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하광정리 권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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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72회 작성일 2018-03-0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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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열 (남, 96세, 현북면 하광정리)
■ 면담일 : 2017.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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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이 올 텐데 왜 심하게 하느냐!


해방이 되고 당시 우리 마을이었던 명지리는 38°선 이남이다.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친과 농사일을 하였다. 명지리에는 그때도 송이가 많이 나서 지게에 지고 주문진에 내다 팔았으나 지금처럼 값이 좋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아버님이 6 ․ 25가 나던 전 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큰형수 그리고 집사람과 두 아들이 함께 6식구가 살았고, 큰형님은 해방 전 만주에서 돌아가시고 큰형 아들은 그때 국군으로 있었다.

1950년 전쟁이 났어도 우리 동네는 피란을 못 나갔다. 그날 아침새벽 북한인민군이 쳐내려오니 38°선 바로 코밑에 있는 명지리 마을은 피란을 나갈 겨를이 없이 인민군들이 벌써 앞서가니 그냥 동네에 주저 않고 말았다.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북한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더니 마을에 간부를 뽑는데 당시 우리 마을에 좌익들은 없었지만, 그들은 강제로 마을책임자를 정하고 이장은 인민위원장을 나는 청년단장을 하라고 하여 마지못해 마을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한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북정치를 받아야 한다며 날마다 동사에 모여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등 교육을 하고 또 의용군을 뽑아 간다고 하니 17세 이상 청년들은 모두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숨었다.
그들이 시키는 일은 생산고 조사가 있는데 면 인민위원장이 와서 나보고 줄자로 농사를 짓는 조이 밭두렁을 재라고 하며 조는 이삭이 길이가 얼마며 몇 개가 되는지 세고, 논도 기본면적을 자로 재서 계산된 수확량을 현물세를 매긴다고 했다. 이 제도를 쓰보갈이(일어)라고 한다.
그때 면 인민위원장의 친척이 되는 한 아저씨가 조카뻘이 되는 면 인민위원장을 보고 자네“내일 모래면 국군이 올 텐데 왜 이렇게 심하게 하느냐!”하고 지레 짐작을 하듯이 말을 했더니“아저씨! 큰일이 날 말 하네.

조심하세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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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지리 38 표지석



◆ 마을사람들은 숨은 청년들의 장소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고는 일을 시켰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산속으로 숨었으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마을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 숨은 청년들의 장소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마다 회의에 나가면 북에서 책임자가 나와서 무슨 말인지 지루하게 연설을 하곤 했다.
얼마 후 면 인민위원장의 친척뻘이 되는 아저씨의 말대로 진짜로 국군이 들어와서 나를 대치리 지서로 데리고 가서 이북정치에서 명지리 청년위원장 일을 하며 어떤 일을 하였는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여 나는 마지못해서 책임자로 한일을 그대로 다 말하니 방망이로 때리더니 집에 가라고 했다.
그러다 마을 젊은 청년들과 나는 북진하는 국군들을 따라가며 식량과 보급품을 날라주는 짐꾼을 하다가 함경도 단천까지 올라가서는 계급이 높은 군인에게 나는 아버지 소상이 얼마 안 남았으니 집으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니 가라고 했는데, 그때 나와 같이 짐꾼을 하던 마을청년들도 같이 보내달라고 간청하여 마을청년 열 두 명과 같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어머니가 탄원서를 내서 살아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소상을 치르고 밥을 먹고 있더라니 주문진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고 또 다른 한명과 함께 감옥에 넣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도 막 붙들어 왔고 모두 약 15여 명이 한 방에 갇혀 있었다. 얼마 후 한사람씩 불러서 조사를 했는데 나는 내가 한 사실대로 말하였고, 이튿날도 조사를 하고 몇 번을 불러내서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어머니는 명지리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은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북에서 온 사람들이 시키니 마지못해서 그들에 비위를 맞추려고 마을일을 했을 뿐이고 또한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못된 짖은 하지 않았다고 호소하자 마을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라 본인 이름에 도장을 찍어줘서 탄원서를 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감옥에서 잠을 자는데 새벽 1시나 2시 사이에 사람들을 불러내서 데리고 나갔고, 그 이튿날도 3명을 불러내갔다. 셋째날도 또 사람을 불러내는데 권○○라고 불러 이번에는 내가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나와 이름이 비슷했던 다른 권○○라는 사람이 나간다. 그리고 얼마 후 나를 불러내더니 집으로 가라고 한다.



◆ 소금을 지고 영을 넘어가 콩과 옥수수 바꾸미를 했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국군이 후퇴를 하면서 두 번째 피란을 나가라고 하여 쌀을 대충 묻고 지게에 이불과 먹을 것을 지고 대치리 고개를 넘어가려는데, 그때 국군이 나타나서 길을 막으며 나에게 인민군이 나오면 집에 들어가 주둔할 터이니 마을 집을 다 태우라고 한다.
나는 할 수 없이 지게를 내려놓고 마을로 들어가 그 당시 명지리에서는 제법 좋다고 하는 우리 굴피 집부터 불을 태우려니 잘 붙지 않아 볏짚에 불을 붙여 태우기 시작하며 다른 초가집도 이집 저집을 뛰어다니며 불을 붙였다.
아깝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인이 빨리 태우라고 하여 마을 전체인 40여 동을 2명이 나누어 몽땅 다 태우고 대치리 고개에 지게를 놓았던 자리에 가니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떠나고 없었다.
고개를 넘어 대치리 고모네 집에 가서 가족을 만나 현남 댓골을 지나 주문진에 가서 지내다가 인민군이 내려온다고 하여 삼척 맹방까지 갔다.
그때 피란을 나갔던 우리 가족은 어머니, 형수, 그리고 집사람과 어린 아들 둘을 합해 여섯 식구라서 가지고 갔던 쌀이 금방 떨어지니 바가지를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계속 밥 얻으러 다닐 수가 없어 소금을 사 가지고 지게에 지고 영을 넘어 다니며 바꾸미를 나섰다. 소금을 지고 산골에 드문드문 떨어진 집집마다 다니며 콩과 옥수수를 바꾸어 밥을 해먹으며 살다가 국군이 북진하여 수복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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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권오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