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하광정리 김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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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7회 작성일 2018-03-0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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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섭 (여, 84세, 현북면 하광정리)
■ 면담일 : 2015.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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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내 나이 22세가 되던 해에 상운 인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근무하던 중 6 ․ 25전쟁이 일어나 9월까지 상운학교에서 근무를 하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미군과 국군이 북으로 진군을 할 때 학교장의 인솔로 북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고성 어디쯤에 갔을 때 비행기에서 폭격을 하고 바다에선 함포사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산이 우르릉 거리며 요란하게 들렸다.
우리 주위에는 온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도록 폭탄이 떨어져 숨어 있다가 나오니 일행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분간을 못해 헤매는데 마침 수양을 맺었던 할머니를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피란생활이 끝나고 나중에 복귀하여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폭격으로 삼지 사방으로 흩어졌던 학교장 이하 동료들을 멀쩡하게 모두 만날 수 있었으니, 그 당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처하였을지라도 모두들 제 살길은 다 찾아서 몸을 숨겼으니 인명은 제천이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았다.



◆ 너는 집으로 가라고 하여 서운하고 허탈했다.



할머니는 나보다 위인 딸을 데리고 안변 사돈네 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 기사문리 할머니 이모네 큰 오빠를 만나 마음이 놓이고 의지가 되었는데, 그 큰 오빠는 나를 보고 본인 자신은 만주까지 가야하니 너를 데리고 갈 수 없다.
너는 집으로 가라고 하여 많이 서운하고 허탈했다. 그 오빠와 떨어진 다음 마을을 찾아 들어가서 석왕사 앞 농가에서 자고난 다음 우리 외가 집으로 갔는데 버덩이 아주 넓었다.
그 마을은 양양에서 농사지으러 온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아버지가 강릉농고 2회 졸업생으로 우리 고장에 고구마를 전파한 공이 있어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서로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두 달을 머물렀다.



◆ 굴에 흙을 발라 험하게 만들고 검문을 받았다.



전쟁이 조용해져 양양으로 나오는데 헌병의 검문이 심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작은 딸이라고 했다. 둘 다 20대 아가씨이니 더욱 검문이 심하여 할머니는 모래로 손과 얼굴을 피가 날 정도로 문지르고 흙을 발라 얼굴을 험하게 만들어야 양양까지 무사히 갈수 있기 때문이었다.
검문이 있을 때 마다 농토가 없어 산을 일구어 농사를 짓다보니 우리딸들은 얼굴이 성한 데가 없다고 했다. 계속 이렇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경찰서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 나오면서 나는 바보처럼 행세했다.
농가에 들어가 거지처럼 밥 구걸을 하고 잠도 자고 걸어서 왔다. 고성 건봉령을 넘으니 간성이었다. 그렇게 걸어서 양양에 왔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죽은 줄 알았던 손녀가 돌아왔다고 울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집은 비행기 폭격으로 불타버려서 아랫집 방을 얻어 살았다.
그 후 당시 군정 하에 양양군에서 학교선생을 뽑는다고 해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강습을 받고 전에 근무하던 상운학교에 발령을 받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 남편 윤석진(86세) 이야기


내 남편인 윤선진은 6 ․ 25전쟁이 나기 전 현북 초급중학교에서 공산주의 교육만 시키는데 반대하여 학교 당국에서 구타를 당하여 동료인 윤석규, 윤석종, 박상진, 윤석근, 윤석무 등과 1948년 6월 집단 월남했는데, 남한에서는 어린 학생들이므로 38°선에서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고 보내주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이였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북한에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하여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어 1949년 3월 12일 재판에서 4년 혹은 5년의 형을 받고 원산형무소에서 있다가 함흥, 청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윤석규, 윤석종, 박상진은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창에 가두어 놓고 한사람씩 나오라고 하고 매질하고 총살했는데 남편은 2일만 늦었으면 죽었을 것
이라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5년 이상 정치범은 총살하고 4년형 이하인 자를 북으로 이송 중에 남편은 마침 유엔군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탈출하여 산위로 올라가 감자 굴에서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했다.
이때 맨발로 산속으로 탈출하였으나 방향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같이 나온 평양 사람과 같이 낮에는 감자구덩이에 들어가 생감자로 20여 일간 연명하다가 맨발로 함남 신흥군 하기천면 치안대장 집에 찾아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그간의 사정을 애기하여 치안대의 호의로 함흥 감포항에서 어선을 타려고 부둣가로 나갔다.
그러나 그 배에는 이미 사람이 가득 차 있어서“나 좀 태워주세요.”라고 사정을 하니 어떤 사람은 같이 가자고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했지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배를 타고 주문진에서 내려 말곡리에 돌아오니 할아버지께서‘꿈인가 생시인가? 너 나를 알겠니?’라고 하신다.
“할아버지 제가 석진입니다.”고 하니 그제야 할아버지는“네가 석진이냐.”하며 눈물을 흘리시며 반가워하셨다고 하시면서 할머니는 너 때문에 내가 산에 있는 서낭당에 다니시며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할머니는 내가 죽었다고 울고 다니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다가 전쟁 통에 피란을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고무신이 다 떨어져 밑바닥이 구멍이 나서 밑에 천을 얻어 깔고 신고 다녔다고 했고, 길을 가다보면 폭격에 맞아 죽은 시체가 드문드문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신발에 구멍이 나서 길에서 주워 신고 맞지 않으면 새끼를 꼬아 동여매어 신고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