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수여리 이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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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0회 작성일 2018-03-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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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희 (남, 80세, 손양면 수여리)
■ 면담일 : 201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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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5월에 학교 앞 아카시아나무 숲에 탱크와 대포도 숨겨 놓았다.


1950년 6 ․ 25한국전쟁 당시 나는 14살 이였고 양양 초급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6월 25일 10시경 동네 인민위원회장이 우리 군대가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주문진까지 진격했다고 동네에 알렸다. 그때 동네에는 부인회, 농민회 등 북한 단체들이 있었다.
1950년 5월에 이미 학교 앞 아카시아나무 숲에 탱크를 숨겨 놓았고 대포도 마차로 싣고 와서 숨겨놓았다. 인민군에게 물어보니“학생동무는 알필요가 없어!”하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인민군이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분대장은 어깨에 빨간색 3줄이 있었다. 파란색 견장은 국방경비대이고 정규군은 빨간색견장을 하였는데 전쟁 발발 후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양양에는 38경비대 3대대와 4대대가 주둔해 있었고 38°선남쪽은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 미군 폭격으로 양양인민학교 뒤 밤나무 밑에서 공부했다.


1950년 전쟁 중에도 학교 공부는 9월까지 하였다. 양양초급중학교에 미군 폭격이 있어서 양양인민학교 뒤 밤나무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추석이 가까울 때 각 면으로 분산하여 다녔는데 나는 손양으로 다녔고 조산리 아이들도 같이 며칠간 공부하다가 현북중학교가 폭격에 맞아 학생들이 많이 죽어 선생님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집에서 농사일을 하였고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도하고 벼추수도 도와드려 농사짓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인공 때는 소나무를 못 베게 보호하여 동네 할아버지가 송아리(소나무 가지)를 따 가지고 지고 오는 것을 보고 노인을 영창에 못 보내니 그 아들을 영창에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 함포사격이 심해지자 굴을 파고 온돌을 놓고 1년 동안 살았다.


북한이 쫓겨 가고 국군이 들어오니 북한의 인민위원장, 부인회장 등 간부들을 잡아가고 소도 끌어다 잡아먹는 일도 있었고, 집안 아저씨는 인공 때 교사를 하였어도 북한을 싫어하여 울진까지 피란을 갔다 왔다.
그러나 그는 학도병들과 치안대들과 같이 어울려져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 10여명과 북으로 피란을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밤에 군인들이 소를 끌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하여 쌀을 모아 소주인에게 소 1마리에 쌀 5말 정도를 걷어서 주기도 했었다.
당시 예고도 없이 무력으로 남침을 당했던 국군들은 이 동네가 공산치하의 지역이라 이같이 못된 짓을 한 것으로 생각되나 38°선 이북지역에 양민들의 소를 잡아가는 일은 전후 피치 못할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함포사격이 심해지면 학포 산골짜기에 들어가 2일 동안 피란하였다가 함포사격이 점점 심해져 집에서는 살 수 없어 굴을 파고 온돌을 놓고 1년 동안 살았다. 1950년 말 온 동네를 국군이 불을 질러 집 탄 자리를 쓸어내고 토담집을 짓고 살았으며, 전쟁을 해도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1951년 3월 국군이 북진해 와 짐꾼으로 포탄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때 16~60세 까지는 전투를 하는 지역에 가서 포탄, 쌀 등 물건을 지게로 져나르는 일에 동원되어 고성 어디인지는 모르나 짐꾼으로 15일 동안 산봉우리를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