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8호

양양소식지 자료 : 양양소식지(양양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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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29회 작성일 2017-03-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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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소식지 자료]

양양소식지(양양600년)

1월 2016년은 양양600년이 되는 해입니다.
2월 양양600년/ 양양은 명실상부한 불교의 성지이다.
3월 동해의 문화적 상징물 1호는 양양의 동해신묘(東海神廟)이다!
4월 지금의 한계령은 옛 오색령이다.
5월 지금의 북암령은 옛 소동라령이다.
6월 양양의 노비(奴婢) 이야기
7월 양양문화제는!
8월 양양부사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
9월 “현산학교와 남궁억”
10월 6.25전쟁과 국군의 날
11월 6.25전쟁 때 양양은 유일한“美軍政統治地域”이었다!
12월 양양600년사에 큰 획을 긋고, 새 천년 희망의 나래를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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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양양소식지]


2016년은 양양 600년이 되는 해 입니다!

2016년(丙申年)은 우리군민에게는 희망찬 새해입니다. 양양 600년이라는 뜻 깊은 한 해를 맞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축복이자 영광입니다. 이와 같이 큰 의미를 지닌 해를 맞게 됨을 알게 된 것은 지난 2010년도에 『양양군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군지편집위원들과 양양문화원 관계자들은 마음의 설레 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시대 안축선생은 양양은 전란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가 없어서 덕과 재주를 지닌 인물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양양에 향교를 지어 인재 양성에 힘쓰셨습니다.
우리는 늘 양양에 대해 오랜 선사문화를 간직한 전통문화의 고장이라고 자부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역사의 고장임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양양 600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새롭게 변화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命題)하에 이 고장에 대한 면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의하면, 즉 풍수에 대저 살 곳을 택할 때, 처음에는 지리(땅의 생김새와 형편)를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생리(생활하는 습성), 인심(백성의 마음), 마지막으로 산수(산과 물)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이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좋지 못 하면 오래 살 곳이 못 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집터는 산소자리와는 달라서 물이 있어야 재산이 생긴다. 그러므로 물이 고여 있는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명촌 및 번성하는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역시 시냇물이 모여 드는 곳이라야 대를 이어 오래도록 살터가 된다. 고 하였습니다.
조선조 왕조(1392년 창건)를 보면,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우리 지역을 특별히 관리해 왔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외친(外親)이기 때문이다. 태조 6년(1397) 1월에 양주(襄州)를 임금의 외친본관이기 때문에 부(府)로 승격시켜 양주부(襄州府)라고 하였다. 태종 13년(1413) 예에 따라 양주부를 양주도호부(襄州都護府)로 승격하였다.
태종 16년(1416)에 양주(襄州)를 양양(襄陽)이라고 개칭하여,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선왕조에서 특별히 관리해 왔다. 왜 이곳을 양양이라는 지명으로 개칭했을 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동해신묘와 조선왕조의 외친이라는 이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동해의 신을 모시는 해가 떠오르는 고을로, 조선왕조의 태동이라는 의미로 양양이라는 명칭을 나라에서 정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양양이란 지명의 의미와 향후계획하고 있는 양양 600년 기념사업 및 행사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양양(襄陽)이라는 지명은 모방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이 조선 태종 16년(1416)부터 함축(含蓄)되어 있었다는 것과, 한글로는 지명의 앞뒤의 글자가 같은 이름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양양’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襄陽의 뜻풀이
■ 양양은 해 오름의 고장이다.
■ 양양은 하늘이 돕는 고장이다.

字典的의미
■ 襄: 1. 돕다, 2. 오르다, 3. 이루다 등.
■ 陽: 1.볕, 양지, 2. 해, 태양, 6. 하늘 등.

이와 같이 양양 600주년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지난날의 암울했던 역사를 뒤돌아보고 반성과 교훈으로 삼아 새 천년을 향해 비상하려는 양양군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드높여 희망찬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기념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2015년 양양문화원장을 중심으로 유수대학 교수, 양양군의회 의원, 양양군 공무원, 양양향토사연구원 등 8명을 인선“양양 정명 60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활동으로 2013년에 600주년 기념행사를 이미 개최한 바 있는 경기도 고양시를 비롯한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방문하여 관계자들과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그 후 양양군에서 추진 가능한 29개 사업들을 정리하였는데, 단기사업으로 역사홍보 동영상 제작 외 17건, 중기사업으로 인물선양사업 외 3건, 장기사업으로 양양 600년 기념공원조성 외 7건의 사업들을 양양문화원에서 1차 조정하여 양양군에 통보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금년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며, 분명한 것은 기념사업들을 추진하였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2016년을 전환점으로 우리는 새천년을 향해 줄기차게 정진해 나가야 밝은 미래가 닥아 온다는 것을 있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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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양양소식지]


양양 600년/양양은 명실상부한 불교의 성지이다.

양양은 통일신라시대(668~892) 이래 대한불교 종파인 화엄종(華嚴宗)과 조계종(曹溪宗)의 종조(宗祖) 도의국사(道義국國師)사가 이 지역에 주석하면서 불법(佛法)을 편 곳으로 가히 불교의 성지였다 할만하다. 또한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을 펼 때에도 낙산사는 조선 태조를 비롯한 왕조(王朝)와 왕실(王室)의 많은 지원을 받았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26개의 사찰과 암자가 관내에 등촉을 밝히고 있었음이 이를 뒷받침 하고있다. 이와 관련한 설화 또한 가치가 매우 높으며, 선림원지에서 출토되어 월정사로 옮긴 범종은 통일신라시대 3대 범종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으나 6·25한국전쟁 당시 월정사와 함께 소실된 아픔을 비롯하여, 양양600년 기념 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이 필요한 시점에서 낙산사와 관련한 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낙산사 창건설화

낙산사는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671년에 처음으로 양양에 낙산사를 창건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佛宇)편에 의하면“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바위 위에서 전좌배례(展坐拜禮)하고 이칠일(14일)이나 정성스럽게 기도하였으나, 불성(佛聖)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바위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절이 낙산사이다.

조신스님의 꿈

강원도 영월군 세달사(世達寺)승려 조신은 강릉에 있는 부속 장원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반하여 짝사랑을 하였다. 승려의 신분이라 맺을 수 없는 인연이었는데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가서 자신과 그 여인을 맺어지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그러나 몇 년 새 그 여인은 결혼하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상 앞에서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 여인과 도망가서 40년을 살았는데 가난과 병고로 큰 아이를 잃고 열 살 난 딸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 물리는 등 인생의 고난을 겪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깬 후 이튼 날 아침에 보니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꿈에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보니 그곳에서 돌미륵이 나와 그 부근의 절에 봉안하고, 사재를 들여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았다.
이상이『삼국유사』에 전하는‘조신’의 꿈 이야기를 요악한 내용이다.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이 설화는 낙산사 관음보살의 영험을 강조한 것이며, 특히 조신의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절절이 배어 있어 읽는 사람의 눈시울을 적신다. 잘못된 만남과 어긋난 사랑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 외친향(外親鄕)

양양의 낙산사는 조선왕조의 대를 잇게 해준 인연이 깊은 곳이다. 『태조실록』총서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익조’가 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數年)만에 아들이 없으므로 최씨〔崔氏,부인〕와 함께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기도했더니, 밤의 꿈에 한 승복(僧服)을 입은 중이 와서 고(告)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은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 라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의주(宜州)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마침내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했으니, 이 분이 태조 이성계의 조부(祖父)인 도조(度祖)이다. “관음굴(觀音窟)은 지금 강원도(江原道) 양양부(襄陽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의 시대로 불교가 상당한 탄압을 받은 때였다. 실제로 많은 사찰들이 철거되면서 불교계는 존속의 위협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절이었지만 낙산사는 오히려 왕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 태조 이성계가 낙산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봄과 가을에 걸쳐 신하를 파견하여 이곳에서 제(祭)를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후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으로 남겨 후대의 왕들도 이제(祭)를 반드시 봉행토록 하였다. 『정종실록』에 태상왕이 정종 1년(1399) “이곳 낙산사에 행차하여 능엄법회(●嚴法會)를 베풀고 이튼 날 돌아갔다.”고 하였다.

선림원지(사림사)의 범종

선림원종은 통일신라 애장왕 5년(804)에 제작되었다. 1948년에 출토되어 1949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이관, 보존되어 오던 중 6·25한국전쟁으로 월정사가 소실될 때 함께 파손되어 그 일부만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던 중 2002년도에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자 다시 강원 지역으로 돌아왔고, 현재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이 종은 총고(總高) 122㎝, 종신고(鐘身高) 96㎝, 구경(口經) 68㎝ 크기의 중종(中鐘)으로 출토 당시 철제현색(鐵製懸索)이 그대로 붙어 있었으며, 종신의 내부에 이두(吏讀)로 된 명문(銘文)이 있어서 주종(鑄鐘) 연대는 물론 승려·시주자 등 주성(鑄成) 관계 인물들을 알려 주고 있는 매우 귀중한 종이다. 또한 이 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범종 중 상원사종(上院寺鐘,725)·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종이다.

<첨부사진>

1. 정원이십년명 범종 사진(소실 전, 후)
2. 선림원지 발굴 현장 및 출토 불상 등
3. 낙산사(원통보전, 7층 석탑, 홍연암, 의상대), 진전사, 선림원지 전경 사진 등.
4. 고 기록 원문 사진
- 삼국유사(조신의 꿈) 원문(표지)
- 신증동국여지승람(낙산사 청건) 원문(표지)
- 태조실록 총서(조선왕조의 외친향) 원문(표지)
5. 기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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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양양소식지]


동해의 문화적 상징물 1호는 양양의 동해신묘(東海神廟)이다!

삼천리금수강산, 아름다운 동해안의 중심지이자 허리는 우리 양양이다, 고래(古來)로부터 나약한 인간들은 신이 우주 만물을 만들었고, 우주만물에는 신이 함께하고 있으며, 자연재해는 이러한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평안을 위해 산천해악(山川海嶽)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수시로 제사(祭祀)를 지내왔다.
통일신라이후 왕건(王建)이 918년 사실상 한반도 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고려는 991년 비로서 개경(개성)에 사직단을 설치하고 이어 개경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곧 동에는 강원도 양양의 동해신묘(東海神廟), 서에는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西海壇), 남에는 전라도 나주의 남해신사(南海神祠)를 설치하고 해신에게 국태민안과 풍농 풍어를 기원했던 곳으로서 4해(海)의 으뜸인 동해지신(東海之神)이 주석하는 이곳에서는 왕(王)이 내린 향(香)과 축(祝)으로 매년 새해 별제(別祭)와 2월과 8월에 상제(常祭)를 중사(中祀)의 예로 매년 행하여
왔다.
이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신 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매년 치제하게 하였다. 조선의 왕은 강향사[(降香使) 왕명을 받아 왕의 성명이 적힌 축문과 향을 지니고 내려온 관리)]를 파견하여 제례의식을 감독케 하였으며, 강원관찰사의 주제(主祭)하에 동해지신(東海之神)의 위폐 앞에서 양양부사의 주관으로 해안을 끼고 있는 고을 수령(남으로는 강릉, 삼척, 울진, 펑해, 북으로는 간성, 고성, 통천, 흡곡)이 동원되어 치제하였으니 그 규모와 절차가 얼마나 엄숙하고 성대한 나라의 제례행사였는지 가히 짐작케 한다.
고려사에서부터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를 비롯하여 동해신묘의 기록이 있는 여러 지리지의 기사 내용을 일일이 열거 소개할 수는 없으나, 우리 양양에 국토수호와 국태민안,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나라의 제사 터가 고려시대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양양의 명예이자 자존심이다.
그런데 오늘의 동해신묘는 어떠한 모습으로 관리되고 있는가?
1908년 12월 26일 일제의 우리민족정신문화말살정책인 일제통감부훈령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당시 양양군수 최종낙(崔鍾洛)이 동해신묘를 훼철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최종낙 군수는 동해신묘 훼철 후 3일 만에 급사하였다 한다. 우리 향토사연구원은 사료를 검증조사하기위하여 전라남도 나주(영암)의 남해신사를 방문하니 남해신사 역시 이전한 근거는 전혀 없었으며 이를 훼철한 나주 군수는 아들까지 화를 입었다. 고 했다.
(풍천의 서해신단은 북한지역이라 확인하지 못하였다.)
1908년 이전 동해신묘는 정전 6간, 신문 3간, 전사청 2간, 동·서재 각 2간, 백천문 1간의 규모였으며, 오로지『東海之神』위패만을 모시고 상설(像設)은 없었다.
1993년 우리군 자력으로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현재 정전 1동만 복원되어 정전 서북쪽에 1800년에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세웠던 두 동강 난 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비(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를 접합하여 세우고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우리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동해신묘에 대하여“본래는 강릉 안인포에 있었는데 1490년 수군만호영이 양양읍 조산리로 이전될 때 따라 들어왔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들은 이 글을 보시고 오해가 풀리기를 바란다.
또한, 금후 양양 동해신묘의 발전을 위하여,
1. 고려시대이래 천년동안 동해신에게 국토수호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국가 제사 터로서의 사적지를 하루속히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하고 성역화 하여야 할 것이며
2. 동해신묘의 제례의식문화를 전통의례로 재현함으로써 환동해권시대의 대표적인 해양제례문화로 승화발전시켜야 하며,
3. 국제적으로 동해의 명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작금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천년 동해라 기록하고 불러왔음을 세계만방에 다시 확인시켜『동해』이외의 다른 명칭으로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이종우) 재공>

* 수정: 2016. 3. 15

양양의 동해신묘는 단순한 미신적 행사나 마을의 속신적 차원의 신격이 아닌 국가에서 향과 축을 내려 동해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국가의 제사터로, 강원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확립시킬 수 있는 동해라는 n거대한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고 인간의 정신적 위안처로서 험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진취적 기상으로 환 동해권 시대 중심의 양양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국제적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양양 동해신묘의 창건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고문헌·지지자료·고지도 등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고려 제6대 성종10년(991년)에서 고려 제8대 현종19년(1028년)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동해신묘(東海神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있으며, 사해(四海) 가운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고 하고 있고, 고려사 동계편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고려조에 동해신묘는 양양 땅에 있다고 하고 있으며, 조선조에도 조선왕조실록 등에 태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당시에도 양양 땅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고, 동해신묘가 이전(移轉)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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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양양소식지]

지금의 한계령은 옛 오색령이다

오색령 명칭의 정당성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조상대대로 지켜온 역사.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자연문화유산일 뿐아니라 자자손손 길이길이 대물림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 고장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관문인 오색령(五色嶺: 양양군 서면 오색리와 인제군 북면 한계리를 잇는 해발 920M의 고개)에 대하여 양양 정명600주년을 맞이하여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영(嶺)의 기능은 귀향(歸鄕)보다는 상경(上京)하는 데에 있다. 지난 2010년도『襄陽郡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오색령이 한계령으로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되어, 그동안 오색령의 실체를 바로 찾기 위해서 고문헌(古文獻)·고지지(古地誌)·고지도(古地圖)를 토대로 조사 한 결과 조선 선조 이후 지금까지 오색령으로 사용 표기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한국근대지도에 한계령으로 왜곡 표기한 것이 시초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색령 명칭의 효시(嚆矢)
오색령의 효시는 소솔령(所率嶺)이다. 추강 남효온(생육신)은 조선 성종 16년(1485)에 유금강산기 서두에 설악산 그 남쪽에 소솔령이 있다고 했고,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은 선조 22년(1589)에 한계산(寒溪山) 시(詩) 주석(註釋)에“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선조 29년(1596) 2월 1일에 비변사의 기록이 최초이며,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오색령 명칭을 계속 사용하여 왔으며 그에 관련 사료로는 고문헌(古文獻)-16건, 고지지(故地誌)-5건, 고지도(古地圖)-29여 건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한계령과 오색령 명칭을 병행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오색령 지명사용은 양면성이 있었다. 조선지지자료(1914이전)·조선총독부발행지도(1915)·인제군세일반((1930) 등에는 한계령으로 표기되어 있고, 같은 시기에 발행한 조선총독부관보(1913)에는 오색령으로 표기되었다. 그 외 개벽(1923), 동아일보(1932), 매일신보(1923) 등의 기사에 오색령 명칭을 사용하였다. 특히 동아일보기사(1932년 3월 15일)에는 인제군 북면의 800여 주민들이 북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색령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해 달라고 인제군과 강원도당국에 진정서를 제기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 현재의 한계령 위치가 옛 오색령 임을 입증하고 있다.

오색령 지명 복원의 당위성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왜곡된 지명인 한계령이 복원되지 못한 상황에서 1950년 6·25한국전쟁을 맞게 되어 미 군사지도 제작 시 일본총독부의 지도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1950년대 미 군사 지도를 참작하여 정부(국방부)에서 제작된 지도를 지속하여 사용한 것으로서 일제가 왜곡한 한계령 지명은 일제의 창지개명 사례로서 절대로 용인되어서는 아니 된다.

맺는말
오색에는 오색석(五色石)이 있다고 유래되어 붙여진 아름다운 오색령은 기암절벽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된지 올해가 71년이 되는 해이다. 아직도 일제잔재(日帝殘在)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이 만든 왜곡된 지명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애국충절의 고장답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으로, 광복이 되자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디 이름을 되찾았듯이 일제강점기에 창지개명 된 한계령 명칭을 우리 고유지명인 오색령으로 바로 고쳐서 후손에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될것이다.

첨부: 1. 1872년 지방도(양양부지도)
2. 대동여지도
3. 지승(1776년)奎15423-양양부
4. 여지도(1736˜1767년)-양양부
5. 광여도(1800년)古4709-58-관동도
6. 일제강점기 한국근대지지자료
7. “ 인제군세일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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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양양소식지]


지금의 북암령은 옛 소동라령이다.

1. 소동라령의 이란?

옛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양양군 서면 송어리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넘어가는 해발 940m의 험준한 고갯길이다. 지금은 북암령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 고개의 옛 지명이 소동라령이었으며, 박달령이 일본식 한자인 단목령(檀木嶺)으로 바뀌었듯이 북암령이라는 지명도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애미(북암리)
로 고친 후, 영의 이름도 일본식 지명인 북암령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소동라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단종 2년(1454)에 완성된『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 편에 所等羅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所冬羅嶺)으로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지역 지명들을 일본이 멋대로 바꿔놓았는데 그 대표적 예가 소동라령→북암령으로, 박달령→단목령으로, 오색령→한계령으로 창지개명 하였다.
또한 국가기관인 국토교통부소속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08년도에 발간한『한국 지명 유래집』과 인터넷에 “한계령”을 검색하면 한계령이“옛날에는 소동라령 으로 불리었다.”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2. 소동라령의 현재 위치는?

옛 소동라령과 오색령(한계령)은 명백하게 각각 다른 영(嶺)이었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에서 하나의 영(같은 영)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지도(古地圖)에 오색령과 소동라령은 각각 다른 위치의 영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아래의 자료(붙임2. 고지도(古地圖)에 표기된 고개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소동라령의 자취

옛 소동라령은 양양에서 서울로 가는 국가관리 고대로(古大路)였다. 조선시대 법전인『경국대전』에 의하면 30리를 1식(息)이라 하여 30리마다 큰 표식을, 돌무지에 장승을 설치하도록 규정 하고 있다. 지금의 북암령(소동라령) 정상에 있는 커다란 돌무지는 당시에 장승을 세웠던 이정표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인제현 편에 소동라령은 인제현 동쪽 72리에 있다고 했고, 가력원(加歷院)을 신설했는데 인제현 동쪽 72리 양양부 경계라고 한 점으로 보아 소동라령은 성종 24년(1493)에 역로에서 제외되었지만 인제현은 이 영로의 도로관리를 계속하였다고 본다. 당시 역로(驛路)였다는 입증은 역(驛)·원(院)·주막(酒幕)의 잔재(殘滓)들에 서 찾을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길손들이 먹고 자던 주막(酒幕)이 진동리에 삼거리주막·갈터주막, 귀둔리에 버덤말주막·곰배골주막, 하추리에 가래울어주막·당수터주막, 원대리에 안삽재주막 등이 인제로 가는 역로를 따라 즐비하게 기록 되어 있다. 이것은 주민들의 왕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인제군지』의 기린면 북리 마을의 유래를 보면 대부분 역(驛)과 관련된 자연마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대표되는 마을은 상역(上驛)·중역(中驛)·하역(下驛)·역동(驛洞)·역골(驛谷) 등인데 특히 연락촌(連絡村)은 옛날 관가에서 연락을 다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하고 말굽을 고치기도 하고 다른 말로 바꿔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지역이 조선시대에 소동라령의 역로(驛路)였다는 것을 확고하게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제가 왜곡한 우리지명들을 반드시 고쳐야 하며,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이 필요 없게 된다.

붙임: 
1. 고지도 1부(팔도지도 외 소동라령 표기된 고지도)
2. 고지도(古地圖)에 표기된 고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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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동라령 현지 답사장면 사진 1부.
4. 조선시대 양양부 소동라영에 관한 고찰 논문 1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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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양양소식지]


양양의 노비(奴婢) 이야기
<예전에 우리고장에는 훌륭한 노비(奴婢)들이 있었다.>

낙산사 사노 걸승(寺奴乞升)

예전의 신분계층(身分階層)은 대체로 귀족·양인·천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천인의 대표적 존재가 노비(奴婢)였다. 흔히 노비라면 남의 집에서 대대로 일을 해 주는 천한 신분의 남녀(男女)를 이르던 말이다.
그러나 우리지역에는 천인 신분임에도 자랑스러운 업적을 남긴 노비가 있었다.
『삼국유사』기록에 낙산사(洛山寺)에는 걸승(乞升)이라는 사노(寺奴)가 있었다.
고려 고종 40년(1253년)에 몽골군이 양주(襄州,양양)를 침입(侵入)하였을 때 낙산사의 주지와 걸승은 함락(陷落)직전에 이성 진용[관음보살·정취보살]과 두 보주[수정염주·여의주]를 양주성(襄州城, 양양성)에 긴급히 옮겨놓았다.
그러나 몽골군의 침입이 급박함에 이르자 낙산사 주지 아행(住持阿行)은 이 두 보주를 은합(銀盒)에 담아 가지고 도망하려고 하였다. 이때 절의 종 걸승(乞升)은 이를 탈취(奪取)하여 땅속 깊이 묻어 보물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고종 41년(1254)에 낙산사 주지(洛山寺住持)는 죽임을 당하였으나, 걸승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양양지역의 성은 함락되어 초토화 되었고, 낙산사는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는 등 몽골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몽골군이 퇴각(退却)하자 걸승(乞升)은 두 보주(寶珠)를 명주도 감창사(溟州道監倉使)에게 바쳐 영고(營庫)에 간직하여 왔다. 명주성이 위태하자 지림사(祗林寺) 주지 각유(住持覺猷)가 임금에게 건의하여 임금이 윤허(允許)하여 이 보주를 무오(戊午1258) 11월에 궁중으로 옮겨 봉안(奉安)토록 한 공을 세웠다.
고려로서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성지(聖地)인 낙산사의 창건과 관련된 두 보주(寶珠)는 빼앗길 수 없는 신보(神寶)였다. 그러나 고려 원종 14년(1273) 1월에 고려로 왔던 원나라의 마강(馬絳)이라는 사신(使臣)이 그 해 3월에 돌아갈 때 고려의 대장군 송분(宋●)이 수행했는데, 이 때 송분(宋●)에게 낙산사 관음여의주(觀音如意珠)를 원나라 황후(元皇后)가 구해보고자 한다면서 헌납토록 했다.

양양의 최고 명창(名唱) 동구리(官奴同仇里)

조선 세조 12년(1466)에 세조대왕(世祖大王)은 정희왕후(貞憙王后), 세자(世子)와 같이 낙산사 법당에 향폐(香弊)를 드리는 불사를 행하고 월정사로 향하던 중 동년 윤 3월 14일 지금의 강릉 연곡에서, 명하여 농가(農歌)를 잘하는 자를 모아서 장막(帳幕)안에서 노래하게 하였는데, 양양의 관노 동구리(同仇里)란 자가 가장노래를 잘하였다.
세조대왕은 명하여 아침저녁을 먹이고 악공(樂工)의 예(例)로 수가(隨駕) 하게하고, 또 유의(●衣) 일령(一領)을 내려 주니 일약 나라의 소리꾼으로 등용되었다.
양양문화원에서는 관노였던 동구리의 장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부터 매년 동구리 경창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2010년까지는 군내 행사였고 2011년부터는 강원도내 경창대회로 격상하여 확대 개최함으로써 전통 민요를 발굴 전승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 있다.

양양의 천재 음악가 허억봉(官奴許億鳳)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 장악원(掌樂院)이었으며, 장악원의 최고 전악(典樂)이 된 허억봉(許億鳳)은 양양부 관노(襄陽府官奴)였다. 12살 때부터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특히 대금을 잘 불었다. 우여곡절(迂餘曲折)끝에 마침내 장악원의 전악이 되었는데, 전악은 조선시대악인(樂人) 중 최고의 위치이며 1,500여 악공을 총 지휘하였다. 16세기 조선의 음악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쳤을 뿐 아니라, 금합자보(琴合字譜) 중 대금 악보인 적보(笛譜)를 만들었다.
천재 음악인 허억봉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8대조는“세종대왕”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文敬公許稠)이고, 그의 아들 허후(許●)는‘수양대군’의 권력찬탈에 반대하다 교형을 당하였다.
또 손자 허조(許●)는 교형을 당한 아버지의 빈소에서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 이 사건과 연좌(連坐)하여‘세조’는 하양 허씨(河陽許氏)문경공파 가문을 일제히 사형하거나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후손 중 한명인 허억봉이 10대 중반에 양양의 관노로 있던 중 대금 연주에 능하여 장악원으로 불려가 장악원의 최고 지도자인 전악의 자리를 십 수년간 이어 왔으며, 그의 아들 허임은 선조의 두통을 침술로 치료하여 일약 조선 침술의 대가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천재음악가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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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양양소식지]

양양문화제는!

양양문화제는!

우리지역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군민의 뜻을 반영하여 옛 부터 계승되어 전해 내려오는 제례행사와 각종 민속놀이 등으로 온 군민이 참여하여 잊혀져가는 우리의 전통을 전승하는 뜻 깊은 문화행사로 전통과 예향(藝鄕)의 맥을 이어가는 축제의 장으로 1979년 제1회 현산문화제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발전을 거듭 우리지역 대표적 전통문화축제의 한마당으로 자리매김 한 군민 화합의 대축제이다.

문화제 특징

선사문화, 불교문화, 호국문화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계승하고 향토문화의 고유한 독창성과 특성을 살려장군 성황제를 비롯, 양양 기미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 신석기인 가장행렬, 양주방어사 행차, 대포수군만호행차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전 및 영신 행렬이 있다
고려 초에는 양주성을 축성하여 향토수호의 기지로 삼았고, 고려 중엽에는 거란병의 침입을 대파하여 양주방어사를 설치하였다.
조선 성종 때에는 조산에 대포수군만호영을 설치 영동지방의 해상방어까지 맡은 군사요충지가 되었다.
구한말 의병 항쟁을 비롯한 기미독립만세운동은 가장 맹렬한 구국 항쟁이었으며, 8·15 해방 이후에는 반공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국군 7개 사단이 창설되기도 하였다.

행사개요

우리 고장은 한반도 중동부의 변방으로 고려 목종 10년(1007년) 양주성을 축성 장군성황제를 봄, 가을로 지냈다.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매년 5월 5일 단오절을 기하여 장군성황신을 수호신으로 성황제를 지내고 굿을 성대하게 하고 제주는 고치물(서문리 양지마을 샘터)을 사용하였고 샘터에는 항상 경비병 2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성황제는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철폐되었으나 은밀히 지내오다가 1920년부터 단양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단오절을 기하여 5,6일씩 별신굿을 하고 관동축구대회를 비롯 각종 민속행사를 개최하여 영동 및 관동지방의 명실상부한 민속 행사로 개최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불행하게도 38이북의 북한치하에 들게 되면서 성황제는 은밀히 지내오다 1964년 다시 마을 제(祭)로 소규모 성황 굿이 전승되었다.
1968년 군민들의 성미(誠米)로 성황제를 단오에 지내오다 1979년 현산문화제위원회를 구성 제1회 행사를 개최하였으나, 1980년부터 기미만세 운동일인 3월1일로 정하여 4회까지 개최하였고, 1983년 제5회부터 4월 4일로 변경하여 제11회까지 거행하여 오다가 제12회부터는 단오절을 전후하여 일자를 정하여 개최하였다.

양양문화제로 명칭 변경

2013년부터 현산이라는 명칭이 양양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2013년 8월과 2015년 10월, 2차례에 걸쳐 명칭변경 여론 수렴을 위한 현산문화제 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여 교수 등 발표자들이 한결같이 명칭 변경 필요성을 제기하므로 2016년 양양 정명 600주년을 맞이하여 양양문화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제38회 양양문화제는 6월에 개최하던 일정을 9월 1일로 60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개최(금년에 한하여)하기로 하였다.

▶ 제37회 양양현산문화제

* 제5회 강원도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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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방어사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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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포수군만호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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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인 가장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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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백일장(한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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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문화제발전을위한 세미나, 심포지엄

* 2013년 현산문화제발전세미나       * 2015년 현산문화제발전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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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제 옛사진

* 제9회 현산문화제        * 제11회 양양현산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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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동구리농가경창대회

* 2013년 현산문화제발전세미나          * 2015년 현산문화제발전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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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양양소식지]

양양부사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생애

1737년 2월 5일(영조 13년) 한양 서부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박사유(朴師愈)의 4남매 중 막내로출생하였다. 연암은 노론학통의 왕실 가문이었지만, 부친은 심한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여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연암 또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매진하다가 50세가 되던 해 음보(蔭補)로 종9품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고 55세에 안의(경남 함양) 현감, 61세에 면천(충남 당진) 군수에 이어 1800년 8월18일(순조1년) 64세에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

● 조선의 대문장가 연암부사

재능이 뛰어난 연암은 20세에 이미 양반들의 위선과 무기력을 비판하는『양반전』을 썼고, 1780년 44세에 청나라 고종황제의 만수절(칠순잔치) 사절단의 진하사로 동행하였다. 한양에서 열하까지 약 3천리 길을 6개월 동안에 걸쳐 다녀온 여행후기를 일기형식으로 쓴 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만연하던 시기에 청나라의 앞선 문화와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과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을 서술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 안빈낙도의 위민행정을 실현

연암은 양양부사 재임 시 공직기강을 확립하고 황장목 패다리를 놓아 줌으로서 부민들에게 위민행정을 펼쳤다.
아들 종채가 쓴『과정록』에 의하면, 양양에 부임해 와서 보니 당시 환곡이 문란해 환곡창고가 비어 있었는데, 이는 예전부터 내려온 관행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암부사는 받은 녹봉 전액을 내 놓고 아전과 고을의 부유한 부민들에게 설득하여 몇 달 만에 창고를 모두 채워, 안빈낙도의 정신으로 공직기강을 확립 하였다.

또한 양양에는 황장목(黃腸木) 숲이 많았는데, 부사시절 마침 왕실의 관곽재(棺槨材)나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을 베어내는 때였다고 한다. 널을 캐고 난 후 자투리 널빤지는 으레 부사의 몫이나 연암부사는 남은 널빤지를 모두 냇가에 모아 놓으라고 하고, 양지말과 음지말 사이에 황장목 패다리를 놓아 백성들이 편히 다닐 수 있게 함으로서 이용후생의 위민행정을 펼쳤다. 매년 10월 초순이면 원일전리에서는 마을축제를 열어예부터 전해오는‘패다리놓기’재연행사가 열리고 있다.

● 경관녹봉론으로 양양을 알리다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부사직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 지인들의 모임에서, 재직 시 서로 받은 녹봉이 많고 적음을 말하는 자리에서 연암부사의 녹봉에 관해 묻자“양양의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만 냥은 될 만하고 고을의 녹봉이 이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일만 이천 봉과 서로 나란하다 할 만 하지요”하여 양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양에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최근 제3차 산업혁명시대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폴 호큰의‘자연자본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 이론의 개념은 자연경관이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또한 곧 자산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연암부사는 캐나다의 폴 호큰 교수 보다 약 200년 앞서 양양의 자연경관을 자산으로 환산하였다고 본다.
다가오는 2016년 9월 1일은 襄陽이 이름 지어진지 600주년이 된다. 양양문화원에서는 양양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하늘이 내린 보물로 재인식하고 문화콘텐츠를 통해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에 문화융성의 시대에“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방안을 창조해 내자”는 연암부사의 실학사상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재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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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양양소식지]

“현산학교와 남궁 억”
(한서 남궁 억 양양군수가 현산사립학교를 세우다.)

한서(翰西)의 생애와 활동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檍, 1863-1939)의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를 지낸 남궁 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변혁기에 태어나,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식민의 수난을 당하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유학교육과 근대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고종의 권유로 1903년부터 성주목사, 양양군수(襄陽郡守)를 지냈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 애국계몽에 참여하다가 1939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는데 그의 정신은 무궁화를 통해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다.

현산학교(峴山學校) 설립이야기

한서(翰西)는 1906년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2월에 소학교 설립문제로 군민대표들을 소집하여 향회를 개최, 협의한 결과 반대론이 있었고 변재안(辨財案:재정조달 방법)이 곤란하자 수향(首鄕)과 통유(通儒)들로 하여금 재정을 조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통유들이 거부하므로 유림들이 향교에 모여 대회를 열고 각 종친회와 서당계에서 1만량을 조달케 하였다.
동년 4월 9개면에 사는 재산가들을 현재의 군청사 뒤 태평루 정자로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환대하였다. 연회가 파할 무렵 그 자리에서 소학교 설립보조금 3만량을 모금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의 향장(鄕長)은 폐지되고 향청(鄕廳)이 남아 있던 재산과 유림들이 모은 1만량을 합하여 4만량(당시 화폐로 4,000환)으로 현산학교를 건립하였다.
순종 원년(1907년) 4월 민긍호 외 4명의 의병들이 군청을 점령하고 현산학교를 소진시켜 버렸는데, 이후건물을 다시 수습하여 1911년에 양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했다.
2010년 발견된 문현산학교작흥하양양인사(聞峴山學校作興賀襄陽人士) 첩문(帖文)은 1906년 8월 17일에 작성한 것으로, 현산학교가 흥성하였다는 것을 듣고 양양인사들에게 경하(慶賀)하는 글로 고급 한지에 먹으로 내려 쓴 국한문 혼용체로 길이 120cm 너비 15cm 두루마리에 1천자 내외의 반초서체로 작성되어 있다.
내용은 당시 양양은 소읍이고 벽지인 곳에서 영어, 국문 등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인근 강릉, 간성, 삼척 등지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운집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당시 팔도 가운데 가히 양양에 부끄럽지 않은 군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하는 등 양양 현산학교가 어려움 속에서 개교한 것은 타 지역에서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글은 작성자가 밝혀져 있지 않아 판단할 수 없으나 남궁 억 군수를 치하하고 양양인사들의 협조에 대하여 감사하는 문장내용으로 보아 지역유지나 당시 교육 분야 상위직책자의 글로 판단된다고 했다.
(현산문화 21호: 2010년 2월, 양양문화원 발행 참조)
붙임: 사진 4매
(남궁 억 선생, 현산학교 수료증서, 현산학교 옛터, 현산학교 축하 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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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양양소식지]

6.25전쟁과 국군의날

우리 양양은 국군의 날과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에 있다.
6.25한국전쟁 때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한 곳이 우리 양양에서 부터 이며, 최초로 38선을 돌파 북진한 10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6년국군의 날로 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6.25전쟁시 38도선 돌파는 양양에서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38도선을 경계로 양양군은 거의 북한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양양군 기사문리와 잔교리 사이에 38도선이 걸치게 되어 남북한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자주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은 1950년 봄부터 기차를 이용하여 양양역에 수많은 인민군과 무기, 군수물자를 옮겨왔고 전쟁준비를 하였다.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양양에서부터 불법 남침을 감행하였다. 미처 대비를 제대로 못한 대한민국은 후퇴를 하게 되었다. 두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부산에서 대구에 이르는 지역까지만 남기고 적의 손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의 전투병력과 5개국의 지원부대가 발 빠른 참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반격을 시작하여 9월 말 38도선 근처에 도달했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을‘국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국군의 북진을 명령하달 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제3보병사단 23연대가 처음으로 북으로 진격하여 1950년 10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양양의 기사문리 38도선을 돌파하여 북한 땅이던 양양지역은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이어서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희망이 보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1.4후퇴)하여 양양은 물론 강릉까지 또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퇴 과정에서 양양 전 지역은 관공서, 가옥, 학교, 낙산사 등 거의 모두가 화재를 당해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이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51년 3월 26일 다시 양양을 탈환 북진하여 지금의 휴전선에서 정전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06년 7월 20일 개교식에는 200명의 학생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무상으로 공책과 연필을 공급하였고, 교과서를 깨끗이 사용한 학생들에게는 상을 주어, 다음 학년생에게 넘겨줄 수 있도록 하였다. 교사는 총 4명이며 교과는 8과목 이었다. 남궁 억은 영어와 음악을 정우용이 산수와 역사, 김홍식이 일어와 체조, 이홍영이 국문과 한문을 가르쳤다.

국군의 날 역사

10월 1일은 68주년을 맞이하는 국군의 날이다. 우리 국군의 위용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함이 국군의 날 제정의 목적이다.
처음에는 각 군의 창설일에 맞추어 따로 기념일을 가졌었다.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육군은 1946년 1월 15일이었는데 1950년 3사단이 양양 기사문리의 38도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하여 10월1일로 바꾸어 행사를 개최하다가 3군이 따로 행사를 치르니 물적 시간적 낭비가 커서 1956년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10월 1일로 통합하여 행사를 개최하도록 결정하였다.

국군 창설의 요람

6.25전쟁 중에 양양에서는 7개의 야전군 사단을 창설 전선으로 배치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0월 1일에는 부대창설의 요람과도 같은 강현면 장산리 부대창설기념공원 (102기갑여단 앞 공원으로 7개 창설 사단 및 이후 창설 부대 기념비를 이곳에 모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여 2015년부터 부대창설기념행사 개최)앞에서 기념식을 하고 양양시가지에서는 66년 전 38선을 돌파하여 양양에 입성하는 재현 행사와 8군단 장병들의 무술시범 등 다양한 행사가 있어 그날을 상기하고 군과 주민의 화합의 장을 이룬다.
북한은 핵폭탄 발사 실험을 계속 하고 있고 그에 대비한 고고도 미사일(사드)을 배치하는 문제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는 주변국에서 조차 말이 많은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나라 사랑과 안보의식을 고취시켜 굳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날 하루만이라도 나라의 평화와 안녕, 전쟁 억지를 위해 젊음을 나라에 바치고 희생하고 있는 대한의 아들 딸들을 응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38도선부근의 남북군사배치 사진>
<부산-대구만 남은 대한민국 >
<38도선을 돌파하는 국군과 유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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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양양소식지]

6·25전쟁 때 양양은 유일한“美軍政統治地域”이었다!

미군정(美軍政)은 3회에 걸쳐 실시

군정(軍政)은 사전적의미로 전쟁이나 사변 중에 점령 지역의 군사령관이 임시로 행하는 통치행위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현대사에서 미군정은 1945년 해방시기부터 1954년 11월 17일 이전까지 세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첫 번째 미군정은 1945년 8월 15일부터 한반도의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이남은 1945년 9월9일부터 미군이 진주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이다.
두 번째 미군정은 6·25한국전쟁시기에 유엔군과 국군이 북한지역을 일시 점령하던 시기인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초까지 대략 45일간 실시되었는데 이때는 전쟁 중이므로 주민들도 전쟁에 휩쓸려 생존을 위협받고 피란생활이나 동굴 속에 숨어 힘겹게 지내던 시기이다.
세 번째 미군정은 6·25한국전쟁시기 38°선 이북지역 중 양양지역만 군정을 시범 실시하였는데, 1951년 7월 4일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1953년 7월 27일까지로 보고 있는데, 실제로는 대한민국 국군으로부터 민정이양이 된 1954년 11월 17일 이전까지 3년 4개월이 통설(通說)이다.

6·25전쟁 중 양양에만 주민거주 허용!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38°선 이북지역인 강원도 7개 군(양양·고성·인제·양구·화천·철원·김화)과 경기도 2개 군(연천·포천)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으로 원주민 모두를 강제 피난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의 접근도 일체금지 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양양지역은 예외로 휴전이 이루어 질 때까지 민간인 거주를 허용하였다. 그럴만한 이유는 당시 속초지역에서 원산에 이르는 동해전선은 미8군 제10군단, 국군1군단, HID, 동해사령부, 해병대 등 작전부대가 전진 배치됨으로써 군부대를 지원할 많은 민간인 군노무자가 필요했고, 점령한 사회주의 지역에 대해 적성(赤性)을 제거하고 민주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책 이었다고 한다.
민사군정 실체는 육군 제1군단 사령부였다.
1951년 7월 4일 미 제8군사령부 부령『행정명령 제34호』에 의거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양양·고성지구에 주둔해 있던 국군 제1군단이 군정을 맡아 실시하였다. 군단사령부는 민사처를 통해 민정을 실시했고 구체적으로 행정을 집행한 것은 현지민사 팀 이었다. 이에 따라 양양의 8개 읍면은 수복이후 주민 총수 7만에 이르고 38°선 이북지역 총면적은 582k㎡에 달하였다.
양양군내 전반에 걸쳐 1951년 7월 5일 읍면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10일에는 군자치위원회를, 8월 1일에는 군 관할지구『지방자치행정잠정규정』을 공포 시행하였다. 본 규정에 의거 각 이장 읍장을 선거한 다음 동월 10일에는 양양군 민정관(군수)을 선출 초대 민정관에 박종승(朴鍾勝)이 당선되었다.
민정관(民政官)의 대주민 권한행사는 군부의 영향력 아래서 가능했으며 민사군정(民事軍政)은 미군에 의해 기획, 지휘된 것으로 주택 및 공공시설은 미 제8군의 자금과 자재를 지원받아 한국 군단의 공병대가 건설했다.
농기구, 농우, 의류 등 구호물자는 주로 유엔군사령관 산하 한국 민사원조처로부터 나왔다. 이와 같이 38°선 이북 양양지역에는 미군통제 아래서 한국군의 명령으로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이 지역에서는 한국정부의 영향력은 전혀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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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양양소식지]

양양600년사에 큰 획을 긋고, 새 천년 희망의 나래를 펴다!

1. 양양 향토사를 재조명하다.

우리는 스스로 전통문화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주인공임을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지난 9월 1일은 조선 태종 16년(1416년)에 양양이라 이름한지 600주년을 맞이하면서 잊혀 진 세월 뒤안길의 향토사를 재조명하는 뜻 깊은 기회를 가졌었다.
세계 8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는 임해고찰 낙산사의 창설설화를 시작으로 10회에 걸쳐 향토사를 살펴보았다. 몽골의 침략 때 낙산사 사노 걸승(寺奴乞升)은 이성(二聖)의 진용(眞容)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겨 묻어놓았다가 몽골군이 물러간 뒤 다시 파내어 두 보주(寶珠)를 명주동 감창사에 바쳤는데, 이를 제대로 지킬 수 없다하여 어부(御府)로 수운(輸運)하여 내부(內府)에 봉안하는 공을 세웠다.
도의선사(道義禪師)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로 건너가 지장(智藏)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당시는 교종(敎宗)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진전사(陳田寺)’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했으며, 후대에 선종을 크게 일으킨 염거화상과 보조선사 같은 걸출한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현재 양양의‘진전사’는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발상지로써 위상을 견지(堅持)하고‘조계종’의 종조(宗祖)로써 추앙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외 동해신묘의 올바른 이해, 한계령은 옛 오색령, 지금의 북암령은 옛 소동라령, 대축제 양양문화제, 연암박지원과 경관녹봉론, 영북지역 최초의 신학문 전파 현산학교, 국군의 날 지정유래, 낙산사의 조신의 꿈, 6·25한국전쟁 때 양양은 미군정통치지역 등의 내용을 양양소식지에 담아 군민을 일깨운 바 있다.
또한 양양600주년의 기념비적(記念碑的)사업으로 지난 10월 30일에 한계령 정상에 우리군민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백두대간 오색령 표석을 대형으로 교체하였다. 이로써 우리고장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오색령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파하고 조속히 오색령으로 복원하자는데 의미를 두고 홍보하였다.


2. 양양문화원의 현안(懸案)은 무엇인가?

양양문화원 및 향토사료전시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