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장승리 강봉진

페이지 정보

조회 1,318회 작성일 2018-03-09 14:05

본문

■ 강봉진 (남, 87세, 서면 장승리)
■ 면담일 : 2017. 6. 19


136 (2).jpg



◆ 모를 심으려고 논에 들어가는데 총 소리가 났다.


38°선이 그어지면서 강릉군 신서면 갈천리에도 집집마다 1명씩 배당되어 경비를 서게 되었다. 노인 ․ 청년 불문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경찰과 합동으로 경비근무를 하였다.
6 ․ 25전쟁 며칠 전 김두한과 황노인(봉관)이 보초를 서게 되었는데 한 명은 문을 지키고 그때 다른 한명인 노인은 안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었는지 나오지 않아 김두한이 찾아가서 아저씨! 하고 부르니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려고 하니 인민군이 총을 겨누며‘너 누구야!’하면서 김두한과 노인을 인질로 방안에 가두어놓고 그들은 칼국수를 먹고 못나오게 하고는 어디로 나갔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조용하여 밖으로 나와 경비대에 알려 몽둥이를 들고 서림 쪽으로 내려가니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4일이 지났다. 서림에 가서 쌀과 부식을 정족산에 있는 8사단 10연대에 운반해 주고 논에 모를 심으러 갔다. 그해 가물어서 좀 늦었으나 증골 논에 모를 심으려고 논에 막 들어가는데 총소리가 나서 늘 그러하듯 오늘도 붙었구나. 생각하고 모를 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총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자주 났다. 일꾼들은 일을 못하고 궁금해 하는데 사람들이 몰려온다. 김남원 면장이 와서 난리가 난 것 같으니 피란을 가라고 한다. 밥을 솥에 가득해 놨는데 어이가 없다.


136 (1).jpg


▲〈면담중인 강봉진씨 〉



◆ 내가 죽으면 우리 집은 대가 끊어진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쌀, 냄비, 장을 챙긴 다음 소를 끌고 산골짜기로 갔다. 거기 숨어 있다가 영을 넘어 명개리에서 밥을 먹었다. 집에 밥을 한솥 해놓고 영까지 넘어와 나무 밑에서 밥을 해 먹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동생이 7살인데 업고 가다가 창촌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매워 피란을 가는 것이다. 운두령에서 비가 심하게 쏟아져 비를 피해가려고 어느 집에 들어서니 못 들어오게 한다. 할 수 없이 찬비를 맞으면서 운두령을 넘어갔다. 그 젊은 놈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역의 빨갱이였다.
갖은 고생 끝에 영천까지 내려가니 쌀이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김남원 면장과 어느 기관에서 근무를 했다는 서면 영덕사람인 김학수가 그 지역 면장과 유지를 찾아가서 쌀과 곡식을 얻어와 피란민들에 끼니를 도와주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우리들을 위해 마을에 다니면서 밥을 얻어왔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영천 다리 밑에는 서림, 황이, 갈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보리를 베어주고 모도 심어주고 3일을 보냈다. 그 속에는 8사단 10연대 군인들도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적이 가까이 못 오게 싸우면서 피란민을 지키고 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군인을 뽑는데 지원하라고 한다. 한사람이라도 식구를 덜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피란을 더 나갈 수도 없는 것 같고, 나는 더군다나 자식이 없다.
내가 죽으면 우리 집은 문이 닫아(대가 끊어지다)진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 황이리 운보가 군인 가자! 하여 14명이 지원했다.
세 식구가 밥을 먹고 나니 군인이 데리러 와서 어머니께 말하고 차에 타니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다.



◆ 여름옷을 입다가 솜바지를 받으니 너무 좋았다.


며칠 후 바지저고리 입은 청년들이 엄청 많이 왔다. 거기서 대대를 창설했는데 형제는 물론이요 어떤 이는 부자가 온 집도 있었다. 옷은 민간인 옷을 그냥 입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서림경비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M1소총은 눈감고도 조작할 수 있는데 박격포는 처음이었다.
4일 동안 훈련 받고 9월 1일자로 군번을 받고 군복과 통다비[전투화]를 지급받아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낙동강 전투에서 양쪽 군인들이 많이 죽어갔다. 처음엔 총도 없이 전쟁에 투입되어 탄환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우리부대가 경기도 연천에 들어올 무렵에 M1총과 실탄을 몸 어깨에 감을 정도로 충분히 받고 수류탄 2발씩과 그리고 배낭과 밥 해먹을 항고까지 지급 받았다.
황해도 미처 못가서 높은 고지로 밤낮 없이 걸어서 이동했다. 취사병이 밥을 제때에 하지 못해 주먹밥을 배급 받았다. 10월인데 춥기 시작하여 솜이 들어간 방한복과 목인 긴 운동화 같은 전투화를 지급 받았다. 여름옷을 입다가 솜바지를 받으니 따뜻해서 너무 좋았다. 미군의 옷이라 너무 커서 줄 일수도 없었지만 젖은 옷을 말릴 시간도 없어 젖은 채로 졸면서 전진하였다,
평안북도 강계에서는 눈이 발목까지 왔다. 1개 소대씩 경계를 서는데 새벽녘에 어디서 나팔소리가 나니 전우들이 눈이 둥그레 가지고“이게 무슨 소리야”하며 연락병이 모이라 해서 가보니“이제부터 후퇴한다.”하니 모두 기가 죽었는지 맥을 못 쓴다. 얼마를 왔을까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해먹을 시간도 없고 신발이 젖어 발이 물 커서 말이 아니었고 쉴 시간도 없다.

밤중에 어느 마을에 들어가 밥을 하려고 하는데 나무도 없고 주위는 어두워 밥도 못 해 먹었는데 동이 트기시작하자 그냥 생쌀을 나누어 준다.
마을은 꽤 큰데 앞산에서‘따콩 따콩’하고 총소리가 나고 잠시 후에는 사방에서 따콩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는데 불과 몇 100미터 내에서 나는 소리였다.



◆ 그때 내 다리를 잡았던 전우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밥이고 나발이고 뛰는데 중대 작전관이“화력이 적은 쪽으로 뚫어라!”하면서 한쪽을 정하여 가라는 명령을 하니 모두가 은폐하기 적당한 방향인 2~3m 높이인 보둑 솔이 빽빽하게 들어선 쪽으로 몰려 뛰었다. 한참 뛰어 8부 능선까지 갔는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는데 여기서 아이쿠, 저기서 아이쿠! 하며 쓰러진다.
하늘에서는 소나무위에 쌓였던 눈이 흰 솜같이 날아다닌다. 그때 나는 몸이 후끈한 것을 느꼈는데, 같이 뛰던 옆 전우가 같이 가자고 발을 잡는다.
나도 느낌이 이상해서 몸 이곳저곳을 만지니 피가 손에 흥건하였는데 옷에도 피가 묻었다. 그때 내 다리를 잡았던 전우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보니 뼈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둔부 쪽인 엉덩이에 총알이 관통한 것 같아 압박붕대를 칭칭 감아 지혈을 하고 난후 총알 일부는 버리고 M1소총과 총알 1캔을 가지고 능선을 오른 후 골짜기를 내려가자 논이 나왔다.

이때 능선에서 군인들이 태극기를 매고 내려 왔는데 누구냐 물으니 ○○중대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수류탄이 터지면서 거의 다 죽었다. 먼저 가던 전우들은 죽고 뒤에 뛰던 전우들은 돌아서 논 쪽으로 뛰었다.

알고 보니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 태극기를 가지고 골짜기로 유인하여 수류탄을 던져 감쪽같이 적군에게 당한 것이다. 아픈 것도 잊은 체 동서남북이 어딘지 정신없이 얼마를 달렸는지 큰길이 나왔는데 그 지역은 평안남도 맹산지구로 기억된다.



◆ 도저히 갈 수 없으니 나를 죽여 달라 !


헌병이 보여 아군부대에 합류하니 부상병을 구별한다. 같은 소대원인 전라도 출신인 ○○를 만났다. 헌병이 확인해주고 차가 없으니 사과 1개를 주며 이쪽이 남쪽이니 걸어서 가라고 한다. 같이 온 전라도 ○○전우는 “너 혼자 못 간다고 때를 써라. 그러면 한사람 같이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헌병이“병력이 없어 안 돼!”하였다. 나는‘그럼 도저히 갈 수 없으니 나를 죽여 달라!’그랬더니‘그럼 한사람 데리고 가! 그래서 그 전라도 전우와 같이 가게 되었고 그 사람은 나를 50M쯤 업고 가다가 쉬기도 하였다.
소여물 때가 된 시간이 되자 마을이 나왔다. 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모두 피란을 가고 빈집들이었는데, 기차 길을 넘어 가더라니 한 집에서 연기가 났다. 회벽에 함석집인데 춥긴 하고 찾아들어가니 3칸에 반 퇴가 달린 집에 문이 걸려있다.
사람은 없고 불러도 안 나와서 문짝을 발로 차니 문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이 있는데 불을 때고 있다. 방은 깨끗하고 다담이 방인데 젊은 놈이 고개도 안 돌리고 불만 때고 있었다.
먹을 것도 없는데 왜 불을 때느냐? 물으니 대답이 없다. 그래서 불 때는 놈의 옷을 찢어 묶고 방안을 뒤지니 쌀이 있고 책자 같은 것이 있어 거기에 적혀있는 것을 자세히 보니 그 지역 인민위원장인 것 같은데 40~50살은 돼 보였다. 뭔가 불안한 마음에 밥도 못 해먹고 총소리를 내면 위험할 것같아 전라도 전우가 그놈을 칼로 찔러 죽이고 쌀을 가지고 나왔다.



◆ 아까정끼(머큐로크롬)만 바르고 마당에서 2일을 잤다.


그 다음 부터는 다리가 떨리고 걸을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오는데 멀리서 자동차 불이 보이면서 이쪽으로 다가와서 숨어서 보니 국군 지프차였다. 우선 차를 세워 타고 보니 장교 같은데 계급장은 없고 권총만 차고 있다. 우리는 그가 주는 건빵을 먹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그가 깨워서 일어나니“너는 이제 살았다.”하기에 눈을 떠보니 사방이 전깃불이 환했다. 어디냐고 물으니 여기가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이라 했다. 병원 직원은 거의 피란가고 없고, 같이 온 전우는 부대를 찾아 귀대하고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온다는 핑계로 후방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 피란가고 약 20명 정도의 환자들이 아프다고 야단을 치니 1시간 후 앰블런스 같은 차가 와서 열차 있는 데로 가니 사과 2개씩 나누어주고 열차를 태웠다.‘아 이제 살았다! 하고 잠들었다. 열차에서 내리니 대구 육군병원이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마당에 무시로(가마니를 뜯은 것)를 깔고 꽉 찼다. 아까정끼(붉은 소독약 : 머큐로크롬)만 바르고 마당에서 2일을 지새웠다.



◆ 강릉출신 군의관이 너 양양사람이구나!


다시 마산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병원은 3층짜리 고등학교 건물이다. 피가 마르니 옷이 뻣뻣해졌고, 난방은 석탄과 흙과 반죽을 하여 불은 때고 있었으며, 병상으로는 야전 침대를 2명씩 엇 거꾸로 사용했는데 나는 하필이면 동상에 걸려 살이 썩어가는 환자와 같이 침대를 쓰는 바람에 냄새가 코를 지독하게 자극했다.

내 상처는 둔부 쪽으로 총알이 맞고 빠져나가 피가 응고되었는데, 그때 병원 군의관이 키는 몽탕하고 야무지게 생긴 강릉사람인 최○○대위가 내 병부일지를 보았는지“너! 양양사람이구나.”하며 잘 해주었지만 둔부로 총알이 빠져나간 구멍에 심지를 박은 것이 성이 났는지 병원에 들어 온지 8개월 만에야 겨우 완치되었다.



◆ 마산병원에서 같이 입대한 고향사람인 창원이를 만났다.


그런데 상처가 다 나아갈 무렵에 이 마산병원에서 고향인 서림에서 피란을 같이 나왔다가 같이 입대를 한 창원이를 만났는데 창원이는 이병원에 환자로 들어왔다가 병원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퇴원을 한다니 나와 같이 퇴원을 한다고 하여 내가 야 니 좋은데 있는데 왜 나가려고 하느냐 하니 그래도 나와 같이 붙어 다니려고 퇴원을 한다기에 그럼 너 마 음 데로 하라고 하여 같이 퇴원하여 부산 제2보충대로 같이 갔다.
그 보충대에서 2일을 묵고 나니 싹 집합하라고 하면서 학력조사를 하는데 대졸, 고졸, 중졸 등으로 조사를 하는데 나는 왜정 때 간이학교를 다녔다는 생각에 에이 빌어먹을 놈의 거 아무것도 모르지만 중졸로 손을 들었다.

이때 창원이도 고졸은 너무 심하다고 하면서 중졸로 손을 같이 들어 나하고 같이 차출되어 차를 타고 어디론지 가는데 어느 군인이“야 너희들!
팔자고 쳤다.”고 하는데 우리가 공병학교로 간다는 것이었다.



◆“야 너희들은 이제부터 하루살이다”하면서 기를 죽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김해에 있는 공병학교에 입교하게 되자 당장은 전쟁터로는 안 가게 될 것 같았다. 공병학교에서는 지뢰 매설 법, 다리 놓는법, 철수하는 법 등을 교육받았다. 교육이 끝나고 5사단 공병대에 같이 배속되어 인제에 갔더니 입구에 붙인 구호가 한문으로 공격소대라고 써져 있었다.
나는 창원이 보고 야 너 인제 죽었다! 저 봐라! 구호 봤냐? 공격소대다.
아! 또 죽을 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부대에 들어가니 소대장이 그러는데“야 너희들은 이제부터 하루살이다”하면서 기를 죽이는데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간판만 공격소대지 대대 보초 선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부대에서 운전해본 사람 나와라! 하기에 저 운전합니다! 하고 나가니 나온 군인은 모두 30명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정 때 석탄 차를 보기만 했지 운전을 해본적은 없지만 손을 들었다. 그 중에는 입대 전차 조수를 한 사람도 나왔다. 그때 내가 운전병으로 가게 되어 창원이와 떨어지게 되자 섭섭하였다.



◆ 불이 번쩍 나게 얻어맞으며 20일간 운전을 배웠다.


그렇게 30명이 운전교육대에 입교하였지만 군기가 얼마나 센지 육군이등상사라는 작자가 교관인데 이놈이 얼마나 악질인지 잘못하면 군화발로 정강이를 차고 오른쪽 귀때기는 아주 내놔야 했다.
개뿔도 모르는 놈들이 운전을 할 줄 안다고 지원을 했으니 본인도 가르치는 것이 힘이 들었던지, 잘못할 때마다 펀치가 날아와 눈에서 불이 번쩍나게 얻어맞으며 20일간 운전을 배웠다. 도로 연습할 때는 인제에서 고성까지 다녔는데 출발하면 왜 그리 시동이 잘 꺼지는지 그때마다 잘 가르쳐 주지도 않고 벌부터 받았다.

도로운전교육 때 우리조가 탄 트럭이 간성에서 양양까지 운전해 오는데 어떤 전우가 낙산고개에서 교관이 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출발!” 하니 시동이 꺼지면서 차가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어찌할 시간도 없이 산 쪽으로 쳐 박혔다.
그때 나를 포함한 차에 승차했던 대원들은 차가 미끄러지기 전에 뛰어내려 다치지 않았고 다행히 한명만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얼마 후 렉카 차가 끌고 부대로 들어왔는데 이 사고를 겪은 후 부터 그렇게 악질적으로 굴던 이등상사는 사고를 당하고난 후부터는 대원들에게 심하게 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혹독한 운전교육을 마치고 육군 소위가 시험 교관이 입회하는 실기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여 군인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그 후 5사단에 수송부가 창설되어 강릉에 가서 차를 수령해 오라고 하여 강릉에 가니 GMC가 새카맣게 서있는데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하여 차를 인계받아 인제에 있던 수송대대는 영을 넘어 양양 낙산 조산학교 터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그 후 다시 거진으로 이동하여 5사단 각 부대에 보급품을 운송하는 업무를 수행하다가, 휴전이 되고 1년이 지난 후 지리산에 공비들이 준동하
자 5사단 병력을 지리산에 전투에 투입할 때 병력을 수송하고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진행 중 이던 1954년 5월 1일자로 제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