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잔교리 홍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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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7회 작성일 2018-03-0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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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필녀 (여, 90세, 현북면 잔교리)
■ 면담일 : 201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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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김순희네 집의 방은 이남이고 부엌은 이북이었다.


1945년 로스케(소련군인)와 미군이 잔교리에 와서 38°선에 막을 치며 여기서부터 이북이라고 말했다. 10월 윤옥남이 시부모 대상(大喪)에 나가보니 빨갱이질 하는 사람들인 최○○, 정○○, 진○○ 등이 이북으로 넘어가거라 지랄이더라.
그때 윤옥남이 남편인 김형만은 상제 옷을 벗고 화를 내면서 이놈들 때려죽인다고 야단이었다. 그 후 서북청년단이 주문진에서 들어와 북쪽으로 간 사람들 집을 때려 부수었다. 그때 잔교리 김순희네 집 부엌은 이북이고 방은 이남이었다.
광정에 있는 내무서원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잡아가 조사를 하고 죄가 없으니 저녁에 돌려 보내기도 했으며, 이장 선거 때는 서로 이기려고 험담을 일삼
고 경쟁을 하며 서로가 갈등을 야기 시켰다. 그 당시 남쪽에는 경찰이 경비를 했고, 북쪽은 소련군 로스케와 인민군이 국경을 지켰다.
어느 때인가 무슨 사건이 생겼는지 소련군과 인민군이 경계를 넘어 공격해 왔다.
그때 소련군이“아메리카 가만히 있어 로스케 마요즈(온다)”라고 했으나, 남한 경찰 경비대 순경이 총을 발사하여 로스케 다리가 관통상을 입어 단가에 실어 북으로 보냈다.
경비하는 경찰은 15명이 근무했는데 마을 순찰 시에는 경찰 1인과 한청(한국청년단)이 딱딱이를 치며 한국청년단원 4명이 동행했다.
그러다가 한때 인민군들의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으로 함순경과 권순경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주민들이 논밭에서 일하다 인민군의 총을 맞아 사망하기도 했으며, 밤에는 인민군이 자꾸 내려와 노략질을 하여 산 너머에 희망 촌을 만들어 움막집을 짓고 피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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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현북면 쟁기동 58번길 18-30 (309번지 당시 순희네 집터) 〉



◆ 국군만 잡을 테니 민간인은 서있으세요 !


6 ․ 25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 포격 소리에 일어나 산위에 올라가 보니 인민군이 새까맣게 깃발을 흔들며 오고 있다. 엄마는 큰 언니가 약해서 애기를 업고가지 못하니 인구 언니 네와 작은 언니 네와 같이 피란을 가라고 했다. 우리는 국군을 따라 인구리 5중대본부로 나가는데 뒤에서 인민군이 총질을 하며 따라 온다.
그 인민군들은“우리는 인민을 사랑하여 인민을 해치지 않는다! 국군만 잡아간다! 민간인은 서 있어요!”하고 소리쳤다. 그때 국군이 우리 좀 살려달라고 우리보고 뒤에서 따라오라고 하며 우리를 방패 막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피란민들이 인구에 있는 국군 5중대 주둔지에 도착하니 벌써 인민군이 앞에 와 있었고 국군은 이미 산을 이용해 주문진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우리는 길을 따라 강릉으로 나갔는데 사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강릉도 위험하다고 하여 성산으로 가니 인민군이 뒤따라온다고 하여 삽당령[강릉시 왕산면 송현리와 목계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을 넘어 임계, 여량, 정선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고 애기를 업고 가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 안동에서 대구 그리고 부산 해운대 까지 피란을 다녔다.


다시 위험하다고 하여 안동으로 그리고 또 대구까지 내려갔다. 사람들이 인심이 좋아 식은 밥, 감자밥, 조밥 강냉이밥을 집집마다 다니며 얻어 먹었다. 어떤 집은“젊은이들이 힘들게 왔는데 밥이 없어 어떻게 하지”하며 안타까워했다. 때로는 쉰밥도 맛있게 얻어먹었다.
대구에서 다시 해운대까지는 군인차로 갔다. 해운대에서도 밥을 얻어먹었는데 배는 곯지 않았다. 쉴 때에는 왜 그리 이가 많은지 가려워 머릿니도 잡고 옷을 벗어 이를 잡고 또 잡았다. 이는 보리쌀만큼 큰 놈들이 옷이 접힌 솔기에 숨어 있으면 양쪽 엄지손톱으로 눌러 딱 터져 죽이면 피가 터져 나온다.



◆ 피란선(군함)을 타지 않아서 죽음을 면했다.


국군이 38°선을 탈환했다하여 군용차로 임원까지 왔고 다시 배로 주문진까지 왔는데, 음력으로 9월 9일이었고, 그리고 다시 사흘 후에는 인민군 패잔병에 쫓겨 할 수 없이 고성 총석정까지 갔다.
그때 언니 시동생이 경찰이어서 우리는 더 피란을 가야만 했다. 식사는 문전걸식을 하였는데, 때로는 경찰관 시동생이 쌀과 수수쌀을 주어서 밥을 해 먹었다.
다시 국군을 따라 나올 때는 언니의 둘째아들을 업고 군함을 타고 나오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애기를 업고 화장실에 갔다가 금방 나오지 못하고 한참 있다가 나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형부가“얻는 밥 잔뜩 주어먹고 똥을 싸러 가서 늦게 와 군함을 놓쳤어! 어떻게 양양까지 걸어 가!”하면서 여간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애기를 업고 남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배가 먼 바다 쯤에 갔을 때 비행기가 오더니 우리가 타려했던 군함을 향해 폭격을 하더니 그 군함은 그만 파선되어 갈아 앉고 말았다.
그때서야 어른들은“니가 우리를 살렸다!”하고 좋아했다. 그 때 그 어린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속초양양교육장을 한 이상집 이다.
그렇게 걸어서 피란을 다니는 동안 옷은 떨어지고 신발도 밑창 이 나서 얻어 신고 다녔다. 양양 고향에 오니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있었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으니 밭에 쌓아놓은 큰 콩 가리 속에서 지냈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날은 9월 29일이었는데, 약 20일간 피란생활이었다.



◆ 나무해 팔고, 삼 삼고 허드렛일 도와주고 보리쌀, 좁쌀을 얻어먹었다.


1 ․ 4후퇴 시 인민군이 사용한다고 집을 모두 불 질러 놓자 동네사람들은 눈을 밟으며 울진까지 피란을 갔다. 울진에서 같은 동네사람이 경찰서장을 하고 있는 김상원이 우리들에게 매화리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하지만 밥은 자기가 해결해야 했다.
덕구 온천마을에 가서 동냥을 해다가 밥해 먹고, 삼 삼아주고, 허드렛일 도와주고 보리쌀, 좁쌀을 얻어다 먹고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 놀래기 잡이, 그리고 나무해다 팔고 농가에 가서 일도와주고 보리쌀을 구해다 먹고 살았다.
이렇게 3개월을 지내다가 집으로 들어오니 집은 타고 없어 안탄 집에 한 칸씩 한집에 3~4가구가 살다가 한집씩 토막집을 짓고 나가 살았다.



◆ 인민군이 기관총 사수를 죽을 때까지 쏘게 기관총을 몸에 묶어놓았다.


잔교리는 60여 호 중에 경찰출신이 38명이다.
38°선이 막혔을 때 공산당이 밤에 넘어와 노략질을 하거나 사람을 해쳐서 원수를 갚으려고 학도 경찰이 되었는데 나중에 정식 경찰로 편입되었다. 한집에 3명의 경찰이 있었으며. 김일권씨는 속초, 인제, 철원의 경찰서장을 지냈다.
38°선을 정할 때 소련군이 북분리와 잔교리 사이에 정했는데 미군이 들어와 38휴게소 지나 굴다리 넘어서 정했다가 지금의 38°선으로 확정했다. 처음에는 미군이 양보 하는가 했더니 나중에 절대 양보하지 않아 지금 위치로 정해진 것이라 했다.
잔교리 앞산이 고산봉인데 6 ․ 25전쟁이 지나간 후 고물을 주우려고 올라가 보니 인공 때 산중턱에 벙커가 있었는데 철근콘크리트로 아주 두껍게 만들어져 있었다. 벙커 안이 100평은 되어 보이고 천정에는 붉은 색별을 그려놓았다.
그 벙커 안에 인민군으로 보이는 기관총 사수가 기관총이 몸에 묶여있는 체로 불쌍하게 죽어있었다. 인민군들은 이 사수에게 죽을 때까지 기관총을 쏘게 하고 후퇴한 것이다. 이 기관총사수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끝까지 남아있겠다고 하였는지, 아니면 상급자에 명령에 의한 것인지 모르는 일이니, 정말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벙커 안에는 총, 반합, 옷가지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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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슲으다!! 38선이여! 故 權德出 경우영전에서 단기4281.10.30. 잔교지서일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