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림리 손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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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20회 작성일 2018-03-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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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종관 (남, 91세, 서면 서림리)
■ 면담일 : 2017.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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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4후퇴 때 소 4마리를 끌고 피란을 나갔다.


그 당시 서림리는 남한 땅이었는데 6 ․ 25전쟁이 나자 구룡령, 은두령을 넘어 속사리까지 피란을 나갔는데 인민군이 앞서나가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인민군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또 살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마을에선 지방 빨갱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1 ․ 4후퇴 때 피란을 가는데 소 4마리를 끌고 큰 소등에 질매를 얻고 쌀을 댓 말 싣고 나가다가 마을마다 피란을 떠난 빈집에 들어가 밥을 해 먹고, 소는 부엌에 매어놓아 눈을 피했으며 소도 전쟁이 나서 피란을 가는걸 아는지 잘 따라와 주었다. 당시 눈이 많이 내려 벽실령을 넘어 인구, 주문진까지 나갔으며, 옥계에서 피란하는 집에서 주인집 영감이 송아지를 잡아먹자고 하니 안 줄 없어 그냥 잡아먹으라고 주고 나니 이제 소는 큰 소만 남았다. 그 집에서 1박하고 묵호로 가서 냉촌에서 1주일을 묵었다.
울진까지 나가면서 식량이 떨어지자 얻어먹으며 가다가 밥을 얻지 못하면 굶기도 했는데 7남매에 부모님까지 식구가 10명이나 되어서 밥을 얻어먹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소를 잡아먹자고 하여 돈을 조금 받고 소를 잡아 고기를 팔기도하고 그냥 주기도 하였고, 또 군인들이 황소를 250만원에 팔라고 해서“너희들 그냥 먹겠다는 거냐? 너희들 부모님 생각 안나?”하면서 다투다 5만원을 더 받고 팔았다.



◆ 인제 백봉령으로 가서 차가 다니는 도로에 제설 작업을 했다.


그 당시 서림은 강릉군에 속해있었는데 신서면장 김남원과 같이 피란을 나왔는데 김남원 면장이 어디서 들었는지 이제는 더 갈 필요가 없다고하여 부모님과 동생들은 그곳에 두고 우리 부부와 여동생이 먼저 들어오는 도중에 안인에서 피란민 중에 인민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있어 미군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강릉 경포대까지 오니 국군 8사단이 주둔해 있는데 우리 부부는 군부대에서 밥을 해서 날라다 주는 일을 했고, 동생은 밥이나 얻어먹으라고 남의집 아기 보는 집에 보냈다. 안인에서 국군이 나를 필요하다며 같이 가자고하여 할 수 없이 인제 백봉령으로 가서 차가 다니는 도로에 눈치는 일을 시켰다. 거기서 동네사람인 김동준과 이장영을 만나 눈을 치는 일을 하고 강릉 성산에 내려왔는데 오늘밤 전쟁이 있을 것이니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조심하라고 국군이 알려 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인민군의 습격으로 전투가 벌어지자 우리는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한참을 있다가 조용하여 일어나 보니 군인들이 후퇴를 하고 있기에 그들을 따라 강릉으로 돌아오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집으로 가다가 잡히면 또 군인을 따라가서 부역을 해야 하므로 증명을 해 달라고 떼를 썼더니‘귀향증’을 해 주어 물어물어 가족을 찾아다니다 천신만고 끝에 삼척 동막골에서 가족을 만났다.



◆ 총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 후 명예제대 했다.


우리는 전쟁을 목격하고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전방 지역은 너무 무서워 온가족이 울진으로 다시 나갔다. 울진에서 1개월을 묵으면서 아버지가 소를 키우기가 힘들다고 팔자고 하여 아버지가 소를 팔아 피란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냉촌에서는 먹을 게 없어지자 남의 집 머슴을 살아 1년 농사를 지어주고 쌀 3가마니를 받고 다음
해에는 5가마니를 받기로 했는데 군입대영장이 나왔다.
마침 경포지서 주임이 손 씨인데 집안 아저씨였다. 경찰서에서 배를 내어 제주도 훈련소에 가니 동네사람이 몇 명 있었다. 훈련소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하사관학교에 입교했다.
하사관 교육이 힘든 건 알았지만 일선으로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자청하여 2개월 동안 하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8사단으로 배치되었다.
2살 아래인 동생뻘 되는 동료 보고 전투 중에 부상자가 생기면 무조건 그 부상자를 부축하면서 환자를 따라 후송을 같이 하여라! 그래야 오래 살수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17세에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다시 나는 1사단으로 발령을 받아 경기도 고양에 가서 보니 사병들은 죽고 없는지 장교들만 남아 있다. 예비부대에 배치되어 후방으로 나왔는데 부대에서 빠리 빠리 한 사람 7명을 뽑아 특공대로 선발되어 밤에 인민군 초소에 침투하여 적군을 생포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야음을 타서 침투하였다.
철조망을 넘어야 하는데 보초는 졸고 있는 듯 적막이 흐르고 있다. 나무를 주어다 철조망을 누르고 첫 번째 침투요원이 넘다가 호에 빠져 죽고, 두 번째 요원은 철조망에 다리가 걸려 지뢰가 매설된 것을 건드려 터지자 그때 보초가 깨어나 다발총을 난사하여 여러 사람이 다쳤다. 나는 목에 총알이 지나가고 손에도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M1 소총을 잡았는데 피가 꿀꺽꿀꺽 하고 나오는 것이다.
다발총알은 계속 날아오자 대원들은 납작 엎드려 뒤로 기어 내려와서 점검을 하니 1명 사망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나는 바로 헬리콥터로 대구 27육군병원으로 후송 1개월 후 명예 제대하였다. 지금도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 다 올라가지 않는다. 전상군경 7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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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관씨 명예제대증 (앞면) 〉                                                      〈손종관씨 명예제대증 (뒷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