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9호

- 襄陽學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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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05회 작성일 2018-02-1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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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교육]


<특강>

襄陽學考察


양언석 (강원도립대)




1. 緖論


양양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談論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의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인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과 삶과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양양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務農桑恤喪葬喜遊宴尙文學貴禮義1)


농업에 힘쓰고,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였다는 기록에서 襄陽學의 面貌를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신라의 정책이었다. 불교를 통한 一心과 佛國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
이처럼 양양은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장이 되었으며, 5세기 말엽에서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영향력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양양은 신라의 영역에 편제되었으니 익령으로 수성군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2)
조선조에는 왕조의 外親으로 양양을 부로 승격하고 특별히 관리해 왔다.3)『擇里志』山水條에 의하면 산수의 승지는 당연히 강원의 영동이 제일(山水之勝當以江原嶺東第一)일 했고, 『新增東國輿地勝覽』樓亭條形勝條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我東韓山水之勝關東爲最)라고 기록하고 있다.
儒家사회에서 연암이 景觀祿俸論을 언급하기 이전부터 선비와 문인들이 風光좋은 양양을 찾아 은둔하거나, 유람하며 심회를 표현한 시와 山行記는 양양의 역사이고 문화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양양은 삼국시대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었고 불교의 聖地였으며, 『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조선조왕조의 外親으로 특별히 관리해 왔다.
문화가 미래인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016년이 양양이라는 지명을 사용한지 600주년이 된다. 600주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지역발전에 중요한 地域學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서 襄陽學은 역사, 인문, 지리, 교육, 문화, 관광, 환경, 산업 등을 연구하여 미래발전을 탐색하는 학문이다.
오늘의 양양문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양양의 문화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襄陽學의 正立은 절실히 필요하다.



2. 文化的背景


지역의 역사는 최고의 자원이다. 양양은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오랜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를 수용하면서 사찰이 건립되었고, 사찰의 상징인 불전과 탑이 양양을 중심으로 건립되어 불교의 聖地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자장을 비롯하여 의상, 원효, 도의 등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은 대부분 입당구법(入唐求法)으로 중국의 선진문화와 불교로 敎化에 힘썼다. 대표적인 사찰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香城寺


진덕여왕 6년(652) 창건하였고, 효소왕 7년(698)에 소실되었다가 효소왕 10년(701) 의상대사가 향성사능인암터에 중건하고 選定寺하였다. 그 후 인조 22년(6144)에 신흥사라고 하였다.
慈藏(건평왕32, 610-태종무열왕1, 654)이 활동했던 7세기 중반은 선덕여왕이 재위했던 시기이다. 여자가 왕위에 올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40여개 성을 빼앗기면서 위태로워졌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선덕여왕의 귀국령으로 유학 중이던 승려들이 귀국하여 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불교로 민심을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자장은 진골출신으로 조정의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를 실행하였다. 이때, 왕명으로 위협하자“백년을 파계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겠노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승려의 꿈을 굽히지 않았다.
자장의 사상 중에 眞種說을 주장하였다. 진종설은 인도의 석가모니를 탄생시킨 왕실과 신라왕실이 같다는 신성성의 주장이다. 석가모니 종족이자 전륜성왕(인도의 이상적인 정복군주)이 다스리는 신라사회는 현재 부처와 보살이 머무르는 신라불국토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상주처이고, 설악산을 雪山이라고 명칭한 것(영혈사, 억성사, 오색석사)은 설산이 석가모니가 득도한 신성한 장소로 자장에서 비롯되었고, 설산(설악산)의 지류인 오봉산의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상주처가 되었고, 신라시대 양양을 불교 聖地의 토대로 만든 것이 자장이다.
양양지역은 불국토사상과 호국불교사상으로 불교의 성지로 확인되어 화랑도와 승려들의 중심수련장과 순례지가 되었다.


2) 洛山寺


671년(문무왕11) 義湘이 관음보살을 親見하고 낙산사 창건하였고, 그 후 범일선사가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 모셨다.
문무왕이 대당전쟁을 승리하고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경주의 王城을 새롭게 하고자 의상에게 묻자 의상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성곽을 새롭게 하여 화려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政敎를 밝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자 왕은 이에 공감하여 역사를 그만두었다.
이러한 의식에서 의상은 변방의 양양지역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인식하여 성지로 정착하고자 낙산사를 창건하였고, 이 지역을 불심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해용왕에게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은 설정은 불교의 성지임을 확인하고 있다. 변방이지만 군사적이고, 교통 중심인 양양을 중심으로 불국토 사상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이 가능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통일 후에도 불교를 신앙체계로 하여 변방의 기층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어 신라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우수한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의 관음보살 상주처를 확인하고자 찾아온 원효가 낙산사에서 비참한 시련을 겪게 된다.
낙산사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고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가 또다시 가다가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했다. “휴제호(休醍●), 화상아!”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아래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이에 원효는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는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떠났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서 주자, 원효는 그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던4) 곳을 냉천이라고 한다.
이 냉천을 문화유적으로 활용하면 흥미로울 수 있다. 의상과 원효는 동학이면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루면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왕실에서는 원효의 자율적인 사상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위해 의상의 체계적인 사상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은 당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의 제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화엄교학을 펼쳤다.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경전 중심의 교종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통해 마음과 마음으로 도를 계승하는 선종이 중시되었다. 이 선종이 도의에 의해 진전사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양양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과 조계종의 개시조인 도의선사가 개창한 진전사가 불교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일연국사가 저술한『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과 원효의 담론과, 조신전, 그리고 범일선사의 정취보살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된 것은 일연국사가 낙산사에서 가까운 진전사에 출가하여 직접 들었던 연유로 보인다.
이처럼 양양의 불교는 신라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그 활용가치는 무한하다. 불교의 성지순례로, 그리고 낙산사의 조신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그 가치와 소설사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가치도 활용 하여야 한다.



3) 陳田寺


창건 년대 미상으로 道義선사가 창건하였고, 九山禪門중 迦智山門의 개시조이다. 그리고 一然스님 14세에 진전사로 출가하였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조당집』권17에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전(도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의선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다. 임신하기 전 그의 아버지는 흰무지개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어머니는 한 승려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부모들은 반드시 聖子를 얻을 꿈이라고 하였는데 임신한지 39개월만에 도의가 태어났다. 출생하는 날 아침에 異僧이 錫杖을 짚고 문 앞에서“금일 낳는 아기의 태를 강과 산으로 첩첩이 둘러쌓인 곳에 묻어라”하고 사라졌다. 이에 태를 묻으니 큰 사슴이 와서 지켰는데 해가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아도 해칠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상서로움으로 법호를 明寂이라 하였다.
建中5년(선덕왕5, 784)에 당나라에 입당하였다. 곧바로 오대산에 들어가 文殊의 감응을 받았는데 허공에서 聖鐘의 소리를 듣고 산 속에서 神鳥가 높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廣府의 寶壇寺에 머물면서 구족계를 받고 曹溪에 가서 祖師堂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하자 갑자기 문빗장이 저절로 열렸고 예배를 세번 드리고 나니 저절로 닫혔다. 그로부터 江西洪州의 開元寺에 가서 西堂智藏(735-814)을 참문하고 의문점이 해결되고 막힌 체증이 풀리게 되었다. 지장이 그를 맞이함이 마치 石間에서 美玉을 줍는 듯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내는 듯하여“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그 누구랴”라고 말하고 법명을 道義라고 고쳐주었다. 이에 頭陀의 길을 떠나 百丈山悔海和尙(749-814)의 처소를 찾아가 서당에게하는 것과 똑같이 하니 백장이 탄복하여 江西(馬祖道一)의 禪脈이 모두 東國으로 돌아가는 구나“ 라고 하였다. 신라의 선승들은 거의 마조도일의 제라로 서당지장과 백장회해도 마조계의 법을 이었다.
37년 정도 중국에서 보내고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의 심인을 전해 받은 도의는 헌덕왕 13년(821)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교종에 의해 불교계에서 魔語라고 배척 받으며 북산(설악산)에 은거하여 산문을 열고, 법을 廉居禪師(?-884)에게 전하였다.
雪山億聖寺에서 조사의 심인을 전하고, 도의의 가르침을 펴다가 普照禪師體澄(804-880)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염거가 설산 억성사에서 행화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참문하여 조사의 심인을 얻었다.
체징은 희강왕 2년(837)에 입당하여 문성왕 2년(840) 귀국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개창하여 도의의 선풍을 계승하였다. 그의 비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선문은 제1은 도의이고, 제2는 염거, 제3은 체징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마조도일의 영향으로 원적도의ㅡ염거ㅡ보조체징ㅡ 백장회해로 법을 이어왔다.
진전사지와 3층석탑, 석조부도, 불좌의 중대석 및 많은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도의가 진전사를 개창한 이후, 가지산문의 토대가 되었다. 의상은 낙산사를 중심으로 낙산사에서 화엄사상을 널리 선교하였지만 신라 말부터 고려조에 도의가 진전사를 창건하여 선종사상을 선교하였다.
普覺國師一然(1206-1289)은 충열왕 9년(1283) 국사에 책봉되어 불교계의 상징이었다. 일연국사가 진전사로 출가한 것은 역사적인 사상사의 흐름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양지역은 신라 불교문화의 중심축으로 군사적, 교통적 중심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국가적인 관심을 갖고 관리해 왔다. 변방이지만 삼국통일과 통일 후 중심지로서 의상이 귀국하여 처음으로 양양에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것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통해 민심을 일심으로 하여 중앙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의상이후 원효가 다시 불교의 성지로 확립하였다. 그리고 조신전은 깨달음의 공간으로 승려들에게 구도적인 의미와 양양인에게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강화하였다. 도의는 당에서 유학하여 중국선종을 수용하여 진전사를 개창하여 선종의 개창자로 추앙 받고 있다.
진전사에서는 선종의 개시처로, 그리고 일연국사와『삼국유사』를 통한 학문적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4) 沙林寺(禪林院)


사림사는 애장왕 5년(804)경 창건 되었고, 황이리 미천골에 있었던 사찰로, 후에 억성사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선림원을 창건한 弘覺선사의 비가 억성사에 세워진 것5)으로 보아 알 수 있다.
貞元20년 갑신(804) 3월 23일 當寺의 종이 만들어졌다. 古尸山郡仁近大內末과 紫草里가 시납하신 古鐘은 쇠 280廷과 當寺고종의 쇠 220廷으로 토대로 삼아 十方의 旦越(檀越)들을 권하여 이루었다. 기원하는 것은 法界有情이 모두 佛道에 이르러 감이다. 서원할 때, 들으신 님은 信廣夫人이다. 上坐令妙寺의 日照和尙이고, 당시 감독(時司)은 元恩師고, 종을 만드는 伯士(기술자)는 당사 覺智師, 上和尙順應和尙, 良惠師, 平法?, 善覺師, 如於?, 宣司禮覺師, 節唯乃同說이다.6)
선림원 종은 고시산군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한 고종과 당사의 고종인 500정으로 건립하였다. 고종이라는 표현에서 이 절은 804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만들 때, 참여란 인원을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화상인 순응은 의상의 제자인 神琳의 제자이다. 혜공왕 2년(766) 입당한 인물로, 애장왕의 지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한 화상이다. 순응이 선림원에서 있었던 이유는 의상과의 관계로 보아진다. 당시 당이나 신라의 불교계의 경향은 화엄종에서 선종의 영향으로 교선일치의 경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엄종의 승려이면서 선림원에서 선종을 받아들였던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선림원 종의 제작에 참여하였다.7)
기록을 고찰해 보면 이 시기에 양양을 중심으로 교종에서 선종으로 사상적 경향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불교가 선림원은 홍각선사 利觀(813-880)이 창건하기 보다는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선승이었던 홍각선사는 억성사의 염거화상과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순응은 화엄종의 승려이면서 당에 유학하여 의상의 직계제자인 神琳에게 牛頭禪을 익혔다.
홍각은 해인사에서 화엄학을 배우다가 가지산문으로 나가 선승이 되어 선림원에 비문에 세워졌다. 이처럼 신라 하대의 화엄학 중심에서 선종의 세계로의 흐름이 양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선림원의 존재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부도(보물 447호), 석등(보물 445호), 삼층석탑(보물 444호)로 보아 규모와 역사를 인지할 수 있다.
사림사비-부 서쪽 30리 사림사 遺墟地에 있다. 石碑는 김시습이 王羲之體의 글자를 모아 弘覺禪師를 찬한 것이다. 비의 자체가 매우 오래되고 훌륭하여 보물로 삼았는데 중년에 들불로 불에 타게 되었다. 일찍이 남은 돌조각을 府中에 두어 남게 하였다.8)



5) 靈穴寺


신라 신문왕 9년(689) 기축에 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 조선 숙종 14년(1688)무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왕 16년(1690) 경오에 절의 중 聚遠이 중건하고 영천사로 개칭하였다.(절 서쪽에 영천이 있다) 고종 18년(1881) 信士김중욱이 중수하고 다시 영혈사로 이름 하였다.9)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설악산 관모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원효가 낙산사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와서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6) 五色石寺


서면 오색리 있었고, 成國寺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찰에는 朗慧和尙碑文이 보인다. 비문에 의하면 雪山오색석사로 되어 있다. 조당집권 17에 無染傳10)에도 기록이 보인다.

성주산문의 낭혜 무염(880-888)은 12세인 헌덕왕 3년(811)에 오색석사에 출가하였고, 스승인 法性선사에게 법문을 배우고 浮石寺의 釋登대덕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법당지와 층계난간석, 3층석탑, 석사자, 연화대석, 석탑기단 등이 전해 오고 있다.
교종사찰: 낙산사, 관음굴
선종사찰: 선림원, 진전사, 억성사, 오색석사
활동한 스님: 자장, 의상, 원효, 범일, 도의, 염거, 홍각,
양양의 불교는 처음에는 관음보살의 상주터로 의상의 화엄종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불교의 성지가 되었지만 도의선사 이후 가지산문의 선승들이 선교하여 선종의 성지가 되었다.



7) 安軸(1282-1348)과 향교


안축이 고려조에 양양향교를 건립하면서 양양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안축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양주공관의 시운을 따라서
이름 있는 길 가는대로 앞길은 기약 없고
이 누각에 오간지 벌써 두 해다 되었네
난간 덮은 대 숲에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고
문을 가린 용나무는 푸른 연기 흔드네
백성 일 두루 보고 내 나라 걱정하니
헛되이 임금 은혜 저버려 하늘에 부끄럽네
졸렬한 계책 아직 이로운 길 일으키지 못했으니
어떻게 하여 계곡의 샘물같이 좋은 생각 연 이으리11).


존무사로 온지 2년이 지나 양양공관에 머물며 지은 작품으로 환로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도모하지 않고, 공관의 누에 올라 심회를 노래하고 있다. 목민관으로서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며 임금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양양을 위해 학교12)를 세우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이 졸렬하다며 부족함을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좋은 계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자신의 심회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양양에 향교를 건립하였다.
안축의 양양신학기는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강원도 존무사로 와서 양양에 향교를 세운 것은 양양문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역사적으로 황폐화된 시기이다. 산수가 아름답고 수려하지만 백여 년 동안 재주와 품위 있는 선비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방이라 변란이 자주 일어나 배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존무사 안축의 생각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면 집에 재주와 학문 있는 손자가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한 풍속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양양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고을마다 미풍양속이 전해오고 있다.
안축의 관동별곡13)은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00여년 앞선 작품으로 안축의 선양사업 중에 관동별곡도 주목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양양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8) 東海神祠


양양의 동해신묘는 역사성과 정체성을 위해 동해신사로 정정해야 한다. 신묘는 신사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신사는 황해도 풍천의 西海神祠, 전라도 나주의 南海神祠와 함께 우리나라 三海의 海神에게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웠했던 곳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왕이 친히 향과 축을 보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14)


元宗元年陞知襄州事別號襄山有東海神祠15)


名山雪嶽在府西新羅時爲小祀東海神祠堂在府東春秋降香祝致祭中祀16)


동해신단: 동쪽 13리에 있다. 고려 때 동해이므로 中祀에 실려 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17)
동해묘: 부 동쪽 10리 바다 가에 있다. 正殿6간, 신門3간, 奠祀廳2간, 東西齋각 2간, 百川門1간으로 매년 초에 別祭를 지내고 2월, 8월 常祭를 지낸다. 향과 축은 모두 서울에서 내려온다.18)


동해묘: 부 동쪽 10리 바닷가에 있다. 창건 연월을 기록으로 밝힐 만한 것은 없으나 매 초봄에 별제를 御諱(임금의 이름)로써 친히 향축을 내려 지내는데 일의 형편에 따라서 존중하고 중시 하였다. 여러 산천의 제사의식이 더욱 요원하게 되었다. 별제를 2월과 8월에 하고 또 상제도 있다. 경종 2년(1722) 임인에 부사 채팽윤이 중창하였고, 동해묘와 백천문 등의 편액도 채팽윤의 글씨이다. 지금의 임금 임신년(영조 28년-1752)에 부사 이성억이 또 새로 지었다.19)


동해신사: 군 동쪽에 있다. 봄가을로 향축을 내여 제사 지낸다.20)


동해신사(東海神祠): 봄가을 降香使가 내려와 致祭를 한다.21)
오늘은 바다가 생명의 중심으로, 인류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수협이나 해양관련 정부부처와 함께 해양축제로 발전시켰으면 한다.
그럼 왜 동해신묘라고 했는가. 그것은 17-18세기 유교문화가 불교와 불교같이 귀신의 세계를 폄하하는 시대적 사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해야 할 문화유적 다음과 같다


1)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관아(官衙)


조선조 太祖6년(1397)에 임금의 외친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府로 하였으며 太宗13년(1413)에 예에 따라 都護府로 하였고, 태종 16년(1416)에 지금의 명칭인 襄陽으로 고쳤다. 이 기록에 의하면, 2016년 음력 8월 10일(양력 9월 1일)은 定名600주년이다. 定名600주년 즈음하여 양양도호부 관아가 재건된다면, 안축의 향교건립처럼 양양발전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양양도호부 관아 건물은 동서남북에 문이 있고, 門樓가 자연과 어울리는 풍경이고, 문루의 이름 또한 문학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성안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정자가 있었다.
도호부 관아 복원을 통해 영북지역 전통문화 중심도시인 양양의 역사성을 복원하여 문화적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양양은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신라시대 양양은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고, 고려 목종 10년(1007) 10월에 348간의 성(城)을 축조하고 성문 4개를 설치하였다.22)
기록23)과 구전에 의하면 양주성 축성을 계기로 성내(城內)에서 성황신을 봉안하여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신 전통이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의 양양문화제로 이어오고 있다.


『관동지(關東誌)』공해조(公●-공관)에 의하면,
객사(客舍) 35간, 아사(衙舍) 108간, 향청(鄕廳) 10간, 훈련청(訓練廳) 14간, 군기청(軍器廳) 10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군보(軍保)조 의하면, 기병(騎兵) 454명, 어영군(御營軍) 19명, 금위군보(禁衛軍保) 37명, 자보(資保) 21명, 훈련도감 포수보(訓練都監砲手保) 188명, 별파진(別破陳) 5명, 악공보(樂工保) 18명, 악생보(樂生保) 6명, 전설보(典設保) 36명, 무학(武學) 13명, 아병(牙兵) 63명, 속오군(束伍軍) 309명으로 그 규모를 인지할 수 있다.
양양관아의 건물에 관한 기록은『현산지(峴山誌)』공해(公●-공관)조에 명칭과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성: 돌로 쌓은 곳은 둘레가 403척, 토성은 둘레가 2825척으로 성안에는 우물에 2곳이 있다. 지금 성벽
은 대부분이 무너져 버렸고 다만 동, 남, 서문만 남아 있다.24)


양양읍성 둘레 2724척은 본부와 원주인 군인 1475명으로써 역사하게 하다.25)


(1) 청연당(淸燕堂): 내동헌(內東軒, 동헌은 지방관아에서 수령들이 업무를 처리하는 청사)이다. 영조 6년(1736) 부사 김중희가 창건하고“사우(四雨)”라고 하였으나 영조 32년(1756) 병자에 부사 임희교가 “청연(淸燕)”으로 개칭하였다.


(2) 와유헌(臥遊軒): 외동헌(外東軒)이다. 영조 6년(1730)에 부사 권부가 창건하였다.


(3) 양양관(襄陽館)): 객사(客舍)이다. 영조 30년(1756)에 부사 이성억이 창건하였다.


(4) 태평루(太平樓): 객관(客官)의 문루(門樓)이다. 원나라 인종 연우 2년(1315)에 창건되었고 세종 21년(1439)에 송목이 재건하였다. 중종 32년(1537)에 윤사임, 정광정이 계속 수리하였다. 효종 9년(1658)에 이인이 기둥을 세웠고 한진이 상량하였다. 인조 18년(1640)에 이헌이 중창하였는데 넓고 화려한 것이 이곳에서 첫째였다. 정조 21년(1797) 2월에 부사 윤헌주가 중수하였다. 다락 안팎 모두에는 태평루 3대자(大字)가 있는데, 내부 동편의 글씨는 송문정공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필적이고 외부 서편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고려조의 문장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 충렬왕 24년,1298-충정왕 3년,1352)은 고려시대 양주(양양의 옛이름) 관아에서 태평루에 관한 시를 남겼다.


(5) 한수루(漢水樓): 동쪽 성문이다. 숙종 26년(1700) 경진에 부사 남치훈이 창건하였고, 문루의 현판은 채팽륜이 썼다.


(6) 현산정(峴山亭): 남쪽 성문이다. 숙종 26년(1700)에 부사 남치훈이 창건하였다. 영조 24년(1748)에 부사 박필정이 다시 창건하였는데 정자의 현판은 채팽윤의 글씨이다.


(7) 애련정(愛蓮亭): 와유헌의 앞쪽 연못 가운데 있다. 영조 24년(1748)에 부사 박필정이 창건하였다.


(8) 통원루(通遠樓): 객관 동쪽 채원(蔡圓) 언덕위에 있다. 남대천을 굽어보고 앞에는 무산을 대하고 있으며 멀리까지 보인다. 부사 이맹우가 중수하다가 압사한 사람이 많아 대간(臺諫)의 계문으로 관직에서파직되었다.


(9) 납호당(納灝堂): 객관 동쪽에 있다. 부사 홍찬이 창건하였다.


(10) 향사당(鄕射堂): 성 서쪽에 있다. 좌수(座首)는 鄕人으로서 풍력이 있는 자를 임명하였는데 유생으로서 科業을 폐하지 않은 자로 과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차망(差望)하였다. 영조 32년(1756) 부사 임희교의 권금록 작성시 정식이 되었다.


(11) 군기고(軍器庫): 객관 남쪽에 있다. 감관(監官)은 2인이다.


(12) 훈련청(訓練廳): 객관 서쪽에 있다. 파총(把摠)은 1인이다.


(13) 군청(軍廳): 객관 서쪽에 있다. 여수(旅帥)는 1인이다.


(14) 취산루(醉山樓): 부의 문밖에 있다. 영조 31년(1755)에 부사 이성익이 창건하였다.


(15) 교아청(校衙廳): 부의 문밖에 있다. 영조 33년(1757)에 부사 임희교가 창건하였다. 행수(行首) 군관 1인, 번군관 40인이다.


(16) 상정청(詳定廳): 부의 문 밖에 있다. 영조 12년(1736)에 부사 김중희가 창건하였는데 옛 이름은 대동청(大同廳)이었다.

이상의 양양도호부 관아건물의 그림이 양양읍지도(고종 9년, 1872 작자미상)에 비교적 자세히 그려 있고, 관동지, 관동읍지, 그리고 해동지도에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양양도호부는 풍광 좋은 곳에 자리하며 동·서·남·북 성위의 문루에 누각이 있고, 양양성내에는 170여 간의 관아건물 있었고, 성내에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정자가 있어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는 관리나 시인 묵객들이 양양관아에서 머무르며 관아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수백편의 시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양양도호부 복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나라에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으로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문화 창달의 차원에서 양양도호부관아건물이 복원되어야 한다.


(2) 도호부 복원을 통해 우리의 아름답고 우수한 문화를 복원하여 체험을 통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릴수 있다.


2) 梨花亭


양양은 예부터 배가 유명하다. 그 시원지가 낙산으로, 이곳에 이화정을 짓고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그러나 山寺가까이 있었던 이화정은 선비들의 풍류의 장소로 변질되어 의도적으로 철폐한 것으로 보인다.



삼천 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雲垂雪嶽三千丈
구만 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 月湧東溟九萬尋
이화정 위의 오늘 가진 이 모임에 今日梨花亭上會
한 가락 아양곡은 고인의 마음이어라 ●洋一曲故人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 멀리 이화정이 있거니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유흥이 절로 난다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26)


낙산기유(洛山記遊)로 암 노석(●老釋)에게 주다


설악산 높아높아 창공에 꽂혔으니 雪嶽之山高揷空
일만 옥이 다투어 푸른 놀에 솟았구려 萬玉爭聳靑霞中
한줄기 꿈틀거려 오봉을 지어내니 ●●一脈作五峯
바다 위에 금부용이 우뚝이 빼어났네 海上秀出金芙蓉
영도는 암암리에 보타와 어울려라 靈圖暗與寶●合
유궁은 예부터 원통이 장엄하이 幽窟自古莊圓通
용천팔부들이 법종을 베푸니 龍天八部設法從
백호(白毫)는 빛을 내쳐 동쪽 바다 비추네 白毫光照滄溟東
금산의 장로는 부처님의 후신이라 金山丈老佛後身
석장 짚고 여기 와서 이궁을 얻었다네 一錫來瞰得異宮
백의의 대사가 진상으로 나타나서 白衣大士現眞相
마니 구슬 내려주어 묵은 업장(業障) 없앴다오 投下摩尼除宿障
전단이 옥을 바쳐 대가 땅에 솟아나니 ●檀貢玉竹湧地
경각 사이 화궁이 구름 밖에 세워졌네 頃刻花宮雲外創
채색 노을 창에 비쳐 벽에 어린 붉은 색깔 彩霞射●丹寫壁
나는 듯 솟은 누각 빽빽이 마주보네 飛樓聳閣森相向
일곱 겹의 구슬발이 주전을 가리웠고 七重珠網鎖珠殿
세 발 달린 금오가 금방으로 날아들어 三足金烏●金●
향화에 정근한 지 자그마치 천 년이라 精勤香火一千年
장엄한 그 공덕 진실로 끝이 없네 功德莊嚴信無量
어느 해에 임금께서 자해를 순행했나 何年淸●慈海巡
암자마다 연이어 채장을 옮기었네 ●竇聯翩移彩仗
임금께서 만월의 용모를 알아보니 重瞳親識滿月容

법뢰는 소리 흘려 공악이 울렸어라 法雷流音空樂響
새는 꽃비 머금어 천의에 떨어지고 鳥銜花雨墮天衣
용은 향운을 뱉어 어장을 감쌌다오 龍吐香雲籠御帳
그 향운 그 꽃비가 공중으로 사라지니 香雲花雨入空去
임금 행차 아득아득 물을 곳 없네그려 ●●宸遊問無處
산문의 성사가 이보다 더할쏜가 山門盛事此最雄
노승들 이야기 지금도 들려주네 只今猶聞老僧語
내가 온 때 바야흐로 팔월달 맑은 가을 我來正値淸秋節
죽장에 짚신 신고 숲 속을 걸어가니 竹杖芒鞋步林●
바다에 부는 천풍 산악을 뒤흔들어 天風吹海動雲根
바라보니 놀란 파도 불골에 침노하네 笑看驚濤侵佛骨
이화정 가에서 달 뜨기를 기다리니 梨花亭畔待初月
옥바퀴 돌아돌아 하늘로 떠오르네 玉輪輾出琉璃滑
계수나무 그림자 금계를 뒤덮으니 桂影婆娑遍金界
일천 바위 변하여 구슬 굴이 되는구만 千巖變作瓊瑤窟
선들선들 마치도 바람탄 열자인 듯 冷然似馭列子風
황학의 등에 올라 부구를 붙들고자 欲●浮丘跨黃鶴
함께 간 풍류승이 티끌 생각 벗어나니 同遊韻釋出塵想
총채를 휘두르며 선 이야기 싫지 않아 揮●談禪也不惡
법라의 혀끝으로 인천을 다 흔드니 人天掉盡法螺舌
부생이란 주착이 없다는 걸 깨달았네 頓覺浮生無住著
사리가 재촉하여 오경종을 두들기니 ●梨催打五更鍾
새벽녘 동쪽 방에 비단발을 걷는구나 曉上東房●●箔
둘러싼 향기 구름 양곡을 가렸는데 ●繞香雲掩暘谷
고래가 화주 끌고 푸른 하늘 날아가네 鯨引火珠騰碧落
문을 닫고 향 피우니 일 만 생각 맑아져서 焚香閉閣萬慮淸
부처님 설법하신 미타경을 다 읽었네 讀盡佛說彌陀經
미진을 건너갈 보벌도 빌렸어라 迷津已借寶筏渡
각로에서 다시 또 금승을 찾아가네 覺路更覓金繩行
이 몸은 황홀하게 극락 땅에 와 있는데 恍然身在極樂土
묘오에 어찌 꼭 명성을 봐야 하나 妙悟何必看明星

내 한평생 발걸음 모두 길을 잃었는데 平生投足摠失路
무슨 일로 하늘이 이 구경 막지 않지 何事玆遊天不阻
원컨대 이 몸을 유마에 기탁하여 願將身世寄維摩
우리 스님 짝을 삼아 부처님께 참여하리 長伴吾師參佛祖
언젠간 벼슬 놓고 행각을 머물리니 投簪他日住行脚
청련의 한 탑자릴 나에게 허해주오27) 一榻容我靑蓮宇


절구(絶句)
이설당 가운데 비단 장막 나직한데 梨雪堂中錦幕低
석양이 막 화란의 서쪽으로 내려가네 夕陽初下●欄西
오는 이 없어 문을 닫아 적적도 한데 閑門寂寂無人到
다만지 산새만이 마음껏 울어대네 只有山禽盡意啼


경함이 십년 만에 선관을 작별하고 經函十載別禪關
삼월이라 명주에서 귀밑머리 희끗희끗 三月溟洲●已斑
해당화 다 져라 떠나자도 못 떠나니 落盡海棠行不得
밤만 되면 꿈은 가서 오봉산을 찾는다오 夜來歸夢五峯山


홍농의 재자들은 사화가 풍부하여 弘農才子富詞華
갠 날 남전에 고운 놀 일었었지 晴日藍田壁絢霞
좋이 서창을 향해 취한 꿈 되새기니 好向西窓●醉夢
이백(李白)의 큰 붓은 단정코 꽃 피우리 謫仙椽筆定生花
단양의 시객이 동파를 배웠어라 丹陽詩客學東坡
은황을 내리쏟아 세상이 다 자랑하네 屈注銀潢世共誇
반산의 두보처럼 바짝 여위려 말고 莫似飯山成杜瘦
좋이 규합 좇아 명하나 지어보소 好從閨閤賦明河


일찍부터 개원의 시격(時格)을 공부하여 早向開元着力多
사구 지으면 음갱(陰●) 하손(何遜)보다 절묘했지 發爲詞句妙陰何

그 누가 알았으랴 강서사로 타락하여 誰知晩墮江西社
큰 바다의 고래를 못 끌어올릴 줄을 未●鯨魚碧海波


점필재 김공은 두소릉에 가깝건만 ●畢金公逼杜陵
백년이라 구학에 등덩굴만 얽히었네 百年丘壑蔓寒藤
유편의 남은 향기 지금도 싱그러워라 遺篇●馥今追●
주옥 같은 그 문장 그 누가 계승하리 玉佩瓊●嗣未能


손곡은 시를 읊어 머리가 희었어라 蓀谷吟詩到白頭
백편의 시 화려함이 수주에 가깝다오 百篇●麗近隨州
지금 사람 육안으로 아무리 비웃지만 今人肉眼雖嗤點
만고에 흐르는 저 강하를 어찌 폐하랴 豈廢江河萬古流


비로가 북으로 가 양양을 배알하니 毗盧北去謁襄陽
말 달림 도리어 술취한 갈강 같네 馳馬還同醉葛彊
응당 이화정 달을 구경하면서 應踏梨花亭畔月
한바다를 옹달샘처럼 바라보며 잔을 들리28) 杯看碧海倒瓊腸


양양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시인묵객들이 낙산사의 의상대보다 이화정을 찾아 자신들의 심회를 표현했던 역사적 장소로 존중하여 복원되어야 한다.



3. 地理的背景


양양은 우수한 문화와 함께 풍요로움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명의 삶을 살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택리지 강원도 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저 살 곳을 택할 때 처음에 地理(땅의 생김새와 형편)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生理(생활하는 도리, 두보-生理何顔面憂瑞且歲時), 人心(백성의 마음), 山水(산과 물)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고을이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좋지 못하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다 해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 없다.(擇里志大抵卜居之地地理爲上生理次之次則人心次則山水四者缺一非樂土也地理雖佳生理乏不能久居地理雖好地理惡則亦不能久居地理及生理俱好而人心不淑則必有悔吝近處無山水可賞處則無以陶瀉性情)


집터는 산소자리와 달라서 물이 있어야 재산이 생긴다. 그러므로 물이 고여 있는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명촌과 번성하는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역시 시냇물이 모여 드는 곳이라야 대를 이어 오래도록 살터가 된다.(擇里志然陽基異於陰宅水管財祿故積水之濱多富厚之家名村盛塢雖山中亦有溪間聚會方爲世代久遠之居)


여러 산이 있고, 산과 바다 사이에는 奇勝地가 많고 골짜기 동네는 그윽하고 깊고 물과 돌이 깨끗하여 혹은 仙靈의 異蹟이라 전한다. 지역의 주민들은 자주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여 동네 노인들은 기꺼이 기악과 술과 고기를 가지고 산이나 물가에 가서 마음껏 놀았다. 이것으로 큰일을 삼기 때문에 자제들이 이에 감화되어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었다(山海之間多奇勝地洞府幽深水石淸潔或傳仙靈異蹟士人重游衍其父老喜載妓樂酒肉跌宕於湖山之間以此爲大事子弟化之少治文學)


사람의 성품은 지세와 환경에 따라 정해진다. 양양은 한반도의 중심부분에 위치하며 장엄한 설악산의 정기와 호탕하고 정열적인 동해를 접하면서 강인한 정신과 우수한 문화와 함께 풍요로움으로 인해 여유로운 삶을 살아 왔다.
오늘날 전통축제는 제의에서 시작하여 제의로 마무리 하지만 신성성은 많이 약화되어 있다. 축제는 대부분 전통적인 향토축제인 향토축제의 성격을 지닌다. 축제의 다른 말은 잔치이다. 잔치는 사람을 만나고 즐겁게 축하하며 즐겁게 먹고 마시면 노는 행위이다. 이 축제는 특별한 의례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성스러운 행위이다. 이것이 세속화 과정을 거치면서 흥과 연희가 일탈로 변이 되었다.
원래 축제는 신성한 행위이다. 축제의 시작은 신을 모시고 풍요와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즐기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다시 삶의 힘을 얻는다. 이것이 오늘날 세속화 되면서 지역경제와 연결된다. 현대 축제에서 신성성은 약화되었지만 축제의 중심은 전통적인 신성성이다.
양양은 동예의 후손으로 집단적인 생활의식을 알 수 있고, 가무와 유희의 제천행사로 문화 예술을 즐기면서 살았다. 勝地를 찾아 술과 놀이를 즐긴 풍속은 천성이 순박하고 낙천적인 성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유희의 본성을 갖고 있다. 그 유희의 본성이 정제되어 예술로 승화되어 축제이다. 그러므로 축제는 비일상적이고 비생산적일 수 있지만 일상과 생산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희를 통하여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한다.
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예의 남쪽으로 진한이 있고,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濊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였다. 그리고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는데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읍락을 서로 침범하면 벌로서 生口(노비)와 牛馬를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 한다.


이상의 기록으로 濊가 씨족공동체 생활양식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양양은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와 평야를 남대천이 흐르면서 풍부한 음식과 기후가 온화하여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문화가 어느 지역보다 먼저 남대천을 중심으로 한 오산리와 도화리에서 삶이 시작되었다.
기후가 온화하여 일찍부터 인간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이어지는 동해안의 신석기문화보다 앞서 형성되었다. 함경북도 옹기군 굴포리와 부산 공삼동 일대의 선사시대 문화를 형성하였다.
B.C 6000년경의 오산리 선사유적이 신석기 시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영동지방민속은 매년 3,4,5월 중 날을 잡아 무당을 맞이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부자는 싣고 가난한 자는 지고장소를마련하여차려놓고북과피리로서흥을돋구고3일동안취흥을즐긴후에집으로돌아간다.
南孝溫『秋江冷話』


또한 교산(蛟山) 허균(許筠)은 낙산사를 자주 찾았다. 석주에게 보낸 서찰29)에 의하면“옛 부임지인 낙산을 찾으니 그 고을의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장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덮어 주었고, 태수가 또 기생과 풍류로 호사를 베풀어주니 호연히 안석의 동산에 노닐던 흥이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이 서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파직되어 산수를 유람하던 허균에게 양양인들의 변하지 않는 의리와 여유 있고 아름다운 풍습을 알수 있다.
양양인은 장엄한 산과 바다를 통해 경외심을 갖게 되어 다양한 민속신앙이 존재 한다. 이 신앙의 특징은 독자적이면서도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 볼 수 있다. 바다에서 풍요와 열정적인 힘을 배웠고, 산의 장엄함, 호수의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배웠다. 그리고 농경생활을 통해 기다림의 인내심과 진실한 삶의 세계를 배우면 다양한 신앙과 연희를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면서 풍요롭게 살았던 양양은 불교의 발상지로 미적인 작품들이 전해오고 있다.
양양은 풍수에서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여 신석기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잡고 생활해 왔다. 고대사회부터 일정한 지역의 交界(경계)와 장소의 출입을 금하는 禁標는 산과 강, 그리고 들과 같은 자연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강이나 계곡이 중요한 경계였다. 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를 관리하기 위한 交界와 금표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양양은 고대사회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하여 신성시하였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양양금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금표- 洛山寺禁標, 東海神祠禁標
2)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금표- 黃腸禁標-釜淵禁山, 剪林禁山
3) 사냥을 위한 구역의 금표- 洛山寺禁標30)
4) 왕실의 胎封의 출입을 금하는 태봉금표-下福里胎封禁標
5) 어렵금지의 禁標-洛山寺禁標31)


강원도 일대32) 에서 발견되고 있는 禁標는 조선시대 중요한 경계와 표지로, 주로 산림과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함 목적이었다. 황장목은 강원도 일대와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經國大典』, 『大典會通』등의 의하면 법전에 의거하여 황장금표를 立標하였다. 이 금표를 통해 국가정책과 생활사, 그리고 산림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동안 양양의 금표는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다.
『江原道誌』卷3, 土産, 三陟條에 의하면, 橋谷山黃腸新羅朝採伐黃腸木云라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강원도일대에서 황장목을 伐採하여 경주까지 운반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葬禮에 관한한 禮를 존숭하는 민족으로, 최고로 인식하였던 사회상으로 인해 문헌과 실록에 황장목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우리의 장례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양양의 금표는 소나무 보호뿐만 아니라 사냥이나 어로, 그리고 궁중불교의 도량으로 신성시하였던 낙산사를 보호하기위한것이었다. 이처럼양양을궁중불교의도량과동해신을모셨던신성한곳이었음을알수있다.

그리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국방의 중요한 지역으로 중시하였다. 고려 목종 10년(1007) 10월에 348간의 성(城)을 축조하고 성문 4개를 설치하였다.33)
기록34)과 구전에 의하면 양주성 축성을 계기로 성내(城內)에서 성황신을 봉안하여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신 전통이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의 양양문화제로 이어오고 있다.
양양군지(2010)에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목종 10년(1007)에 양양읍 성내리를 중심으로 양주성을 축성하고 매년 침입해 오는 외적들과 항전을 계속하면서 향토를 수호하고 이 후 양주성을 동서남북에 4대문을 내고 성내에 성황사를 짓고 춘추로 치제를 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이후 매년 5월 5일 제의 뿐만 아니라 성황굿을 성대하게 하였다. ... 현산문화제 기간 중에 장군성황제가 열렸는데 15시경 고치물제부터 시작하여 장군성황당에서는 양양군수를 초헌관으로 하여 성황제를 지낸다.



4. 歷史的背景


양양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에 속하였지만 후기에는 신라에 속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6대 태조 4년(56)7월 함남지방의 동옥저를 정벌하고 동으로 창해로 진출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 18년(409) 동해안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하였다. 제20대 장수왕 42년(454)에는 신라의 북방을 정벌하였다. 장수왕 56년(468) 2월 말갈군사 2 만 명으로 신라의 悉直州城(삼척)을 공격하여 삼척 이북의 모든 땅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제21대 文咨王5년(496) 신라의 牛山城(靑陽)을 공격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어 泥河(강릉)상류를 공격하였다. 泥河는 양양 남대천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양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으로 분쟁이 계속되었다.
신라 제5대 婆娑尼師今23년(102) 삼척지방에 있던 실직국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하였다. 제6대 祗摩尼師今14년(125) 고구려의 침입으로 泥河남쪽까지 퇴각하였다. 제6대 祗摩尼師今11년 하슬라 사람 15세 이상을 징집하여 泥河에서 성을 쌓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토였던 양양을 신라가 자주 침입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니하는 양양의 남대천으로 양양지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제21대 炤知麻立干때 신라가 고성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제21대 炤知麻立干3년(481) 2월 北列城(安邊)에 행차하여 군사를 위문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제22대 智證麻立干6년(505) 悉直州에 異斯夫를 군주로 삼았다. 이때 비로소 동해안의 삼척지역은 확실한 신라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智證麻立干13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양양을 고구려에서는 翼峴縣또는 伊文縣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성군에 속해 고 翼嶺縣이었다. 익령현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의 성지로 화랑들의 순례지였다. 낙산사 등에서 범일, 의상, 원효, 도의 등 고승들이 불교도량에 佛法에 정진하였다. 실록과 많은 문헌에 의하면 낙산사에 대해 특혜35)를 주었다.
조선 왕조 (1392년 창건)를 보면, 우리 지역을 특별히 관리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외친이기때문이다.
우리 翼祖께서 貞淑王后와 함께 여기에 와서 후사를 점지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은 善來이다.”하였다. 얼마를 지나서 도조가 태어나니 선래라 이름 하였다.36)


태조 6년(1397) 1월에 양주를 임금의 외친 본관이기 때문에 부로 승격시켜 양주부라고 하였다.
태종 13년(1413) 예에 따라 양주부를 왕조의 외친이라 하여 양주도호부로 승격하였다.
태종 16년(1416) 양주를 양양이라고 개칭하여, 양양도호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선왕조에서 특별히 관리해 왔습니다. 왜 이곳을 양양이라는 지명으로 개칭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동해신묘와 조선왕조의 외친이라는 이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동해의 신을 모시는 해가 떠오르는 고을로, 조선왕조의 태동이라는 의미로 양양이라는 명칭을 나라에서 정하였다.
조선왕조의 뿌리를 양주에서 양양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뿌리를 양양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태조실록권일, 총서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인 이선래를 낳다. 즉, 낙산사 관음굴은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의 후사를 점지한 기도처로 해마다 강향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고 사전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낙산사는 궁중불교의 도량으로 이름 하였다.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중수하고 홍예문을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와 부인이 여기서 빌어 도조를 낳았다고 하여 아기빌이 굴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조선왕조의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성종실록에 의하면 정희왕후(세조비)가 일 년에 쌀 백 섬씩 낙산사에 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양양이라는 지명은 조선조 태조 6년(1397) 정축에 外親37)이라 하여 부로 승격하고 태종 13년(1413) 계사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고 16년(1416) 병신에 양양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이나 다른 많은 문헌에서 태종 16년(1416) 양양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미 양양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나타난다. 근재집에 의하면 충숙왕 17년(1330) 안축(安軸, 1287-1348)이 강릉도 존무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읊은 관동별곡에 양양의 지명이 나온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 수련장이었다. 신라는 불교국가로, 이상적인 인간은 화랑이나 승려가 되는 것이었다.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으로 그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상형인 화랑으로,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전통이 이어진다. 화랑은 그 명예에 어울리는 교육방법이 있었다.
1) 相磨以道義2) 相열以歌舞, 3) 遊娛山水의 道를 중시하였고 풍류를 즐기며 자연과 벗하였다. 화랑들의 교육방법은 첫째가 상마도의이다. 道와 義를 연마하였다. 둘째가 상열가락 이다. 가무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 훈련이다. 셋째가 유오산수 이다. 名山大天을 다니면서 천지기운을 받는 수련이다. 가장 이상적인 한국형 인물은 화랑이었다. 이 화랑이 조선조 선비로 이어진다.
미래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가 경제의 중심이 되어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전통으로, 전통은 물려받으면서 동시에 창조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조하느냐에 따라 양양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화랑의 순례지가 양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리고 화랑도의 삶과 이념은 우리 민족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가무로 풍류를 즐기면서 서로 긴밀해졌고 산수에 노닐며 자연숭배도 함께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며 강릉대도호부에 수록된 한송정, 경포대 가문과 이것을 읊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전해지고, 조선조 초기까지 화랑의 유물과 자취가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돌절구, 돌샘, 돌아궁이 등은 화랑이 차를 마시던 기구로 화랑도의 수련도량으로 강릉이 중요한 순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이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교육되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최초의 화랑인 설원랑의 기념비가 명주에 세워졌다는 의미 있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수련장소를‘風月之庭’이라고 불렀지만 구체적으로 강원도 해변의 山水名勝地일대 이다. 王都, 경주 南山38), 그리고 관동의 명승지로 총석정, 삼일포, 영랑호, 文珠寺, 三和寺, 鏡浦臺, 飽石亭, 五臺山등이다.39) 또한 사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불교의 성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수련 장소는 동해안 바닷가의 명승지, 호수, 정자, 사찰 등으로 귀족 출신의 화랑들은 그의 郞徒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예의와 도덕 그리고 名山大川을 순례하며 풍류를 즐기며 멋을 누렸다. 그러므로 화랑을 風流道, 風月徒, 香徒, 國仙徒또는 神仙, 國仙이라고도 하였다. 이곡의「東遊記」에 의하면, 그가 通川庫底에 있는 총석정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로 영랑, 술랑 등 四仙童이 그 徒衆3000人과 함께 海上에서 놀았다는 것이다. 그리고「東遊記」나『東國輿地勝覽』44∼47의 의하면 영랑 등 사선이 유오한 자취는 영동해안지방으로 집중되어 있다.
삼일포 丹書六字의 마멸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옛날 고을 사람 중에 유람하는 사람은 접대하기 괴로워하여 丹書를 쪼아 버릴 때, 깊이가 5寸쯤에 이르러도 자획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두자가 분명하니 못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고을 사람 중에 遊覽者가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한송정의 집을 털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유람자가 많고, 의도적으로 화랑의 유적지를 훼손하기도 했다.
화랑이나 많은 지식인들이 강릉을 찾은 것은 강릉이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한다.
「東遊記」와『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화랑도의 동해안 遊娛地순례기에 의하면 강원도 通川의 叢石亭과 四仙亭, 金蘭窟, 高城의 三一浦, 石龕, 四仙亭, 杆城의 永郞湖, 江陵의 鏡浦臺와 寒松亭, 平海의 越松亭등이 四仙의 유오지였다.
임영의 경포대는 신라의 永郞仙人이 놀던 곳인데 내가 이 대에 올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참으로 즐거워 지금까지도 간절히 생각나고 잊혀 지지 않습니다.40)


四仙이 지었다는 <寒松亭曲>이『고려사』樂志에 수록되어 이다.41) 세상에 전해오는 말이 이 곡조를 琵琶바닥에 써 둔 것이 물결을 타고 강남지방(중국)으로 떠밀려 갔으나 강남인들이 그 글의 뜻을 몰랐다. 고려 광종 때, 우리나라 사람인 張晋公이 강남으로 사신으로 갔더니 그에게 가사의 뜻을 묻자 진공이 시를 지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논자들이 말하기를 師의 조직은 비록 교묘하나 前篇의 天趣의 자연스러움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42)


亭依松麓斷정자가 소나무 산기슭에 의지했는데
東望海無門동쪽을 바라보니 바다는 끝없다
境靜仙●在지경이 고요하니 신선자취 있고,
沙明鳥篆存모래 밝은데 새발자국 남았네
碑心苔彙綠비석은 이끼 무늬 푸르고
石面兩痕昏돌에는 비 맞은 자국 어둡네
一●泉無渴한웅큼치는 샘 마르지 않으니
源乎天地根천지의 뿌리에서 솟아 나오네43)


古仙浪遊處옛 선인이 유랑하던 곳에
爭慕客塡門다투어 사모하여 객이 문간을 메우네
●藥人何去약을 만들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煎茶●獨存차달이던 이궁이만 홀로 남았네
壺中閑日月항아리속 일월이 한가로운데
世上郞晨昏세상일은 아침저녁 동안이어라
回首尋遺迹머리돌려 유적을 찾으니
唯松自託根오직 소나무만이 절로 뿌리 박았네44)


白沙汀


雪積廻灣淨회만에 눈이 쌓여 조촐한데
瓊鋪闊岸紆넓은 둑 구불구불 구름 깔렸네
銀河通玉府은하수는 옥부를 통해 흐르고
瑤海湛氷壺요해는 빙호 하냥 맑기로 하이
履迹行疑陷신발자국 다니면 빠질까 싶고

松梢看似無솔가지는 보아도 없는 것 같아
長歌答明月긴노래로 밝은 달에 대답을 하니
吾是迹郞徒나는 바로 술랑의 무리로세45)


(남곤의 白沙汀記에 阿郞浦는 곧 옛적 화랑이 놀던 곳이다. 그래서 아랑포가 된다)


화랑도는 도의로써 연마하기 위해 山川을 순례하며 가악으로 서로 즐기면서 노닐었다. 화랑도는 풍류를 중시했고, 그 풍류는 화랑의 중심사상이었다.
어느 종교나 자연 순례를 중시하였다. 이 자연과 순례를 통해 신과 인간과의 조화가 일치하고 싶었던 의식반영이다. 이 의식을 춤과 노래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류로 먼 곳까지 서로 순례하면서 낭도들은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고 조화로운 삶과 멋은 후대 선비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意專尋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