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금강리 이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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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44회 작성일 2018-03-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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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형 (남, 86세, 손양면 금강리)
전 양양군 노인회장
■ 면담일 : 201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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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이 되었다.


양양국민학교 6학년 때 해방이 되고 이듬해인 1946년 졸업하고 양양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닌 후 고급중학교 3학년 졸업하고 난 다음부터는 매일 점심을 싸가지고 학교에 나가서 군사훈련 받았는데 당시 내 나이가 19세였다.
1949년 8월에 인민군에 입대하여 원산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후 간부후보학교 입교하여 2주간 교육 받고 분대장인 병장계급을 받고 간성에 배치되면서 파란색 견장을 받았다.
군에는 외무성 군인과 내무성 군인이 있는데 내무성 군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국내 치안유지를 담당하고 외무성 군인은 외부에서 침입해 오는 적군을 막는 임무를 갖는다. 또한 내무성 군인의 복장은 바지에 파랑색 줄이 2개가 있고 외무성 군인은 빨간색 줄이 2개있으며 모자도 같은색의 줄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후 나는 중대장으로부터 4분대장으로 임명 되어 간성에 배치되고 2일후 양구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20여명이 함께 걸어서 점심은 마을에 들러 부인회에서 해주는 밥을 먹어가며 2일만에 도착했다.



◆ 영어를 배웠다고 포로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20일 후 황해도 곡산에 배치되니 학교 운동장에 국방군과 미군의 포로들이 쇠고랑이 채워져 약 300명이 모여 있었는데 포로들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쇠고랑을 풀어주었는데 도망가는 것으로 오인되어 총을 발사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나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포로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져 연대본부로 들어오라는 명이 내려왔다. 연대본부는 원산 위에 있는 덕원으로 250리길이다.
대원 40명이 같이 떠났는데 3~4일간 잠도 제대로 못자고 미군 비행기폭격 때문에 밤에만 산길로 걸어서 원산에 도착하니 가는 중에 거의 다도망가고 몇 명 남지 않았다. 중간에 취사는 마을에 가면 여성동맹이 위원들이 나와 해주었고 없는 마을에서는 굶었다.
그래도 남은 대원들은 가는 도중에 과수원에서 배도 따먹으면서 안변에 도착하니 날이 밝았는데, 사방에서 패잔병들은 다 모였는데 계급장도 없는 상태이고 지휘자라는 사람이 산에 쌓아두었던 총을 내어주고 안변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때 인민군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지휘자는 있었지만 계급도 달지 않았다.



◆ 패잔병을 모아놓고 총을 주는데 총알은 주지 않는다.


9월 17일 경인데 배에서 함포 사격을 하여 산천에 드르릉 드르릉하고 울렸다. 부대는 전선을 다시 평남 양덕으로 이동하는데 배고프고 힘도 없어 총도 버리고 그냥 따라갔는데 사단은 모르고 제4연대라고 했다.
제4연대 집결지에 도착하니 400명이 모여야 하는데 이동 중에 다 도망가고 100여명만 모였다. 저녁때가 되자 제방 둑에 나가니 연대장을 체포해 왔다고 하는데 눈을 가리고 있다.

인민재판을 하는데 정치보위부원이 죄명 발표하는데, 도망갔다는 죄명으로 어둑할 때 총살을 해 버렸는데 고향은 강원도 속초사람인 김○○로 23세라고 했고, 같이 잡혀온 여자 위생병 2명은 경고조치하고 풀어주었다.
나는 정신이 앗 찔 하여 도망갈 생각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해산! 하는 구령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북쪽으로 걸어갔다. 평안북도 성천(成川)까지 가서 패잔병을 모아놓고 총을 또 나누어주는데 총알도 주지 않는다.
비행기가 폭탄을 퍼부으니 앞에 가던 인민군이 막 죽어나간다.



◆“고향이 어디여? 보모님이 얼마나 기다리겠어.”하니 눈물이 울컥 난다.


계속되는 비행기의 공습에 정신이 없고 귀가 멍멍하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살기위해 모두 산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폭격이 뜸해지고 산에서 내려와 어딘지도 모르는 논에 벼를 베지 못해 그냥 있어 그걸 훑어서 비벼서 먹었다. 낮에는 낙엽을 긁어 덮고 숨고 저녁이면 산으로 걷는데 토끼길을 따라 가서 민가를 찾아 들어가니 노인이 혼자 있었다.
그 노인은“고향이 어디여? 보모님이 얼마나 기다리겠어.”하니 눈물이 울컥 난다. 반갑게 맞아주며 이 옷으로는 못가니 인민군 복을 벗기고 자기 옷인 명주 적삼을 준다. 노인의 옷을 입고 나가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이미 민간인 옷을 입고 나온 사람이 수십 명이다.



◆ 귀가증명서, 한청 귀가증명서, 인민군 귀순증명서


서로 고향을 물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산길을 걷다가 산에서 내려와 넓은 도로를 가다가 국군 헌병에게 잡혔다. 국군 주둔지에 가니 우리뿐만 아니라 잡혀온 사람이 몇 백 명이 되었고 개별로 신상과 증명서를 조사한다.
어쩌나, 나는 증명 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던 참에 눈치를 보니 어느 한사람이 육군 대령이 해준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나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에게 같이 일했다고 해 달라고 사정을 하자 그 사람이 그러마라고 했다.

증명서는‘귀가 증명서’라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한청 귀가증명서’어떤 사람은‘인민군 귀순증명서’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사람 뒤에 바짝 붙어 위기를 면했다. 그 사람은 황해도 사람인데 그 집까지 같이 가니 부모님이 아주 반겨주었다. 그 사람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고 학도병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리저리 다니다가 그 집에서 해주는 강냉이밥을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그 귀가 증명서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니 선 듯 내주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고향집으로 가기위해 잘 모르는 길을 혼자 찾아가야할 판인데 그렇다고 무작정 큰길로는 갈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도로로는 가지도 못하고 주로 산길을 이용해서 걸었는데도 그만한청(한국청년단)에 잡혔다. 나는 귀가 증명서를 보여주니“너 수상해!
증명서는 황해도인데 왜 남쪽 여기까지 온 거야!”하며 윽박지르며 때린다. 나는 구구절절이 사정사정하여 겨우 풀려나 경기도 이천까지 왔다.



◆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오다.


다시 조금은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길을 택해 내금강 쪽으로 방향을 잡아 10월 7~8일경에 강원도 고성 현내면 모정리에 도착하여 구장 집을 찾아 들어갔다. 구장 집은 노인 부부가 살고 있는데 우리 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큰 걱정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 잠시 묵었는데 아직도 위험하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몇 일을 더 지나고나니 구장이 현내면 치안대에 가서 인민군 귀가 증명서를 해다 주었다. 먼저 받았던 증명서는 귀가 다 닳고 삭아 없어졌다.
10시에 출발하여 간성에 오는데 산에서 군인 2명이 내려오는데 다행히 그중 1명이 당숙이다. 셋이 만나 걸어서 간성읍 군인(HID)부대에 가니 양양사람인 이복길씨가 문관으로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거지같은 행색을 한 나에게 민간인 신발과 그리고 옷도 갈아입힌 다음 부대에서 주는 점심밥을 잘 먹고는 다시 양양으로 걸어서 1950년 12월 18일 오후 4시경 고향인 손양면 송현리에 돌아왔다.



◆ 남한에서는 학생이 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학교에 다니려고 학교에 가니 강진천 이라는 분이 교장이셨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나에게 2학년에 입학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후배들과 같이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하여 남한에서의 학생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