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수리 김종호

페이지 정보

조회 1,268회 작성일 2018-03-09 12:12

본문

■ 김종호 (남, 80세, 서면 수리)
■ 면담일 : 2015. 6. 8


149.jpg



◆ 남한유격대가 들어와 학교를 폭파하여 내현리 빈집에서 공부했다.


나는 수동 삼발이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9세 때 해방이 되고, 1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나를 돌보아주시다가 13세에 돌아가셨다.
이듬해인 14세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인공 때는 상평인민학교에 다녔는데 나이가 많아 특별반에 입학 1년간 1~3학년 공부를 하고 2년째 4학년에 월반하였다.
하지만 늘 지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삼발이에서 상평까지는 멀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는 하천에 다리가 없어 질러가려면 돌고지 물을 건너고 범부로 넘어가는 된님이 고개를 넘고 범부 물을 건너는 등 다섯 번 물을 건너고 오솔길로 돌아서 학교에 다녀야했다.
상평인민학교에 갑 반, 을 반이 있는데 을 반은 1~3학년 과정을 1년에마치고 4학년에 월반하는 학년이다. 상평학교에 다니다 너무 멀어서 현북 도리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그때 남한유격대가 들어와 학교를 폭파하여 내현 빈집에서 공부하였다.
다시 수리 인민학교가 인가가 나서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상평 인민학교도 인민군 대대가 주둔하여 양양철광산에 있는 극장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매일 30리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멀어 매일 지각이었다. 늦게 가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러다 수리인민학교에로 전학을 하니 너무 좋았다.
1949년 여름 수리 인민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중학교에는 못가고 농사일을 하며 꼴 베기와 화전 밭 매기 그리고 나무하는 일을 도왔다. 부소치에 로스케(소련군)가 주둔하고 있어 큰 누나가 원일전으로 시집갈 때 38°선을 넘어가야 하는데 가마를 조사하고 보냈다.
그러나 17세인 둘째 누나는 양양 서문리에 시집갔는데 며느리가 일을 못한다고 시어머니가 밥도 안주고 동네사람들이 인민재판을 하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못한다고 말하니 한사람이 올 소! 하면 모두가 올 소! 하여 며느리가 잘 못 했다고 하여 이혼 당해 와 얼마 후 산길로 38°선을 넘어 장리에 시집을 보냈다.



◆ 인민군들이 우리 집 마루에 박격포탄을 가득 쌓아놓았다.


1950년 5월에 북에서는 약 100여 명씩 남쪽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면 군인들이 줄지어 행군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리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주민 3가구는 아랫말로 보내고 자기들이 차지하여 우리는 작은 할아버지 댁 사랑방에 가서 살았다. 우리는 이북 정치를 싫어했다. 아버지가 ‘조선조 말엽 정감록에 12당에 들지 말라’는 말이 있다하여 공산당에 들지 않았다.
6 ․ 25전쟁이 일어나고는 별 일없이 농사일을 했는데 1 ․ 4후퇴 때 피란가라고 하여 이장네는 소 질매에 짐을 싣고 피란을 떠났다. 숙부가 월남했고 누나들이 남쪽 원일전과 장리에 시집가서 살아서 쌀 3말을 지켜주며 장리 누나 집에 가 있으라고 하셨다.
내현에 가니 군인들이 못 가게 하여 돌아오니 우리 집에는 포병들이 집을 차지하여 마루에 박격 포탄을 가득 쌓아놓았다. 이튿날 망태를 지고 밭둑을 살살 기어 도리를 지나 장리 누나 집에 갔는데 군인들은 없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와서 피란가라고 하고는 집에다 불을 질러 놓는다. 원일전리에 가도 불을 싸놓는다. 초가집에 소이탄을 쏘니 삽시간에 불이 붙었고 기와집에 불이 붙으니 기와 장에서 총소리처럼 탕 탕 하고 소리가 났다.



◆ 족보와 효부교지를 부엌 단지에 묻고 피란을 갔다.


어성전에서 1박하고 입암리에서 1박하고 나갔다. 부모님은 하루 늦게 떠나 내현, 손양을 지나 해안을 따라 강릉 쪽으로 가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비행기가 폭격을 하니 있을 때가 없어 집으로 가자고 하여 죽헌리, 주문진, 정자리에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1박씩 하고 집에 돌아왔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불이 안 탄 집에 모여 살았으며 산에 굴을 파고 살기도 했다. 부모님과 할아버지는 3월에 오셨다.
그러다가 국군이 또 밀려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족보와 가보로 여기는 효부 교지를 부엌에 단지에 쌀과 함께 묻어놓고 피란을 갔다. 이번엔 얼마 가지 않아 돌아왔는데 쌀은 누가 꺼내 먹고 교지는 물이 들어가 젖어 있어 잘 말려서 보관하였다.
그러나 우선 집을 지어야 했다. 방바닥에 흙을 걷어내고 나무토막으로 쌓아올려 움막 2칸과 부엌은 우데기를 쳤다. 나무는 내 것, 네 것 없이 아무산에서 베어다 지었다. 할아버지는 족보를 단지에 넣어 보관하고 못자리를 만들어 놓고 논물도 보시는 일까지 하셨는데 그때 할아버지 연세는 75세쯤 되셨다.
우리는 원일전리 큰누나 집까지 갔다. 그때 장질부사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시체 거둘 사람이 없어 아버지가 가서 거두어 밭에 토롱(임시로 만든 간단한 무덤)을 하였다. 그러다 아버지가 전염되어 앓아누우니 아버지가 모내기 성군인데 할 수 없어 동네사람들이 품앗이를 안한다구 하여 세집이 모내기를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다행이 아버지는 나으셨고 다른 식구들은 전염되지 않았다.



◆ 인민군을 잡아 소원이 뭐냐 고 하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3번 외친다.


1950년 가을 인민군이 쫓겨 갈 때 전투 없이 차를 타고 북진했는데 낙동강까지 갔던 인민군이 해안으로 가지 못하고 산간으로 가는데 부연동 가마소에서 수리까지 와서 뒷전의 예문리로 해서 오색으로 가려는데 이때 백골부대가 수동에 주둔했는데 인민군이 모르고 수리로 온 것이다.
그때 국군 매복지로 향하여 인민군이 들어오자 뚝 방이 높은 곳에서 국군이 손들어! 하고 소리치자 멀리 도망가는 인민군 쪽으로 박격포로 쏴서 1명은 딴 봉서 죽고 4명은 가둔지로 뛰어가고 1명은 콩 가리 속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나오라고 하니 안 나와서 국군이 들어가 부상당한 인민군을 끌어내어 소원이 뭐냐? 하니 그 인민군은“조선 인민공화국 만세”를 3번 부르기에 총을 쏴서 죽였다.
그리고 나머지 1명은 방공호로 들어간 것을 끌어내어 부상당한 인민군을 아래 골에 데려다 너는 거제도까지 갈 처지가 못 된다고 하면서 총살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