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말곡리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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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72회 작성일 2018-03-0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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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기 (남, 81세, 현북면 말곡리)
■ 면담일 : 201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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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 아버지가 면서기를 했다고 혹시 월남을 할까봐 감시를 받고 살았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인공정치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면서기를 하였다고 친일파로 몰려 토지 분배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혹시 월남할까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자들에게 감시를 받고 살았고 그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제 3자가 또 감시를 하니 행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단은 저녁 식사 후에는 동사에 나오라고 하여 노래도 배우고 줄을 서서 마을을 돌며 이승만 타도하자!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6 ․ 25전쟁이 나기 직전 겉으로는 전혀 기미를 채지 못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열흘 전부터 마차 위에 풀로 위장하고 무엇인가를 싣고 나왔고 주부대가 마을 앞산 샘잿산에 이웃 주민들에게 인부 나오라 하여 호를 파고 인민군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남과 북이 서로 총질하다 보면 총알이 마을에 날아들기도 했고, 남쪽 명지리 방면에서 박격포를 쏘아 우리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불이 번쩍하고 나면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어느 날 마을에 서있는 큰 감나무에 포탄이 터져 사람이 1명 죽고 2명이 다친 일이 발생했다. 그때 다친 사람들은 들것을 만들어 병원으로 가는 도중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다.



◆ 인민군이 말곡리 입구 골짜기에 포신이 긴 대포 7대를 설치했다.


전쟁 3일전에는 포 1대에 사람들이 20~25명이나 매달려 대포를 밀고 당기며 말곡리 마을입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에 7대의 포가 설치 되었다. 그때 나는 13살 어린 나이에 군인들이 왜 이렇게 많이 오지? 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드디어 전쟁이 터져 피란을 가라고 하여 자다 말고 아랫말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나니 곰말로 가라고 했다. 전쟁 당일 인민군들이 말곡리 샘잿산을 올라가다 지뢰가 터져 3명이 죽어 들것에 실려내려오는 일이 있었다.
6 ․ 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인민군들이 계속 남하하며 점령하는 곳을 마을 게시판 지도에 그려놓고 경상도와 부산만 남았으니 곧 통일이 된다고 선전하여 사람들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 교통호에 대피한 고학년은 죽고 산으로 간 1학년은 무사했다.


그런데 9월 어느 날 교통호를 파고 소나무를 베어 현북중학교 건물 주위에 죽 세워놓고 나뭇가지를 베어다 지붕을 위장한 현북중학교 상공에 갑자기 정찰기가 와서 빙빙 돌다가 미처 가기도 전에 시커먼 쌕쌔기 폭격기 4대가 날아와 폭격을 하였다고 한다.
저학년 학생들은 산으로 뛰어 올라 토치카로 대피했고 고학년 학생들은 교통호에 숨었다. 소이탄 폭격과 함께 불이 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 몸에 불이 옮겨 붙자 손으로 불을 털어내면 또 옮겨가며 불이 붙으니 교통호로 대피했던 학생들이 대부분 많이 죽고 산으로 올라 뛴 1학년 학생들은 무사했다고 한다.
그때 마침 나는 집에 일이 있어 학교에 안가서 화를 면했는데 폭격기가 지나간 후 여학생들이 살이 타서 넓적다리에 살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눈으로 보기 무서워 소름이 끼쳤다. 그때 소이탄 공격을 받은 학생들은 몸이 뜨겁다고 손으로 치면 불이 그 옆으로 바로 옮겨 붙어 피해가 컸다.
인부들이 동원되어 들것에 태워 양혈을 지나 간리를 넘어 양양 감곡리로 해서 적은리로 환자들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도 못하다가 국군이 들어오니 환자들을 두고 인민군들은 북으로 도망갔다.
부모들이 수소문하여 자식들을 찾아서 호박을 구해다 속을 긁어 발라 치료를 하고 감자를 삶아서 붙이고 피마자기름을 바르고 정성으로 치료하여 나은 학생도 있다. 그때 소이탄공격으로 넓적다리가 갈라져 화상을 입었던 여학생들은 나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현북중학교 뒷산에는 인민군 고사포 부대가 있어 비행기에 고사포를 발사 했다고 한다. 이 사고가 난후 소문이 퍼져 양양군의 학교들이 모두 폐교를 하였다.



◆ 중복골까지 피란을 갔다가 국군이 와서 열흘 만에 돌아왔다.


9월말이 되면서 현북 중학교에 다니는 고학년 남자 학생 5명을 보자고하여 인민군들이 데리고 갔다. 얼마를 지난 후 에 돌아왔는데 청진까지 갔다가 도망 왔다고 했고, 도망친 방법은 비행기 폭격을 받을 때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그 틈을 이용하여 산으로 뛰어 숨었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 있다가 이곳이 전쟁터가 된다고 피란가라고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미군이 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했고 열흘간 피란을 가있으면 된다고 하여 이불과 쌀을 지고 고모 네가 살고 있는 중복골까지 피란을 갔다가 열흘 만에 국군이 온다고 하여 돌아왔다.
당시 국군은 자동차로 빨리 북진하는 바람에 인민군들이 미처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 대 부대가 국군이 북으로 들어간 후에 지나가는데 얼마나 무서웠던지 우리식구와 가까운 세 집은 굴속에서 15일간 나오지 못하고 숨어서 지냈다.
다행이 우리 동네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고 인민군 패잔병 대부대가 북으로 다 지나간 후에 나와 보니 2~3달 동안 마을을 설치고 다니던 세포위원장과 인민위원장 그리고 민청위원장들은 모두 북으로 들어갔다.



◆ 남쪽으로 자꾸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밥을 더 얻어먹기가 쉬웠다.


그러고 3달이 체 안 되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인민군과 또 처 나온다고 하자 1 ․ 4후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부분 사람들은 공산사회에서 시달림을 받고 살아서 먼 남쪽으로 피란을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연로하신 할아버지는 집에 남겨두고 식구들은 이불과 쌀 3말을 지고 피란을 갔다.
강릉 비행장 부근 빈집에서 1박하고 밤재를 넘어 옥계를 가다가 인민군을 만났는데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때 우리는 피란가기 싫어 다시 들어가는 중이라고 위기를 모면하였다. 옥계에서 한 달 여를 지냈는데 그때 아버지가 북으로 들어오던 국군의 포탄을 지고 전쟁터로 나가셨다.
피란을 나가면서 밥을 제대로 얻어먹으려면 남쪽으로 자꾸 나가면 더 쉬웠다 그래서 모든 피란민들은 힘들어도 남쪽으로 계속 더 나갔다.



◆ 국군의 짐꾼으로 가셨던 아버지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시다.


국군이 다시 북진을 하고 인민군들이 북으로 쫓겨 가자 지역마다 공산주의에 혼난 사람들이 한청을 조직하여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도 정보통이 있어 들어가도 된다고 하여 밭에 마늘이 올라올 때쯤인 봄에 말곡리에 돌아오니 집이 다 타고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 이미 아버지께서 먼저 들어와 계셔서 식구들은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거름 밭에 독을 묻고 쌀을 감추어두고 나갔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묻은 쌀독 윗부분은 1 ․ 4후퇴 당시 우리 집이 탈 때 용광로 같은 어마어마한 열을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타서 누렇게 된 쌀도 그때는 곡식 낱알이 한 톨도 귀한 때라 어머니가 아까워서 밥을 해먹었는데 얼마나 쓰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였다.
동네 어르신들은 우선 집이 타고 난 온돌위에 통나무를 베어다 토막을 쌓고 벽은 흙으로 발랐고 부엌은 거적때기로 막고 솥을 걸었다.
봄에 농사를 시작했는데 씨앗은 어디서 구했는지 씨앗을 뿌렸고, 전 동네가 힘을 모아 서로 도와가며 일을 했다. 먹을 게 없으니 면사무소에서 우유가루와 밥이 훌훌 날아가는 안남미 쌀 등을 배급받고 나물과 섞어서 배를 채우며 농사일을 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