전국이 23부로 편성되면서 강릉부 관할 양양군으로 편제되었다. 1896년 다시지방관제가 개편되어 전국이 13도로 나뉘자 강원도 관할 양양군이 되었다. 1919년 5월 15일에는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바뀌면서 그 관할 하에 있던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45년 광복되면서 현남면·현북면과 서면의 일부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 21일『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현남면은 명주군에, 현북면과 서면은 양양군에 복귀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는 속초읍이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어 나가고, 죽왕면·토성면이 고성군에, 명주군 현남면이 양양군으로 환원되었다.


2. 양양의 명칭 유래

조선초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와『고려사』지리지에는 다수의 지명별호가 나타난다. 전자에는‘순화소정(淳化所定)’·‘성종십년신묘소정(成宗十年辛卯所定)’·‘성종소정(成宗所定)’의 별호로 되어 있고, 후자에는‘성묘소정(成廟所定)’의 별호로 되어 있다. ‘성종소정’은 성종 때 제정된 군현의 별칭인‘성묘별호(成廟別號)’를 나타낸 것인데, 이는‘순화별호(淳化別號)’1)와 같은 성격으로 파악된다.
성묘별호의 제정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 경기 광주목 세주(細註)에“성종 10년(991) 신묘에 주군(州郡)의 별호를 정하였는데, 광주를 회안(淮安)이라 한 것은 곧 송나라 태종 순화(淳化) 원년이다. 뒤에 무릇 순화에 정한 바라 한 것은 모두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고려사』지리지에는 광주의 별호를‘회안(淮安)’이라 한 점은 같지만 군현 말미에‘성묘소정(成廟所定)’이라고 부기되어 있을 뿐이다. 이 때의 개편에 대해『고려』에는 성종 11년에“주부군현(州府郡縣)과 관역강포(關驛江浦)의 명칭을 고쳤다”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성종 10년이라 한 것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의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즉위년칭원(卽位年稱元)으로 인한 오차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성묘별호의 제정은 성종 11년이라 본다.
성묘별호는 대개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아화(雅化)된 명칭이었다. 예컨대 경주는‘낙랑(樂浪)’, 춘천은‘수춘(壽春)’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묘별호의 제정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려 성종대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종대에는 유교적 체제확립과 중국제도의 수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경관(京官) 5품이상의 신하들에게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을 대부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유교정책을 펴 나갔다. 성종은 즉위년(981)에 팔관회를 폐지하였고, 성종 2년(983)에는 처음으로 적전례(籍田禮)를 지냈으며, 성종 7년(988)에는 오묘(五廟)제도를 정하였다. 성종 10년(991)에는 토속신앙을 줄이는 사직제(社稷制)를 마련하였다. 성종의 유교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은 종묘(宗廟)·사직(社稷) 등을 설립하고 여기에서 유교의례에 따라 국가의식을 거행했다는 점이다. 고려말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제현이 성종의 치적을 평가하는 가운데“입종묘 정사직(立宗廟定社稷)”을 제일의 업적으로 꼽았던 것도 이에 기인하는 바이다.
고려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당(唐)이 멸망하고 5대(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교체되고 주변지역에서는 10국의 흥망이 거듭되는 혼란기였다. 고려와 중국과의 통교는 고려 태조 6년(923)경에 후량과의 교빙이 열리기 시작하여 그 후 후당과도 교빙이 자주 행해졌다. 후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취하여 960년에 건국된 송(宋)과 고려와의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광종 13년(962)이었다. 그것은 고려 측에서 광평시랑 이흥우(李興祐)를 파견한 데 대해 송이 이듬해 책명사(冊明使) 시찬(時贊)을 보내 답빙(答聘)함으로써 열리게 되었다. 성종대의 외교는 12년 5월 거란 침입이 있기 전까지 송나라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양국간의 교섭은 공식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비공식적 혹은 무역을 통한 접촉도 매우 빈번하였다. 그 과정에서 송의 문물이 활발히 입수되어 집권세력이 주도한 유학적 체제정비의 방향이 중국을 모델로 삼은 화풍(華風)의 형태로 추진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성묘별호는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성종 때 중앙에 진출하여 있던 관인들이 당대(唐代)의 군망(郡望, 어느 지방의 명망 있는 가문)정책을 모방하는 선상에서 그들의 출신(出身) 기반의 명칭을 등재하여 둘 필요에서 성묘별호를 추진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성묘별호는『고려사』지리지에 모두 53개가 기재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모두 47개가 기재되어 있다. 전자에는 없으나 후자에 기재되어 있는 별호 2개를 합하면 모두 55개이다.
성묘별호가 부여된 곳의 읍격(邑格)은 대개 주(州)였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29비(妃) 출신지로서 주(州) 이상의 지역은 성묘별호가 있었다.2) 성묘별호가 수록되지 않은 주(州)들은 다음의 몇 가지 근거를 통해 성묘별호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고려사』식화지 조운조에 보이는 성종 11년의 조선 수경가(漕船輸京價) 기사와 성종 14년 주-현체계 하에서 사용된 현명(縣名)이다. 성종 11년의 조선 수경가 기사는 조운이 이루어지는 각 포구에서 개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수송비를 10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규정한 것이다. 이 기사에는 해당 포구의 소재지가 군 또는 현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명칭 중에는 성묘별호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성종 14년의 군현제 개편에서는 절도사·단련사·자사 등의 외관이 주(州) 단위로 설치되었는데, 이들 주(州)는 대개 성묘별호를 가지고 있다. 이상의 명칭 중에는 성묘별호가 직접 반영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성묘별호를 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수경가 기사는 주로 경상남도에서 황해도 이르는 연해지역과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역에 한정되어 있어 양양의 성묘별호를 추정할 수가 없다. 양양의 성묘별호는 봉작명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봉작은 종실(宗室)과 이성제군(異姓諸君)에게 수여되었다. 종실에 대한 봉군(封君)은 태조 때부터 등장하고, 이성(異姓)에 대한 봉군은 경종 5년(980)에 최지몽(崔知夢)이 동래군후(東來郡侯)로 봉해진 것이 최초이다. 종실에 대한 봉작은 주로 개성국공(開城國公)·진한후(辰韓侯)·낙랑백(樂浪伯)·평양공(平壤公) 등 국명 내지 지명과 연관된 공·후·백의 봉작명이 주어졌고, 이성제군에 대한 봉작은 동래군후(東來郡侯) 청하현개국남(淸河縣開國男)과 같이 군현과 연관된 공·후·백·자·남의 봉작명이 주어졌다.3) 고려시대 자료에서는 정식지명이 봉작명에 쓰인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성묘별호가 쓰인 것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양양이라는 정식 명칭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양양부’라고 칭하면서 비롯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봉작명으로 양양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① 황원(皇元) 후지원(後至元) 원년 을해년(충숙왕 복위4, 1335) 모월 모일에 고려국왕의 순비(順妃)가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65세이다. 성은 허씨(許氏)이며, 공암군(孔巖郡) 사람이다. 증조 경(京)은 검교상서우복야 행예빈소경 지제고(檢校尙書右僕射行禮賓少卿知制誥)를 지냈고, 조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직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翰林直學士承旨)를 지냈다. 아버지 공(珙)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를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충렬왕 묘정에 배향되었다.…아들 셋과 딸 넷을 두셨다.…맏딸 영복옹주(永福翁主)는 양양군(襄陽君) 김대언(金臺彦)에게, 둘째 딸 연희옹주(延禧翁主)는 중서좌승(中書左丞) 길길반(吉吉反)에게 각각 출가했다( 『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
A-② (현종의 증손) 왕선(王瑄)이 양양군(襄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왕규(王珪)는 수연군(壽延君)에 책봉되었다가 공양왕 4년(1392)에 먼 지역으로 유배갔다( 『고려사』권90, 열전3 宗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양양’이라는 명칭은 태종 16년(1416)에 정식 명칭이 채용되기 이전인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세워진『충선왕비순비허씨묘지명(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과 고려말에‘양양군(襄陽君)’이라는 봉작명을 부여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양양’이라는 명칭은 성묘별호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3. 양양지역의 성씨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법률에 의거하여 본관·성·이름을 가지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7세기까지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백성 가운데 대략 40% 안팎을 차지할 정도로 무성층(無姓層)이 많았다. 모든 사람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제가 타파되고 1909년에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였다.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온 단계혈연(單系血緣) 집단을 지칭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로까지 소급된다. 신라 진흥왕대에 세워진 순수비에는 적지 않은 신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 가운데 성씨를 가진 인물은 찾을 수 없고 이름 앞에 부명(部名)을 관칭(冠稱)하였을 뿐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만 하더라도 무력지(武力智)라고만 하였을 뿐 성씨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현존하는 자료상 신라인 가운데 처음으로 성씨를 사용한 인물은 진흥왕이다. 그후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소수의 귀족층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즉 신라 통일전후에는 국왕을 비롯해 소수의 인물들만이 성씨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고려초기에 들어와서다.
본관은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同姓)이 많이 생겨남으로 인해 성만으로는 동족(同族)을 구별할 수가 없게 되자, 씨족의 출신지 또는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徵稅)·조역(調役)의 필요상 일반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즉 양인이면 누구나 성씨의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본관을 가졌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아울러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고려초기 이래 각 군현에 어떤 성관(姓貫)이 존재하였는지는 15세기 전후한 시기에 간행된『경상도지리지』(1425)를 비롯한『세종실록지리지』(1454)와『동국여지승람』(1481)에 성씨 관련 자료가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경상도지리지』에는 지역적으로 경상도 일원에 한정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인물조와 고적조에 해읍(該邑)을 본관으로 한 인물과 각 성의 본관이 기재되어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선전기 전국 각 군현에 토착하고 있던 토성(土姓)을 비롯하여 각종의 이입성(移入姓) 그리고 망성(亡姓)·속성(續姓) 등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성씨들은 비록 조선초기에 파악된 것들이지만, 그것은 이미 고려초기부터 존속해 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되어 있는 성관체제를 추적하여 고려시대 성관의 유래와 그 존재 양태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토대로 현재 영동지방의 성씨를 들면 다음 표와 같다.

『세종실록지리지』재 영동지방 군현별 성종(姓種) 일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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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지방의 각 군현에는 대개 3·4본의 토성이 존재하였다. 즉 강릉 6본, 삼척·통천 4본, 고성 3본, 간성·양양 2본이다. 속현 중에서는 연곡 5본, 우계·동산 4본, 환가 3본, 열산·벽산 1본이다. 이는 조선초기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토성은 고려초 이래 전해져 오던‘고적(古籍)’과『세종실록지리지』편찬 당시 각 도에서 올린‘관(關)’에 기재되어 있던 성씨를 지칭했다. ‘고적’은 고려초 이래 전래해 오던 중앙 소장의 군현 성씨 관계 자료였고, ‘관’은 지방의 각 읍사(邑司, 향리들이 모여 고을의 사무를 처리하던 곳)에 비치되어 있던 성씨 자료를 수합 정리하여 중앙에 보고한 문서였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려시대 향리와 같은 향촌 지배계층의 성씨가 바로 토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들은 신라말 고려초에 성주·장군·촌주 등의 직함을 지내면서 지방세력을 대표하던 이른바 호족의 후예였다. 호족은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하여 개국관료와 삼한공신이 되면서 각기 성관을 분정 또는 하사받았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의 토성들은 혹은 본관을 떠나 상경종사(上京從仕)함으로써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었고, 그대로 토착하던 토성은 읍사를 중심으로 상급 향리층을 구성하여 지역사회를 자율적으로 지배하고 질서유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이후 많은 변화와 분화 과정을 겪고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 이들 성씨가 각종 토성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모든 토성이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토성의 내부구조에서 같은 토성이라도 토성과 차성(次姓), 인리성(人吏姓)과 차리성(次吏姓)이 있는 것은 양자가 시간적 선후를 두고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차성 또는 차리성이라 했던 것은 토성과 인리성 다음에 각각 형성되었던 것에 기인하는 바이다. 동계의 북부지역에 위치하였던 흡곡에는 토성이 아예 없다. 그것은 고려초 이래 빈번한 국경 신축으로 인해 주민의 집산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토착세력의 유망이 심하여 미처 토성으로 책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망성은‘고적’에는 기재되어 있으나‘관’에는 없는 성씨를 지칭했다. 망성은‘망토성(亡土姓)’과 같은 뜻으로, 『세종실록지리지』편찬 당시에는 이미 소멸된 성씨였다. 이는 토성이 확립된 이래 신분이 상승하여 본관지를 옮겼거나 몰락하여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이동해 간 경우와 전쟁 등과 같은 비상시에 자신들의 성을 관계 기록에 기재하여 놓지 못한 경우에 해당된다. 망성은 대체로 하삼도지역보다는 근기지역에, 대읍보다는 중소읍에 많았다. 경상·전라도처럼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은 중앙정계의 변동에 그렇게 민감하지도 않았고, 또 직접적인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에 각 읍 토성이‘고향을 편안히 여겨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꺼려한[安土重遷]’결과 망성의 발생이 적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연해지역과 주민의 집산·국경선의 신축이 반복되었던 동계의 북단에 있는 양양부와 간성군은 망성이 많았다.
속성은‘고적’에는 없고 그 대신‘관’에 처음 기재된 성씨를 지칭했다. 즉 속성은 종전에 없던 성을『세종실록지리지』편찬 당시에 각 도에서 올린‘관’에 추가 등재된 성씨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속성을 각 읍성씨조의 맨 끝에 놓였고 반드시 내성 다음에 기재하였다. 속성은 고려후기 이래‘북의 오랑캐와 남의 왜구침입[北虜南倭]’과 격심한 사회변동 및 거기에 따른 토성이족의 유망에서 군현과 각종 임내(任內, 속현과 향·소·부곡)의 향리 자원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보충 내지 열읍 간에 향리수를 조정한 결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당시 읍사를 구성하고 있던 향리는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내의 징세·조역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영동지방에서는 간성군·고성군·통천군 등에 속성이 집중되어 있었다. 강릉부의 속성은 정선전씨·평창이씨·원주원씨이고, 연곡현의 속성은 정선전씨이며, 우계현의 속성은 유(劉)씨이다.
입성(入姓)은 지역적인 이동에서 발생한 성씨를 지칭했고, 입진성(入鎭姓)은 고려초부터 북진정책에 따라 영토확장과 함께 실시되었던 국가의 사민정책에 의해 남부지역에서 양계지역에 사민해 온 정착민의 성씨를 지칭했다.
내성(來姓)은 그 자의대로 다른 지역에서 입래(入來)한 성씨로서 고려초 이래의‘고적’에도 토성과 함께 기재되었던 성씨를 지칭했다. 토성이 확정된 뒤 그 토성의 유망 또는 소멸에서 망성이 발생하였듯이, 망래성(亡來姓)은 입래한 내성이 그 후 다시 유망하거나 소멸함에 따라 발생한 성씨이다.
요컨대 고려 초기부터 각 군현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깊이 뿌리박고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유리·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했다. 그 결과 기존토성의 유망에서‘망성’이 발생했고, 지역적인 이동에서‘내성’·‘입진성’·‘입성’등이 발생했으며, 여말선초 열읍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해‘속성’이 대량 발생했던 것이다.
사성(賜姓)은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 성씨를 지칭했다. 이는 국가에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에게 임금과 같은 성씨[國姓]인 왕씨를 하사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는 한국 성관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인데도 편찬 이후 한말까지 민간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를 축약·혼성한『동국여지승람』이 조선시대 성관의 기본자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를 보면『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토성·차성·인리성·차리성·백성성·입주후성·입현후성 등의 용어는 없어지고, 다만 본관을 본읍과 임내로 구분하고 토성과 망성을 혼성해서 기재하였다. 그리고 이주해 온 성씨에 대해서는 본관을 작은 글씨로 주기하되, 본관을 모를 때에는‘성’자 다음에‘내(來)’·‘속(續)’·‘속(屬)’자를 부기함으로써 고려초기 토성분정 이래 성관의 본래 모습이 상실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물조와 고적조를 대폭 보강하여 해당 고을을 본관으로 한 인물과 각 성의 본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기재함으로써 후대 족보와 읍지 및『대동운부군옥』성씨조와『증보문헌비고0127 제계고(帝系考) 부록 씨족조에서 인용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누락된 군현 또는 향·소·부곡성이 기재되어 있어 이를 보완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던 15세기 전반에는 토성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고, 『세종실록』을 비롯한 공사문헌에도‘토성품관(土姓品官)’·‘토성이민(土姓吏民)·‘토성명현(土姓名賢)’등의 용례가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세종실록지리지』보다 약 반세기 후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에는 고려 이래 성씨의 대종을 이루었던 토성이란 용어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 사족의 본관이 거주지와 유리되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종래 토착적 의미의 토성은 이제 무의미해지고 그 대신 성의 출자지, 지위와 명망[地望] 내지 가문의 격[家格]을 추상적으로 의미하는 본관만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옛 문헌을 볼 때 어떤 인물에 대한 내용 중에‘○○인’이라고 기록된 것을 쉽지 않게 대하게 된다.
예컨대 율곡 이이와 이순신의 본관은‘덕수인(德水人)’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덕수’는 율곡과 이순신의 출생지나 거주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선대에 덕수를 기반으로 세거(世居)한 적이 있고 그 혈통이 이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본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율곡과 이순신은 같은 고향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본관이‘덕수’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고, 태어난 곳과 성장한 곳이 각각 다르다. 오늘날 본관은 대개의 경우 거주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성씨의 본향을 통해 씨족을 구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하겠다.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에 의하면, 양양부의 토성은 김·이씨가 있고, 양양부 속현인 동산현의 토성은 박(朴)·김(金)·최(崔)·진(陳)씨가 있다. 그리고 양양부의 속성은 장(張)·임(林)·윤(尹)씨가 있고, 동산현의 속성은 임(林)씨가 있다. 양양지방에 거주하는 성씨는 조선중기『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까지만 해도 크게 변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다양한 성씨들이 입향하여 거주하게 된
다.
영조 35년(1759)에 편찬된『여지도서』에는 강릉·주 김씨, 함평·전의·안성·경주·가산(嘉山)이씨, 청주 박씨, 진주 하씨, 초계 정씨, 울진 장씨, 칠원 윤씨, 나주 임(林)씨, 평강 채씨, 강릉 최씨, 광주(光州) 노씨, 제주 고씨, 창원 황씨 등의 성씨들이 기재되어 있다. 즉 양양지방의 성씨분포를 보면 조선중기까지는 토성과 속성이 주로 거주하였고, 조선후기에는 해읍(該邑) 토성보다는 이주 또는 우거(流寓)한 성관이 거주하였다. 이들 성씨들이 양양지방으로 이주해 온 것은 지역 내 토성 또는 유력 가문과의 혼인, 친척의 수령 재임시 동행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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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淳化는 990년부터 994년까지 사용된 宋太宗의 연호이다. 이는 고려 성종 9년부터 13년에 해당된다.
2) 성종은 태조 이래 공신의 우대를 강조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한 그들의 후손을 위무하기 위한 정책상의 필요에서 그들의 출신지에 別號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3) 종실에 대해 國名이나 地名을 부여한 것은 중국의 天子가 諸侯國에 봉한 것과 같이 고려에서도 국왕이 왕실을 제후국으로 봉한다는 分封制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중국 봉건제도가 고려에서는 부분적이고 형식적이나마 중국의 축소판으로 행해졌으며, 중국의 천자가 고려 국왕을 봉한 것처럼 고려 국왕도 功臣이나 王室에 대해 책봉의 형식을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