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동호리 이흥만

페이지 정보

조회 1,198회 작성일 2018-03-07 16:26

본문

■ 이흥만 (남, 79세, 손양면 동호리)
■ 면담일 : 2015. 5. 12


200.jpg



◆ 길가에 누더기를 덮고 누어있던 노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13살 때 손양인민학교 3학년을 다녔는데 그 때 6 ․ 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남쪽으로 처 나갈 때까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1 ․ 4후퇴 때인 겨울에 국군을 따라 피란을 나가는데 길거리에는 시체가 많아 피하면서 발을 옮기며 걸어 피란을 나갔다. 때로는 노인이 가지 못하고 누더기를 덮고 누워있는 모습도 기억에 생생하다.
첫째 날은 지경리 현 동해막국수 집 부근에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고 주문진 큰 냇가를 지날 때 비행기에서 기관총으로 사격을 하여 사람들이 막 쓸어졌다. 그때 우리 동네 이상덕씨 모친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는데 그 어디 가서 항의도 하지 못하고 산에 묻었다.



◆ 그때 버려졌던 애기가 지금 속초에서 살고 있다.


연곡 쯤 인데 하늘엔 검은 비행기였고 쌩쌩 날아다니고 피란길가 옆으로 소이탄이 떨어졌다. 이웃집이 애기를 버리고 가는 것을 우리 누나가 업고 갔다. 나는 이불을 지고 따라가다 누나가 없어 찾아보니 애기가 울고있었는데 가보니 폭탄이 떨어지면서 흙속에 묻혀 있었다.
그렇게 죽는 건지 사는 건지를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걸어서 초당에 도착하니 마침 집 주인이 피란 떠난 빈 집에서 1박을 했다. 그때 버려졌던 애기는 전인호로 지금 까지 속초에 살고 있다. 그 후 삼척까지 피란을 나가서 1개월쯤 지나자 쌀도 떨어져 남의 집에 다니며 동냥을 하며 살았다.



◆ 굴속은 인민군도 피하고 함포사격에도 안전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인민군을 따라 양양에 왔다. 그때 같이 들어 온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동호리 까지 와서 살짝 숨어 마을에서 떨어진 뒷산에 굴을 파고 살았다. 이곳은 인민군도 피하고 함포사격 때도 소리만 요란했지 안전했다. 피란민들은 하얀 보자기를 가지고 다니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몸을 숨겼다.

북한에서 어머니는 교회를 믿는다고 내무서에 잡혀가서 많은 고초를 겪었기에, 더는 인민군을 따라가지 않고 다섯 가구(이흥만, 전인영, 전인호, 전○○, 홍○○)가 굴속에서 함께 살았다.

밥은 집에 가서 해 먹고 대부분 굴속에서 살았다. 마을 고개 넘어 에는 7집이 살고 있었지만 그중 3집만 남았는데 그때 불타지 않은 집은 최천명, 윤해병, ○○○ 집이었다.
국군이 들어오자 어머니와 교회 장로였던 장기주는 태극기를 그려 굴 속에서 나오며 만세를 불렀다. 국군은 불에 타지 않은 집에 주둔하니 밥도 먹을 수 있고 누룽지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때 내 나이는 14살이었는데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 최고로 좋았다.
이른 봄 국군과 같이 산에 갔는데 인민군이 산에 숨어 있다가 총을 사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는데 한참 후에 보니 7명중 3명이 충에 맞아 사망하였는데 한 군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 시멘트 푸대 종이에 태극기를 그려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얼마 후 국군이 또 남쪽으로 후퇴할 때 우리는 안 따라가고 굴속에 숨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동네인지 모르지만 국군을 좋아한 사람들을 누가 인민군에게 고자질하여 사람들을 줄로 묶어 끌고 바닷가 솔밭으로 가서 구덩이를 파게하고 기관총으로 사살했다고 한다. 우리는 무서워 굴속에서 숨죽이며 살았다.
인민군들은 우리 동네에 와서는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형이 인민군 장교였는데 두 번이나 자기 부모님께 인사하고 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인민군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모르고 남쪽으로 가더니 얼마 후 국군에게 쫓기어 또 후퇴해 북으로 가버렸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동네가 비어있게 된 후 국군이 들어올 때 어머니와 장기주 장로님은 시멘트 종이에 태극기를 그려서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형의 가족은 그 후 서울 어디에 가서 산다고 하는데 이 고장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 동호리 앞바다에 좌초된 군함


피란 갔다 돌아오니 동호리 남쪽 끝 앞바다에 시커먼 큰 군함이 바닷가 모래 불에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무서워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시간이 흘러 반년이 흘렀을까? 가보니 군함 밑에 구멍이 났는데 그리로 들어가보니 칸칸마다 총과 총알 폭탄 대포가 있고 별 이상한 것들이 있었다.
대포는 머리를 넣어 봐도 들어갈 큰 대포도 있다. 부처님도 있고 식당에는 그릇들도 많았다. 군함이 처음엔 육지에 닿아있었는데 홍수가 지면서 떠밀려 바다에 떠 있었다. 우리는 그 속의 구리 파이프를 뜯어다 동네에 도랑에 배수구를 만들려고 파이프를 놓고 쓰니 좋았다. 그러다 고철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친구들인 이흥만, 장기성, 장세환이 뜯어서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 군함 속에 부처님으로 쌀 5가마니 값을 받았다.


처음에 구리파이프를 뜯어서 속초 고물상에 가지고 갔다. 차가 없어 걸어서 가거나 운이 좋으면 군용차를 얻어 타고 가기도 했으며, 처음 쌀 1말값을 처 주었는데, 몇 번 그렇게 팔러 다니다 요령이 생겨 망치, 쇠톱, 스패너 등 공구를 사서 이용하니 더 많은 고물을 뜯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돈이 생기니 하고 싶었지만 헤엄을 쳐 들어가야 하고 또 잠수를 해서 군함 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고 또 무서워서 용기를 내서 하지 못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여 1군사령부에 근무할 때 잠수병으로 뽑혀 양평 다리 놓을 때 철 와이어를 메고 강을 건너는 일을 했을 정도로 물에는 단련되어 있었다.
다음은 주문진에도 가지고 가서 팔았다. 파도가 심하여 죽을 뻔 한때도 있었으며, 그러던 중 군함 속에 부처님이 있어 그것을 꺼내 속초에 가서 팔았는데, 그 다음날 고철을 뜯어 팔러가니 고물상 주인이 부르더니 어제 부처님 값을 더 처 주겠다며 쌀 5가마니 값을 준다. 기분이 아주 좋아 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금이 아니면 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