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장리 김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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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3회 작성일 2018-03-0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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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연 (남, 79세, 현북면 장리)
■ 면담일 : 201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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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경찰부인은 최근까지도 계속 혼자 살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해방 되면서 북에는 소련군이 왔고 남쪽에는 미군이 왔다. 당시 미군은 우리 마을에서 소련군과 서로 대치하려고 현재 마을회관 뒤편에 있는 산등성이 둔덕에 임시 주둔할 곳을 만들고자 미군 4명이 와서 천막을 치고 있었는데 나는 친구들과 천막 바닥을 푹신푹신하게 하려고 송이풀도 베어주고 일을 도와주었더니 미군들은 우리에게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알
사탕을 주었다.
그때 장리 곤지골에 사무소가 있어 배급을 타 오는데 경비를 서던 소련군들이 검사를 하고 쌀을 빼앗아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미군은 1~2개월 후 가고 지서에서 파견을 나온 경찰관 2명을 인민군들이 확인한다고 끌고 갔는데 돌려보내지 않는 일이 생겼다.
당시 38°선 경계선 근방은 비공식적으로 남과 북이 서로 왕래하며 어수선하게 살던 때라 그런 일이 발생하였는데 그 경찰부인은 개가도 하지 않고 최근까지 계속 혼자 살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상황이 이러하자 남아 있던 경찰도 가끔 습격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해 밤에는 경비초소에 근무하지 못하고 산에 호를 파고 근무하였고 주민들도 인민군들의 습격을 우려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 그들은 전날 어디서 사람을 동원해 왔는지 야밤에 벼를 몽땅 베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어성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5중대에서 1개 소대 병력이 주둔하러 왔다. 국군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투 호를 파고 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국군이 주둔하자 전처럼 가까이 지내던 이웃 동네 도리는 북쪽 마을이니 서로 왕래도 못했다.
처음에는 예전처럼 양양 시장에도 다녔는데 갈 수 없었고 원일전리 청년 한명은 토치카 공사 중 인민군이 총을 쏴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으나 그 어디 가서 항의도 못하고 억울하게 살았다.
1950년 들어서는 거의 밤마다 습격을 당하니 공병대 3명이 지뢰 매설하러 와서 지뢰를 매설하였다. 그 후 아침에 나가면 인민군들이 지뢰를 밟아죽자 머리를 잘라서 10개씩 가마니에 담아 인부꾼들이 지게에 지고 어성전리 중대 본부에 가지고 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람 머리가 무거우니 귀를 잘라 가져갔다. 그러나 당하기만 하던 인민군들이 습격을 와서 지뢰 매설 군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렇게 쌍방이 피해보는 일이 자주 일어나니 장리 주민들은 편히 살수 가 없어 어성전에 쫓겨 가서 살았다.
그러나 추수철이 되자 논에 벼 베는 날만큼은 서로 인접해있는 북쪽 마을인 부소치와 협의하여 같은 날로 정하고 남북이 서로 도발을 하지말자고 약속을 하고 벼를 베기로 했는데 그들은 전날 어디서 사람을 동원해 왔는지 야밤에 자기들 논에 벼를 몽땅 베어갔다.



◆ 피란 못간 경찰 가족을 동네 주민들이 신고 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들이 떼거리로 총을 쏘며 내려오는데 그나마 주둔해있던 국군 1개 소대가 필사적으로 대항하니 금방은 내려오지는 못했으나, 계속 남하하는 인민군의 공세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국군은 후퇴를 했다.
주민들은 밀려오는 인민군들의 총소리에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판국인데 이때 어성전 국군 본대도 철수하며 피란을 가라고 했다.
주민들은 다급하게 피란보따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 어성전을 지나 산 넘어 부연동까지 가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전우재를 넘어연곡에 가니 거기는 이미 인민군들이 바글바글 했다. 피란을 나온 사람들에게 인민군들이 다시 돌아가라고 하여 더 피란을 갈 수 없어 할 수도 없이 장리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였다.
그 후 북에서 공산당원들이 마을에 와서 동네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정하여 일을 시키자 그들은 마을의 젊은이 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때 젊은 사람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숨었고 마을 사람들도 신고하지 않아 찾지 못하였는데 한 청년이 집에 내려 왔다가 잡혀서 인민군에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찰 가족이 미처 피란을 못 갔지만 동네 주민들이 신고를 안 해 무사히 다친 사람 없이 지날 수 있었다.
나는 어성전 인민학교 3학년에 들어가 김일성이에 가르침을 배웠고 그때 배운 노래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은 생산고 조사를 하는데 좁쌀까지 셌다. 세는 방법은 일정한 면적을 정해서 베어서 작은 종지로 세고는 그걸로 되질을 하여 계산했다.



◆ 엄동설한에 만약 빈집이 없었더라면 엄청 더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국군이 반격을 하자 인민군이 후퇴할 때는 강가에서 하얀 보자기를 가지고 있다가 비행기가 나타나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엎드리니 비행기가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때 우리 마을 앞길로 인민군이 후퇴를 하는 데 종일 줄지어 지나갔다.
인민군이 들어가고 잠시 동안 배웠던 인민학교가 다시 국민학교로 바뀌어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도 우리가 처음 국민학교에서 배우던 그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구장을 하던 아저씨도 선생님이었다. 좋은 세상도 잠시 겨울인데 또 피란을 나가라고 하여 1 ․ 4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피란보따리를 싸고 집에서 나오자 군인들이 총을 쏘니 집에 불이 붙었다. 가족은 할아버지와 부모 그리고 우리 3형제 여섯 식구가 어성전을 지나 망령재를 넘어 댓골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주문진에 갔는데 아버지가 국군에게 잡혀 차에 태워갔다.
남은 식구들은 모두 짐을 지고 정동진에 가니 빈집 들이 많았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잤다. 그때 눈이 많이 내리는 엄동설한이라 밖에서는 잘 수가 없었는데 만약 빈집이 없었더라면 엄청 더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가끔 쌕쌕이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사람도 많이 죽고 소도 죽어 있었다.



◆ 울진에 나가서 형과 나는 엿 장사와 양담배 장사를 했다.


6 ․ 25가 나고 1차 피란 때는 얼마 나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들어와 살다가 공산치하에서 3달 동안 시달려보았기 때문에 2차 피란 때는 제법 많은 쌀을 지고 피란을 나왔다. 그러나 많은 식구에 피란생활이 길어지자 쌀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밥을 얻으러 다녔다. 묵호에서도 피란민이 하도 많아 밥 얻어먹기가 어려워져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울진까지 갔다.
울진에서는 형과 나는 엿 장사를 했다. 엿은 만드는 집에서 떼어다가 엿판을 매고 다니며 엿 사세요! 엿 사세요! 하며 다녔다. 잘 팔리는 날은 하루 한 판을 다 팔았고 나중에는 양담배도 떼어다 같이 팔았다. 주민들은 돈이 없어 못 사먹고 대부분 군인들이 많이 사 먹었다.
피란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져 가는데 얼마 후 수복이 되었다고 하여 고향으로 들어오니 국군에게 잡혀갔던 아버지께서는 이미 돌아와 계셨다.
그때 모두가 힘들고 고달팠던 피란생활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도 많았지만 현지 주민들의 대부분 인심은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수많은 피란민들과 같이 살았던 인심이 좋은 현지 사람들은 피란민들을 위하여 밥을 더 넉넉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