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오색령

<부록Ⅰ-1> 五色嶺 地名에 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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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91회 작성일 17-03-1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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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色嶺 地名에 관한 考察


Ⅰ. 問題의 提起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조상대대(祖上代代)로 지켜온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자연문화(自然文化)의 유산(遺産)일 뿐 아니라 자자손손 길이 대물림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論意)의 시작과 끝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의의 장(場)을 마련함으로써 과거의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밝혀둔다. 왜냐하면 역사는 되풀이 될 것이며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남기는 교육적인 일만큼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양양군의 개략적 지리환경은 북쪽으로는 속초에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강릉과 접해 있다. 서쪽인 내륙으로는 인제군이 있지만, 양양과 내륙의 사이에는 분수령(分水嶺)이 되는 험준한 백두대간이 놓여 있어서 원래부터 내륙과의 교통이 불편하였다. 다만 남북으로는 교통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지명은 일반 어휘(語彙)에 비하여 변화를 거부하는 성격이 있어서 인문학적 유물로 취급된다. 정치체제가 바뀌거나, 또는 외부의 침입에 의하여 통치세력이 바뀌는 경우에도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이동하지 않는 것이 상례(常例)이므로 이들 토착주민에 의해 사용되는 지명이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으로 영(嶺)의 기능은 귀향(歸鄕)보다는 상경(上京)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당시의 인제현(麟蹄縣)과 양양부(襄陽府)의 관점에서 볼 때, 인제현에 속한 한계리와 양양부에 속한 오색리에서 영(嶺)의 기능과 관련된 지역은 출발점인 오색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오색령이라 이름하였던 것은 타당한 이름의 부여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양부에서 내륙인 경사〔(京師)서울〕로 통하는 길은 오색령(五色嶺)과 소동라령(所冬羅嶺)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나온 지도를 보면 오색령은 지금의 한계령(寒溪嶺)에 해당한다. 그리고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춘천부(春川府) 기린계(猉麟界)로 통하던 길이었으나 도로 기능을 잃었다.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듯, 지명(地名)은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유산을 상징하고, 사회 구성원의 얼이자 정신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본 논의(論意)의 목적은 오색령(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북면을 연결하는 고개, 해발 920m)의 실체(實體)를 바로 찾기 위해서 고문헌(古文獻)⋅고지지(古地誌)⋅고지도(古地圖)를 토대로 조사 한 결과 일제강점기에 한계령으로 왜곡(歪曲) 기록된 것이 명백하여 이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바로잡고자한다.



Ⅱ. 五色嶺 地名에 관한 考察


1. 五色嶺의 歷史的 記錄


1) 고문헌에 나타나는 오색령

(1)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년]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서두에 “한 줄기가 남쪽으로 200여 리를 뻗어 가다가 산 모양이 우뚝 솟고 험준함이 대략 금강산과 같은 것이 설악산(雪嶽山)이다. 그 남쪽에 소솔령(所率嶺)이 있다. 설악산 동쪽 한 줄기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룬 것이 천보산(天寶山)이니 하늘이 눈비 내리려고 하면 산(山)이 저절로 울기 때문에 혹(或) 울산이라고도 한다.” 라고 적었다.

∎ 一枝南延於二百餘里。 山形竦峭。 略如金剛本岳者曰雪岳。 其南有所率嶺。 岳東一枝又成一小嶽。 曰天寶山。天將雨雪。 山自鳴。 故或曰鳴山.

조선 성종 16년(1485년) 윤4월 15일 (을미) “오색역(五色驛)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올라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서 영(嶺)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을 지나 인제현(麟蹄縣)에서 묵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 당시에 지금의 오색령(五色嶺)을 소솔령(所率嶺)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한다.

∎乙未。發五色驛。度所率嶺。雪岳亂嶂。無慮數十餘。峯皆頭白。 溪邊石木亦白。 俗號小金剛山。非虛語矣 ...余於嶺上辭東海...自元通履平地...宿麟蹄縣.

(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에 편찬(編纂)된 양양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在府西六十里重巒疊嶂地勢險阻舊有路通京師今廢.

양양에 대한 기록에서 영(嶺)은 오직 소동라령(所冬羅嶺)만 있으므로, 이 것이 후대의 기록에 나오는 오색령(五色嶺)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나, 그 이후 자료로 보아 소동라령과 오색령은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제현(麟蹄縣)의 산천조(山川條)에도 한계산(寒溪山)의 다음 항목으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기록 되어 있으며, 인제현의 북쪽에 있는 영(嶺)으로는 소파령(所波嶺), 미시파령(彌時坡嶺) 등이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색령(五色嶺)에 대한 기록은 없다.

(3) 팔곡집(八谷集)

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팔곡 구사맹(八谷 具思孟)의 팔곡집(八谷集)에 한계산(寒溪山) 시(詩)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 “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어 인제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계사[(寒溪寺)지금의 인제군 북면 한계리 장수대 인근에 위치한 절]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라고 적고 있다.

∎古寺卽寒溪寺自襄陽所率嶺抵麟蹄舊路經由寺下往來人必投宿于寺寺僧不堪迎接之苦不肯居住遂致空廢今則頹圮己久只有舊基砌礎宛然曾是巨刹也此山在麟
蹄爲寒溪其在襄陽者曰雪岳實一山也.

(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8년 임오(1462년) 8월 5일(정묘)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기록에 상운역(祥雲驛)·연창역(連蒼驛)·오색역(五色驛)·강선역(降仙驛)·인구역(麟丘驛)·청간역(淸澗驛)·죽포역(竹泡驛)·운근역(雲根驛)·명파역(明波驛)·대강역(大江驛)·고잠역(高岑驛)·양잔역(養珍驛)·조진역(朝珍驛)·등로역(登路驛)·거풍역(巨豐驛)·정덕역(貞德驛)이상 16역은 상운도 역승(祥雲道驛丞)으로 일컬을 것.

∎ 祥雲驛、連蒼驛、五色驛、降仙驛、麟丘驛、淸澗驛、竹泡驛、雲根驛、明波驛、大江驛、高岑驛、養珍驛、朝珍驛、登路驛、巨豐驛、貞德驛已上十六驛, 稱祥雲 道驛丞。

성종 8년 정유(1477년) 1월 24일 (계해) 이극증의 계본에 따라 강릉·양양·인제의 공수 위전을 대로의 예에 따르게 하다. 기록에 호조(戶曹)에서 양전 순찰사(量田巡察使) 이극증(李克增)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강릉(江陵)의 진부역(珍富驛)·횡계역(橫溪驛)·대화역(大和驛)·임계역(臨溪驛)과, 양양(襄陽)의 오색역(五色驛)과, 인제(麟蹄)의 부림역(富林驛)은 극심하게 잔폐(殘敝)하여 모든 공급(供給)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공수위전(公須位田)을 대로(大路)의 예(例)에 따라 20결(結)을 주어서 회복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戶曹據量田巡察使李克增啓本啓: “江陵珍富驛ㆍ橫溪驛ㆍ大和驛ㆍ臨溪驛、 襄陽五色驛、麟蹄富林驛殘敝莫甚, 凡供給必不能支, 請公須位田, 依大路例給二十結, 使之蘇復。” 從之。

위의 세조실록, 성종실록에 오색역(五色驛)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색령(五色嶺)이라고 지칭한 기록은 없으나 오색(五色)을 경유하는 대로(大路)인 영로(嶺路)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문헌에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朝鮮王朝實錄』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 권72(宣祖實錄卷七十二)』 1596년 2월 1일(戊戌)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적병이 경상도의 영해(寧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받을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여 적병이 깊숙이 영동(嶺東)으로 침입하면, 추지령(楸池嶺)⋅미수파[(彌水坡)⋅오색령(五色嶺)⋅백봉령(白鳳嶺) 등의 곳은 모두 영(嶺)을 넘는 길이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備邊司【去正月三十日, 備忘記回啓也】啓曰: ……賊兵由慶尙道寧海, 沿海以北, 則平海蔚珍, 當先受敵。 此處若失, 而賊兵深入於嶺東, 則楸池嶺、彌水坡、 五色嶺、白鳳嶺等處, 皆爲踰嶺之路, 不可不備也。……

(5) 양서 이광윤 선생년보(瀼西 李光胤 先生年譜)

양서 이광윤(瀼西 李光胤 1564∼1637년)선생연보(先生年譜)에 “1602년(壬寅) 4월 관동을 두루 돌아 한계산(寒溪山)의 승상이 빼어난 오색령(五色嶺)을 두루 다니면서 전직 재상 절도사들과 시를 지어 읊조리며 술자리를 베풀었다.”라고 적었다.

∎ 四月。還關東。歷討寒溪山五色嶺勝狀。與使相。有唱醻諸作.

(6) 곡운집 권지4(谷雲集 卷之四)

김수증[(金壽增) 1624~1701년]의 『한계산기(寒溪山記)』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기문(記文) 중에 “살피고 나서 수백 보를 나아가,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고서,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오색령(五色嶺)을 경유하여 양양(襄陽)으로 가는데 거리는 약 80리가 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考按旣訖 起行數百步 至溪邊石上午飯 逢過去僧 問其何向 則曰 由五色嶺至襄陽 篕此距海路八十里云.

유곡연기(遊曲淵記) 1698년(戊寅) 2월 27일의 기문 중에 “각형에게 물으니 지한이 설악 위를 가리키며 봉정암(鳳頂庵) 동쪽 모퉁이에 있고, 동북쪽에 있는 백연(百淵)은 남기와 아지랑이 그윽하고 어두우니 가히 말 할 수 없으며, 필여봉(筆如峯) 위의 오색령(五色嶺)은 동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問於覺炯 池漢 而指點上雪嶽鳳頂庵在東曲 百淵在東北 而嵐靄杳冥不可辨五色嶺上筆如峯 在東南.

(7) 명암집(鳴巖集)

명암 이해조[(鳴巖 李海朝) 1660~1711년]가 1709년 양양부사 재임 시 현산삼십경(峴山三十景)을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과 읊은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시(詩)에 “오색령(五色嶺)은 양양부(襄陽府) 서쪽에 있는데 고비고 사리가 많이 난다.” 라고 설명하였다.

∎ 五色嶺 在府西多生 薇蕨.

(8) 양와집(養窩集)

양와 이세구(養窩 李世龜) 1646∼1700년)의 양와집(養窩集)에 1691년(辛未) 10월 3일(甲申) 동유록(東遊錄)에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양양(襄陽)이고 서쪽은 인제(獜蹄)이며 오색령 북쪽에 미시파령을 이룬다.”라고 적었다.

∎ 曹砧之北爲五色嶺。其東則襄陽。西則獜蹄。五色之北爲彌時坡嶺.

1693년(癸酉) 6월 그믐날 양와(養窩)가 자익 김창흡(子益 金昌翕)과 더불어 글을 쓰다. 라는 제하의 글 속에 “호수와 바다를 탐승하며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니 스님이 설악산(雪嶽山) 북쪽의 가지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오색령(五色嶺)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적었다.

∎ 探湖海到洛山。居僧指雪岳北枝曰是五色嶺也.

(9) 풍악록(楓嶽錄)

저촌 심육[(樗村 沈錥) 1685~1753년]이 1713년(癸己)에 쓴 일기 풍악록(楓嶽錄)에 투촌 사람 집에 유숙하니 역시 회양 땅이다. 주인의 이름은 손일성이며, 그 아들 순흥이 말하기를 일성은 오색령(五色嶺)에 사는 한승운의 매제라 하였다.

∎ 投村人家留宿。 亦淮陽地。 主人姓名 孫一成。 其子順興云。 一成。 卽五色嶺 韓承雲之妹婿云.

(10) 연려실기술별집 제16권(燃藜室記述別集 第16卷)

이긍익[(李肯翊) 1736∼1806년]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에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鐵嶺)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뻗쳐서 유관령 ․ 추지령․ 금강산 ․ 회전령 ․ 진부령 ․ 흘리령 ․ 석파령 ․ 설악 한계산이 되고, 오색령 ․ 연수파로 이어지고, 오대산 ․ 대관령 두타산 ․ 백복령이 되었다.”라고 적었다.

∎ 東起爲鐵嶺. 東北爲黃龍山. 南走爲杻串嶺. 爲楸池嶺. 爲金剛山. 爲檜田嶺珍富嶺 屹里嶺石波嶺. 爲雪岳寒溪山. 爲五色嶺連水波. 爲五臺山. 爲大關嶺. 爲頭陀山. 爲百福嶺.

(11) 택리지(擇里志)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영조 27년(1751년)에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천 산수를 논 하며, 백두산은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며, 한 나라에 북두칠성을 둘러싼 별처럼 되어 있는 그 위에는 둘레가 80 리나 되는 큰 못이 있는데,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고, 동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고,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이며 두만강과 압록강의 안쪽이 곧 우리나라이다. 백두산에서 산맥은 가운데로 뻗어 함흥에 이르고, 동쪽 가지를 따라 뻗은 두만강 남쪽, 서쪽 가지를 따라 뻗은 압록강의 남쪽이다.
함흥에서부터 산등성이가 동해에 좁게 치우쳐 서쪽 가지는 칠팔백 리에 달하고, 동쪽가지는 백 리 미만인 대간은 남으로 내려가 수천 리를 끊이지 않고 옆으로 골짜기를 이루고 경상도에 이르러서 태백산과 통하였다.
한줄기 영이 함경도와 강원도가 만나는 곳에 철령(鐵嶺)이 되었으며 이 영(嶺)을 통해 북쪽은 대로다.
그 아래로 내려와 추지령(湫池嶺)⋅금강산(金剛山)⋅연수령(延壽嶺)⋅오색령(五色嶺)⋅설악한계산(雪嶽寒溪山)⋅오대산(五臺山)⋅대관령(大關嶺)⋅백봉령(白鳳嶺)에 이어 태백산(太白山)으로 이어졌다. 여기저기 솟은 고저가 고르지 않는 산은 모두 골이 깊고 높은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다. 영(嶺)을 이르기를 영의 등성이 점점 낮아져 평평한 곳을 열어 길을 내어 영동과 통하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 모두 이름 있는 산이라 부른다.

∎ 山水

何以論山水白頭山在女眞朝鮮之界爲一國華蓋上有大澤周廻八十里西流爲鴨綠江東流爲豆滿江北流爲混同江豆滿鴨綠之內即我國也自白頭至咸興山脈中行東枝行於豆滿之南西枝行於鴨綠之南自咸興山脊偏薄東海西枝長亘七八百里東枝未滿百里大幹則不斷峽橫亘南下數千里至慶尙太白山通爲一派嶺而咸鏡江原之交爲鐵嶺是爲通北大路其下    爲湫池嶺爲金剛山爲延壽嶺爲五色嶺爲雪岳寒溪山爲五臺山爲大關嶺爲白鳳嶺仍作太白山焉皆亂山深峽危峰疊嶂耳謂之嶺者仍嶺脊稍低平處開路通嶺東其餘皆以名山稱者也

(12) 다산시문집 제7권 (茶山詩文集 第7卷)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년] 시(詩) 소양강을 건너서 두보의 수회도시에 화답하다(昭陽渡和水廻渡) 시(詩) “寤寐五色泉 何由得一餐(자나
깨나 바라나니 오색의 샘물을 어떻게 해서 한번 마셔 볼거나)" 라고 읊고.
"설악산 동쪽이 곧 양양의 오색령(五色嶺)인데 여기에 영천(靈泉)이 있다."라고 적었다.

∎ 雪嶽之東 卽襄陽 五色嶺 有靈泉.

(13) 해좌선생문집(海左先生文集)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1723년∼1801년]의 시문(詩文) 상운역승을 만나려 오색령에 갔으나 영천(靈泉)만 마시고 만나지 못했다. 에서 “길을 찾아가니 오색령(五色嶺)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다.” 라고 읊었다.

∎ 訪祥雲丞 値入五色嶺 飮靈泉不遇
停盖雲松下 虛樓不見君 徑尋五色勝 剩作四仙羣
飛舃還居後 靈漿倘許分 依依沿浦返 遙海欲斜曛.

1779년 설악기(雪嶽記)에 “동남방은 숲과 골짝이 아주 아름답다. 동쪽은 오색령인데 영천(靈泉)이 있어서 체증에 좋다고 한다.”라고 적었다.

∎ 東南林壑絶美。東爲五色嶺。有靈泉。宜痞積.

(14)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연경제 성해응(硏經齋 成海應 1760∼1839년)의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에 설악산에 관한 기록 가운데 “설악산은 눈같이 교결(皎潔)하여 설악산이라 칭하는 바, 오색령으로 이어졌다.”라고 적었다.

∎ 山皎潔如雪 乃雪嶽之所稱也 自靑峯走東南 連亘五色嶺者.

(15)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4(軍政編四) 관방(關防) 강원도[조선 순조 8년(1808년)경에 시임(時任) 호조판서(戶曹判書)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奎)가 같이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 한 것이다.]에 “양양영로(襄陽嶺路)는 오색령⋅필여령. 기린(猉麟)통로는 소동라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과의 경계. 형제현(兄弟峴)⋅양한치(兩寒峙) 모두서쪽 통로다.”라 기록되어있다.

∎ 襄陽嶺路 五色嶺 弼如嶺 猉麟路 所冬羅嶺 阻沈嶺 九龍嶺 江陵界 兄弟峴,兩寒峙 幷西路.

(16) 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

식산 이만부[(息山 李滿敷) 1664~1732년]의 금강산총기 서두에 대체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두산(白頭山)의 낙맥(落脈)이 남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며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흘러서 추지령·쇄령·온정령 등 세 고개가 되고 이것이 팔백리를 관통하여 온정령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삼십리 지점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동해 바다를 따라 백리를 내려가 진보령(진부령)이 되며 진보령에서 오십리를 더가면 석파령, 그곳에서 삼십리를 더 가면 미치령, 다시 육십리를 가면 한계산이 되고, 다시 삼십리를 가면 오색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구십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르고, 삼십리 거리에 대관령이 되고, 사십리 거리에 백복령이 되고, 백리 거리에 태백산과 황지가 된다. 이것이 금강산을 중심으로한 그 위아래의 형승이 막히고 험준한 모습의 대략이다.

∎ 大抵我東之山 起自白頭 白頭之脉 南流至鐵嶺 限南北界 東迤爲楸池 鎖溫定三 大嶺 通八百里 溫定南三十里 爲金剛 金剛東遵海百里爲眞寶嶺 五十里爲石坡嶺 三十里爲 彌峙嶺 六十里爲寒溪山 三十里爲五色嶺 九十里爲五臺山三十里爲大 關嶺四十里爲百複嶺 百里爲太白·黃池. 此其上下形勝阻阨大體也.

(17) 산경표(山經表)

조선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1712~1781년]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山經表』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나타낸 지리서이다. 우리나라 산들의 족보인 셈이다.
책의 윗부분에 대간(大幹)·정맥(正脈) 등의 명칭을 가로로 표시하고, 그 아래에 세로로 산·봉우리·고개 등의 연결 관계, 산들의 갈래를 기록하였다.
표 밖의 상단에는 그 산이 속한 군현 이름을 표시하여 행정구역상의 위치를 나타냈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광문회에서 『택리지』 『도리표』에 이어서 지리서로서 세 번째로 1913년에 간행한 책이 『山經表』인데 산경표에 나타난 지명은 총124개소 중 山57개소, 嶺48개소, 峙8개소, 峴7개소 峰4개 소이며 내용은 <표 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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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1896년 2월 16일(丙申 建陽元年·開國五○五年) 유진장 이우렬(留陣將 李佑烈)이 의병군(義兵軍)을 이끌고 오색령(五色嶺)을 넘어 양양으로 진군했계에 이르렀을 때 서울의 병력이 낮에는 매복하고 밤에 행군하여 춘천에서 출발하여 오색령을 넘어 양양으로 들이 닥쳤다.”라는 기사가 있다.

∎ 三月京兵曉諭文 兄弟彎弓 致書觀察使 徐廷圭 史筆公論 李錫範論罪 王師到境 時京兵晝伏夜行, 自春川反踰五色嶺抵襄陽.

(19) 증보문헌비고 권28(增補文獻備考 卷二十八)

양양 산천편(襄陽山川編)에 오색령은 서쪽 50 리에 있다. 모든 산의 총설에 나타나 있다. 양양 영로(襄陽嶺路)는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조침령⋅구룡령⋅형제령⋅양한치이며, 인제 영로(麟蹄嶺路)는 미시령⋅흘이령⋅탄둔령⋅두모치⋅건리치⋅오색령⋅서파령⋅가노치⋅진보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 襄陽 五色嶺在西五十里右諸山見總說
嶺路五色嶺見襄陽嶺路 弼如嶺並西路 所冬羅嶺 阻沈嶺 九龍嶺江陵路 兄弟峴 兩寒峙並西路麟蹄 嶺路味施嶺……屹伊嶺 炭屯嶺……頭毛峙……建里峙……
五色嶺 見襄陽嶺路 西坡嶺並東路 加奴峙南路 眞寶嶺北路


2) 고지지(古地誌)에 나타나는 오색령

(1)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년 양양부(襄陽府) 지도에는 북쪽에 있는 영(嶺)으로서 오색령(五色嶺)⋅필여령(弼如嶺)⋅소동라령(所冬羅嶺)⋅조침령(阻沉嶺)⋅구룡령(九龍嶺) 등의 다섯 개의 영이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열거되어 있으며, 북쪽의 오색령이 설악산의 주봉에 가장 가깝다. 이로써 보면 오색령(五色嶺)과 소동다.(襄陽進軍 引軍踰五色嶺) “3월에 이석범을 논죄하고 제왕의 군사가 경라령(所冬羅嶺)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오히려 구룡령(九龍嶺)에 인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도로의 표시는 유일하게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기능이 우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악산의 주봉에 근접한 오색령의 위치로 볼 때 지도상의 오색령은 현재의 한계령임이 분명하다. 『輿地圖書』의 관애조(關阨條)에는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조침령⋅구룡령⋅형제현⋅양한치 등의 일곱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서 오색령⋅필여령⋅소동라령의 세 기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五色嶺 在府西五十里卽是雪嶽南枝接麟蹄界
∎ 弼如嶺 在府西四十里卽五色嶺南枝接春川猉麟界
∎ 所冬羅嶺 在府西六十里卽弼如嶺南枝接猉麟界

이러한 기록을 참조하면 양양부(襄陽府)에서 인제현(麟蹄縣)으로 이르는 관애(關阨)는 북단의 오색령(五色嶺)에서 남단의 소동라령(所冬羅嶺)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대동지지(大東地志)

1866년 양양 영로조(襄陽嶺路條)에는 연수파령⋅오색령⋅필여령⋅박달령⋅소동라령⋅구룡령⋅양한치⋅소량치 등의 모두 여덟 개의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여기에서 오색령(五色嶺)에 대한 설명은 필노령⋅박달영 등과 함께 되어 있고, 아울러 소동라령(所冬羅嶺)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 五色嶺 弼奴嶺 朴達嶺 俱西五十里獜蹄界.
∎ 所冬羅嶺 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獜蹄界.

옛날의 소동라령(所冬羅嶺)에는 경사[(京師)서울]로 통하는 대로(大路)가 있었다. 그런데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인제(麟蹄)의 영로조(嶺路條)에는 연수파령⋅오색령⋅필노령⋅박달령⋅진부령⋅선유령⋅흘이령⋅소파령⋅회전령⋅응봉령⋅탄령⋅건이령⋅두모현⋅사라치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양양(襄陽)과 연결되는 것은 오색령⋅필노령⋅박달령 등의 세 영(嶺)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大東地志』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소동라령(所冬羅嶺)보다는 오색령(五色嶺)이 인제와 양양을 잇는 주요 통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지지 권27(大東地志 卷二十七)의 정리고(程里考)에 “경도(京都)를 기점으로 전국으로 통하는 십대로(十大路) 중 동남쪽 평해까지 대로(東南至平海大路)의 기록을 보면 홍천(洪川)의 가노진(加奴津)에서 인제(麟蹄)는 10리, 인제에서 서울까지는 360리요, 인제에서 동쪽 오색령(五色嶺)까지는 70리, 오색령에서 양양(襄陽)까지는 50리로 구대로(舊大路)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오색령은 경도(京都)에서 출발하여 평해에 이르는 주요대로(主要大路)였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졌다.

∎加奴津十里 麟蹄十里京三百六十里 ○東五色嶺七十里襄陽五十里舊大路

(3) 관동읍지(關東邑誌)

관동지의 편찬 시기는 명기되어 있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동읍지[(關東邑誌) 1871년의 선생안(先生案)]에 군수의 도이임(到移任) 년월이 기록된 읍지가 14개나 있다. 이를 토대로 비교해 보면 각 읍지를 종합하여 성책(成冊)한 것은 1829년에서 1831년 사이로 추정된다. 관동지는 총1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3권에 양양(襄陽)과 간성(杆城)의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영로(嶺路) 연수파령은 서북쪽 75 리에 있으며 오색령⋅필노령⋅박달령은 모두 서쪽 50 리에 있는 인제계(麟蹄界)이다.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서쪽60 리에 있는 험한 절벽지로 경성으로 통하던 대로로 인제계(麟蹄界)이다.
구룡령(九龍嶺)은 서남쪽 60 리에 있으며 강릉계(江陵界)이다

∎ 嶺路連水坡嶺西北七十五里五色嶺弼奴嶺朴達嶺俱西五十里麟蹄界所冬羅嶺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麟蹄界九龍嶺西南六十五里江陵界.

(4) 양주읍지(襄州邑誌) 

1823년 양주읍지(襄陽邑誌)에 “오색령(五色嶺)은 부(府) 서쪽 70 리에 있으며 이를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간다. 이는 미시령 길에 비해 50 리나 단축되는데 영(嶺) 아래에 예전에 역(驛)이 있었으나 관터는 비어있다. 골짜기와 냇물이 험하여 간성의 원암(元巖)으로 역을 옮겼다. 영의 북쪽에 온천이 있는데 박필정[(右尹 朴弼正):1747년 양양부사, 1755년 한성부우윤]이 이르기를 고성의 온정 온천수보다 못지않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 五色嶺在府西七十里由此入京則比彌坡路短五十里嶺下舊有驛基館墟移峽川之險移驛於杆城之元巖嶺之稍北有溫泉朴右尹弼正以爲湯水之效無滅於高城井云.

(5) 강원도지(江原道誌)

1940년 강원도지에 “오색령(五色嶺)은 부(府) 서쪽 70 리에 있으며 이를 경유하여 서울로 간다.”······라고 적었다.

∎ 五色嶺在郡西七里由此入京則比彌陂路短五里嶺舊有驛基館.墟以峽川之險移驛于杆城元岩嶺之稍北有溫泉諺傳古有此嶺一木開五色花見之者長生不老近世此花潛影不見只有藥水湧出飮者得效大正己卯郡守全在禹使人探査得一木開靑黃赤三色花移植則枯死故於本生地培養繁殖而方探五色花木也


3)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五色嶺


(1)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회화식 군현지도집이다. 해동지도에 있는 문장들을 풀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양양부로 승격되었으며 태종 16년(1416년)에 양양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양양군 일대와 속초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양양읍 군향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지도 위쪽의 소천면(所川面)과 도문면(道門面)이 현재의 속초시(束草市)에 해당하며 지도 아래쪽의 동산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양에 포함된 땅으로 양양군 현북면지역이다. 청초호(靑草湖), 쌍호(雙湖) 등의 석호(潟湖)가 발달한 지역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 위는 설악산 일대이며 오색령⋅박달령⋅조침령⋅구룡령 등의 고개는 양구⋅인제⋅춘천과 통하는 통로가 된다.
동해묘[(東海廟)동해신사, 양양읍 조산리]는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과 축을 내리어 동해신(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낙산사를 비롯하여 신흥사⋅영혈사⋅개운사⋅명주암 등의 사찰이 있었다. 양양을 중심으로 표기된 영(嶺)을 보면 오색령(인제계)․박달령(춘천계)․조침령(춘천계)․구룡령(강릉계)순으로 기록 되어 있다.

(2) 광여도(廣輿圖)

양양부(襄陽府)는 양양군과 영랑호 남쪽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읍치(邑治)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이다. 고을의 진산(鎭山)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설악산(雪嶽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색약수로 유명한 오색령(五色嶺)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토축(土築)과 석축(石築)이 섞여 있었던 읍성이 있었음이 지도에도 보인다. 읍성의 오른쪽에는 동해묘(東海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사전(祀典)에는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신라의 의상[(義湘)625-702년]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낙산사(洛山寺)가 있고, 150m 아래쪽 절벽 위에 지어졌다는 의상대(義相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서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도 신라 신문왕 9년(68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영혈사(靈穴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가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상운역(祥雲驛)은 15개의 속역(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며 해안가에는 석호(潟湖)에 해당하는 청초호·쌍호·포마호(靑草湖·雙湖·浦麻湖) 등이 보이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동산현(洞山縣)은 고려 초에 병합된 폐현을 가리킨다.
양양을 중심으로 지도에 표기된 영(嶺)을 살펴보면 오색령(인제계)․박달령(춘천계)․조침령(춘천계)․구룡령(강릉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청구도(靑邱圖)

조선순조 34년(1834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지도책이다. 전국을 남북 29층, 도서 22판으로 나눈 방안지도(方眼地圖)로서, 방안의 실제거리는 남북이 100 리, 동서가 70 리이다. 지도의 내용으로 읍치 산천 군현경계 도로 면 창고 서원 향교 누정 역 고개 교량 봉수 도서 진 시장 등이 그려져 있는 전국지도로서 대동여지도 제작의 바탕이 된 지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양양을 중심으로 한 지도에 표기된 영(嶺)을 살펴보면, 오색령⋅형제현⋅연수령 조침령⋅소동라령〔險阻而廢〕⋅구룡령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철종 12년(1861년)에 제작한 우리나라의 대축적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순조 34년(1834년)에 김정호 자신이 제작한 『청구도』를 27년 후에 증보 수정한 대축적지도로 분첩 절첨식 지도첩이다. 우리나라의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다.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남북은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 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도록한 전국지도이다. 양양을 중심한 일부분의 영(嶺)을 살펴보면 오색령⋅필여령⋅구룡령 세 개의 영(嶺)이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열거되어 있다.

(5) 양양읍지도(襄陽邑地圖)

1872년의 지방지도(총459매)는 병인 신미 두 차례의 양요를 겪은 후 국방을 강화하고 사회 경제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읍치의 관청 건물과 각면의 소속 동리와 같은 행정적 요소 창고 장시 역원 도로와 같은 사회경제적 요소 제단 누정 서원 고적과 같은 문화적 요소 등이 망라되어 지방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동해신묘의 규모와 낙산사 관음굴 의상대가 두드러지게 표현 된 것이 특징이다. 양양읍 지도에는 북쪽에 오색령⋅필여령⋅조침령⋅구룡령 등의 네 개의 영(嶺)이 기록되어 있으며, 인제현(麟蹄縣) 지도에는 동쪽으로 오색령(五色嶺) 양양계(襄陽界)라 하여 오색령(五色嶺)이 양양에 이르는 주요 통로임을 기록하고 있다.

(6) 其他地圖

조선중기 이후 한결같이 오색령으로 표기된 지도는 총43개로 조사 되었다. 이 중 앞에 기록된 해동지도 광여도 청구도 대동여지도 양양읍지도 등 5개지도 외에 38개 지도를 열거하면 관동지도(1712년,古4709-35) 여지도(1736〜1767년,古4709-68,양양부, 인제현) 비변사인방안지도(1745〜1765년) 해동지도(1750년, 강원도, 인제현) 조선지도(1750〜1768년,奎16030)선역도(1760년대) 팔도분도(1758〜1767년) 팔도지도(1758〜1767년,古4709-23) 팔도지도(1767〜1778년, 古4709-14) 동역도(1767년, 古4709-27)지승(1776년, 奎15423, 강원도, 양양부, 인제현) 조선팔도지도(古屛912.51-J773-강원도.황해도) 조선팔도지도(1776〜1785년, 古4709-54, 강원도) 좌해분도(古4709-99)팔도지도(1790년, 古軸4709-48)여지도(1789〜1795년, 古4709-78)여지도(1795〜1822년, 古4709-37) 해동지도(1800〜1822년, 古4709-61, 강원도) 광여도(1800년,古4790-58, 관동도, 인제현) 좌해지도(1830년, 奎12229) 청구도(3책 제15층9판) 청구요람(1834년) 청구요람(1책제15층9판) 대동방여전도(12첩2면,강원도) 동여도(1857년) 1872년 지방도(인제현) 지도(古4709-92, 강원도) 해좌전도(1849〜1863년) 조선여지도(1894년) 조선전도(1894년) 대한전도(1899년) 대한지지(1906년) 대한신지지부지도(미상)등이다.


4) 일제강점기 신문 및 관보 등(日帝强占期 新聞官報 等)


(1) 동아일보 기사

1932년 3월 15일[소화(昭和) 7년 3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에 “인양선도로문제(麟襄線道路問題)로 동민, 당국(洞民當局)에 진정 오색령으로 고쳐달라고 800명 동민연서(洞民連書)로”란 제목으로 대서 보도되었다. 기사내용은 인제군 주민 800명이 연서하여 인제군 북면 원통리를 중심으로 오색령을 관통해 달라고 인제군과 강원도당국에 진정서를 제기하였다.

(2) 조선총독부 관보

조선총독부관보에 1913. 1. 15.자로 강원도의 3등 도로(道路)를 다음과 같이 정하다. 울진~죽변 간, 강릉~견소진 간, 양양~인제 간(藥水里 五色嶺魚頭里 經由)… 라 게재하여 있다.

(3) 개벽

개벽 제42호 1923년 12월 1일 기사제목 조선의 처녀지(處女地)인 관동지역 란에 인정, 풍속, 언어 상술함과 여히 영동, 영서는 지세 급(及) 기후가 상이할 뿐 안이라 교통이 전혀 격절상태(隔絶狀態)에 재 하얏슴으로 인정, 풍속, 언어 등이 또한 상이하다. 즉 영동의 울진, 삼척, 강릉은 대개 경상도와 갓고, 양양, 고성(杆城合郡)은 영서와 갓고 [고대(古代)로 오색령을 통하야 영서의 교통이 빈빈(頻頻 : 잦은)한 소이(所以 : 모양)] 통천은 함경남도와 갓고 영서의 이천 평강은 황해도와 비슨하고 기타 제군(諸郡)은 경기, 충청도와 비슨하다 총괄하야 말하자면 강원도의 인정, 풍속, 언어는 무슨 특색이 업다.

개벽 제42호 1923년 12월 1일 기사제목 관동의 흑산국 양양군(關東의 黑山國 襄陽郡) 란에 시사문제는 오색령도로문제(五色嶺道路問題)와 송계문제(松稧問題)가 최중요(最重要)하나 오색령문제는 대개(大槩) 민간요구와 여히 귀착(歸着)되야 현재 측량에 착수중이오 송계문제(松稧問題)도 관민간 다소충돌(多少衝突)되나 미구(未久)에 원만해결(圓滿解決)될 것이다.

개벽 제62호 1925년 8월 11일 기사 내용을 개괄적으로 간단하게 몇 마디만 적어보자. 만호(萬戶) 미만인 양양주민 부담으로 20만원 거금을 판출(辦出)하야 五色嶺을 2等 道路로수축(修築)하야 양양의 교통과 발전을 도모(圖謀)한다는 절대불가능의 미명하(美名下)에서 소위 유지기인(有志幾人)이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하고 총독부당국(總督府當局)에 허가를 엇는다고하야 ······오색령도로반대(五色嶺道路反對)를 결의하고 도당국과 총독부(總督府) 당국에 진정서까지 제출하야서 대소동(大騷動)을 일으키든 것이······


2. 한계령으로 地名 變更記錄


1) 日帝强占期 寒溪嶺으로 歪曲

한계령(寒溪嶺)은 일제(日帝)가 멋대로 땅이름을 바꿔놓은 왜곡의 표본사례이다. 1914년 이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전국의 지명과 지지사항(地誌事項)중 양양군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양양군 서면 오색령을 인제군 북면 지역에 표기하고, 한계령은 양양군 서면지역으로 변경 표기함으로써 우리 전통고유 지명인 오색령을 한계령으로 뒤바꿔 놓은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는 신종원(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의 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朝鮮地誌資料≫ 강원도편-(경인문화사) 420쪽 인제지도 북면 동쪽으로 오색령이 표기되어있다. 양양지도에는 오색령이 없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형제현(兄弟峴), 연수파령(連水坡嶺), 조침령(阻沉嶺), 구룡령(九龍嶺)으로 표기되어있다. 『朝鮮地誌資料』 강원도편 421쪽에 수록된 지명은 인제군 북면 강천계간명(江川溪澗名)에 오색천(諺文:오이)이 한계리 자양곡(紫陽谷)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표 2>참조. 423쪽의 인제군 북면 영치현명(嶺峙峴名)에 오색령(諺文:오이영)이 한계동(寒溪洞) 자양동(紫陽洞)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40쪽의 양양군 서면 영치현명(嶺峙峴名)에 한계령(諺文:한게영)으로 적고, 비고란에 서면 오색리로 기록하였다<표 4>참조.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의 각 쪽별의 세부 자료는 중․하략(中下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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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강점기 한계령으로 變更

지도상에 한계령으로 단독표기 된 것은 1915년 발행된 조선총독부지도가 최초 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1930년(昭和 5年 4月)에 발행한 한국근대 지지자료(韓國近代地誌資料)의 인제군세 일반(麟蹄郡勢一斑) 지도[(地圖)1/200,000)]에는 설악산과 그 아래 영로는 한계령(寒溪嶺)⋅단목령(檀木嶺)⋅조침령(鳥砧嶺)순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오색령이 지도상에서 완전 삭제되고 한계령으로 표기한 시점은 이때부터 임을알 수 있다.

3) 일제강점기 오색령 명칭 계속사용

조선총독부는 조선지지자료(1914년 이전) ․ 조선총독부발행지도(1915년)․
한국근대지지자료(1930년)에 한계령으로 변경표기 한 것과는 관계없이, 총독부관보, 개벽(월간종합지), 동아일보 신문기사, 강원도지 등에 오색령 명칭을 통상적(通常的)으로 사용해 왔다. 그 실례를 보면 “조선총독부관보(1913년 1월 15일)에 강원도 3등 도로를 다음과 같이 정하다 에서 양양〜인제 간(약수리 오색령 어두리 경유)······” “동아일보기사(1932년 3월 15일) 인양선도로문제로 동민, 당국에 진정 오색령으로 고쳐달라고······” “개벽 제42호(1923년 12월 1일)기사제목 조선의 처녀지인 관동지역 란에······(古代로 五色嶺을 통하야 嶺西의 교통이 頻頻한 所以)······” “개벽 제42호(1923년 12월 1일)관동의 흑산국 양양군(關東의 黑山國 襄陽郡) 란에 시사문제는 오색령도로문제와 송계문제(松稧問題)가 최중요하나 오색령문제는······” “개벽 제62호(1925년 8월 11일) 만호(萬戶) 미만인 양양주민 부담으로 20만원 거금을 판출(辦出)하야 오색령을 2등 도로로 수축(修築)하야······” “강원도지(1940년)에 오색령은 부 서쪽70리에 있으며 이를 경유하여 서울로 간다.”라고 적었다. 등이다.

4) 정부수립이후 한계령으로 命名한 誤解

정부수립이후(政府樹立以後) 공식적(公式的)으로 한계령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61년 4월부터이다.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 소장(所藏)된 한계령(寒溪嶺) 지명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인제군은 1959년 3월에 지명조사를 실시하여, 동년 3월 27일 지명제정위원회의 절차를 거쳐, 동년 4월 1일 지명승인 신청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계령 지명의 유래는 “영동과 통하는 오색이영의 낮은 영으로서 한계지역에 있다하여 한계령(寒溪嶺)이라고 하나 오색이영 이라고도 함”이라고 보고 하였다. 국무원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행정구역이외의 표준지명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이를 사용한다.”라고 국무원고시 제16호(1961년 4월 22일)로 전국의 지명을 고시 할때 한계령(寒溪嶺)도 함께 표기되었다.
설악산 횡단도로 개축공사(改築工事)는 육군공병부대가 2차에 걸쳐 실시한 바 있다. 1차 공사는 육군 제3군단에 의해 1963년에 완공하였고, 2차 공사는 육군 제5289부대서 1971년에 각각 완공하였다. 군부대에서 공사를 완공한 이후 당시 일반사회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던 오색령을 갑자기 한계령이라 부르게 되니, 일반사회에서는 군부대와 관련된 것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일제가 임의로 지도상에 오색령(五色嶺)을 한계령(寒溪嶺)이라 바꿔 표기했던 것을 바르게 고치지 않고 비판 없이 그대로 표기한데서 온 오해(誤解)이다.


3. 오색령⋅한계령 考證 比較

앞에서 오색령에 관하여 고문헌(古文獻)․고지지(古地誌)․고지도(古地圖)등 역사적으로 고증(考證) 된 기록들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및 정부수립(政府樹立)이후 오색령(五色嶺)이 한계령(寒溪嶺)으로 지명(地名)이 변경된 기록을 각각 살펴보았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비교하기 위한 표는 다음과 같다<표 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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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오색령 地名 復元의 當爲性과 復元節次


1. 오색령 지명 복원의 당위성


지금의 한계령(寒溪嶺)은 오색령(五色嶺)이다. 오색령이란 지명의 효시(嚆矢)는 조선 선조실록(1596년)에 처음 등장하여, 이때부터 계속 오색령으로 불리어 왔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 양양군에 속해있다.(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1-24번지) “오색령(五色嶺)은 강원도 양양군 서쪽 23km지점에 있는 고개, 이 고개를 넘으면 인제군에 이른다. 고개아래에는 옛날의 역원(驛院)이 있었다. 한편 협천(峽川)이 험하여 역(驛)을 간성(杆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고개의 조금 북쪽에는 온천(溫泉)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김익달(金益達)『대백과사전(大百科事典)』,4권 783쪽 참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문헌⋅지지자료⋅지도에 한결같이 오색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양양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영로(嶺路)는 각종문헌을 통해서 볼 때 대표적으로는 소동라령(所冬羅嶺)과 오색령(五色嶺)이 있었다고 하겠으며. 동여도(東輿圖)에 오색령(五色嶺)은 고대로(古大路)라 병기(倂記)되어 있다.

오색령은 “양양사람들이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산 도둑이 들끓어 해가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양양군 서면 오가리(오색리)의 길 옆 바위에 금표(禁標)라고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 바위가 있으며 한계령에 오르는 길에는 금표교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참조> 현행사용 되는 지도상에 양양군과 인제군의 경계는 영(嶺)마루 선이 아닌 인제군의 한계천(寒溪川) 마지막 지계곡인 도둑바위 골로 100여m내려간 곳이다. 도둑바위 골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금표암과 도둑바위 골이 현재까지 상존하는 것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동․서 영로(嶺路)임을 입증하는데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조선중기를 전후하여 소동라령(所冬羅嶺)이 도로(道路)의 기능을 상실하자, 오색령은 새로 개척한 도로상에 위치한 영(嶺)으로 분명히 소동라령(所冬羅嶺)과는 별개의 지명이다. 혹자는 소동라령이 현재의 한계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여지도(輿地圖1736-1767년)․해동지도(海東地圖1678-1752년)․팔도지도(八道地圖1767-1778년)․좌해분도(左海分圖1787-1795년)․청구도(靑邱圖1834년)․좌해지도(左海地圖1830년) 등에는 오색령과 소동라령은 전혀 다른 위치에 표기 되어있다. 북쪽의 오색령(五色嶺)은 설악산의 주봉에 가장 가깝다. 이로써 보면 오색령(五色嶺)과 소동라령(所冬羅嶺)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소동라령(所冬羅嶺)은 오히려 구룡령(九龍嶺)에 인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악산의 주봉에 근접한 오색령의 위치로 볼 때 지도상의 오색령은 현재의 한계령임이 분명하다.

반면 한계령이란 명칭이 한 때 동여도에 표기 되었다가 대동여지도에서는 삭제된 지명이었지만, 동여도(東輿圖)상에 표기 된 한계령로(寒溪嶺路)는 양양군 소천면〔(所川面)지금의 속초시지역〕의 소양치 위쪽을 지나 인제군 북면 백담사를 경유하여 남교리(嵐校里)로 연결 된 도로로 현재의 한계령 도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계령 명칭으로 표기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일제는 조선지지자료(1914년 이전)에 오색령(五色嶺)은 인제군 북면 자양동에 속한 것으로 기록하고, 한계령(寒溪嶺)은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속한 것으로 뒤바꿔 놓았다. 조선총독부발행지도(1915년)에 한계령으로 단독 표기하였다. 한국근대 지지자료1930년 4월)인제군세 일반(麟蹄郡勢 一斑)지도에는 오색령(五色嶺)은 완전히 삭제되고 한계령(寒溪嶺)으로 일원화(一元化)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지도상에 표기된 한계령 명칭과는 관계없이 오색령이란 지명을 통상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주민들은 일제가 지도상에 한계령으로 표기한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점기에 오색령 명칭을 사용한 자료를 보면, 조선총독부관보(1913년), 개벽 42호(1923년), 개벽 제62호(1925년 8월 11일), 동아일보기사(1932년) 강원도지(1940년)등이다.
정부수립이후 1959년도 국무원에서 전국의 지명조사 당시 군(郡)에서 보고 된 조사서식을 보면 지도상 기재된 지명, 경위도, 좌표, 지명유래 순으로 기록토록 되어 있다. 이 보고서식으로 보아 이미 지도상에 표기된 지명 외에는 기초조사 기관의 재량권이 결여 된 것이 아닌가 본다. 따라서 한계령지명이 현재까지 기록유지 된 소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왜곡된 지명이 복원되지 못한 상황에서 6․25한국전쟁을 맞게 되자 1950년도 미군사지도 제작 시 일본총독부의 지도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전쟁와중에 지도제작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또 1959년도에 한국 지명조사 실시 당시 조사서에 첨부된 지도 역시 제작 근거자료가 없는 점으로 보아 1950년대 미 군사지도를 참작하여 정부(국방부)에서 제작된 지도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유추해 본다. 이상을 종합 할 때 소동라령(所冬羅嶺)과 오색령(五色嶺)은 별개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일제 강점기 이후에 오색령을 한계령으로 표기하였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으로 본다.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 할 때, 역사적으로 고증된 자료를 토대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아서 후손들에 물려주는 작업은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2. 現行法上 地名 復元節次


자연지명은 개별법에서 정한 이외의 마을⋅산⋅고개⋅나루터⋅폭포⋅굴⋅섬 등으로 국토해양부의 측량, 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제91조 제2항)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자연지명이라 하더라도 하천은 하천법, 국립공원에 관한 명칭은 자연공원법, 관광지 등은 관광진흥법에서 각각 개별법으로 규정 되어 있다. 측량, 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 제91조의 규정에 의하여 지방자치단체나 시민단체, 개인 또는 일반법인 이 지명제정⋅변경⋅폐지 등에 대하여 지명의 유래, 지형 특징, 역사적 사실 등의 자료를 수집하여 제안 또는 발의 가능하며, 절차상으로 당해 지명이 소재하고 있는 시⋅군⋅구의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시⋅도 지방지명위원회에서 조정, 심의 후 최종적으로 국토해양부의 국가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고시하고 지도에 표기 또는 수정 된다.(국토지리정보원)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표 8>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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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맺는 말


이상 앞에서 논의 한 바와 같이 현재의 한계령은 고문헌⋅지지자료⋅지도에 한결같이 오색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민족혼 말살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는 오색령을 한계령으로 멋대로 땅이름을 바꿔놓은 이른바 창지개명(創地改名)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는 1914년 이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조선지지자료 내용을 살펴보면 양양군 서면의 오색령은 인제군 북면 자양동 자양곡에 소재 지명으로 표기하고, 한계령은 양양군 서면 오색리 소재 지명으로 변경하여 표기하였다.
조선 중기이후 발행된 43개의 고지도에 표기된 영(嶺)의 명칭 중 변천된내용을 양양을 중심으로 몇 개소 살펴보면, 진부령이 진보령으로 미시령이 미시파령으로 필여령이 필노령으로 지명이 일시 변경되었다가 복원된 사례와, 소동라령, 한계산 처럼 당시의 사정에 의하여 없어진 예는 있었지만, 오색령과 같이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어온 지명이 일제 강점기에 인제군 지역으로 속하였다가 사라진 예는 극히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왜곡행태의 예라 할 수 있다.
1930년(昭和 5年 4月)에 발행된 한국근대지지자료(韓國近代地誌資料)의 인제군세 일반(麟蹄郡勢 一斑)지도에는 설악산과 그 아래 영로로 한계령․단목령․조침령으로 표기되어있었고, 오색령은 완전히 지도상에서 삭제 된체 한계령으로 일원화 된 것을 볼 수 있다.
정부수립이후 공식적으로 한계령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61년 4월 22일 국무원고시 제16호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행정구역이외의 표준지명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이를 사용한다.”라 고시 할 때 한계령명칭이 함께 고시(告示)되었다.
우리가 용인(容認)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오색화(五色花)에서 유래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아름다운 오색령은 기암절벽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반면 몹시 추웠던 것을 되새겨 한계(寒溪)란 명칭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한계령은 우리 지역 정서와는 상관없는 지명이다.
강점기에서 해방 된지 올해가 66년이다. 일제가 자기들의 통치 상 편의에 맞춰 왜곡시킨 지명을 현재까지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할 때, 우리 윗대가 광복이 되자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디 이름을 찾았듯이 강점기에 창지개명 된 한계령을 우리의 고유지명인 오색령으로 바로 고쳐서 후손에 물려주어야한다. 이 작업(作業)이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課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 고 문 헌

강원도지(江原道誌)
개벽 제42호(1923년12월1일)
개벽 제62호(1925년8월11일)
곡운집 권지4(谷雲集 卷之四)
관동읍지(關東邑誌)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금강산총기(金剛山總記)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
다산시문집 제7권(茶山詩文集 第7卷)
대동지지(大東地志)
동아일보 기사(1932년3월15일)
만기요람(萬機要覽)
명암집(鳴巖集)
산경표(山經表)(1996.3월 산림청발간 백두대간 문헌정리요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서 이광윤 선생년보(瀼西 李光胤 先生年譜)
양와집(養窩集)
양주읍지(襄州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연려실기술별집 제16권(燃藜室記述別集 第16卷)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지지자료
조선총독부 관보(1913년1월15일)
증보문헌비고 권28(增補文獻備考 卷二十八)
택리지(擇里志)
팔곡집(八谷集)
풍악록(楓嶽錄)
해좌선생문집(海左先生文集)



지 도 목 록 오색령 관련지도

1. 해동지도
2. 광여도
3. 청구도
4. 대동여지도
5. 1872년 지방도-양양읍지도
6. 관동지도(1712년)古4709-35
7. 여지도(1736~1767년)-양양부
8. 여지도(1736~1767년)-인제현
9. 비변사인방안지도(1745~1765년)
10. 해동지도(1750년)-강원도
11. 해동지도(1750년)-인제현
12. 조선지도(1750~1768년)奎16030-인제
13. 선역도(1760년대)
14. 팔도분도(1758~1767년)
15. 팔도지도(1758~1757년)古4709-23
16. 팔도지도(1767~1778년)古4709-14
17. 동역도(1767년)古4709-27
18. 지승(1776년)奎15423-강원도
19. 지승(1776년)奎15423-양양부
20. 지승(1776년)奎15423-인제현
21. 조선팔도지도古屛912.51-J773-강원도.황해도
22. 조선팔도지도(1776~1785년)古4709-54-강원도
23. 좌해분도古4709-99
24. 팔도지도(1790년)古軸4709-48
25. 여지도(1789~1795년)古4709-78
26. 여지도(1795~1822년)古4709-37
27. 해동지도(1800~1822년)古4709-61-강원도
28. 광여도(1800년)古4709-58-관동도
29. 광여도(1800년)古4709-58-인제현
30. 좌해지도(1830년)奎12229
31. 청구도-3책제15층9판
32. 청구요람(1834년)
33. 청구요람-1책제15층9판
34. 대동방여전도 12첩2면(강원도)
35. 동여도(1857년)
36. 1872년지방도-인제현
37. 지도古4909-92-강원도
38. 해좌전도(1849~1963년)
39. 조선여지도(1894년)
40. 조선전도
41. 대한전도(1899년)
42. 대한지지(1906년)
43. 대한신지지부지도(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