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수상리 조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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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71회 작성일 2018-03-0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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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홍식 (남, 83세, 서면 수상리)
■ 면담일 : 201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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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15 양양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6 ․ 25한국전쟁이 발발하고 20일후인 1950년 7월 15일 양양중학교를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장에 이수 과목과 점수가 5단계로 표시되는데 품행점수가 불량하면(4점 이하) 졸업이 아닌 수료증만 받았는데, 1개 반에 3~4명은 수료증을 받았다.
아침학습 시간에 소년단, 민청생활,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였는데 남한은 부자만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깡통을 찰 정도로 거지가 많다고 했다.
학생 자치회는 소년단 위원장, 민청위원장, 벽보주필이 있었다. 제식훈련은 인민군 장교가 파견하여 지도하였고, 고등학교는 군사훈련을 받고 졸업하면 소대를 지휘할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입대하였다. 중학교 졸업할 때 비행기가 폭격하여 양양여중 솔밭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그 당시 정찰기가 하늘에 떠 다녔는데 전쟁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은 굴속으로 재빨리 피신하는 반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교사는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 학교에는 기마대가 주둔해 있었고, 그 말들이 대포를 끌고 이동을 했다.


양양중학교 교장이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덕원농립학교 교장으로 이동 발령이 났는데, 그 학교 교사가 강현중학교에 와서 덕원농림학교 입학시험을 보게 하여, 동급생 몇 명이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나는 그때 걸어서 덕원농림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밭에서 김을 매는 실습을 하는데 비행기가 폭격을 했다.
학교에서는 9월 20일 휴교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다시 친구 김석호와 하루에 100리 씩 걸어서 집에 왔다. 집에 와서는 부모님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각 학교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었다. 양양실천여학교는 기숙사까지 기마대대가, 상평학교는 기마중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인민군은 대포를 말이 끌고 이동하기 때문에 말이 꼭 필요했다.



◆ 인민군 패잔병은 민간인 옷으로 위장하고 가다.


국군의 진격으로 인민군은 쫓겨 가기 시작했다. 국군은 7번 국도를 따라 빠르게 진격하고 인민군은 산 쪽 길로 퇴각하는데 민가에 들어가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갔다. 각 학교들은 군인들이 주둔했다.
상평국민학교는 1개 대대가 주둔하여 학생들은 광산 빈집에서 공부하였다. 양양국민학교도 인민군이, 양양여자중학교는 인민군 기마대대가 주둔하여, 양양중학생은 2부제 수업을 했다. 덕원농림학교에 1개월 다니다휴교하여 집에 돌아와 농사일을 도왔다.
후에 국군이 입성하여 상평국민학교에 1개 연대가 주둔했다. 1 ․ 4후퇴후 남한은 자유스럽고 부자만 잘살고 자동차가 많다. 그러나 거지는 많아도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산다고 월남한 사람들이 돌아와 남한은 자유스럽더라고 알려주었다.



◆ 날씨는 춥고 잘 곳은 없어 타지 않은 변소에서 잠을 잤다.


면 치안대가 피란가라고 하여 떠났다. 외가가 토지를 몰수당하였음으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피란을 떠났다. 부모님은 그릇, 옷을, 나는 쌀 2말을 지고 부모님을 따라 삼척까지 피란을 갔다. 그때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았다.
1951년 1월 집을 태우는데 치안대가 태우지 못하게 말리지도 못했다.
2~3일전에 피란가야 하니 물건들을 꺼내서 밭에다 묻었다. 입을 옷만 두껍게 입고 2~3일만 있다온다고 저녁에 출발했다. 동네 사람, 친척들도 모두 피란을 떠났다. 날씨는 춥고 잘 곳은 없어 타지 않은 변소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 피란민 중에도 은연중에 남쪽 편 북쪽 편으로 갈리었다.


도시는 폭격을 하니 도시는 피하고 산길을 따라 피란을 갔다. 가는 도중에 골짜기에 빈집이 남아있어 그 곳에서 하루씩 자고 갔다. 구장(이장)의 말이면 절대적이었다. 피란민 중에도 은연중에 남쪽 편 북쪽 편으로 갈리었다.
강릉 작은 외가에 갔다. 3개월을 지내고 봄에 상평 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재로 변해 있었다. 집에 탄 자리에 남아있는 구들장 위에 움막을 짓고 피란가기 전 묻어두었던 쌀을 꺼내어 양식으로 했다.
국군이 또 후퇴를 하니 피란을 가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무자로 잡혀 오색령으로 식량, 탄알 등을 지고 최전선으로 날랐다. 약 20일을 노무자로 다니는데 어떤 사람은 현지에서 입대하였는데 나는 17세여서 집에 왔다가 또 간단한 짐을 지는 짐꾼으로 가자고 하여 또 총알을 지고 전선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결말이 나더라도 아무튼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사람만 희생된다. 한국 전쟁으로 일본만 부자가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 민족끼리 평화롭게 사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