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오색령

<부록 Ⅱ> 五色嶺과 所冬羅嶺이 標記된 古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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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25회 작성일 2017-03-1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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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色嶺과 所冬羅嶺이 標記된 古 記錄


1. 지리지(地理誌)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432~1530)

○ 양양도호부
소동라령(所冬羅嶺) : 부 서쪽 60리 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간성군
미시파령(彌時坡嶺) : 고을 서남쪽 80리 쯤 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 인제현
소동라령(所冬羅嶺) : 현의 동쪽 72리에 있다. 소파령(所波嶺) 현의 북쪽 82리, 간성군(杆城郡) 경계에 있다. 미시파령(彌時坡嶺) 현의 북쪽 80리에 있다. 미륵천(彌勒川)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그 원류가 넷이 있으니 하나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파령(所波嶺)에서 나오며,


2)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년∼1765년)

○ 양양
관애(關阨) : 오색령은 부 서쪽 50 리에 있으며 이는 설악산 남쪽 가지 인제경계에 접했다.
- 필여령은 부 서쪽 40 리에 있으며 오색령 남쪽 가지 춘천기린경계에 접했다.
- 소동라령은 부 서쪽 60 리에 있으며 필여령 남쪽 가지 기린경계에 접했으며 예전엔 서울로 통하던 길이였으나 지금은 폐했다.
- 조침령은 부 서쪽 45 리 소동라령 남쪽 가지 기린계에 접했다.
- 구룡령은 부 서쪽 70 리에 있으며 조침령 남쪽가지 강릉 금천면계에 접했다.
- 형제현은 부 서쪽 40 리에 있으며 오색령으로 향하는 길로서 서로 비슷한 두 고개가 서로 대치하여 이름 하였다.
- 양한치는 부 서쪽 20 리에 있으며 구룡령으로 향하는 길이다.
(五色嶺 在府西五十里卽是雪嶽南枝接麟蹄界. 弼如嶺 在府西四十里卽五色嶺南枝接春川 猉麟界. 所冬羅嶺 在府西六十里卽弼如嶺南枝接猉麟界舊有路通京中今廢. 阻沈嶺 在府西四十五里卽所冬羅南枝接猉麟界. 九龍嶺 在府西七十里卽阻沈南枝接江陵 金川面界. 兄弟峴 在府西四十里向五色嶺路兩峴對峙相似故名. 兩寒峙 在府西二十里向九龍嶺路.)
○ 麟蹄 : 오색령이 현의 동쪽으로 72리 거리에 있다.(五色嶺在縣東距七十二里)


3) 대동지지(大東地志 1862년∼1866년 김정호가 펴냄)

○ 양양 : 오색령(五色嶺) 필노령(弼奴嶺) 박달령(朴達嶺) 모두 서쪽으로 50 리에 인제와의 경계이다.(五色嶺 弼奴嶺朴達嶺俱西五十里麟蹄界)
○ 인제 : 오색령(五色嶺) 필노령(弼奴嶺) 박달령(朴達嶺) 모두 동쪽으로 70 리에 양양과의 경계이다.(五色嶺 弼奴嶺朴達嶺俱東七十里襄陽)
○ 추동천은 동남 30 리에서 출원하여 오색령 서쪽으로 유입하여 기린천 아래로 흐른다.(楸洞川東南三十里源出五色嶺西流入基麟川下流)
○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에 인제에서 동쪽 오색령은 70 리요, 오색령에서 양양은 50 리로서 예전에는 대로였다.(麟蹄 東五色嶺七十里襄陽五十里舊大路)


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770~1908)

○ 양양
산천편 : 오색령은 서쪽 50 리에 있다.
영로 : 오색령 필여령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 형제현 양한치
○ 인제
영로 : 오색령


5) 양주읍지(襄州邑誌 1910)

- 1823년 양주읍지에 오색령은 부 서쪽 70 리에 있으며 이를 경유하여 서울로 간다. 라고 적었다.


6) 강원도지(江原道誌 1940)

- 1940년 강원도지에 오색령은 부 서쪽 70 리에 있으며 이를 경유하여 서울로 간다. 라고 적었다.



2. 조선왕조실록. 관동창의록(朝鮮王朝實錄. 關東倡義錄)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병신(1596년) 2월 1일자 기사에 적병이 깊숙이 영동으로 침입하면 오색령(五色嶺)을 넘을 것이니 방비를 잘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 1896년 2월 16일(丙申 建陽元年·開國五○五年) 의병군을 이끌고 오색령을 넘어 양양으로 진군했다.(襄陽進軍引軍踰五色嶺,)
- 3월에 이석범을 논죄하고 제왕의 군사가 경계에 이르렀을 때 서울의 병력이 낮에는 매복하고 밤에 행군하여 춘천에서 출발하여 오색령을 넘어 양양으로 들어 닥쳤다.(三月京兵曉諭文 兄弟彎弓 致書觀察使 徐廷圭 史筆公論 李錫範論罪 王師到境 時京兵晝伏夜行, 自春川反踰五色嶺 抵襄陽,) 라는 기사가 있다.



3. 문집(文集)


1)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선 왕조 제23대 순조왕(純祖王) 8년 (1808년)경에 시임(時任) 호조 판서(戶曹判書)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奎)가 같이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것이다.

군정편4 (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
【양양(襄陽)】 영로 : 오색령(五色嶺), 필여령(弼如嶺) 기린(麒麟) 통로. 소동라령(所冬羅嶺), 조침령(阻沈嶺), 구룡령(九龍嶺) 강릉과의 경계[界]. 형제현(兄弟峴)ᆞ양한치(兩寒峙). 모두 서쪽 통로다. 라 기록되어있다.


2) 유 금강산기(遊金剛山記)

- 1485년 추강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의 遊金剛山記 서두에 ‘한 줄기가 남쪽으로 200여 리를 뻗어 가다가 산 모양이 우뚝 솟고 험준함이 대략 금강산과 같은 것이 설악산(雪岳山)이다. 그 남쪽에 소솔령(所率嶺)이 있다. 설악산 동쪽 한 줄기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룬 것이 천보산(天寶山)이니, 하늘이 눈비 내리려고 하면 산이 저절로 울기 때문에 혹 울산(鳴山)이라고도 한다.’ (一枝南延於二百餘里。山形竦峭。略如金剛本岳者曰雪岳。其南有所率嶺。岳東一枝又成一小岳。曰天寶山。天將雨雪。山自鳴 故或曰鳴山) 라고 적었다.
- 1485년(성종 16년) 윤4월 15일(을미)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을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서 영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을 지나 인제현에서 묵었다.(乙未。發五色驛。度所率嶺。雪岳亂嶂。無慮數十餘。峯皆頭白。溪邊石木亦白。俗號小金剛山。非虛語矣。…余於嶺上辭東海…自元通履平地…宿麟蹄縣.)라는 기록이 있으니 옛날에는 지금의 오색령을 소솔령(所率嶺)이라고도 부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3) 팔곡집(八谷輯)

- 1589년 강원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 具思孟)의 팔곡집(八谷輯) 한계산(寒溪山) 시의 주석을 보면 ‘양양에서 소솔령을 넘어 인제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계사 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 라고 적고 있다. 주석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古寺卽
寒溪寺自襄陽所率嶺抵麟蹄舊路經由寺下往來人必投宿于寺寺僧不堪迎接之苦不肯居住遂致空廢今則頹圮已久只有舊基砌礎宛然曾是巨刹也此山在麟蹄爲寒溪其在襄陽者曰雪岳實一山也]


4) 이광윤 선생연보(李光胤 先生年譜)

- 양서 이광윤(瀼西 李光胤 1564년∼1637년) 先生年譜에 ‘ 1602년(壬寅) 4월 관동을 두루 돌아 한계산의 승상이 빼어난 오색령을 두루 다니면서 전직 재상 절도사들과 시를 지어 읊조리며 술자리를 베풀었다.’(四月。還關東。歷 討寒溪山五色嶺勝狀。與使相。有唱醻諸作) 라고 적었다.


5) 양와집(養窩集)

<양와 이세구(李世龜 1646년∼1700년)의 양와집(養窩集)에>

- 1691년(辛未) 10월 3일(甲申) 東遊錄에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양양이고 서쪽은 인제이며 오색령 북쪽에 미시파령을 이룬다.’(曹砧之北爲五色嶺。其東則襄陽。西則獜蹄。五色之北爲彌時坡嶺)라고 적었다.
- 1693년(癸酉) 6월 그믐날 養窩가 자익 김창흡과 더불어 글을 쓰다.
라는 제하의 글 속에 ‘호수와 바다를 탐승하며 낙산사에 이르니 스님이 설악산 북쪽 가지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오색령이다. 라고 말하였다.’(探湖海到洛山。居僧指雪岳北枝曰是五色嶺也) 라고 적었다.


6) 곡운집(谷雲集)

<김수증(金壽增 1624년∼1701년)의 谷雲集卷之四에>

- 寒溪山記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기문 중에 ‘고안 을 지나 수백보를 나아가,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고서,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오색령을 경유하여 양양으로 가는데 거리는 약 80리가 된다.’(考按旣訖 起行數百步 至溪邊石上午飯逢過去僧 問其何向 則曰由五色嶺至襄陽 蓋此距海路八十里云) 라고 기록되어 있다.

- 遊曲淵記 1698년(戊寅) 2월 27일의 기문 중에 ‘각형과 지한에게 동쪽 골의 봉정 위 설악을 가리키며 물었다. 백연은 남기와 아지랑이 그윽하고 어두우니 가히 말 할 수 없는데. 필여봉 위의 오색령은 동남쪽에 있다.’(問於覺炯 池漢 而指點上雪嶽鳳頂庵在東曲 百淵在東北而嵐靄杳冥不可辨 五色嶺上筆如峯 在東南) 라고 기록되어 있다.


7) 명암집(鳴巖集)

<명암 이해조(鳴巖 李海朝) : 1660~1711. 襄陽府使,大提學,全羅道觀察使〉

(1) 五色嶺

五色嶺 在府西 多生薇蕨 [오색령 재부서 다생미궐 / 오색령은 부의 서쪽에 있으며, 고비고사리가 많이 난다]
西嶺採蕨 [서령채궐 / 오색령에서 고사리를 캐다]
季鷹南山物(계응남산물 / 끝 매봉 남쪽에서 산의 재물이
今從西嶺生(금종서령생) / 이제부터 오색령에서 생산되네.
已作少兒拳(이작소아권) / 아이의 주먹같이 생긴 모양
不下千里羹(불하천리갱) / 나물국은 천리에 으뜸이로다.
但恐放筋空(단공방근공) / 다만 힘이 없어 두려워 내쳤었는데
猶喜傾筐盈(유희경광영) / 오히려 광주리 가득하여 무거워졌네.
終今不釣魚(종금불조어) / 오늘은 그만 낚시질은 접어두고
和雨摘新莖(화우적신경) / 비 그쳐 화창하니 고사리 뜯는다.

(2) 西嶺採蕨 : 五色嶺 和答詩〈金昌翕 : 1653~1722.朝鮮後期 學者〉

西山早燒餘(서산조소여) / 서산에 일찍이 불탄 나머지
一雨綠薇生(일우록미생) / 한차례 비에 고사리 돋았네.
持筐于以採(지광우이채) / 광주리 메고서 나물을 캐는데
紛吾愛其名(분오애기명) / 나는 이리저리 고비와 친했네.
誰云此味苦(수운차미고) / 누가 쓴맛이라고 하였는가
可勵丈夫貞(가려장부정) / 걸걸한 여자에게 권면하네.
願廻腥腐腸(원회성부장) / 원대로 좋은 음식이 되나니*
稍存巖岫情(초존암수정) / 산중 은사의 작은 정이로다.*
※ 腐腸: 腐腸之藥의 준말. 곧 좋은 음식.
※ 巖岫: 巖岫之士의 준말. 곧 산중에 사는 은사.


8) 금강산 총기(金剛山總記)

- 息山先生別集 卷之三 地行錄[六] 〈李萬敷:1664·1732.朝鮮後期 學者〉
大抵我東之山。起自白頭。白頭之脉。南流至鐵嶺。限南北界。東迤爲楸池,鎖,溫定三大嶺。通八百里。溫定南三十里。爲金剛。金剛東遵海百里爲眞寶嶺。五十里爲石坡嶺。三十里爲彌峙嶺。六十里爲寒溪山。三十里爲五色嶺。九十里爲五臺山。三十里爲大關嶺。四十里爲百複嶺。百里爲太白,黃池。此其上下形勝阻阨大體也

「대저아동지산。기자백두。백두지맥。남류지철령。한남북계。동이위추지,쇄,온정삼대령。통팔백리。온정남삼십리。위금강。금강동준해백리위진보령。오십리위석파령。삼십리위미치령。육십리위한계산。삼십리위오색령。구십리위오대산。삼십리위대관령。사십리위백복령。백리위태백,황지。차기상하형승조액대체야」

/ 무릇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부터 기원하여 백두산의 맥이 남쪽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러 남북의 한계이다. 동쪽으로 비스듬히 三大령인 추지령 쇄령 온정령을 이루어 300리에 통한다. 온정에서 남느오 30리에 금강산이 되고, 금강산에서 동해를 따라 가면서 100리에 진보령이고, 50리에 석파령, 30리에 미치령, 60리에 한계산, 30리에 오색영이 되고, 90리에 오대산, 30리에 대관령, 40리에 백복령, 100리에 태백 황지에 이르는데 그 상하 형승이 대체로 험하다.


9) 증소집(橧巢集)

- 橧巢集卷之二 詩○百六哀吟 幷序 〈金信謙 : 1693~1738. 朝鮮後期 學者〉

百淵
叔父三淵先生旣棄龍華三淵。改占雪嶽百曲淵。置永矢庵於高明峰南。又於十二瀑下水簾洞中。得一阜樹屋。號以滅景。余侍先生於山中凡四十餘日。今餘一紀而如昨日事。聞滅景尙不毁。若加修葺。奉安先生畵像。募僧守護。則當爲勝事。不知早晩能成此計不。梅月翁甞捿此山五歲。童子庵在永矢庵東。閉門巖下。

백연
「숙부삼연선생기기룡화삼연。개점설악백곡연。치영시암어고명봉남。우어십이폭하수렴동중。득일부수옥。호이멸경。여시선생어산중범사십여일。금여일기이여작일사。문멸경상불훼。약가수즙。봉안선생화상。모승수호。칙당위승사。불지조만능성차계불。매월옹상서차산오세。동자암재영시암동。폐문암하。」

滅景庵空永矢哀 / 멸경암 영시암은 비었으니 구슬프고
水流人世桂花開 / 물같이 흘러가는 세상 계화가 피었구나.
玉虬何處追梅月 / 옥룡은 어디에서 매월당을 따르는가
鳳頂閑雲五色廻 / 구름이 봉정봉엔 한가한데 오색령선 맴도네.
鳳頂峰名。五色嶺名。
(위 시의 제4구(끝구) 가운데 鳳頂, 五色을 기록하고는, 시의 말미에 이를봉정봉 오색령이라고 설명한 註를 달아놓았다.)


10) 칠암집(七巖集)

〈金夢華 : 1723~1792 工曹參議,襄陽府使,同知義禁府事〉
유설악록(遊雪嶽錄)
相公戒之曰愼勿取路大乘盖愍余之老也余回留是菴
初七日辛未入大乘洞口肩輿僧蹶然仆地余墜落溪水不用椎公之言以至於此政所
謂滄浪自取也過槽潭俗呼槽爲歸于余念麟鳳龜龍是爲四靈夫以麟蹄一邑里有龍
頭菴有鳳頂獨無以龜得名之地見今此潭之巖背有文尾短而尖有似乎龜請易名曰
龜尾潭以備四靈之一登大乘嶺回視日昨經過處五歲之萬景永矢之南臺晩頃之左
右峯皆在膝下獨鳳頂爲前峯所遮而不可見下山腰十里寔爲寒溪登觀瀑臺有九天
銀河四大字刻此政乾坤逞技之處造化得意而成者也此之昨日所見十二瀑則細柳
之眞將軍棘門㶚上之兒戱必有能下之者矣臺下路絶險下臨無地間多石齒鑿鑿惴
惴然如將隕墜班孟竪幽入之夢無或類此歟向寒溪嶺遇水石佳處舍輿息肩酌溪水
澆飯而喫溪上有巨巖巖之左右丹楓映請名之曰停車巖踰嶺是爲五色石峰峭抜羅
列雪嶽之一支也止宿于五色村
初八日壬申早起飮藥水五椀儘覺數日勤苦事盡向毛孔散也踰凉峴則官吏持人馬
來待矣噫世之譚山水者必以楓嶽雪嶽幷稱邑誌又曰白頭以南雪岳最高玆山

유설악록
「상공계지왈신물취로대승개민여지로야여회유시암
초칠일신미입대승동구견여승궐연부지여추락계수부용추공지언이지어차정소
위창랑자취야과조담속호조위귀우여념인봉구용시위사령부이린제일읍리유용
두암유봉정독무이구득명지지견금차담지암배유문미단이첨유사호구청이명왈
구미담이비사령지일등대승령회시일작경과처오세지만경영시지남대만경지좌
우봉개재슬하독봉정위전봉소차이부가견하산요십리식위한계등관폭대유구천
은하사대자각차정건곤령기지처조화득의이성자야차지작일소견십이폭칙세유
지진장군극문패상지아희필유능하지자의대하로절험하임무지간다석치착착췌
췌연여장운추반맹수유입지몽무혹류차여향한계령우수석가처사여식견작계수
요반이끽계상유거암암지좌우단풍영청명지왈정차암유령시위오색석봉초발라
렬설악지일지야지숙우오색촌초팔일임신조기음약수오완진각수일근고사진향
모공산야유량현칙관리지인마래대의희세지담산수자필이풍악설악병칭읍지우
왈백두이남설악최고자산」

상공이 조심하라고 이르기를 내가 늙었으므로 대승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하여 신중하지 못했다고 근심하므로 나는 이 암자로 돌아와 머물렀다.
초7일 신미대승동구에 들어와 승려가 맨 가마가 넘어지므로 나는 시냇물에 추락하였다. 상공[관찰사 김재찬]은 쓰지 아니하고 此政[현감 김몽화]이 소위 푸른 물을 스스로 취했다고 말한다.
속칭 구유라 하는 깊은 못을 지나와서 내 생각에 기린 봉새 거북 용,이 네 영물로 하여 인제 한 고을과 용두암, 봉정암, 하나 없는 거북 이름의 땅이 바위 등 뒤 아름답고 꼬리가 짧고 뾰족한 같은 것이 있다.
이제 이 못을 거북이라 불어보고 이름을 바꾸어 이르되 구미담이 네 영물의 하나로 갖추어졌다.
대승령에 올라 돌아보니 어젯날 만경의 오세암, 남대의 영시암, 좌우 봉의 만경 모두 무릅 아래요, 봉정암이 앞을 가리고 있어 밑은 볼 수 없었다.
산허리 10리에 참으로 한계의 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九天銀河)라고 크게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此政이 천지가 왕성하게 뻗는 조물주의 뜻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고했다.
이는 어제 보았던 십이폭포 즉 한나라 진장군의 패수 자문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에 지나지 않다.
대 아래의 길은 아주 험준하여 갈수 없고 많은 돌들이 이빨처럼 쪼개져 겁나며 장차 갈라져 떨어질 것같이 그윽하게 세워져있어 혹 이런 꿈을 꾸지 않기를 한계령을 향하다가 아름다운 수석을 만난 곳에서 가마를 세우고 쉬면서 개울물을 떠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개울에 큰 바위와 바위의 좌우에 단풍이 비치므로 정차암이라고 청하여 불렀다.
오색이라 하는 영을 넘으니 석봉이 기풍이 힘 있게 나열된 설악산의 한가지다. 여기에서 묵으니 오색촌이다.
초8일 임신
일찍 일어나 약수를 다섯 사발 다 마시고나니 며칠 동안 힘이 다 빠지도록 애를 썼음이 느껴진다.
서늘재를 넘으니 관리가 인마를 대리고 와서 기다렸다.
아! 산수의 이야기는 반드시 풍악과 설악을 읍지에 올리고 백두산 남쪽의 최고의 산이 설악이다.


11) 풍악록(楓嶽錄)

저촌 심육(樗村 沈錥 1685년∼1753년)이 1713년(癸巳)에 쓴 일기 풍악록(楓嶽錄)에 ‘투촌 사람 집에 유숙하니 역시 회양 땅이다. 주인의 이름은 손일성이며, 그 아들 순흥이 말하기를 일성은 오색령에사는 한승운의 매제라 하였다.’(投村人家留宿。亦淮陽地。主人姓名孫一成。其子順興云。一成。卽五色嶺韓承雲之妹 婿云) 라고 적었다.


12) 정범조(丁範祖) 시문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1723년∼1801년)의 시문에>
- ‘상운역승을 만나려 오색령에 갔으나 영천만 마시고 만나지 못했다.’
(訪祥雲丞。値入五色嶺。飮靈泉不遇) 또 ‘길을 찾아가니 오색령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다.(徑尋五色勝) 라고 읊었다.
- 1779년 雪嶽記에 ‘동남방은 숲과 골짝이 아주 아름답다. 동쪽은 오색령인데 영천이 있어서 체증에 좋다고 한다.’(東南林壑絶美。東爲五色嶺。有靈泉。宜痞積) 라고 적었다.


13)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1736년∼1806년)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에 설악(雪岳)ᆞ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ᆞ연수파(連水波)가 되었다. 라 기록되어 있다.


14)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연경제 성해응(硏經齋 成海應 1760년∼1839년)의 記關東山水에 설악산에 관한 기록 가운데 ‘설악산은 눈같이 교결하여 설악산이라 칭하는 바, 오색령으로 이어졌다.’(山皎潔如雪。乃雪嶽之所稱也。自靑峯走東南。連亘五色嶺者) 라고 적었다.


15) 다산시문집(茶山文集)

다산 정약용 시문집 제7권 〈丁若鏞 : 1762~1836. 同副承旨,兵曹參知,刑曹參議〉
和杜詩十二首 [화두시십이수/두보의 시 십이수를 화답하다]
昭陽渡和水廻渡 [소양도화수회도/소양도에서 두보의 수회도시에 화답하다]

牛馬立渡頭(우마립도두) / 소와 말들은 나룻가에 서 있는데
沙水復平安(사수복평안) / 백사장 흐르는 물 또한 평온하여라
氣色近都邑(기색근도읍) / 풍경이 점차 도읍에 가까워지니
曠莽無險難(광망무험난) / 넓게 트이어 험난한 곳 없구려
江繞朱樓鬯(강요주루창) / 강이 둘러라 화려한 누각 성대하고
山遠平蕪寬(산원평무관) / 산이 머니 편평한 들 너르어라
便娟有柔態(편연유유태) / 예쁜 건 부드러운 자태가 있었고
麤惡羞狂瀾(추오수광란) / 추악한 건 미친 파도가 부끄럽네
土性利稻棉(토성이도면) / 흙의 성질은 벼와 목면에 알맞아
終古無饑寒(종고무기한) / 예부터 의식은 궁하지 않았다오
仙源抵雪嶽(선원저설악) / 이 물 근원이 설악에 이르렀다가
到此九折盤(도차구절반) / 여기까지 아홉 번을 굽어 돌았네
吾聞洗蔘水(오문세삼수) / 내가 들으니 산삼을 씻은 물은
不令津液乾(불령진액건) / 진액이 마르지 않게 한다던데
寤寐五色泉(오매오색천) / 자나깨나 바라나니 오색천의 물을
何由得一餐(하유득일찬) / 어떻게 해서 한번 마셔 볼거나
雪嶽之東。卽襄陽。五色嶺。有靈泉[설악지동。즉양양。오색령。유령천/설악산 동쪽이 곧 양양(襄陽)의 오색령(五色嶺)인데 여기에 영천(靈泉)이 있다]


16) 북한기록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 제공)

리춘명, <리조후반기 태백산줄기의 령길개척에 대하여>, 력사과학 2003년 2월호, 과학백과사전출판사,39쪽"리조후반기에 들어와서 태백산줄기에는 이미 전에 개척된 령길외에 새로 수많은 령길들이 개척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을 들면 판기령, 법소령, 평개령, 부합령, 적유령, 판막령, 온정령, 회전령, 탄령, 삽운령, 진부령,오색령, 흘리령, 필노령, 구룡령, 니현, 건의령, 고석령등이다.(대동여지도에 의함)...
오색령은 린제와 양양을 련결하는 령으로서 교통운수에 많이 리용되였다. 필노령은 오색령의 남쪽에서 린제와 양양을 련결하는 령이다. 이 령은오색령보다 많이 우회하여야 하였으므로, 오색령처럼 많이 리용되지 않았다."
"양양관내의 장시로서는 읍내장, 동산장, 상운장, 부동장, 물치리장 등이 있었으며 여기서는 알곡, 무명, 베, 방어, 북어 대구, 소금, 과일, 종이, 소 등이 유통되었다. 리조후반기에 들어와서 태백산줄기를 넘는 령길들이 수많이 개척됨으로써 동서지역 간에 경제적 련계가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4. 관보(官報), 개벽지(開闢誌,) 신문기사(新聞記事)


1) 관보(官報)


朝鮮總督府官報(1913. 1. 21)
1913. 1. 15.자로 江原道의 3等道路를 다음과 같이 定하다. 울진-죽변간, 강릉-견소진간, 양양-인제간(약수리 오색령 어두리 경우)…… (蔚珍-竹邊間, 江陵-見召津間, 襄陽-麟蹄間(藥水里 五色嶺 魚頭里 經由……), 라 게재하여 있다.


2) 개벽지(開闢誌,)

< 개벽 제42호 1923년 12월 01일>

- 인정, 풍속, 언어 상술함과 如히 嶺東, 嶺西는 지세 及기후가 상이할 뿐 안이라 교통이 전혀 隔絶狀態에 在하얏슴으로 인정, 풍속, 언어 등이 또한 상이하다. 즉 嶺東의 蔚珍, 三陟, 江陵은 대개 慶尙道와 갓고, 襄陽, 高城(杆城合郡)은 嶺西와 갓고(古代로 五色嶺을 통하야 嶺西의 교통이 頻頻한 所以) 通川은 咸鏡南道와 갓고 嶺西의 伊川 平康은 黃海道와 비슨하고 기타 諸郡은 京畿, 忠淸道와 비슨하다 총괄하야 말하자면 江原道의 인정, 풍속, 언어는 무슨 특색이 업다.

- 時事問題는 五色嶺道路問題와 松稧問題가 最重要하나 五色嶺問題는 大槩 民間要求와 如히 歸着되야 현재 測量에 着手中이오 松禊問題도 官民間 多少衝突되나 未久에 圓滿解決될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개벽 제62호 1925년 08월 01일 양양통신>

“양양사회 말도 많고 일도 많다”
俗諓에 종가집 메느리 말만코 남의 집 머슴군 일만타더니 襄陽사회야말로 말도 만코 일도 만타. 複雜한 내용을 상세히 記錄할 수는 업스나 개괄적으로 간단하게 몃 마 듸만 적어보자. 萬戶 미만인 襄陽주민 負抯으로 20만원 거금을 辦出하야 五色嶺을 2등 도로로 修築하야 襄陽의 交通과 發展을 圖謀한다는 절대불가능의 美名下에서 소위 有志幾人이 期成會를 조직하고 總督府當局에 허가를 엇는다고 하야 죽지 못하야 살아가는 郡民들의 分*千餘圓을 收合하여 가지고 京城에 올나가서 料理費와 기타 자기네들의 소지품 매입에 소비 하엿다는 것이 판명되야 5만여 민중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전체의 사활문제라고 宣傳하야 五色嶺道 路反對를 決議하고 道當局과 총독부 당국에 陳情書까지 제출하야서 大騷動을 이르키든 것이 아즉까지 귀에 새로운 금일에 와서는 郡公會堂과 郡守官舍問題로 또한 관민간 與論이 어지간치나 沸*된 모양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3) 신문기사(新聞記事)

<동아일보1932년 3월 15일[昭和 7년 3월 15일>
인제군 주민 800명이 연서(連署)하여 인제군 북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색령을 관통해 달라고 인제군과 강원도당국에 진정서를 제기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