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잔교리 박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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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0회 작성일 2018-03-0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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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표 (남, 80세, 현북면 잔교리)
■ 면담일 : 201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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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의 도발을 피해 북분리 백자골에 들어가 살았다.


해방이 되어 38°선이 그어지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자 북은 소련군이 와서 지키고 있어 경계선을 넘으려고 산길로 숨어서 다니는 장사꾼들이 남으로 물건을 팔러 넘어와 아군에게 잡히면 압수당했다.
당시 북에서 명태가 많이 나서 대나무로 꿰어서 팔러 오다 압수당한 것을 현재 마을회관 자리에 있던 지서에 쌓아 두었는데 꼬챙이로 명태 눈을 빼 먹다 잡혀 지서 뒤에 나무로 둘러막아 만든 영창을 살아보기도 했었다.

그때 장사꾼들은 주로 대치리에서 잔교리쪽 산으로 넘어오는 장삿길로 많이 다녔다. 경비가 점점 강화되면서 소련군과 인민군이 습격을 해와 윤석갑 순경이 다쳤다. 그래서 남쪽도 북쪽을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북쪽 인민군들이 주로 밤이면 보복을 해와 도발을 자주 당하니까 불안해서 살수 가 없어 집을 놔두고 마을을 떠나 백자골에 움막을 치고 낮이면 논밭에서 일하고 밤이면 움막에 와서 자고 하였다.



◆ 논에 가래질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총알이 날아와 총상을 입기도 했다.


북분리 백자골에는 30여 집이 있었고 현 경찰공원 자리에 부근에도 20여 집이 있었는데 잔교리 지서는 철거하고 북분리로 옮겼다. 그때 마을 청년들은 한청에 가입하여 순경들을 도와 마을을 경비했다.
잔교리는 경찰마을이라 한집에 2~3명씩 경비를 서다가 경찰이 되어 경찰서장도 나왔다. 그리고 지금 현남 휴휴암 자리는 북한 간첩선이 접선하고 돌아가는 장소였다.
그때 간첩 9명이 북한 간첩선과 접선하다가 잡혀 휴휴암 방파제에서 총살을 당했는데 그중 할머니 한분은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가 총에 맞지 않은 그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그리고 남흥덕 순경 부친은 봄에 골짜기 논에서 가래질 하다가 쉬는 시간에 불을 쬐고 있는데 총알이 날아와 맞아 다치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북쪽 기사문리도 소련군과 같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은 서로 연락하여 월남할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여자들이 주로 하였다. 낮에 일할 때는 시간을 정해서 농사일하고 오후에는 철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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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교리지서직원일동 民國30년(1948년) 10.1 〉



◆ 주문진 소돌에서 북한 쾌속정 3대가 아군 함포에 맞아 침몰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쟁이 난 줄도 몰랐다. 먼동이 틀 무렵 경찰이 땡땡땡 하고 비상종을 울렸다. 얼마 후 총소리가 몇 방나더니 동네 사람들이 보따리를 싸고 나갔다. 그때 미처 나가지 못한 경찰이 M1 총을 보리짚 더미에 던지고 우리와 같이 피란을 나가다가 북분리에서 인민군을 만났고, 중공군도 북치며 나왔지만 소련군은 보지 못했다.
남으로 피란을 나가려고했으나 앞서 인민군이 있으니 할 수 없이 북분리 백자골에가서 식구가 방 한 칸을 얻어서 살았다. 백자골에는 이미 노인들과 아이들은 피신해 와 있었고 나도 할아버지와 거기서 같이 지냈다. 할아버지들은 전쟁이로 뒤숭숭하건만 그 와중에도 쌀로 술을 담아 먹고 있었다.
아이들과 구르마(놀이기구)를 타려고 산위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니 북한 쾌속정 5대가 주문진 소돌 에서 아군 군함의 함포 사격을 맞고 2척은 가라앉았고 1척은 불이 붙었다 바로 침몰하고 나머지 2척은 북으로 도주하는 것을 보았다.



◆ 리장 선거에 지자 인민군이 되어 긴 칼을 차고 겁을 주며 리장을 찾는다.


우리 마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동네에서 리장 선거가 있었는데 서로 경쟁을 하다가 떨어지니 그중 한 사람이 홧김에 월북하였다.
6 ․ 25전쟁이 일어나자 그 자는 칼을 차고 바지 옆으로 뻘건 줄이 있는 옷을 입고 와서 마을 앞에 있던 뽕나무를 긴 칼로 휙~하고 베면서 겁을 주며 리장을 사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못 찾았는데, 그 당시 전연차의 손자에 의하면 그는 북분리 백자골에 있는 남에 집 쌀통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해 10월이 되자 국군이 북진해 들어 왔다. 경찰 김형갑과 낙권이 아버지가 피란 안간 것을 알고 북분리 백자골로 찾아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국군이 양양까지 진격했습니다.”하자 이젠 살았구나 하고 하면서 잔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국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인민군 패잔병에게 밀려 마을사람들은 오히려 북쪽으로 피란을 갔다. 그때도 노인들은 피란을 안가고 밤으로는 산으로 가서 지냈는데 인민군들은 소와 먹을 것을 내 놓으라고 협박을 하고 약탈해 갔다.
그해 겨울 또 인민군이 나온다고 피란을 가라고 한다. 그때 북한에서 내무서원들이 마을 책임자를 찾아다녔지만 다 피신하고 글을 모르는 문맹자만 남아 있어 피해는 없었다.



◆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피해자가 된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때 마을 일을 맡아서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김○○은 마을을 위해 누가 해도 해야 한다며 내가 안 나서면 죽으니 마지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니 마을사람들 모두가 나중에 국군이 들어오면 꼭 지켜주겠다고 결의했다. 그래서 김○○이 인민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국군이 진격해 와서 인민위원장을 찾았다. 그때 경찰과 동네 사람들이 이분을 강제로 인민위원장을 맡아주어서 피해 없이 살았고 증언하여 아무 탈이 없었다.
그 사람 아들은 머리가 좋아 인데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하였으나 과거 부친이 인민위원장 경력 때문에 신원보증에 걸려 불합격이 되자 나중에 지역경찰들이 신원보증을 하여 경찰이 되었으나 후에 아버지 김○○은 화병이 나서 술 마시고 죽어 마을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피해자가 된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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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 고무(苦務)를 상위(相慰)하는 바-례 광경 잔교리에서 民國3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