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어성전리 김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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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26회 작성일 2018-03-0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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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범 (남, 82세, 현북면 어성전리)
■ 면담일 : 201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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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현북면사무소는 하광정리에서 어성전리로 이전되었다.


어성전리는 38°선에서 남쪽으로 15여리 떨어져 있다. 해방 전에는 현북면 면사무소가 하광정리에 있었으나,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38°선 이남이 강릉군으로 편입되면서 면소재지가 현북면 어성전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해방 후 어성전에는 국군 2개 중대와 화기소대병력이 주둔한 대대본부가 마을을 지나 명주사로 들어가는 입구 좌측의‘노전’이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주민들은 38°선과 인접한 동네인 명지리와 장리 연화동 등지를 다니면서 땅을 파고 초소와 같은 벙커를 흙주머니를 쌓아 만들고 교통호를 파는 일에 한 가구당 1년 5~60번을 동원되었고 군부대의 짐을 나르는 일에 동원되어 실탄과 식품 등을 져 날랐다.
가끔씩 남과 북이 38°선에서 충돌이 있으면 그때마다 피했다가 조용하면 들어오곤 했는데 농사일을 하기가 불안하여 아침에 골짜기나 논밭에 들어갔다가 주로 오후가 되면 집으로 내려왔다.
그때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총소리를 들으면 어디쯤에서 날아오는지 대강 안다. 총알이 멀리 날아갈 때는‘퓌~웅’하고 소리가 나고, 가까이로 떨어지는 소리는‘찌직~찌직’하고 소리가 났다.



◆ 국군들은 밥을 먹을 때와 잠잘 때도 손에 수류탄을 쥐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논에 모 심으러 가셨는데 마을 앞길로는 피란민들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마음으로 불안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데 부모님은 점심때가 넘어서 돌아오셨다.
우리 식구들은 짐을 챙겨서 피란을 떠나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사람이 많은 곳은 절대로 가지 말자는 말을 듣고 우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인적이 드믄 들미골로 가서 하루 밤을 묵으려고 초막을 쳤다.
저녁 4~5시가 되자 피란민에 섞여 나온 국군 1등 중사와 2등 중사가 전쟁 전날 저녁을 먹고 하루 종일 굶었는지 힘도 재대로 못 쓰며 주저 않는다. 우리가 마침 밥을 하여 그들과 밥을 같이 먹는데 그중 1등 중사는 손에 수류탄을 쥐고 밥을 먹고 있었고 잠을 잘 때도 수류탄은 손으로 꼭 쥐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머니에는 산에서 따가지고 온 덜 익은 산머루가 들어있었다.
다음날 국군들이 어디로 가야 남으로 가느냐고 물어서 개잔리를 거쳐 가마소를 지나 연곡으로 나가서 진고개로 접어들면 남쪽으로 나갈수 있다고 말하니 국군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M1총을 메고 개잔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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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김용범씨



◆ 동네에는 장총에 칼을 꼽은 인민군이 씨글씨글 하다고 한다.


우리도 여기서 더 지체하지 않고 용너미를 거쳐 개잔리로 가서 개울가 옆에서 모래를 파고 나무를 찍어 덮고 4집 식구가 잤다. 이튼 날 할아버지 두 분이 마을에 가 보자며 어성전으로 내려 가셨다 오시더니 동네에 인민군이 장총에 칼을 꽂고 씨글씨글 하다고 하신다.
나도 인민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혼자 내려 가 보려는데 원일전리 사람과 장리 사람들이 피란을 나가고 있다. 어성전 마을에 들어서니 누런 옷을 입고 있는 인민군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나는 혹시 함부로 행동을 하다가는 그들에게 붙잡힐 수 있어 도망을 칠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들 옆으로 지나 동네 집으로 들어가는 척 하다가 그 집 뒤로돌아가서 다른 길로 우회하여 돌아왔는데 그때 나는 얼마나 무서운지 발바닥이 땅에 닿았는지도 모르게 달려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인민군들이 남쪽으로 떠난 후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우리보다 앞서 나갔으니 어딘들 피란을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시어 집으로 돌아 왔다. 그때 내 나이 16살 이였다.
그러나 당분간은 집에 들와서도 바로 못 살고 4집 가족이 고적제에 막을 치고 얼마동안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부 다른 집들과 대부분 공무원가족 그리고 특히 경찰가족은 경상도 까지 피란을 나간 집도 있었다.



◆ 농작물을 베어 벼이삭과 콩알도 세더니 현물세를 내라고 한다.


그리고 멀리 피란을 나가지 않고 되돌아와 살고 있던 동네에 얼마 후 북에서 정치공작대라며 남자 1명 여자 1명이 왔다. 그들은 소년들을 모두 현성국민학교로 나오라고 하여 모아놓고는 소년단을 조직하고 노래를 가르쳐 주고 김일성 장군에 대하여 가르쳤고 어른들 중에서 동네를 이끌 수 있는 책임자를 뽑는 등 이른바 100일정치 사회가 시작되었다.
8월에는 남조선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청년들에게 인민군에 나가라고 선동을 하니 안 갈수 도 없고, 만세를 부른다고 모이라 하여 현성학교 운동장으로 나가니 마을 청년들은 바로 의용군에 끌려가 인민군대로 입대시켰다. 그때 의용군에 나갔다가 돌아 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해는 가물어서 벼를 심은 논이 많지 않았으나 그들은 그나마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놓은 곡식에 대해 현물세를 내라고 하며 전체수확량을 조사를 한다고 농사가 잘된 곳 1평을 낫으로 베어 벼이삭과 콩알도 세어서 전체수확량에서 할당된 곡식을 현물세로 내라고 했지만 결국 국군이 들어오자 북으로 도망갔다.



◆ 청년들이 국군으로 위장한 인민군에게 속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마을 청년들이 모여 국군이 온다고 환영식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인민군이 국군 복장을 하고 오니 국군인줄 알고 만세를 부르고 환영을 하니 청년들을 꼼짝 말라고 하며 전화선으로 손을 묶고 끌고갔다.
밤이 되면서 청년들은 외딴곳으로 끌려가면서 묶인 손을 몰래 풀고 있다가 인민군들이 청년들을 세워놓고 다발총을 쏘려고 할 순간에 재빨리 도망을 쳤다. 하지만 인민군의 총알을 피하지 못한 2명은 총에 맞아 죽고 부상을 당한 청년도 있었다.
그때 법수치 구장도 가슴에 총에 맞아 밭에 엎드려 피를 흘리며 죽었고 김영옥은 그 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아들 내놓으라고 소리 쳤지만 그때 인민군들은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그 후 가을에 타작을 하는데 인민군 패잔병 3명이 산줄기를 타고 어성전으로 들어왔는데 2명은 부상자이고 한명은 위생병인 듯 한자가 부축하고 왔다. 그들에게 우리 큰 집에서는 패잔병이었지만 총을 들고 있으니 어쩔 수없이 10여 일 동안 밥을 해먹이면서 묵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인민군 복을 입은 군인 셋이 와서 여기 인민군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큰 집에서 콩 마댕이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M1총을 쏘며 나오라고 하니 한 인민군이 수류탄을 마당에 던지고 뒤로 도망가려 하는 것을 군인들이 엎드려 포위하여 총을 쏘니 나가다 손에 들고 있던 수류탄이 터져 죽고 환자 한명은 방에서 다른 한명도 도망을 치다가 군인들에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인민군 복을 입었던 군인들은 국군들이 인민군복장으로 위장을 한것이었다.



◆ 1 ․ 4후퇴 때 짐꾼으로 가셨던 아버지를 정동진에서 기적처럼 만났다.


평온도 잠시 동짓달에 인민군이 다시 밀고 내려와 국군이 후퇴하면서 제 2차 피란인 1 ․ 4후퇴가 시작되자 가족과 친척들은 짐을 지고 피란을 가자고 하였다. 1차 피란을 가까이서 잠깐 동안 하고 들어왔다가 북한정치에서 고초를 겪으시고 이번에는 멀리 피란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국군을 따라 산줄기를 타고 벽실골을 넘어 서림으로 해서 인제와 홍천방면으로 짐꾼으로 가셨고, 나는 가장이된 몸으로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과 모두 넷이 피란을 떠났다. 대치리를 지나 인구에서 1박하고 아침에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만나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안심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친척어르신들과 같이 가는데 내가 끌고 가는 수소 송아지를 군인들이 팔라고 하여 4천원에 팔고 주문진에서 1박하고 강릉 팔송정에서 자고나니 눈이 왔으나 그래도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고 정동진에 가서는 수많은 피란민 인파속에서 뜻밖에 국군을 따라 짐꾼으로 가시는 바람에 헤어졌던 아버지를 기적처럼 만나니 하늘이 도와서 운이 좋았는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 삼척 오분리에서 겨울철에서 봄까지 바다풀을 뜯어먹고 살았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와 쌀과 장 그리고 이불을 나누어지고 밤재를 넘어 옥계에서 1박을 하고 삼척에 나가니 피란민이 바글바글하다.
시내에서 살다가 바닷가 마을인 오분리에 가니 겨울에 산에는 풀이 없지만 바다에는 겨울철에서 봄까지 바다풀인 보리해둥이 등을 뜯어서 먹고 쌀이 떨어지자 쌀과 밥 동냥을 하러 다니려고 20리도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피란생활은 주로 가는 곳 마다 더 멀리 피란을 나간 빈집들을 찾아다니며 살았고 정라진에 이르러서는 피란을 나가지 않은 할머니 집에 들어가니 그 집에는 며느리와 장질부사를 앓는 아들도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죽으니 누구 하나 병이 옮길 것을 겁내고 장례를 지내줄 사람이 없어 아버지가 산에 묻어 주었다. 그 집의 26살의 애 엄마가 고맙다고 돈을 좀 주어 주문진으로 들어와서 지내다가 망령재를 넘어 어성전으로 들어와 보니 옛 집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 강가 모래밭에 감자구덩이처럼 깊게 파고 나뭇가지를 덮고 잤다.


때는 3.4월이라 강바람이 몹시 차지만 첫날에는 잠 잘 곳이 없어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위를 견디며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튼 날은 강가 모래밭을 감자 구덩이처럼 깊게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로 걸치고 그 속에서 잠을 잤다. 잠시 시간을 내어 하월천에 사는 누님 집에 가보니 초막을 짓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우리보고 먼저 고향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전세를 살피고 나중에 들어오시겠다는 아버지가 오셨다. 당시 강가 언덕위에‘뒷송정’이라는 장소에는 전쟁 전 강릉‘임공사’라고 하는 회사에서 침목을 많이 쌓아놓은 것이 있어서 그 침목을 가져다 타다 남은 집 구들장 위에 동네 사람들과 같이 여름까지 서로 품앗이로 집을 지었다.
전부터 아버지는 노꼬(나무를 캐는 폭이 넓은 톱)질을 잘 하셨고 할아버지는 목수여서 외를 엮고 벽을 바르고 집을 지어주었는데 돈도 받지 않고 서로 도와주었는데 그 후 면사무소가 들어오고 면사무소를 통해서 쌀과 옷 등 구호물자도 배급받았다.
한때 법수치 깊은 산골에 미처 북으로 들어가지 못한 공비들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가서 주문진 경찰서 어성전 지서에서 보조경찰(의경)들이 근무를 하며 공비들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