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수여리 이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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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1회 작성일 2018-03-0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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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남, 84세, 손양면 수여리)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고문
■ 면담일 : 2017.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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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댁 벽장 속에 조카와 같이 솜이불을 여러 겹으로 가리고 숨어있었다.


1950년 10월 1일 우리 국군이 기사문리 38°선을 돌파 양양에 입성한 후 1개월간 주민들은 전쟁의 불안한 생활을 벗어나려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북쪽 안변지역까지 피란하라고 소개령이 내리니 마을의 이장 한청단장 등 책임자들은 은밀한 곳에 숨거나 자치치안대와 같이 북쪽으로 피란하였다.
이는 앞서 국군이 먼저 북상을 하고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반격으로 미처 북으로 퇴각을 하지 못한 인민군패잔병 8개 사단병력이 1950년 11월 2일 양양으로 진입을 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도 인민군패잔병 1개 연대가 진입하여 3일간 머물다가 11월 4일 새벽에 철수하는데 초가 6칸인 우리 집은 의무소대가 주둔하고, 종형께서 한청단장을 맡고 있는 우리큰댁에는 대대본부, 이종순씨 댁에는 연대본부가 주둔했었다.
그런데 이때 큰댁에 주둔한 대대본부의 대대장이 후퇴 할 때에 나를 납치해 간다고 하는 소리를 우리 아버지가 은밀하게 듣고서 피하라고 하여, 나는 3일 날 밤에 몰래 인민군이 주둔하지 않은 하수여리에 있는 아래큰댁의 벽장 속에 조카 이흥수와 같이 솜이불을 여러 겹으로 가리고 숨어 있었다.
솜이불로 몸을 감싼 이유는 우리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방음효과를 노린 것이며 또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혹시 나의 은신처 벽장을 향해 사격 할 시 방탄용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나는 밤새도록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숨어 있는데 4일 새벽 지축을 흔드는 폭음소리가 쾅쾅쾅 세 번 울리더니 조용해졌는데 큰댁 노 아주머니께서 인민군들이 남대천을 건너 북으로 다들 떠났으니 나오라한다.
이리하여 나는 그때 인민군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슬기롭게 처신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피해나갈 수 있었다. 벽장 속에서 숨을 죽이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그날 밤은 시간이 왜 그렇게 더디 가던지 그때 아버님께서는 조상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신 은덕이라고 말씀하셨다.
새벽의 폭음이 진동한 것은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양양남대천 대교를 폭파시킨 것이었다. 2일 동안 양양에 체류한 인민군이 11월 4일 새벽 북으로 후퇴해 들어갈 당시 속초와 대진에서 인민군에게 피해를 입힌 방공애국청년단 조직원이었던 당시 우리 마을의 이장 이공수(당시22세)의 무용담(武勇談)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반공애국청년단 조직원 이공수는 23명의 대원과 같이 11월 3일 밤 속초읍 부월리에 진을 치고 인민군이 후퇴 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인민군 선발대와 교전 인민군 정규군과의 대적은 중과부적으로 몇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고성에서 대진을 지나 제진까지 후퇴하여 그곳에서 다시 인민군과 교전하고 많은 피해만 남기고 안변까지 후퇴했다가 돌아왔다고 전하였다.」



◆ 양양군정사령관 이하 관계 장병들과 국군환영 마을잔치를 성황리에 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의 기세는 꺾이고 3개월만인 9월 30일 당시 인민군이 쌀 창고로 사용하던 향교를 불 지르고 인민군은 후퇴하자 10월 1일 국군이 우리 양양을 수복했다.
당시 인공치하에서 요직에 있던 분들은 북으로 피란가고 나머지 주민들은 전과 같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치행정조직, 자치치안조직 등으로 조심스럽게 새 세상, 새 터전을 꾸려가고 있었으나 이곳은 38°선 이북지역이라 대부분의 주민들은 불안한 생활이 영속(永續)되려는 것을 염려(念慮)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시기 전 재산 몰수당하고 남한으로 월남했던 이면수 씨가 수복 귀향하여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았던 집을 수리하고 공포 속에서 생활하는 마을 주민의 심리적 내지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을 주민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마을인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의 지난날과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주민의 안녕, 단합, 화합을 위해서 국군환영대회를 열어야 한다. 는 주제로 토의하니 이면수 씨의 의견대로 국군환영연회를 개최키로 결의하고 주민 각자 부서별 담당자가 선정되었고 그때 나는 연락과 초청 안내책임을 맡았다.
시기는 기억이 암울하나 1950년 11월 20일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양군청 청사에 군정을 관할하는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남대천 다리도 끊어졌으니 나는 혼자서 남대천을 건너 군청에 자리한 사령부에 찾아가서 우리 마을의 전후 사실을 말하면서 국군환영 마을잔치를 개최하고자 하오니 참석하여 우리 마을 주민을 따뜻이 안아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사령관은 쾌히 승낙하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에 돌아오니 마을 주민은 합심하여 술을 담그고 큰 암소 한 마리도 잡는데 담당은 간성댁 이용조 할아버님이 맡았고 마을 부녀들이 동원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큰잔치가 열리게 된다.
나는 약속한 날 또 혼자서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는 군청청사로 들어가 사령관을 비롯하여 관계 장병을 우리 마을로 안내하여 국군환영마을잔치는 성황리에 끝을 내었으니 인공치하에서 조금이라도 앞서서 부역하던 사람들 모두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으며, 이후 우리 수여리 마을 주민들은 군정초기 군과 소원함이 없이 군정 속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게 되었다.



◆ 출생 5시간 된 핏덩이를 누더기로 감싸 안고 엄동의 피란길을 나서다.


1950년 12월 23일이다. 당시 수여리 한청부단장 이영택이 새벽 일찍부터 마을을 순회하면서 큰 소리로“모두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빨리 남쪽묵호 이남으로 피란 떠나라.”고 소란이다. 그러지 않아도 종형 이종범 한청단장은 화둥부리(황소) 등에 쌀자루 두개를 얹고서 몇 일전에 혼자 떠났고 이어 큰어머니는 나머지 가족인 자부, 어린 손자 손녀 6명을 대리고12월 22일 떠난 후다.
우리도 피란 준비하는데 양양읍에서 우리 일가의 사돈인 이종철 장모께서 분만시각이 급박한 자부와 세 살 박이 손자를 대리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우리 아버지께서 난감해 하시면서도 침착하게 방에 불을 뜨끈뜨끈하게 지펴 방을 달궈놓고서 방바닥에 볏짚을 깔고 분만 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집을 비우고 떠나라고 국군이 돌아다닌다.
할 수 없어서 우리 아버지께서 지게에 멍석과 집단을 지고 수여리 서녘말 서낭재 바람으개 대나무밭 옆에 아늑하게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식구와 분만 진통이 시작된 사돈네 식구까지 모두 대리고 그곳에 이르니 추위는 말 할 수 없으며 앞산에서 여우가 짖는 소리 시끄러운데 아버지께서는 내 어린 동생들이 놀랠까봐 개가 짓는다고 하신다.
이러한 상황인데 밤 10시경 임부는 그 통증이 어떠하랴? 죽는다고 신음하니“이러다간 이렇게 추운 밤중에 잘못하면 여기서 장사를 치르게 되겠구나.”하시면서 아버지께서“사돈네는 나와 같이 집으로 들어갑시다.” 하시니 우리 식구만 산에 남고 사돈네는 뜨끈뜨끈하게 달궈 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 식구는 눕지도 못하고 추워서 웅크리고 앉아서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는데 얼마 지난 후에 아버지께서 오셔서“아들을 순산했다.” 면서“할 수 없다. 우리도 들어가자.”하여 집에 들어오니 어느새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깨어나니 1950년 12월 24일 아침이다.
준철네 식구는 벌써 남쪽으로 떠났다한다. 상상해 보라! 조산원도 없이 난리 중 태어난 핏덩이 아이와 미역국도 재대로 끓여 먹지도 못하고 태어난 지 다섯 사간도 되지 않은 핏덩이를 누더기로 감싸 안고 살을 에는 엄동의 피란길을 나섰다.
여기서 이제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 자체의 행위가 아니라. 조물주의 조화에 의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리라.
이 세상에 태어난 핏덩이가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엄동설한에 전쟁의 참화 피란 속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거짓에 가까운 신비스러운 비화가 아니겠는가. 이제 그는 의젓한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우리 양양의 재건을 위해 심신을 다 바치고 늙어가는 양양인 안준덕 이다.



◆ 잿더미가 된 집으로 되 돌아와 땅굴을 파기 시작하였다.


1950년 12월 24일 양양지역은 유엔군 작전명령에 의하여 가옥은 모두 불태워졌다. 손양면은 7호선 국도변 마을은 전소되었으나 날이 저물어지자 하수여리, 학포리 등 동해안 쪽 마을에는 가옥을 소각하는 군인들이 미치지 못하고 황급하게 후퇴하는 바람에 그쪽 마을들은 불태워지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불에 타는 집을 뒤로하고 그날 저녁 어두운데 소 등의 질매에 쌀 한 자루 이불을 실고 조갱이골을 지나 조선시대 도로였던 진손이 쪽으로 나가다가 밤이 어두워 더 나가지 못하고 길가의 무덤에 어린소나무인 보두기를 찍어다 바람막이를 하고 밤을 지샜다.

바람은 없었으나 밤길에 하룻밤 지새는 것은 정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늙으신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 넷 우리 식구는 남하 할 수 없어서 잿더미가 된 집으로 되 돌아와 땅굴을 파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께서 하수여리 아래큰댁의 상황을 보러 가셨다 오시더니“아래 큰댁은 타지 않았다.”하시면서 큰댁으로 가자고 하여 그날(1950년 12월25일)부터 우리 식구가 기거 할 굴이 다 될 때까지 큰댁에서 지내는데 눈이 계속 내리기 시작한다.
이 시기 북에서 내려오는 피란민들은 남대천 양양대교가 끊어졌으니 남대천을 건너는 요지(要地)는 바로 지금의 연어양식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하천의 폭은 넓으나 여울져 가장 얕으며 옛 철로와 연결 강릉쪽으로 나가는 이 지름길을 지나서 남으로 내려가려는 피란민들은 우리 아래큰댁 집 길목을 꼭 지나쳐야만 했다.



◆ 마당의 바지랑대에 태극기를 달았다가 인민군에게 화를 당했다.


수요일인 1951년 1월 10일 눈이 계속 내리는 날의 일이다.
오후 5시경 나는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려고 차비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드니“집 주인님 계십니까?”소리치므로 나는 재빨리 방 출입문 창호지 문살에 붙여놓은 조그마한 유리조각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국방색 코드를 입은 군인 7명이 서 있으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피하게 하고 밖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니 마당에서 눈을 맞으면서 하는 말이“우리는 인민군 척후병이요.”
우리는 후퇴하지 않고 인제의 깊은 산골에서 은신하면서 작전 임무를 수행다가 이제 다시 진격하게 되어 척후병으로서 선발대 역할을 하는 중이다. 라고 하고는 남대천 쪽 버덩말로 간다.
그때 내가 내다보니 말을 하는 군인은 장교요 겉 요대에 권총을 찼으며 나머지 병사는 장총과 따발총을 코드 속에 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떠난 지 10여분 지났을까? 200m이내의 지점에 있는 형수 벌되는 일가 댁 부인인 거릿댁 아주머니가 눈이 퍼 붓는 길을 헤치고 달려 나와 울면서 아버지를 찾으면서 방금 인민군들이 남편(이종상 당시 47세)을 권총으로 머리를 쏴 죽이고 갔다고 함으로, 우리 아버지는 황급히 그 아주머니와 함께 그 집에 가서 시신을 염하고 그 즉시로 뒷산에 눈을 치고 매장하고서 밤늦게 돌아오셨다.
화를 당한 형님께서는 눈 내리는 마당의 바지랑대 끝에 태극기를 게양해 놓고 사랑방에 앉아 경서를 읽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소여물을 끓이는데 인민군 척후병이 나타나서 형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한다.
“우리는 인민군인데 이집은 반동의 집이로군, 저 태극기를 내려 버리시오.”라고 하니 형님께서는“나는 이승만 박사와는 종친 간으로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놈들아 내 앞에서 살아져라.”라고 소리치니 악에 바친 인민군 장교가 형님을 끌러 내어 마당 고질까리 옆에 꾸러 앉히고 곧바로 권총 한발로 머리를 쏴 사살하고 남대천을 건너갔다.
이종상의 부인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며칠 전부터 실성해 하시면서 경서만 읽는다고 하셨다. 후에 인민군 7명은 형님을 사살하고는 곧바로 남대천을 건거 낙산사 입구 강현면 주청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 신고산유격대원들이 강현면 주청리에서 인민군 척후병 7명을 소탕하다.


당시 신고산유격대 소대장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1951년 1월 10일 밤 인민군 척후병 7명이 주청리에 당도하니 주청리의 여맹위원장, 농맹위원장 등 북한 노동당 세포요원들이 모여들어 대환영잔치가 벌어진다. 이웃마을까지 연락하여 각자 집에 담궈 놓은 막걸리단지며 안주감 마련 급히 찹쌀떡을 안반에 치는 등 야단법석으로 음식과 주안을 마련하고 여맹위원장 집에서 환영 만찬회가 열리니 이제 그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한창 주흥이 무르익을 참에 북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36명의 신고산유격대원들이 그곳에 당도하여 그 상황을 감지하고 그자들을 소탕(掃蕩)할 준비를 갖추고 주흥이 무르익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동무들!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네까? 조국전쟁과정에서 이렇게 동무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반갑습네다. 동무들 환영합네다.”하면서 악수를하면서 적기가를 같이 부르며 포옹도 하고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깔 때, 지휘자의 신호에 의하여 인민군의 개인화기도 탈취 제압하고 그 방에서 놀던 인민군 척후병 7병을 비롯하여 그 지역 노동당 세포요원들을 사살하는 쾌거를 올리고 신고산유격대 36명 전원이 그 다음날인 1월 11일 오후 중에 남대천을 건너 우리가 기거하고 있는 수여리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이날 오후에 노병례[(盧炳禮) 1932년 양양농민조합사건으로 3년간의 형을 받고 함흥형무소 구금]씨의 안내를 받으면서 수십 명의 피란민 대열선두와 후미에서 신고산유격대원들이 피란민들을 호위하면서 남대천을 건너 우리가 기거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피란민과 유격대원 일부는 잠시 쉬었다가 남으로 떠나고 노병례씨와 나모지 유격대원들은 내가 기거하고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가 1월 12일 아침에 남쪽으로 떠났다.
그때 신고산유격대 대장이라고 하는 분이 누런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수여리 이준재 씨를 만나려한다.’고 하므로 내가 그분은 바로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서 내가 아버지를 모셔오자 유격대 대장이 들고 있던 편지를 우리 아버지께 드리면서 하는 말이“이 편지는 우리가 통천을 지나올 때 강용길 동지가 편지를 써 주면서 이분이 나의 장인이시니 양양을 지나갈 때 꼭 찾아 드리라고 부탁받은 것입니다.”라면서 우리 아버지께 편지를 전하고 인사를 하고난 다음 남쪽으로 떠났다. 그것이 나로서는 작은 매형이 아버지께 전한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말았다.


<편지내용>
「안부를 전하고 묻는 말, 전쟁 기간 중 몸을 보존하시라는 당부, 3개월
후면 국군이 다시 진격 할 것이니 그때에 재회할 것이다.」



◆ 67년 전의 격전장을 찾은신고산유격대장손홍구의 증언을 듣다.


당시 유격대장 손홍구(남, 88세, 서울시 통일로 78-가길 13-14)는 지난 2017년 12월 11일 이곳 강현면 주청리에 찾아와 감회가 새롭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그는“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면에서 공산당을 반대 황동 중 인민군에 입대영장을 7회나 받았으나 6회는 군에서 반대하여 안 나갔고 1회는 평양까지 갔다가 도중에 도망하여왔다.”고 했다. 그 후 피신 중 6 ․ 25전쟁이 일어나 피신생활 5개월 만에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입성하자 산에서 내려와 자치대를 조직하였다. 그 때 소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중략>
"나는 자치대 대원 7명과 선발대로 남하 중 낙산사 앞 동네에 인민군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 때 우리는 남진하는 인민군 유격대라고 하면서 민간인을 동네에 있던 인민군을 보자고 연락하니 인민군 한명이 나와 악수를 한 후 대대장과 소대장하고 같이 회합을 하자고 한 후 인민군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는 대원중 칼빈 소총 소지자를 4인 선발하여 모두 총을 장진시키고 내가 인민군한테 말을 시키면서 손을 들면 사격하라고 약속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아랫방과 윗방사이에 칸막이에 문짝이 4장 있는 것을 떼어내고 인민군들은 아랫방에 앉아 있고 우리는 문턱에 걸터앉아 동무들 소속이 어디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고 우리는 대대장, 소대장 2소대장 3소대장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자 그 인민군들은 오늘 인민군유격대[위장을 한 HID]대원이 오늘 온다는 연락을 받고 그들이 막걸리를 해 달라고 시키고 갔는데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돼지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고하여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고 한창 여흥이 고조되어가고 있을 무렵 나는 재빨리 손으로 신호를 하여 인민군 8명을 사살하고 따발총 6정, 장총 3정을 노획하였다.라고 하였는데 67년 전에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여 기록한 내용과 다소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같은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 창고와 마구간에서 공부하고, 손양면민 자력으로 국민학교를 재건축했다.


1950년 12월 24일 작전상 부득이 모든 가옥과 관청이 모두 불태워 질때 손양학교도 잿더미로 변했다.
전쟁 중 학구열에 불타는 주민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집이 타지않고 남아 있는 주리와 학포리 민가의 창고와 마굿간을 빌려 교실로 이용하여 교육시키도록 하고 이어 군부의 지원이 있어 잿더미가 된 손양학교의 교정을 정리하고 군 천막을 지원받아 교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시기 타면의 학교들은 유엔군이 지원하는 자재로써 육군공병대의 직접지원 하에 복도가 운동장 쪽으로 설계된 교사를 재건하여 학교마다 교실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손양학교만은 그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이유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손양면민들은 학교건축을 위한 자치기성회를 조직하고서 손양면민의 총의(總意)에 의하여 총동원되어 직접 면민의 손으로 학교를 건축한다고 의견을 정하고 부소치리, 삽존리, 주리, 상왕도리 등지의 산에서 재목으로 쓸 만한 소나무를 베어 작동(作動) 재재하여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외벽 내벽 모두 외(椳)를 엮고 익인 흙을 맨손으로 발라 벽을 만들고 이렇게 면민의 합심으로 7개 교실로 된 손양국민학교 교사가 재건되었다.
다만 지붕의 루핑(roofing)과 교실바닥의 마루는 미송판자 그리고 창호는 유리 대용인 가는 철사 망 한쪽 면에 얇은 비닐 같이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과 같은 재료를 입힌 것은 군부에서 지원하였었다. 이 시기 손양면장은 밀양리의 윤현중씨가 아니면 양혈리의 고연재씨 이였을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았던 전쟁과 군정(軍政) 속에서 변혁(變革) 애향(愛鄕) 교육열은 면면(綿綿)이 이어져 오늘의 양양이 있게 하였으리라!
그래서 새로운 도시브랜드“고맙다! 양양”이 탄생하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