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8호

문화원회원교육(특강) : 普覺國師一然과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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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03회 작성일 2017-03-1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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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覺國師一然과 양양


양언석 교수


1. 서론


양양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談論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미래는 문화의 시대이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의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와 이야기가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양문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얼마 전에, 전국한시 백일장, 오랜만에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양양다운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작지만 하나하나 양양다운 문화를 찾아갔으면 합니다. 향교에서 나오신 분들이 선비복장을 하고, 행사에 참여해서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양양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양양은 삼국시대 지리적 중심지로,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던 지역으로, 신라가 고구려에서 양양지역을 점령한 이후, 불교의 성지로, 그리고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 되었다.
그리고 원효, 의상 도의 그리고 범일선사 같은 분들과 화랑인 영랑, 원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와 유적이 전해오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신라의 정책이었다. 불교를 통한 一心과 佛國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과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양양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務農桑恤喪葬喜遊宴尙文學貴禮義1)


농업에 힘쓰고,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였다는 기록에서 襄陽學의 面貌를 찾아 볼 수 있다.


『擇里志』山水條에 의하면, 산수의 승지는 당연히 강원의 영동이 제일(山水之勝當以江原嶺東第一)일 했고, 『新增東國輿地勝覽』樓亭條形勝條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我東韓山水之勝關東爲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민이 자주 놀러 다니기를 좋아해서 동네 노인들은 기꺼이 기악과 술과 고기를 가지고 산이나 물가에 가서 마음껏 논다. 이것으로 큰일을 삼기 때문에 자제들은 이에 감화되어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다. 더욱이 그곳이 두 서울에서 멀어, 옛날부터 현달한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화가 미래인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600주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지역발전에 중요한 地域學이라는 학문을 정립하고 모색해야 한다.
오늘의 양양문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양양의 문화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襄陽學의 正立은 절실히 필요하다.



2. 文化的背景


지역의 역사는, 최고의 자원이다. 양양은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오랜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를 수용하면서 사찰이 건립되었고, 사찰의 상징인 불전과 탑이 양양을 중심으로 건립되어 불교의 聖地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자장을 비롯하여 의상, 원효, 도의, 일연선사 등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은 대부분 입당구법(入唐求法)으로 중국의 선진문화와 불교로 敎化에 힘썼다.


오늘은 일연국사와 양양의 불교문화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연의 생애 (희종2 ~충렬왕 15,1206∼1289)


일연선사는 1206년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2세인 1227년 승과에 급제(양양에서 8년 정도 생활)한 뒤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하셨다.
44세인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와 지리산 길상암에, 1264년에는 영일 오어사에 계시다가 대구 가까운 인흥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학승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72세인 1277년에는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시다가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추대되었고,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연의 업적
14세 때에 삭발하고 중이 되어 선종에 속하는 진전사에서 수학하였다. 조계종의 4선인 가운데 첫째로 추대하였다. 고종 14년 겨울에 승과에 나가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22세였다.
이후 그는 여러 절을 두루 거치며 수도 생활을 하였고, 그 깨달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가다. 그가 주관하는 법회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삼중대사, 대선사 등에 올랐으며 1283년에 국사가 되었다.
충렬왕 15년 6월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왕에게 올릴 글을 쓰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무답으로 날을 보냈는데 이 날 밤에 둘레가 한 자가 넘는 큰 별이 절에 떨어졌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떠나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몇몇 중과 사에 대한 문답을 한 후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이때 오색의 빛이 절 뒤에서 일어나 타오르는 듯 했고 그 뒤에 는 흰구름이 덮여서 하늘을 향하여 가버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84세의 일이다.
일연을 사람됨이 과묵하여 허튼 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 가식 없이 진정으로 대했으며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학문하는데 있어서도 특별한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덕을 닦으며 수양하
였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정성도 지극하여 항상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론 불교적인 업적과 발행한한 저서이다. 일연이 쓴 책은 모두 100여권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정력과 박식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와 관련 있는 불교서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삼국유사'만이 남아서 국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 신라 등 삼국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가 살던 고여 중엽가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도 언급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시되는 내용은 신라시대의 향가14수이다. 여기에 실린 향가는 그 내용에 있어 제각기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향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설화, 신화 등 역사적 야사도 실려 있다.


일화
한편 불후의 역작인『삼국유사』는 그 후 5년 여에 걸쳐서 집필을 완성하였다 한다.


1) 洛山寺
671년(문무왕11) 義湘이 관음보살을 親見하고 낙산사 창건하였고, 그 후 범일선사가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 모셨다.
의상은 변방의 양양지역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인식하여 성지로 정착하고자 낙산사를 창건하였고, 이 지역을 불심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해용왕에게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은 설정은 불교의 성지임을 확인하고 있다. 변방이지만 군사적이고, 교통 중심인 양양을 중심으로 불국토 사상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이 가능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통일 후에도 불교를 신앙체계로 하여 변방의 기층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어 신라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우수한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의 관음보살상주처를 확인하고자 찾아온 원효가 낙산사에서 비참한 시련을 겪게 된다.
낙산사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고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가 또다시 가다가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했다. “휴제호(休醍●), 화상아!”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아래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이에 원효는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는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 가지도 못하고 떠났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자, 원효는 그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던2) 곳을 냉천이라고 한다.
이 냉천을 문화유적으로 활용하면 흥미로울 수 있다. 의상과 원효는 동학이면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루면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왕실에서는 원효의 자율적인 사상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위해 의상의 체계적인 사상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은 당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의 제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화엄교학을 펼쳤다.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경전 중심의 교종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통해 마음과 마음으로 도를 계승하는 선종이 중시되었다. 이 선종이 도의에 의해 진전사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양양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과 조계종의 개시조인 도의선사가 개창한 진전사가 불교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일연국사가 저술한『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과 원효의 담론과, 조신전, 그리고 범일선사의 정취보살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된 것은 일연국사가 낙산사에서 가까운 진전사에 출가하여직접 들었던 연유로 보인다.
이처럼 양양의 불교는 신라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그 활용가치는 무한하다. 불교의 성지순례로, 그리고 낙산사의 조신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그 가치와 소설사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가치도 활용 하여야 한다.


2) 陳田寺
창건 년대 미상으로 道義선사가 창건하였고, 九山禪門중 迦智山門의 개시조이다. 그리고 一然스님 14세에 진전사로 출가하였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조당집』권17에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전(도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다. 임신하기 전 그의 아버지는 흰무지개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어머니는 한 승려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부모들은 반드시 聖子를 얻을 꿈이라고 하였는데 임신한지 39개월만에 도의가 태어났다. 출생하는 날 아침에 異僧이 錫杖을 짚고 문 앞에서“금일 낳는 아기의 태를 강과 산으로 첩첩이 둘러쌓인 곳에 묻어라”하고 사라졌다. 이에 태를 묻으니 큰 사슴이 와서 지켰는데 해가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아도 해칠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상서로움으로 법호를 明寂이라 하였다.
建中5년(선덕왕5, 784)에 당나라에 입당하였다. 곧바로 오대산에 들어가 文殊의 감응을 받았는데 허공에서 聖鐘의 소리를 듣고 산 속에서 神鳥가 높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廣府의 寶壇寺에 머물면서 구족계를 받고 曹溪에 가서 祖師堂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하자 갑자기 문빗장이 저절로 열렸고 예배를 세 번 드리고 나니 저절로 닫혔다. 그로부터 江西洪州의 開元寺에 가서 西堂智藏(735-814)을 참문하고 의문점이 해결되고 막힌 체증이 풀리게 되었다. 지장이 그를 맞이함이 마치 石間에서 美玉을 줍는 듯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내는 듯하여“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그 누구랴”라고 말하고 법명을 道義라고 고쳐주었다. 이에 頭陀의 길을 떠나 百丈山悔海和尙(749-814)의 처소를 찾아가 서당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하니 백장이 탄복하여 江西(馬祖道一)의 禪脈이 모두 東國으로 돌아가는 구나“ 라고 하였다. 신라의 선승들은 거의 마조도일의 제라로 서당지장과 백장회해도 마조계의 법을 이었다.
37년 정도 중국에서 보내고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의 심인을 전해 받은 도의는 헌덕왕 13년(821)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교종에 의해 불교계에서 魔語라고 배척 받으며 북산(설악산)에 은거하여 산문을 열고, 법을 廉居禪師(?-884)에게 전하였다.
雪山億聖寺에서 조사의 심인을 전하고, 도의의 가르침을 펴다가 普照禪師體澄(804-880)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염거가 설산 억성사에서 행화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참문하여 조사의 심인을 얻었다.
체징은 희강왕 2년(837)에 입당하여 문성왕 2년(840) 귀국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창하여 도의의 선풍을 계승하였다. 그의 비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선문은 제1은 도의이고, 제2는 염거, 제3은 체징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마조도일의 영향으로 원적도의-염거-보조체징ㅡ 백장회해로 법을 이어 왔다.
진전사지와 3층석탑, 석조부도, 불좌의 중대석 및 많은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도의가 진전사를 개창한 이후, 가지산문의 토대가 되었다. 의상은 낙산사를 중심으로 낙산사에서 화엄사상을 널리 선교하였지만 신라 말부터 고려조에 도의가 진전사를 창건하여 선종사상을 선교하였다.


普覺國師一然(1206-1289)은 충열왕 9년(1283) 국사에 책봉되어 불교계의 상징이었다. 일연국사가 진전사로 출가한 것은 역사적인 사상사의 흐름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양지역은 신라 불교문화의 중심축으로 군사적, 교통적 중심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국가적인 관심을 갖고 관리해 왔다. 변방이지만 삼국통일과 통일 후 중심지로서 의상이 귀국하여 처음으로 양양에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것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통해 민심을 일심으로 하여 중앙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의상이후 원효가 다시 불교의 성지로 확립하였다. 그리고 조신전은 깨달음의 공간으로 승려들에게 구도적인 의미와 양양인에게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강화하였다. 도의는 당에서 유학하여 중국선종을 수용하여 진전사를 개창하여 선종의 개창자로 추앙 받고 있다.
진전사에서는 선종의 개시처로, 그리고 일연국사와『삼국유사』를 통한 학문적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3. 원효와 의상의 담론


원효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을까 한다!”이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 무렬왕이 듣고,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얻고 싶구나. 나라에 현자가 있다면 나라에 이익이 클 것이다.’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이 의도적으로 과부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만들어 설총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반면 의상은 두 번째 당나라에 가면서 원효와 헤어진 후 홀로 험한 뱃길에 당나라 유학길이 오른다. 당 등주에 도착해서 그곳의 州長인 신도인 유지인의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때, 그 집의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의상에게 첫 눈에 반해버렸다. 선묘아가씨는 의상스님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젊의 구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갑자기 道心을 발하여‘세세생생에 스님에게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고 큰일을 이룩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필요하시는 생활품을 받치겠습니다.’라고 큰 소원을 세웠다. 의상스님은 지엄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화엄학을 공부한 다음 문무왕 11년(671)귀국했다. 선묘아가씨는 한마리 용으로 변하여 신라 땅까지 스님을 따라 왔고, 스님이 머물던 부석사에 오래도록 살면서 스님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원효는 요석공주가 찾아왔지만 다시 만나지 않았다.


신라는 불교국가로, 이상적인 인간은 화랑이나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으로 그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화랑들의 규모는 3백 명에서 3천 명 정도로, 구성은 국선인 화랑 1명과 그 밑에 승려 2-3명, 그리고 화랑도로 되어 있다. 유명한 승려들을 보면 15-18세 정도, 수련 기간은 3년 정도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형인 화랑은,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이어진다. 화랑은 그 명예에 어울리는 교육방법이 있었다.
1) 相磨以道義(요즈음 대세 의리)-의리를 배웠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2) 相悅以歌舞, 3) 遊娛山水의 도를 중시하였고 풍류를 즐기며 자연과 벗하였다.
화랑들의 교육방법은 첫째가 상마도의 이다 몸을 연마하면서 도(道)와 의(義)를 닦았다. 둘째가 상열가락 이다. 가락(歌樂)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훈련이다. 셋째가 유오산수 이다 명산대천(名山大天)을 다니면서 천지기운을 받는 수련이다. 가장 이상적인 한국형 인물은 화랑이었다.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이어진다. 오늘날도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어떤 교육 산-웅장함과 경건함, 바다-열정적임 힘, 호수-고요함 영랑호에 화랑들이 노닐었던 곳에 정자가 있습니다. 또 기록에 의하면 경포대와 한송정은 낭도 3천명이 각기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 푸르름을 자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동지방은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다.



4. 헌화가


삼국시대 중에서 신라의 문화와 사상을 알기 위해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여인을 보면, 신라의 여인들은 헤브라이즘의 도덕사상보다는 육체미와 쾌락을 추구했던 헬레니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문학은 1) 양반 사대부 아녀자-도덕과 효, 2) 기생-사랑하는 마음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 그런데 그 기생의 유래가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의 신라 본기에 보면, “진흥왕 37년 봄에 원화라는 것이 처음 생겼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생사를 기록한 문헌으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라는 책에 우리나라 기생의 기원은 원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화란 원래 임금과 신하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 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들을 기생의 기원으로 보았다.
이 주장을 시인한다면 기생의 역사는 14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신라의 여인을 통하여 신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신라의 여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인가.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아름다운 신라의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신라의 여인들은 고려나 백제, 그리고 조선조의 여인과는 삶이 모습이 다르다.
역신이 범한 처용의 아내, 여왕이면서 미천한 인물인 지괴에 팔찌를 풀어준 선덕여왕 많은 화랑들과 염문을 남겼던 진성여왕 등이 있지만 그래도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찾는다면 수로부인을 능가 할 사람은 없다.


자줏빛 바위는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 이 꽃을 꺾어 받치겠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남편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노복과 종자들을 데리고 경주에서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지금으로 말하면 동해 고속도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해안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수로부인이 간 그 길은, 미와 시의 길이다. 이 길은 관동팔경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시와 문학과 사랑의 감정과 사랑을 하게 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문학은 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사막의 길에서, 마크트웨인의 문학은 뗏목을 타고 다니는 미시시피강의 문학이고 이 작품은 수로부인이 지나간 해안의 길이다. 순정공의 무리가 길을 가다가 점심을 먹기 위하여 멈추어 선 곳은 아마도 하루의 여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이다.
푸른 바다, 그 바다를 배경으로 병풍처럼 둘러있는 붉은 절벽, 그리고 그 절벽 위에 아름다운 철쭉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수로부인은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꽃을 꺾어 바치기를 원한다.
천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별 꽃은 문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꽃은 놓는 위치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거실, 침실)
꽃과 새는 서로 짝을 이루며 동양화의 중요한 소재이다. 이처럼 꽃과 새는 함께 짝을 이루며 아주 오래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의 하나이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꽃과 새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만이 아니라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한다. -화투-二梅鳥-그림 속에서 꽃과 새는 한 쌍의 남녀모습으로 상상되어 있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부인이 아름다운 꽃을 들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고 미의 완성이고, 문학이다. 우리 문학이나 동. 서양의 문학에서 꽃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런데 꽃을 꺾는다는 의미는 여성의 정조를 빼앗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죽음을 느끼는 순간 생에 대한 인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많은 하인이나 병사들은 어느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꽃을 꺾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무리 중에서 어느 누구도 수로 부인을 범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만약, 그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꽃을 꺾어 받친다면 그것은 수로부인의 정조를 빼앗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의미는 퇴색 된다 왜 --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는 꽃을 꺾어 바치는 인물로 노복이나 병사가 아닌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여 꽃을 꺾어 받쳐야 한다.
그런데 꽃을 꺾어 바치는 인물이 노인이라는 점에서 김이 센다. 오늘날이 작품이라면 ,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미모의 부인에게 젊은 청년이 아무도 청을 들어주지 못할 때 용감하게 절벽으로 기어 올라간다.
이러한 행동의 의미는 그가 정력이 넘치는 힘이 센 청년으로 어렵고 힘들게 꺾은 꽃을 꺾어 바치면서‘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면 이 꽃을 받치겠습니다’이것은 상당히 로맨틱하다.
그런데 여기서 꽃을 꺾어 받치는 사람이 노인이다. 이 노인이라는 말이 작품의 의미에 변화를 줄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노인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노인이라는 의미는 생리적인 노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전 문학을 보면 지식인, 현명한 사람, 신선, 도인 등은 모두노인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지금도 노형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의 의미는 지적으로 높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노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1) 작품 속에‘내가 잡은 암소 놓아두고..’라는 말이 나온다. 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소는 불교에서 불도를 닦는 도승을 의미한다. 그래서‘잡은 암소 놓아두고’라는 말의 의미는 도 닦는 것을 그만두고 라는 말은 파계하고 라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스님을 牧牛子(목회자), 스님들이 도를 닦는 방을 尋牛堂, 석가모니를 고타마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가장 좋은 소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노인은 승려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을 쓴 일연 자신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2) 고대 농경사회에서 소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소는 농업과 관계있고, 또한 그 노인은 不知何許人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소설이나 설화에서 신은 모두 부지하허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농신


3) 중국의 전국시대에 백리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소를 살찌게 기를 줄 알았다. 그래서 주목공의 신마을 얻어 벼슬자리에 올라 국사를 살폈다. 소를 살찌게 하는 사람은 백성을 살찌게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여기에서는 관리.


4) 평범한 농부, 무당, 신선으로 보기도 한다.


노인이 소를 버려두고 꽃을 꺾어 바치는 것은 지금까지 중시해 왔던 생업이나 도를 닦던 것보다 수로부인의 미를 더 존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희랍사람들처럼 신라인들은 고려나 조선조처럼 관능적인 세계를 천시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숭배했다. 그래서 화랑이나 원화를 뽑는 첫째 기준이 미모, 문제는 그 노인이 누구든 스님이든, 신선이든 수로부인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틀을 편안히 가다가 또 임해정이라는 곳에 이르러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갑자기 바다의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순정공이 땅에 넘어져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옛사람의 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다. 이제 바다의 용인들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경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순정공이 그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받치었다.
공이 바다 속에 들어갔던 일을 부인에게 물으니 부인 왈‘칠보궁전에 음식이 맛있고 향기롭고, 정결한 것이 인간세계의 것이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부인의 옷에서 나는 향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들에게 붙들리었다. 이 때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處容歌에도 보면 역신이 등장한다.
처용가는 아내를 빼앗긴 아픔을 영원한 시로 노래한 것이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랑이 지었다는 8구체의 향가 아내와 역신의 간통장면을 보고 처용은 그 고뇌를 노래와 춤으로 정화 한다. 이에 감복한 역신이 현신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의 화상만 보여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빈다. 그래서 오늘날 처용의 하나의 토착신앙으로 승격되어 전한다.
이 작품은 신라 49대 헌강왕이 개운포에 나들이를 나갔다가 생긴 일이다. 지금의 울산이다. 바닷가에서 쉬고 잇는데, 갑자기 구름과 연기가 일고 밝은 대낮이 깜깜해지는 변괴가 생겨 동행하던 일관의 가르침에 따라 동해 용왕을 위해 그곳에 절을 지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랬더니 구름이 개고, 동해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왕 앞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왕의 덕을 讚揚한다 그 때 동해용왕을 일곱 아들 중에서 한 아들을 바쳤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이 설화도 그렇지만 신라인들은 바다와 접해 있었지만 그 바다와 친했다기보다는 항상 두려워했다. 수로부인도 바다의 용이 납치를 하고 -- 그들은 바다 밖으로 진출하려는 생각보다는 바다에서 침입해 오는 적을 방어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文武王이 자기가 죽거든 바다에 장사지내라고 했고 그러면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손을 잡고 통일을 한 것을 보아도 그들의 적은 바다 쪽의 일본 해적이다. 이 말은 신라의 문화는 대륙보다는 바다를 타고 오는 문화와 접촉이 많았다.
설화를 보아도 가락국의 수로 왕비는 서남쪽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아유타국 공주로 되어 있고, 탈해왕 역시 먼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용성국의 어린 왕자로 되어 있다. 반면에 고구려의 주몽 같은 설화를 보면 북방에서 말을 타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문화는 배의 문화와 관계가 잇다. 처용이나 탈해을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배를 타고 표류해온 남방계의 이방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대륙의 영향을 받은 대륙문화인가? 아니면 배를 타고 온 해양문화 인가에 따라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특성이 달라진다.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해양문화로서 해양문하의 특징은 개방적이고 낭만적이고 본능적인 세계를 중시하는 문화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여인들을 통하여 본다면 대부분 육체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단히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면 처용이라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라는 해양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처용은 배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 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당나라는 아랍상인 들과 교역을 했었고, 고려 때 처용을 노래한 그 모습을 보아도 한국인이 아니다. 키도 크고, 이마도 넓고, 눈도 파랗고, 문제는 설화나 신화의 기술법을 보면 얼굴색이 다른 낯선 이방인은 모두 용이나 신으로 되어 있다. 처용은 아내보다도 달을 더 사랑한 풍류객이었다. 처용의 아내는 보통의 여자가 아니다. 동해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왕이 직접 고른 여자니까 역신이 탐낼 만한 그런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런 미인을 혼자 방에 놔두고 밤새껏 달과 함께 노닐었다는 것은 보면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처용은 아라비아 상인이니까 달을 보며 고향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고, 세속적인 지상의 쾌락보다는 초월적인 꿈의 세계를 그리는 시인적인 기질을 볼 수 있다. 달을 좋아한 풍류객이었으니까 그 아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역신과 간통을 한 그 아내의 책임보다는 그 책임이 처용에게 있다.
시구를 보면“동경밝은 달 아래 밤드리 노니다가”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날만이 아니고 여러 번 그런 일이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신과의 간통장면을 보면 처용은 현인 아니면 바보형에 속한다. 자기 아내가 다른 놈과 간통하는 장면을 보면 앞이 잘 안 보일텐데, “들어가 자리보니 가랑이 네히어라 둘은 내해였다만은 둘은 누해인고 ”“라고 다리의 숫자를 정확히 세는 것을 보면 아주 냉정상인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기부인과 정을 통한 간부를 향해“두다리는 누구 것인고”라고 말한 처용의 태도는 여유를 넘어 유우머스럽기까지 하다.(김삿갓 배--여유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빼앗긴 헬렌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이고, 그 후편격인 <오디세이>는 자기가 부재중에 자기아내(페네로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악한들을 힘으로 물리치는 영웅 오디세이를 노래 부른 것이다.
서구문학에서 보면, 여성을 지키는 것이 곧 남자의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세 기사도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의 발생심리학은 이러한 명예의식에서 출발된 것이다.
시를 지어 후세에 남긴다는 것은 후세에 영웅의 공적을 찬양하여 전하려는 명예의식의 소산이다.
서구인의 의식에서 보면, 아내를 빼앗기고, 노래를 부르는 처용은 바보.
또 내용 중에“본디내해다 만 은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하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온다. 역신은 처용의 춤과 노래를 보고 그의 덕에 감화되어 무릎을 꿇고 다시는 처용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래서 처용이 병을 물리치는 힘으로 신격화되어 토착종교화 하여 처용무는 조선조까지 전해 내려왔다. 처용은 표면적으로 볼 때 무력한 바보로 그려져 있지만 실은 역신을 물리친 영웅이다 이것으로 보아 인간은 때로 바보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어쩌면 그런 사람이 무서운 힘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본문 중에“본디 내 해다만은 빼깃 긴 것을 어찌하라”라는 대목이 나오지만 공후인에서도 남편을 잃고 어찌하랴 로 끝맺음을 했는데 처용에서도 어찌 하랴 라는 체념사로 시를 끝맺는다. 대단히 무력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이방인이니까 아내를 빼앗겨도 어디에다 호소할 것이 없었다고 합리적으로 해석해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신라인들의 의식구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신라는 불교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교설화를 보면
보시태자는 자기의 재산, 아내, 자식, 그리고 마지막에 자기의 눈, 육체까지도 모두 그것을 원하는 자에게 받친다. 이런 것은 불교의 인내행과도 관계있다. 악이나 적을 대하는 태도는 칼을 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관용과 덕으로 굴복시키는 슬기로 나타나 있다. 無力이 힘이 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간디의 무저항주의도 불교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의 경우는 우리와 다르다.
서양의 영웅은 오딧세이나 아킬리스처럼 모두 역신 같은 존재들을 근육의 힘 즉, 무력으로 물리치는 호랑이와 같은 영웅이다. 그런데 악과 적을 물리치는 리의 영웅은 분노나 고통을 극기의 힘으로 이기는 곰 같은 존재의 영웅이 더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 문학에서 보면 현명한 사람은 바보로 묘사 된 것이 많다. --바보 온달, 사씨, 영재--춘향전에서도 보면, 변사또의 매질에 악을 쓰지 않고 매를 칠 때마다 그것을 운으로 삼아 춘향은 노래로서 저항을 한다. 그리고 이도령도 변학도와의 대결한 것도 권력이 아니라 그 유명한 시인


金樽美酒는 千人血이요
玉盤佳肴는 萬性膏라
燭淚落時에 民淚落이요
歌聲高處에 怨聲高라


시로써 그의 가슴을 찌른다. 역신을 칼이 아니라 시와 춤으로 물리친 처용의 행위는 한국인의 저항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미녀 헬렌의 경우도 약탈을 당한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무력으로 찾아온다. 이것이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력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여론으로 미녀인 수로 부인을 찾아온다. 우리문화가 박력은 없을지 모르지만 더 문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때 부른 노래가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그러면 왜 용에게 잡혀갔는데 갑자기 거북이가 등장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 당시에 남을 위협할 때 주문처럼 사용한 노래 같다. 문화 인류학에서 보면 거북이는 남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수로부인을 범한 남자. 즉 남자의 상징을 욕하는 의미를 잠재하고 있다.
물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수로부인의 이름을 보면 水路==(물길)물길이라는 수로부인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 물속에는 많은 거북이와 용이 놀 수밖에 없다. 거북이와 용 등은 남자를 상징한다.(작명법== 옷 걸레, 행주, 수건 )
그러면 수로 부인을 어떻게 평할 것인가. 많은 신들에게 정조를 빼앗겼지만 끝까지 강릉까지 따라간 것으로 보아 정조 관념이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희랍의 경우와는 다르다. 아프로디테는 도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그래서 그는 창녀의 신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수로부인은 신들에게 잡혀갔지만 끝까지 남편을 따라 간 것으로 보아 아프로디테나 마리아의 중간적인 여성.(하지만 오늘날의 여성은 다르다. 자식까지 버리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다른 남자와 짜고 남편을 독살하는 것을 보면 사회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한 사회의 여성의 모습 그것은 어쩌면 도덕성의 상실과 남성들의 무능과 이기주의 반영이기도 하다.
일연스님이 쓴 이 작품은 바다가 있고, 꽃이 있고 바위가 있고, 미인이 있다. 그 미인은 비단 인간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용까지도 그리고 산천초목까지 감동하는 것으로 이 글을 읽는 기쁨이다.


1. 普覺國師一然과 양양


2. 양양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談論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미래는 문화의 시대이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의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와 이야기가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3. 삼국시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신라의 정책이었다. 불교를 통한 一心과 佛國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과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4. 지금부터 10년 후 양양이 존재할까? 아니면 10년 후 양양이라는 지명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까? 저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5. 양양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務農桑恤喪葬喜遊宴尙文學貴禮義『( 輿地圖書』)
농업에 힘쓰고,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였다는 기록에서 襄陽學의 面貌를 찾아 볼 수 있다.


6. 일연의 생애 (희종2~충렬왕 15,1206∼1289)
일연선사는 1206년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2세인 1227년 승과에 급제(양양에서 8년 정도 생활)한 뒤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하셨다. 72세인 1277년에는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시다가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추대되었고,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 일연이 쓴 책은 모두 100여권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정력과 박식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와 관련 있는 불교서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삼국유사'만이 남아서 국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 신라 등 삼국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가 살던 고여 중엽가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도 언급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시되는 내용은 신라시대의 향가14수이다. 여기에 실린 향가는 그 내용에 있어 제각기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향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설화, 신화 등 역사적 야사도 실려 있다.


8. 낙산사


9. 도의선사와 진전사


10. 원효와 요석공주


11. 의상과


12. 헌화가


13. 半月        黃眞伊


誰斷崑山玉하여
裁成織女梳오
牽牛一去後에
愁擲碧空虛라


14.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 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리
네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옭아 구워먹으리(해가)


15. 處容歌


16.

1) 개운포에서 용왕이 춤을 춘다.
2) 처용이 역신 앞에서 춤
3) 포석정에서 남산신 상벙이 춤을 춘다 이에 왕이 몸소 춤을 배워 춤을 춘다
4) 금강령에서 산악의 신이 옥도령이란 춤을 추고 동체전에서는 연회때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그 춤이름이 지백급간이다.


17. 물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수로부인의 이름을 보면 水路==물길이라는 수로부인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 물속에는 많은 거북이와 용이 놀 수밖에 없다. 거북이와 용 등은 남자를 상징한다.(작명법- 옷 걸레, 행주, 수건 )


18. 바다가 있고, 꽃이 있고 바위가 있고, 미인이 있다. 그 미인은 비단 인간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용까지도 그리고 산천초목까지 감동하는 것으로 이 글을 읽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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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輿地圖書』
2) * 『신증동국여지승람』
냉천(冷泉)- 오봉산 아래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관음보살이 여자로 변해서 벼를 베고 있는데 원효대사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웃으며 농지거리를 하였다”고 한다.
* 『여지도서』, 『관동읍지, 『현산지』
냉천_ 부 북쪽 15리 오봉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덕녀로 변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원효대사와 냉천의 물을 마시면서 함께 실없이 말로 농지거리를 하였다고 한다. 鄭樞의 시에“덕녀의 옛터엔 잔디가 섬돌을 덮었고 원효의 남긴 자리에는 나무가 하늘에 연했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