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림리 이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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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65회 작성일 2018-03-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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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영 (남, 87세, 서면 서림리)
■ 면담일 : 2017.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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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천 배낭골에서 3달간 숨어 살았다.


서림리는 38°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마을인데 나는 8․15 해방이 되고 20세가 되기까지 아버지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며, 이때 형님은 국군 경비대에서 교통호를 파는 작업도 하고 경비대 초소에 실탄과 밥을 운반해 주는 일을 했다.
나는 1950년 6월 1일 지인의 소개로 영 넘어 횡성에 있는 횡성농업중학교에 입학하여 겨우 25일 다니고 있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고 27일인지 28일인지 그맘때 벌써 인민군들이 횡성까지 내려오자 학교가 폐쇄되어 보따리를 싸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인민군들이 이미 제천까지 나갔다고 하여 미처 피란을 못 나간 사람들은 인민군 뒤로 따라가야 되는 판국이라 우리가족과 일부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나갈 수가 없게 되자 나는 국군이 진격해 올 때까지 갈천리 구룡령에서 제일 큰 배낭골 이라는 골짜기에 산판을 하던 움막 같은데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3달간 숨어서 살았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다 잡혀갔지만 나는 작은어머니가 날라다 주는 감자를 먹으면서 지낼 수 있었는데, 그때 만약 숨어살지 않았으면 필시 인민군대에 끌려 나갔을 것이다. 얼마 후에 국군이 들어온 다고하여 갈천으로 내려가니, 자동차를 타고 들어온 국군이 나를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총을 겨누었다. 그들은 내가 빡빡 머리이기 때문에 인민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인민군이 아니고 학생입니다. 하고 손을 들고 나가니 국군이 같은 동네 친구인 안익순과 함께 짐꾼을 하라고 하면서 쌀 4말을 지고 양양까지 내려갔으나 부대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이 민간인은 싹 보내라고 하여 군인들한테 짐을 인계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는 또 국군들에게 짐꾼으로 잡혀 갈 것 같아 차 소리만 나면 큰길로 다니지 않았다. 그때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안익순 이라는 친구는 동네에서 2~3년을 더 살다가 가족들과 남쪽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 피란민들이 인민군에게 밀려 고성까지 피란을 갔다 왔다.


당시 강릉에 약 5만 여명이 집결되어 있던 국군은 차를 타고 북진했지만 인민군은 산속으로 걸어서 후퇴하니 인민군이 국군보다 뒤떨어졌다.
그래서 피란민들은 인민군에게 밀려 통천에서 고성까지 피란을 갔다가 죽다가 살아오기도 했다.
당시 인민군들은 큰길보다는 38°선 이북지역의 태백산맥줄기를 따라 산속에서 북으로 후퇴하자 미 해병대가 통천에 상륙하여 반격하자 인민군들은 회양으로 넘어가 재정비했다가 가을에 또 나왔다고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과 국군이 반격하자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하며 도주 할 무렵 인민군 패잔병들이 서림동네를 들이닥쳐 이 동네 사람들이 지난 6 ․ 25남침 때 피란을 나간 사람들의 논에 벼까지 몽땅 털어서 저장해놓은 것을 약탈하며 뒷산으로 도망가려는 것을 총으로 무장한 동네 한청대원들이 격퇴시켰다, 당시 이 지역에서 주둔했던 8사단 기갑연대에서 사용하다가 고장으로서 있던 반 장갑차 책임자로 있던 일등중사가 기관포로 패잔병들에게 사격을 하자 인민군들은 아군주력부대가 있는 줄 알고 도망가기가 바빴다.
그때 한청 경비대원들은 국군이 인민군들과 전쟁기간 중에 인민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노획하여 총과 탄약을 땅에 묻어놓은 것을 파내서 무장을 했고 그 당시 한청대원들은 남한과 북한의 모든 총을 다 사용할 줄 알았다.



◆ 이갑영은 일본군 출신으로 한청대원을 지휘한 훌륭한 애국자였다.


당시 서림리에 살고 있던 이갑영이 총책임자가 되어 신서면 5개 마을인 서림리, 황이리, 갈천리, 명개리, 조개리의 청장년들을 모아 소대장과 분대장을 임명 책임자를 정하고 경비대를 조직 도주하는 인민군들과 여러번의 교전을 통하여 수 십여 명의 패잔병들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양하다.
이때 우리가 사살한 인민군들을 동네에서 30~40이 넘은 대원들과 노인들이 즉시 개울가 모래 불에 얼른 묻어 흔적을 지워버렸는데, 이는 나중에 인민군들이 알게 되면 이 동네사람들이 몽땅 화를 입을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한청경비대 책임자 이갑영은 40세 정도로 1945년 4월에 일본군에 입대하여 해방될 때 북해도에서 돌아온 사람으로 그가 책임자가 되어 조직한 한청대원을 지휘하면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시키고 점호까지 취하면서 군기가 든 조직으로 만들었기에 인민군들을 소탕하는데 큰 성과를 얻게 된것이었다.
또한 이갑영은 15여명의 대원으로 시작해 약 50여명 넘는 인원으로 성장하게 되자 자신을 중대장으로 자처하며 인민군에게 많은 병력을 보유한 것처럼 기만술을 써서 인민군들을 속여 대원들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그가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가 버글버글한 옷을 벗어 이를 털어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픔에 젖어있는 그에게 마을사람들이 모두 함께 애도를 표하며 위로하기도 했으며, 이갑영이도 후에 우리 건너 집에서 돌아가셨지만 그는 조국과 국민을 위해 애를 많이 쓰신 훌륭한 애국자였다.



◆ 군번도 없고 명예도 없었지만 국민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싸웠다.


앞서 국군과 미군들이 반격할 때 인민군들이 통천에서 미군해병대에 막혀 회양으로 도주하였다가 다른 인민군부대와 함께 재정비하여 다시 산을 타고 내려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갈터를 점령했다.
당시 기갑연대는 그 지형을 잘 아는 지역경비대 분대장을 한명씩 국군 수색조에 편성하여 함께 수색정찰을 수행하며 적과 오랜 교전 끝에 엄청난 전쟁을 겪으며 인민군이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싣고 다니던 말과 각종 장비들을 노획하여 기갑연대가 큰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우리 민간인은 그 전투에서 싸우다가 며칠도 되지 않아 죽을 것같았고 그렇게 죽으면 헛 죽음이 될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더라도 당시 우리들은 군번도 없고 명예도 없었지만 그저 국민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분만으로 인민군과 치열한 전쟁을 한 것이다.



◆ 캄캄한 밤이 되자 군인들이 깔아놓은 전선줄에 불을 붙여가며 영을 넘었다.


그해 12월이 되자 9사단은 인민군에게 밀려 구룡령 방면으로 후퇴를 반복하며 진부까지 전투를 하며 후퇴하였고, 기갑연대는 당시 동해안에 포진한 미 함정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해안선 지역인 양양을 경유하여 남으로 후퇴 하였다.
1 ․ 4후퇴가 시작되자 군인들은 동네 주민들의 집까지 불태우고 난 다음 피란을 가도록하여 우리 식구는 소를 끌고 벽실령을 넘다가 영이 험하고 길이 미끄러워 끌고 가던 소를 버리고 피란을 나갔다. 캄캄한 밤이 되어앞이 안보이자 군인들이 깔아놓은 전선줄에 불을 붙여가며 좁은 길을 따라 어성전을 경유 강릉까지 나갔다.



◆ 어머니가 나에게 숟가락을 손에 쥐어주면서 가족과 헤어졌다.


1 ․ 4후퇴 때에는 군인들과 함께 피란을 나갔으며 시일이 지나자 쌀이 떨어져 밥을 얻어 와야 하는데 나는 창피해서 굶기가 일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식구가 많으면 고생을 한다고 내가 군인들을 따라다니는 것을 허락하여 기갑연대를 따라 다니기로 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숟가락을 손에 쥐어주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강릉을 지나 삽당령을 넘어 임계에서 삼척으로 가는 도중 눈 속에 얼어 죽은 사람들을 보았는데, 밤에 국군들이 민간인들에게 밥을 해먹이면서까지 짐을 지켜서 백복령을 넘으려 했지만 너무 눈이 많이 와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불쌍하게 죽은 사람들은 국군들의 작전(정보)이 엇갈리면서 오락가락하다가 백봉령으로 짐을 지고 가족을 데리러 가다가 민간인들끼리 인민군이 온다는 헛소문에 당황한 나머지 엄동설한에 길거리에서 갈팡질팡 헤매다가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다.
민간인들은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데 인민군이 다 죽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서 인민군점령지에 가족이 고립되자 가족을 데리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들도 민간인들이 묶고 있는 집이나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는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우리 가족은 다행스럽게 이 고비를 잘 넘기고 삼척까지 피란을 나갔다고한다.



◆ 징발된 민간인노무자는 옷에 증자를 표시하고 박격포탄을 져 날랐다.


나는 이 무렵 소대장의 배낭을 지고 다니다가 들판에 뛰어 다니는 주인 없는 소들을 보았는데, 이 소들을 그냥 두면 인민군들이 가만히 놔둘 것같지 않아 우리 부대원들이 먼저 여러 마리를 잡아먹으며 건강하게 작전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 후 중공군의 대공세 때 우리 기갑연대는 강릉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하진부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다시 강릉으로 넘어오려고 하니 중공군에게 길 이 막히자 고참(선임)들이 중공군을 무찔러 길을 터서 후퇴 시켰다.
통상 전시에 신병들은 힘을 쓰면서 진격을 잘 하지만 후퇴 즉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고참병들이 더 힘을 발휘한다. 이때 적은 중공군이 인민군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겨우 포위망을 뚫으며 강릉에 오니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강훈련을 시키며 봄이 되자 신분증이 있는 징발된 민간인은 몸에‘증’자를써 붙이고 오색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나는 기갑연대 제1대대 제4중대 81 미리중화기중대에 배속되어 박격포탄을 5개씩 지고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전투를 하다가 중공군 대공세에 아군 1개연대가 포위되어 하진부까지 후퇴하였는데, 때는 못자리에 모가 뾰족이 나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 오색 관터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다시 인민군 짐꾼이 되었다.


그때 나는 퇴각하는 부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설악산에서 포로가 되고말았다.
우리 부대 주둔지는 대청봉 그 밑에 꽤 높은 산(관모봉)이었는데 그날은 모처럼 암자(영혈사 암자)가 있는 좋은 샘에서 항고에 2사람분의 밥을 하려고 쌀을 씻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기관총 소리가 났다.
당시 나는 김동건이라는 사람하고 같이 밥을 해먹을 때인데 쌀이 2사람분이면 항고 뚜껑으로 2뚜껑 인데 김동건은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 많은 사람으로 앞서 내가 서림에서 민간경비대에 근무하면서 인민군 패잔병들을 소탕할 때 인공 치하에서 민청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국군들이 죽이려고 하자 기가 바짝 죽어있을 때 내가 나서서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하여 내가 살려준 사람이다.
김동건은 아군이 북진을 할 당시 북으로 피란하였다가 도로 나온 사람으로 당시 민청이라면 총살 감이지만 내가 살려준 은인라고 이 사람은 내가 어물어물하면 벌써 밥을 해주며 나에게 대접을 잘 해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인민군이 기습을 할 때 후퇴하는 퇴각하는 기갑연대 대열에 합류했지만 결국 나는 모처럼 동떨어진 곳으로 밥하러갔다가 고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바위굴에 들어가 숨어서 2일을 지냈고 그러다보니 한 10끼는 굶은 것 같았지만 그렇게 많이 굶어도 웬만한 행동은 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살려고 절대로 막 안 먹고 생쌀 2뚜껑을 양말에 넣어서 조금씩 아껴 먹어가며 숨어 살다가 잠잠한 틈을 타서 굴 밖으로 나오니 비행기 소리만 들리고 국군은 보이지 않아 하산하기로 했는데 그때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할 수 없고 안 잡히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이판사판인 심정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설악산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땅 전체가 거의 지뢰가 많이 묻혀있는 지역이라 주로 바위 돌만 밟으면서 오색 관터의 솔밭으로 막 내려오는 찰나에 인민군인 듯한 4명이“손들어!”라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속으로 (증)자를 떼어 버리고 머리를 깎았으니 내 뛸까 말까하다가“저는 군인이 아닙니다.”하고는 잡혀가 보니 관터 둔덕위에 있는 인민군 사단 사령부였다.



◆ 바싹 마른 싸리나무나 뽕나무로 불을 때면 연기가 잘 안 난다.


사령부 막사에 들어가니 인민군 연대장이“동무네 연대장 무사히 나간것 같나요?”하자 나는 짐꾼이라 모르겠다고 하자 그 밑에 부관인 듯 한 자가“무사히 나갔겠지요?”하고 말한다.
전쟁 중에는 국군이나 인민군들도 민간인들을 잡아다 짐꾼으로 써먹기는 마찬가지인지 이 인민군들도 나를 보고 실탄 통을 짊어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놈들이 날 죽일 놈들은 아니라고 혼자 생각했다.
나는 몸이 정상이면 짐을 질 수 있지만 밥을 10끼를 굶었다 고 하니 인민군 연대장이“이런 망할 놈에 새끼들 국방군 놈들은 밥 두 안 먹이고 전쟁을 했나?”하면서 으스대듯이 욕을 하며“야! 밥 갔다 줘! 여기 겅건이(북한에서 밥반찬을 이르는 말) 없어!”라고 한다. 나는 겅건이가 무엇이냐 하자 국방군 그 새끼들 겅건이도 없이 전쟁을 하냐? 라고 소리를 친다.

나는 밥을 먹고 나서 우의를 입고 탄통을 지고는 연대 사령부 소속 장교(중위)1명과 중사 1명에 졸병 2명의 인민군과 같이 행동을 하며 따라 다녔는데, 특히 장교는 나를 잘 돌봐주었다. 박달령을 넘어 설피밭에서 밥을 해먹어야 되는데 비행기 때문에 연기를 못 내니까 바싹 마른 싸리나무가지를 구해서 밥을 했는데, 제일 좋은 뽕나무로 불을 때면 연기가 잘 안 난다.
나에 일행은 5명인데 책임자에게 밉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잘 해주었더니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었으며, 믿음을 주어 감시가 허술하게 했다.
또한 처음에는 이들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으나 제까진 것이 가 보아야 어디를 가겠느냐고 하면서 나중에는 감시가 소홀해졌다.
부대는 비행기 폭격을 피하려고 주로 나무숲이 우거진 오색 박달령을 넘어 설피밭과 구룡령을 넘어 아침가리 광원까지 산악지대를 진군을 하면서 아군 비행기들에게 25여 번의 폭격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다리가 떨려서 뒤꿈치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 산길은 인민군들이 자주 이용하는 고정 코스이다.



◆“해방군동무 여기서 정선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아침이 되자 구룡령을 넘어 아침가리를 지나 광원으로 나갔다가 다시 대관령, 진부, 유천, 월정사로 들어가는 3거리까지 갔다가 대관령에 아군 탱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대관령 방향 쪽으로는 뚫지 못하고 우회해서 연곡까지 갔다.
연곡에서 계급이 높은 듯 보이는 땀이 흠뻑 젖은 놈이 2명이 와서 콩과 강냉이를 20가마니 구해 놓아라! 하고 명령하는데, 당시 연곡 사람들은 집집마다 농사를 지어놓고 피란을 떠난 후라 거의 빈집을 털다시피 하여 콩과 강냉이 20가마니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인민군들은 다시 월정사 쪽으로 가는데 장교가“해방군 이 동무 여기서 정선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하면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동무는 아직 나이가 있는데 전쟁에 휘말리지 말라”고 하면서 정선 가면 나를 슬그머니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장교에게 밥을 더 많이 주어서 장교가 밥을 남겨서 나에게 주게 되면 졸병들은 의례히 내 눈치를 보게 되는데 나는 이를 미리 알아채고 졸병들에게 밥을 주어 선심을 샀다.
옥수수는 그냥 끓이면 불려 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 딱딱해 먹기 힘들기 때문에 깨끗이 씻은 바위위에 물을 조금 붙고 옥수수를 놓고 돌로 으깨서 끓이면 부드러운 쌀 밥 같이 되어 쉽게 먹게 해 주니 그들이“강원도 사람이 다르네.”하면서 칭찬까지 해 주면서 한 식구처럼 되어 가다보니 이 재부터 나에 대한 호칭도“이 동무”라고 부른다.



◆ 나는 10끼를 굶어봐서 식량이 없이 도망가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민군 부대는 창촌 이라는 살골 길에서 길을 몰라 나에게 해방군 이 동무 앞장서라고 하여 앞으로 나갔지만, 나는 알아도 모른다고 할 판인데 연대장 앞에 가서 캄캄해서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이놈들이 지도를 보며 갔는지 날이 샐 무렵에 진부 쪽으로 가니 솔밭에 국군이 후퇴하면서 미처 못 가져간 쌀이 남아 있었다. 당시 국군이 후퇴할 때 인민군이 대전차 무반동총으로 앞에 가는 장갑차를 폭파하자 뒤에 있던 국군들이 혼비백산하여 장비는 그냥 두고 산속으로 후퇴를 한것이다.
그리고는 아군 비행기한테 연락을 해서인지 인민군들이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자동차를 폭격해서 몽땅 태워버렸다. 그러나 솔밭 속에 남아있던 쌀은 인민군들에게 5항구씩 나누어 주었다.
그 후 미 공군기가 계속 폭격하며 인민군들을 괴롭혔다. 나는 10끼를 굶어 봤기 때문에 식량도 없이는 도망가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인민군들이 도망을 갔다가 먹을 것이 없어 기어 나오는 것을 보면 인민군들은 용서 없이 죽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5인분으로 1인당 2되씩 쌀을 1말 정도 지급받았는데 그 장교는 나를 짐을 많이 못지게 하여 쌀과 실탄 1통을 지고 인제까지 가야 하는데, 오늘밤 도망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 그 사람은 내가 목숨 말고는 다 내어줄 수도 있는 은인이다.


저녁 식사 후 L19 비행기가 빙빙 돈다. 인민군들이 아무리 연기가 안나게 마른가지를 이용해 밥을 한다고 하지만 병력 전체가 밥을 하게 되면 뽀였게 연기 같은 것이 보이니까 하늘에서 정찰을 하던 L19 비행기 5대가 연락을 해서인지 창촌에 주둔한 국군들이 105미리 포로 집중사격을 가하였으나 다행히 몸은 무사했다.
나는 여기서 나가면 38°선 이란 것을 안다. 장교는 나를 짐을 많이 못지게 하였으나 나는 실탄 1통과 쌀을 질방을 만들어 매고 지는데 특히 쌀은 꼭 묶고 실탄은 빠져나가게 허술하게끔 묶었다. 장교가“이 동무 괜찮겠나?”하며 나를 걱정을 해 준다. 일행들은 서로 줄을 잡고 밤길을 따라 걸었는데, 그때 나는 소련제 군화를 신고 있어 발은 편했었다.
출발을 하고 한 50M쯤 갔는데 아군 포 부대에서 미리 영점을 잡아놓고 사격을 하는지 행군하는 인민군들 지역으로 정확하게 포탄이 날아오는데 대낮같이 환하게 포탄을 쏟아 붓는다.
사방에서 아우성소리가 나는데 나는 도로가 옆 도랑물이 흐르는데 거기를 내려뛰니 실탄은 빠져나가고 쌀자루만 붙어있다. 개울 건너 바위가 있어 뒤에 숨었다. 그때 장교가“이 동무! 이 동무!”하고 계속 부른다. 당시 5개부대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포격으로 인하여 불바다인 와중에서도 나를 걱정하며 부른 것이다.
전시인 상황에서 그 장교는 나와 행동을 같이하는 동안 나를 끔찍이 보호를 해 주었으며 단 둘이 있을 때 나에게 다음에 기회에 되면 숨었다가 집에 가서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라! 하고 나를 자유 대한민국으로 인도한 이름도 모르는 군관 동무가 고맙기 그지없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은 내가 목숨 말고는 다 내어줄 수도 있는 그런 은인이다.
더구나 그 장교는 나에게 짐을 지키면서 소련제 군화까지 구해줘서 발바닥을 편하게 만들었지만 인민군 사병들은 신발이 좋지 못해서 부대가 진군을 하다가 힘이 들어 쉴 때마다 선전부 중대장과 문화부 중대장이 정신교육을 시키는데 동무들이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내색을 하면 군 사기가 떨어지니 조국해방을 완수하려면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정신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내가속한 부대는 수시로 38연대 또는 79연대로 2개 명칭을 사용해 아군들에게 혼선을 주려고 2개 부대 행세를 했다.



◆ 할머니 문 열어 봐요! 내가 할머니가 나를 내다보는 것을 다 봤어요!


그 후 나는 홀몸으로 현리 귀둔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에 숨어있다 나오니 무슨 중얼 중얼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싶어 보니 인민군 소위의 인솔하에 약15명 정도 가고 있었는데 나는 당신네 왜 이제와! 바쁜데. 하고 큰소리를 치니 그들은“아 우리는 저 골짜기로 올라가서 밥해 먹고 가려고 이제 온다.”라고 한다.
나는 바로 우리 부대는 포격이 심해 여기서 숨었다 날 샐 무렵에 후퇴하려고 저 아래에서 집결하는데 너희들은 밥해 먹고 빨리 가라! 하고 호통을 치니 그들은 나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인민군들은 내가 높은 사람들이나 쓰고 다니는 인민군모자에 머리카락도 길고 소련제 워커를 신고 코트처럼 생긴 긴 우비를 입고 있으니 나를 높은 장교나 또는 정보장교로 본 것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저쪽에 민간인 집이 보여서 가보니 문에 붙인 조그만 유리창 속에서 밖을 내다보는 눈이 보였고 밖에서는 인민군이 맷돌에 옥수수를 타개고 있어 내가“야 이놈아 지금 어느 땐데 여기 있어!”하고 큰 소리를 치자 그 인민군은 부상을 당한 친구가 다쳐서 옥수수를 밥을 해 먹이려고 타개고 있다고 하면서 타긴 옥수수와 덜 타긴 통 옥수수를 가지고 겁에 질려 끽 소리도 못하고 간다.
나는 빨리 가! 라는 큰 소리를 치며 문 유리창을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가 보여서 할머니 문 열어 봐요! 내가 할머니가 나를 내다보는 것을 다 봤어요! 나는 이집 식구가 방공호 속에 숨어있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는 군화 신은 채로 앉아서 나는 할머니 밥 좀 주세요! 할머니가 방공호 속에 있는 식구에게 줄려는 밥 있잔 우! 하자 내가 높은 사람인줄 알고 건추 국밥에 김치짠지가 나와 군화신은채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나는 고단해서 잠깐 자고 갈 테니 국방군이 쏘는 포격소리가 나면 나를 깨우고 밖으로 나가서 숨어야 되요! 하면서 나는 그래야 포격을 할 때 이 할머니가 틀림없이 반공호로 뛸 테니 그때 나도 그방공호에 같이 들어가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안 그러면 나중에 이 집에 불을 확 지른다고! 큰소리를 지르고는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



◆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중공군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 포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데 사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포탄이 막 떨어져 황급히 뒷문을 열고 나가니 아무도 보이지 않아 바로 앞 골짜기를 올려다보니 소가 다닌 길과 소똥이 보여서 마을이 있을 같아 올라 뛰는데 포탄이 사방에서 비 오듯 했다.
그렇게 뛰어서 올라가다보니 석가레만 걸린 빈 집이 보이고 바위 뒤에 큰 소가 매어 있는 곳으로 가니 한 60먹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내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위에는 널찍하고 평평한데 1천여 평은 되어 보인다.

순간 나는 그 할아버지가 나를 수상하다고 생각이 들어 인민군 모자를 벗어 홱 던지며 이런 것도 모자라고 주나! 하며 노인 옆에 앉으며 개새끼들 이걸 모자라고 하면서 할아버지 내가 인민군으로 보여요? 하면서 내가 14일간 끌려 다니다 지난밤에 포격할 때 탈출했으니 이 쌀로 밥을 해주고 날 숨겨주세요? 하니 노인은 쌀자루를 받아 쥐면서 나를 따라 와요! 한다.
아마 그 할아버지도 인민군이면 골짜기로 뛰면서 길을 따라 도망을 치겠지만 나는 인민군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산으로 올라오니 아군 쪽사람으로 보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집은 8칸 집인데 부엌이 넓었고 며느리와, 손자 딸이 있는데, 아들은 방위군에 끌려갔다고 한다. 나는 쌀자루를 부엌에 놓고 그 노인이 나를 숨으라고 하여 산비탈로 올라가 짚단 가리에 짚단을 들어내니 방공호 속에 등잔불이 켜져 있었고 그 안에 이미 한사람이 숨어있기에 서로 인사를 하라고 소개한다.
그 사람은 지방 사람인데 통성명하고 난후 몇 시간 있다가 방공호에 있던 사람이 갔다. 그 사람은 노인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그 사람 집은 중공군과 인민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 겁이 나서 이곳에 피해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니 서로가 불편한 것 같아 나간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나가고 나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였으나 만약 그 사람으로 인해 최악에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이 집 노인과 가족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생각하니 안심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밥은 날이 새기 전과 어두운 밤에나 가져오게 되니 하루 2끼씩 먹어야 할것 같았다.
잠시 후 노인의 발자국소리가 아닌 땅이 크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나서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중공군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 상하이에서 모택동 군대에게 잡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순간 가슴이 화끈하며 야! 이놈으로 인하여 인민군에게 끌려가 죽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멍해졌다. 뭐라고 말을 걸기에 모른다고 하니 나오라고 하여 얼른 나가니 나를 앞세우고 따라 온다.
나는 내가 만약 도망을 치면 노인과 이집 가족인 며느리와 손자 딸도 바로 죽일 것을 생각하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날은 어둑어둑 한데 노인 집에 들어가니 화롯불에 컵을 올려놓고 다른 또 한 놈이 있다.
뚱뚱하게 옷을 잔뜩 해 입은 이 중공군들은 뚱뚱해 멀리서 이 집 주변을 주시하며 사람들이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며 상황파악을 대충하고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중공군들은 미군 파커와 모포까지 가지고 있어 이놈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는 알 수 없고 순간순간이 초조하기만 했다. 서로 말은 잘 안 통하였지만 눈 동작과 손짓 등의 행동으로 교감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별의 별생각을 다 하며 이놈들이 공산군인 적군 쪽인지 자유진영 쪽인지를 가늠하며 그렇게 한 1시간동안 있더라니 그중 한 놈이 날 보고 앉자있던 다른 놈에게 데리고 가 악수를 권했다.
그때 노인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면서 전혀 겁먹은 눈치가 아니다. 나는 노인보고‘야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하니 노인은 얘들이 부대를 이탈한 도망병 같다고 하는데 그래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들은 파카옷의 실밥을 뜯고 한문자로 쓴 종이를 꺼내는데 신분증이었다. 나는 일정 때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새파란 종이로 만든 중화민국(대만)국부군 신분증을 보이는데 그들은 상하이에서 모택동 군대에게 잡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국부군 출신으로 한사람은 29세이고 운전수를 했다는 사람은 30세로 장개석군 이었다. 나는 중국말은 몰랐지만 대만군 아이들은 미군, 기관총, 이승만이라는 한국말을 했다. 그들은 미숫가루를 가지고 먹으며 지냈으며 자기들은 대만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긴장 속에서 1시간이 흐른 다음 노인에게 물으니 얘들은 국부군같다고 했다. 긴장이 풀리고 나자 그래 좋다 하면서 서로 먼저 악수를 하자고 하면서 이들은 오랫동안 도망을 다니려고 미리 준비한 미숫가루를 먹으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 중에 매고 다니던 미제 모포 2장을 주며 한 장을 깔고 한 장은 덮고 자려고 나에게 대접을 잘 해준다. 나는 속으로 이들과 행동하다가 만약에 인민군에게 붙잡혀도 중공군과 같이 있으니 별 탈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도 대포소리는 가까이서 들리고 있고 먼 아래에서는 기름 드럼에 들어있는 중유가 타는지 불이 타고 있다. 중공군들은 궁금한지 내려가 보자고 하나 나는 가지 않고 잠이 들었고, 그들은 늦게까지 뭐라고 떠들다가 늦게 잠을 잤다.



◆ 그들은 내 눈치를 보고 바보가 된 것 같은 모양으로 내가 하자는 대로 한다.


다음날 나는 노인과 함께 처음 보는 며느리와 손녀딸과 함께 식사를 먼저 하려고 하는데 노인께서 방에서 자고 있는 중공군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저 아이들은 나중에 깨어나면 미숫가루나 먹으라고 하면 된다고 하면서 노인 가족과 밥을 다 먹고 난 다음 나는 중공군 아이들을 발로 차서 깨우자 그들은 일어나서 내 눈치를 보고 바보가 된 것 같은 모양으로 내가 하자는 대로 한다.
이제부터 나와 이 중공군 아이들의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중공군에게 군장을 단단히 챙기게 하고 오로지 아군진영으로 귀순을 하기 위하여 국군이나 미군점령지로 가야만 했다. 나는 이들과 함께 가다가 만약 중공군이나 인민군에게 마주치면 내가 손을 들고 중공군의 포로 행세를 하기로 미리 약속을 정해놓았다.
얼마를 가다보니 인민군이 10명 그리고 2명과 5명이 지나갈 때도 있었고 중공군까지도 20여명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인민군이나 중공군을 만나면 포로 행세를 했지만 정작 적군들은 전쟁 중이라 자기들도 바삐 행동하느라고 뭐라고 간섭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가기만 한다.
그러나 어떤 때에 그 아이들은 나를 보고 인민군이든지 중공군이든지 관계없이 내 옆에만 있으라고 하면서도 겁이 났는지 선 듯 앞장을 못 서자 내가 먼저 앞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동안 있더라니 제법 먼 거리에서 미군들이 지프차에 기관총을 매달고 오는데, 그때 버드나무 숲에서 숨어있던 인민군 7명이 미군 지프차에 다발총을 난사하여 1명이 죽고 나머지 한명은 차를 버리고 도망을 가는 것을 목격 했다.



◆ 코가 큰 미군을 보자 지레 겁을 먹었는지 손이 조금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얼마 후 조용해지자 나와 행동을 같이하던 중공군 아이들은 미군 지프차가 있다는 것은 이곳에 미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는 앞서서 가고 중공군 아이들은 뒤에 따라오라고 한 다음 아군에게 내가 손을 들고 신호를 하면 빨리 옆에 와서 손을 들라고 했지만 그들은 겁에 떨며 계속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구불구불한 길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자 조금 더 내려가서 시야가 트인 먼 아래를 보리밭에 미군들이 보였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내가 미군들 오면 나가서 손을 들어 신호를 할 터이니 너희들도 내 옆에 와서 손을 들어야 한다고 제차 다짐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미군들이 있는 보리밭으로 접근하여 M1총을 들고 있는 미군들에 한손은 들고 다른 한손으로 손짓하며 큰 소리를 지르자 그 중국군 아이들은 내가 총을 겨누고 있는 미군에게 총에 맞은 것 인줄 알았는지 놀라 오던 길로 다시 도망을 처 미군들이 잘 보이지 않은 구렁텅이에 가서 손을 들고 숨는다. 전쟁이 아니라면 다른 한쪽에서 웃음이 나올 판이다.
나는 다시 빨리 나오라고 재차 큰소리를 치자 그들은 그때부터 손을 들고 내 옆으로 오는데 얼마나 두꺼운 옷을 많이 껴입었고, 그리고 코가 큰 미군을 보자 지례 겁을 먹었는지 손이 조금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들은 우리들에게 접근은 하지 않고 총을 겨누며 꼼짝 말고 내려오라고 한 다음 확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우리가 서있는 보리밭 뒤쪽인 먼 산 방향으로 사주경계를 하는 한편 보리밭에서 삥 돌려 서서 3명중 1명이 총을 겨누고 나머지 2명은 꼼꼼히 몸수색을 한다.



◆ 중공군(대만)을 귀순 시켰다고 말하니 미군이 참 잘 했다고 격려한다.


그러고 난 후 한참을 있더라니 서로 연락이 되었는지 한국 사람이 타고 있는 쓰리쿼터에 미군 운전수 1명과 또 다른 미군이 와 우리를 태우고 주둔지 부대에 도착하니 이 전선에서 한국군은 망하고 물러났는지 미군 주둔하여 전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차가 부대로 들어가는 중에 나는 한국군 통역관에게 대충 이야기를 하니 큰일을 했다고 한다. 주둔지에 도착하니 미군들의 연대 CP 천막이 쳐져 있었다.
얼마 후 미군이 한국통역관을 대동하고 오더니‘당신들 어떻게 된 것이야! 하고 묻자 나는 저 중공군(대만)을 귀순 시켰다고 말하니 그 미군이 그래 당신들 참 잘했다 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당신은 이제 전쟁터에도 안 다니고 포로수용소에서 편하게 지내라고 한다.
나는 대만 아이들을 보고‘이제부터 당신들 걱정 말아라 이제는 살았어! 대만으로 갈 수 있어! 라고 하니 그때부터 중공군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로 인하여 이 미군 주둔지에 중공군 포로는 처음이라서 미군부대가 들 떠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인민군도 15명이나 잡혀와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 통역관이 뭐라고 하자 중공군이 잡혀온 것을 알고는 천막에서 미군들이 쏟아져 나온다. 미군들이 귀순한 중공군아이들에게 C-레이션 박스를 가지고 나와 먹으라고 대우해준다. 인민군 포로들에게 C-레이션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중공군 아이들은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다.



◆ 대만에서 나를 만났다면 자기아버지보다도 더 귀하게 대하였을 것이다.


그 후 미군 원주 야전 사령부에 오니 전쟁포로가 몽땅 잡혀와 있었는데 중공군도 약 2천여 명이나 잡혀와 있다. 때는 4월이라 넓은 논에 중공군, 인민군, 한국군 포로수용소가 만들어져있다. 전쟁 통에 포위된 격전지에서는 모든 한국 사람들도 예외 없이 몽땅 포로취급을 한다.
그러나 중공군과 인민군들은 포로들에게는 철조망을 치고 분리해 놓았다. 처음에 중공군과 인민군포로들은 한국군이 하라는 데로 하고 때려도 꼼짝 못했는데 나중에는 누가 미군 헌병에게 말이 들어갔는지 미군들이 화를 내며 포로들을 때리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격리되어 있던 한국군 포로는 군번을 확인하는 등의 신분을 파악하고는 소속부대로 복귀시키고, 나는 대만출신 중공군을 귀순 시켰지만 나도 한국군포로 신분이었으며, 귀순한 중공군 아이들하고는 원주에서 헤어졌다. 나중에 내가 군대 가서 전우신문에서 대만 군들을 배로 보냈다는 보도가 났었다.
나는 후에 어른이 되서 여행을 가는 계를 모아가지고 대만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만약 그때 그 대만군아이들 이름이나 적어두어 찾아서 만났다면 그놈들이 나를 아버지보다도 더 귀하게 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전쟁 중이라 그런 생각은 미처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 군의관한테 이질 병이 걸렸다고 하고는 도망을 쳤다.


당시 원주 군부대에서는 나같이 현역이 아닌 민간인은 원주 민사처로 보내져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설악산전투에서 아군 기갑연대의 짐꾼 노무자로 일할당시 나와 같이 민간인 신분으로 기갑연대 군수과에서 보급품 일을 보던 김갑수를 만나니 친구처럼 반가웠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로 전쟁초기 인민군이 남으로 쳐 내려올 때 인민군분대장으로 참전을 했다가 부대에서 이탈해 도망을 쳐 한국군에 편입되었던 자이다.
당시 원주민사처에서는 민간인들을 다시 노동인력으로 주천면 도로 보수 작업에 동원되었는데 미군들이 쉬지 않고 일을 시키는데 힘들어 못 배길 것 같아‘야 갑수야 우리가 공병대에서 일하게 되었나!’‘갑수야 우리 도망가자!’당시 전쟁터에는 이질 병이 심하게 돌땐데 군의관에게 이질이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는 데는 이골이 난 놈들이라 밥을 조금씩 먹고 모아두었다가 싸가지고 도망을 쳤다.
그리고 나는 갑수보고‘너 어디로 갈 거야’하니 머뭇거리기에‘야 우리가 그보다 더 한데서도 도망을 다녔는데 못 갈 것 없다’면서 한 3~4일이면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여 서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너 지금 집에 가면 군인을 가게 되니 더 있다가 가라고 한다.


얼마를 가다보니 헬리콥터가 날아 숨어 있다가 주천에서 산을 넘어 내린천으로 밥을 얻어먹으며 다리를 건너는데 보초가 총을 겨누고 오라고하여 그 부대 중대장에게 가니‘왜 이렇게 도망 다녀! 이 새끼 어디서 본것도 같은데’하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6 ․ 25 전쟁이 나기 전 서림에서 국군 8사단 예하의 1개 중대가 지키고 있을 때 그 곳에서 만났던 정진화 소위가 1년후 인데 대위가 되어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야 너 우리하고 여기 같이 있자, 야는 누구야!” 하기에 나는“야는 설악산에서 인민군들과 전투를 할 당시 기갑연대에서 나하고 같이 짐꾼 일을 하다가 원주 민사처에서 우리를 미군 공병대로 보내져 도로보수를 하다가 도망가는 중인데 갈 데가 없어 우리 집에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너 집에 가면 군인가! 여기서 더 있다가 늦게 군인가! 안 그러면 위험해! 빨리 가면 전방으로 팔려가 빨리 죽을 수 있어!”라고 한다. 그리고는 여기서 밥도 하고 나무를 져 나르고 창촌가서 보급도 받아오면서 나하고 같이 있자고 한다. 그때는 수시로 헌병이나 특무대에서 조사를 자주 나온다고 하면서 나를 보고‘너 나보고 고종 사촌 형이라고 해!’라고 한다.



◆ 전 후 김갑수에 대한 행방을 알 수 없고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나는 갑수보고 정진화 중대장이 나를 보호해 줘서 당분간 집으로 못 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갑수와 같이 정진화 중대에서 얼마를 지내고 있다가 부대가 양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갑수가 우리부대 바로 옆에 설악산에서 같이 있었던 기갑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을 알고 기갑연대에 간다고 하고는 밥 지고 간다고 자청하여 밥을 지고 나가면서“내가 없거든 기갑연대에 간줄 알어!”하면서 부대를 이탈해서 기갑연대로 들어갔다.

나는 중대장에게“갑수가 내 뺏어요. 간다고 말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갔어요.”하니 중대장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얼마든지 갑수를 기갑연대로 보내줄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럼 너도 집에 가고 싶으냐? 지금 집에 가면 바로 영장이 나와 군에 들어가면 바로 전방이야.”
“지금도 휴전이야기가 나오는데 집에 갔다가 신통찮으면 이리로 오너라!”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진화 중대장은 내가 하루라도 군대를 늦게 가려고 나를 붙잡아둔 것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 후 김갑수에 대한 행방은 알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지금도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나기도 한다.



◆ 빨치산 연락병이 서림으로 자수해왔다.


가을에 집에 오니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형과 형수만 있었다. 그 시절은 살림을 책임져야하는 형보다 동생이 먼저 군인을 가야하는데 이때가 1951년 11월 쯤 이었고 내 나이는 22살이었다. 하루는 신서면 사무소에서 사람이 와서 지서에 가니 그때 지서장이 숫한 전쟁을 겪은 나를 보물이라고 여기고 전쟁을 체험얘기 해 달라고 한다.
지서장은 권영열 경사인데 가끔 공비가 출몰하자 전쟁터에서 경험을 많이 한 나를 공비토벌을 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청하자, 나는 아직 집에 일을 거들어야할 입장이라고 하니, 지서장은 조금 있으면 군대 영장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전방으로 갈 거여 안 갈 거여”하면서 내가 지서에서 숙식을 다 제공해 줄 터이니 나를 도와달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형님 내외와 같이 지내는 것이 조금은 그렇고 해서 지서장 일을 돕기로 했는데, 그때 지서에는 지서장 외 순경 7명과 당시 명개리와 조개리 동네가 공비들에게 점령당하자 명개리와 조개리 사람들이 서림리로 쫓겨 피란을 와서 가족과 함께 움막을 짓고 살던 청년 20여명이 경찰 특공대 같은 신분으로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평양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공비가 험준한 태백산맥을 따라 지리산 빨치산에게 지령을 전달하려는 책임구간 총책임자와 연락병2명이 마침 서림구역으로 들어와 귀순하여 왔다. 이들은 공산주의 사회가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자수하면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확고한 공을 세우려고 비밀정보를 제공하고 큰 성과를 얻어 신분을 인정받으려고 한 것이다.
이들에 정보에 의하면 설악산 구역 연락병이 ○월 ○일 서림에서 남쪽구역인 오대산 구간 연락병과 접선을 하기 위하여 영덕에 체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빨치산 연락병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는데 설악산에서 오대산까지의 연락책 2명이 영덕 산야골에 와서 저녁을 해 먹고 어두운 밤이 되서야 행동개시 할 터이니 그놈들이 정족산까지 가서 접선하기 직전 이 서림구역에서 잡아야 한다고 하며, 이놈들은 얼마나 악질인지 자수할 놈들이 아니니 사살하라고 당부했다.



◆ 영덕 산야골에서 빨치산 연락병 2명을 사살하다.


자수한 공비들이 정보를 제공하자 내가 직접 작전계획을 짜자 지서장도 내 계획대로 하자고 하여 함병열 팀장과 대원들을 내가 직접 인솔하여 현 영덕양수발전소 홍보관이 있는 산얏골 입구의 맨 끝에 있는 집으로 출동했다.
당시 그 집은 가을농사를 거두어들인 다음 겨울을 나려고 공수전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빈집이었고, 내년 봄에 다시 올라와 꺼내먹으려는 김치까지 땅에 묻고 갔었는데 공비들은 그것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대원들은 그 집 앞 큰 밤나무 뒤로 접근하여 관망하니 집에서 하얗고 맑은 연기가 나고 있었는데 하얀 연기가 난다는 것은[예전에는 거지가 밥을 얻어먹으러 다닐 때 하얗고 맑은 연기가 나는 집만 찾아다닌다고한다] 밥이 거의 되어 지금은 밥을 먹고 있을 때 라 여기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니 밥을 다 먹었는지 항고(밥통)를 긁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한 놈이 M1을 들고 쑥 나왔다.

주위는 어둑어둑하고 굵은 함박눈이 드문드문 내리고 있었는데 그놈은 주위에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잡았는지 산을 처다 보고 있다가 뒷산 쪽을 처다 보는 바로 그 순간 그때 내가 총을 빵 쏘고‘손들고 나와! 너희들은 포위되었다’하자 그놈은 바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며 밤나무 방향으로 총을 쏘기 시작하자 밤나무 쪽 옆에 죽 늘어져 있는 흙벽에서 흙이 퍽석 퍽석하고 떨어진다.
사실은 우리 대원들은 앞에서만 대치하고 있었는데 공비들은 뒤에서도 포위한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당초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어 공비들을 당황하게 만든 상황이 되었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라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치고, 밤나무 뒤에 숨어 대치하고 있는 대원 7~8명에게‘안방과 아랫방에 있으니 그 쪽으로 쏘아라!’하자 갑자기 한 놈[후에 조장으로 밝혀짐]이 앞문을 발로 차고 나온다.
그 위기 상황인데도 바보같이 한손에 배낭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총을 들고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드는데 순간 내가 확 끌어안을까 했지만, 앞서 귀순한 공비들에게‘생포할 생각은 마라!’는 말을 들은 지서 김 경사의 당부도 있고 해서 혹시 단도를 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총으로 그놈의 목에 들이대고 손들어 하자 이놈이 엎드리면서 빙글 돌더니 앞으로 내 달려 담장이 쭉 서있는 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7~8명의 대원들의 막강한 화력으로 총을 쏴 데자 그놈은 마구간 뒤로 돌아가다가 그대로 쓰러진다. 상황이 종료된 후에 가보니 그 조장이란 놈은 수류탄 통이 다 깨져있을 정도로 총을 많이 맞았다.
그러나 아직도 한명이 남아있다면 내 짐작에 부엌에 가 납작 엎드려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잠시 후 그놈은 그래도 배낭은 제대로 짊어지고 M2 카빈총을 난사하며 나오면서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것을 나는 대원들에게 어둡더라도 조준하여 쏘라고 하였다. 날이 어두운 가운데 그놈이 아래쪽 방향으로 도망가다가 바로 거꾸로 지는 모습이 보이자 혹시 알 수 없어서 그놈에게 다가가 다시 총을 쏘았다.



◆ 공비들은 남에 집 김치까지 꺼내먹을 정도로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개털 모자를 쓰고 공비를 잡으러 나왔던 연수가 위치 선정을 잘못해 엉뚱한데 가서 배꼽에 총에 맞아 엎드려 있었다. 그때 나는 연수를 끌안고“야 연수야 연수야”야 이런 딱한 놈아 왜 하필이면 여기에 와 있다가 변을 당했느냐 하고 소리치자 연수는 뭐라고 입을 열다가 바로 고개를 푹 숙인다.
이 작전에서 연수만 안 죽었으면 공비를 생포는 못했다 하더라도 다 죽여서 전공을 세워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텐데... 그리고 연수만 안 죽었으면 성공을 거두는 사건이었다.
당시 연수 아버지는 일정 때만주까지 가서 살다온 아주 유식한 어른 이셨고 3형제 중 형은 군인 가서 연락 없고, 동생은 피란 댕기다가 죽고 없어, 부모는 오로지 연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나는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연수 부모에게 가서 연수가 죽었다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선다. 그래도 형은 전쟁 후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와 150만원씩 받는 전상6급 유공자가 되었다.

사실 빨치산 정보원을 사살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다 죽고 나 밖에 없다. 당시 권영열 지서장과의 나는 한 마음이 되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 때 지서장과는 같이 앉자 사진을 찍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공비들이 지금 양양양수발전소 홍보관이 있는 산야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집에서 김장김치를 땅에 묻어놓고 공수전에 가서 겨울을 나고 봄에 들어와 김치를 꺼내 먹으려고 묻어놓은 것 까지 다알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때 빨치산 정보원들은 사상적으로는 강해서 정신무장이 잘 되었으나 전투능력을 보니 위급상황에서 양손에 배낭과 총을 따로 들고 있는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적군인 공비가 M1총이나 M2 카빈총을 사용하였는데 그때는 아군이나 적군도 서로 상대방의 총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참고적으로 6 ․ 25 전쟁 기간 중에 입대를 한 사람은 유공자이나, 휴전 후에 입대한 사람은 유공자가 될 수 없었지만, 단 민간인 신분으로 공비토벌에 참여하면 유공자로 인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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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림특공대국가유공자



◆ 노리쇠가 아가리를 벌려 재 장진이 안 될 정도로 치열했던 저격능선 전투


4월 초순 입대 영장이 나와 제주도 훈련소로 가서 일반 병으로 훈련을 마치고 될 수 있는 대로 전방에 늦게 배치되지 않으려고, 또 다시 2개월 동안 훈련을 더 받는 하사관 학교로 지원해 갔다.
하사관 학교는 240명을 뽑았는데 A반 120명, B반 120명이 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거기서 1등으로 수료하고 춘천 보충대로 보내졌다가 2사단 23연대 1대대 3중대 하사로 부대배치를 받자마자 바로 금화지구 저격능선 전투에 투입되니 아군과 적군이 서로 저격능선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중대원은 130여명으로 분대장이 분대원 8명을 인솔하여 올라갔다.

소총을 매고 안전핀은 쉽게 빠지도록 열어놓은 수류탄 50개씩을 배낭에 지고 고지를 향해 돌격하며 앞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중대장이 대원을 지휘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총을 쏘려고 하였지만 흙이 튀고 앞이 안보여 쏠 수가 없는 처지에 이르다가 어떻게 하다가 첫발을 사격하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사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실탄을 장진하는 노리쇠에 흙이 들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재 장진이 되지 않는 지경되기도 하였다.



◆ 적군과 뒤섞여 수류탄이 필요 없었고, 하늘에서 부모님에 환상이 보였다.


미군과 우리 아군 포가 300문과 적군 포 200문에서 발사된 포탄이 빗방울처럼 쉴 틈 없이 여기저기서 사방에서 터진다. 하늘에는 나뭇조각과 흙이 회오리바람 불 때처럼 공중에서 쏟아진다. 쌍방의 포격으로 몸이 자동적으로 흙에 반 이상은 묻힐 정도로 포탄이 쉴 세 없이 고지로 떨어진다.
등에 지고 올라간 수류탄을 정신없이 적진을 향해 던지고 또 던졌다. 어떤 대원은 수류탄을 던지지도 못해보고 쓰러지고, 아군과 적군이 뒤섞이는 상황에 까지 이르자 수류탄이 필요 없게 되어 대원들이 수류탄을 버려 땅 바닥에 널려져 있는 것이 수류탄이다. 나도 수류탄을 잔뜩 매고 있는 것이 소용없게 되자 수류탄을 버리고 그래도 2개만은 꼭 쥐고 있었다.
윙~쾅, 짜르르~쾅 귀청을 요란하게 들리던 포성도 아련해지면서 하늘에서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 보이는데 그 환상과 아울러 나무 조각이 날라 천천히 눈처럼 가라앉는다. 맥이 하나도 없이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나를 살리러 왔는가? 부모님은 나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했고, 그리고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하셨으면 나는 살 것이다! 부모님 형상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고 난 후 포탄소리가 들리다가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리고 포 소리도 안 나고 사방이 조용하다.



◆ 24시간을 버티는 치열한 전투에서 거의 전사하고 7명만 남았다.


그때“3중대 살아 있는 놈은 나를 따라 내려와~!”어떻게 생존했는지 중대장 조태수 대위가 계속 소리를 친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겨우 몸을 추슬러 기어 내려와 바위절벽 아래에 오니 배추국과 밥이 와있다.
그리고 건빵을 주는데 얼마나 나굴었는지 밀가루 번벅(뭉터기)이다. 지고 올라간 빈 수류탄 통은 벗어 던지고 총은 목숨과 같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총은 버리지 않고 총은 뒤로 매고 밥을 먹었다. 이 전투를 치른 먼저 패들 중에 총을 내버리고 온 병사들은 나중에 후방으로 잘안 보낸다고 했다.
이 지옥 같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살아서 내려온 전우는 나와 중대장을 포함해서 7명이었다. 함경도 사람인 조태수 중대장은 비교적 안전한 벙커같은 곳에서 중대원을 지휘 하는 바람에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다른 부대가 투입되어 바로 사창리에서 빠져나왔다.
다음 부대도 같은 상황으로 또 계속 전투를 치를 것이다. 대대병력이 한번 이 저격능선에서 24시간 동안 버티면 아주 잘 버텼다고 했는데 이는 곧 그만큼 피아간에 힘겨운 싸움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부대는 거의 전사하고 7명만 남아 임무가 끝나 사창리를 나가 인원을 보충 받아 다시 투입될 것이다. 결국 금화지역 저격능선전투는 2달간 지속되었다.
전쟁 후 미 군단사령부 조사에 의하면 1분간 6000천 여발의 포탄이 저격능선에 쏟아졌다는 기록을 보면 피아간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혹독하였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막바지 전투에서는 네이팜탄 이라고 해서 휘발유 같은 연료를 섞어 넣은 20리터짜리 깡통에 호수를 연결하여 짊어지고 밀집된 적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아 불태워 버리기도 하는 참혹한 전투를 목격했다.
6 ․ 25전쟁 기간 중 나와 같이 죽음에 고비를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내가 직접 체험한 부모님의 환상이 나타난 것처럼 여러 장병들도 나와 같은 환상을 보았다는 체험수기와 또는 방송매체에서 보고 들었다고 했다.
이 같이 극적인 상황에서 부모님들의 환상이 보였다면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현상이라 믿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며,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나를 살아있게 한 것은 부모님의 환상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항상 남들에게 그 은혜를 보답하며 살아왔다.



◆ 백마고지에서 벨기에 군인들이 우리를 하느님보다 더 반갑게 맞이한다.


금화지구 저격능선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우리부대는 다시 신병으로 인원보충을 받아 엄한 군기 속에서 전투와 같은 훈련을 1개월 동안 받은 다음 1952년 12월 25일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우리부대는 이 고지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6 ․ 25 참전국 중 한 나라인 벨기에 대대와 교체를 하였는데, 우리부대 선발대가 들어가서 보니 미군들하고는 생김새가 다른 나라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벨기에군으로 우리부대가 들어가자 우리장병들을 보고 하느님보다도 더 반갑게 맞이한다. 이 부대원들에 표정을 보아 아마도 백마고지전투에서 악전고투를 겪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고난 후라 우리부대가 구세주로 보였음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야전에서 미군이 지원한 담배 등의 보급물자를 사용하고 크리스마스 때 본국에서 보급된 깡통에 든 담배와 먹을 수 있는 보급품 등을 땅굴 속에 보관해놓은 것을 고스란히 우리부대에 인계하고 갔다.



◆ 백마고지 전투에서 관측장교 업무를 대행하여 특별대접을 받았다.


이 백마고지전투도 포격전의 양상이라 전투가 시작 되려면 이틀 전부터 드문드문 포탄이 날라 온다. 그러나 내가 속한 부대에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탄착점을 지도에 찍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캄캄한 밤에서도 위치를 찾아 갈 수 있는 독도법을 철저히 배워 하사관교육 때 240명중에 1위를 하였다는 소문이 나서 하사신분으로 포대 관측장교 업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우리 관측소는 적의 포사격에도 끄떡없는 높은 곳에 위치한 벙커시설이었다. 이 벙커 안에는 포대 관측장교와 우리 중대장이 그때 마침 배앓이를 해서 중대 부관인 백낙수와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피아간에 포사격을 하는데 아군의 포탄이 적 진영에 떨어지면 등고선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펴 놓고 횡좌표와 정 좌표 등의 교착 점을 표시하고 좌표를 찍어서 포병부대에 보고를 했다. 관측장교가 있었으나 관측업무를 내가 대행하다보니 내가 없이는 전투가 어려울 정도였고, 간혹 내가 밤새 상황근무를 하고나서 아침이 되면 나보고 침대에 가서 자라는 등의 특별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때 당시 포대 관측장교가 업무가 미숙하였고, 내가 마침 운도 따랐겠지만 포사격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격표적을 정하는 좌표를 찍어주는 실력을 인정받아 관측업무를 이행할 수 있었기에 안전한 포대관측벙커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휴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중공군들이 조명탄 낙하산을 걷어 가려고 하얗게 나와 있다.


하루는 초저녁에 소대장이 와서 1953년 7월 27일 저녁 10시경부로 휴전이 조인 될 것이니, 오늘저녁에 중공군들이 포탄 자랑을 하려고 남아있는 포탄을 다 쏘고 나가려고 자랑삼아 포 사격을 해 올 수도 있으니, 밤이 되면 땅굴 속에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오줌이 마려워도 호 안에 싸고 나오지 말거라, 이때까지 싸우다 살아났으니 대원들에게 절대 밖으로 나오지말라고 하달되었고 밤 10시가 되기도 전인 벌써 8시인데도 포성은 없고 조용하다.
하긴 이 중공군들도 휴전이 되는 마당에 포만 쏘았지 무엇이 아쉬워서 총을 들고 공격을 해 올리는 만무하였다.
10시가 되자 적군지역을 바라보니 중공군들이 후레쉬를 들고 나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조명탄에 달려있는 낙하산 걷어 가려고 불빛이 어른거린다. 그다음 날 아침에도 중공군들은 낙하산을 줍기 위해 하얗게 나와 있다.
우리도 우리 지역 쪽으로 떨어진 낙하산이 욕심이 나기도 했었지만 겁이 나서 못나갔는데 그놈들은 우리 측에서 총을 안 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같았다. 당시 야간 전투를 위해 미군이 조명탄을 쏘아 올릴 때 사용했던 낙하산은 줄도 매끄러워 사용하기 좋고 천은 마후라를 만들 정도로 좋았다.



◆ 소대장이 과실로 죽은 병사의 귀때기를 때리며 분해서 벌벌 떨며 오열한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모두 살아있음에 기뻐한다. 그러나 아군 진지에 뒷일거리가 생겨 평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