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선리 이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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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70회 작성일 2018-03-0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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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형 (남, 82세, 서면 서선리)
■ 면담일 : 201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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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작을 팔러갔다가 소와함께 짐꾼이 되어 정족산으로 갔다.


소에 질매[소나 말의 등에 얹어 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안장]를 매어 장작을 싣고 친구 3명과 양양에 팔러 내려오니, 고모가“너 지금 어느 때인데 장작을 팔러 왔느냐!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하여 장작을 고모 집에 두고 서선리 집으로 오다가 내곡리 논에 주둔해 있는 한 군인이 나를 잡아놓고 하는 말이 이 탄약을 소 질매에 싣고 산으로 가자고 한다.
겁에 질려 못 간다는 말도 못하고 탄약통(M1총탄)을 소 질매 한쪽에 3통씩 6통을 싣고 따라 오란다. 탄약통은 쇳덩어리여서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수동 정족산으로 올라가는데 헐떡거리는 소가 불쌍했다. 탄약을 내려놓고 내려오니 이번에는 또 수동에서 밥을 싣고 올라가란다. 주먹밥을 보자기에 싸서 가마니에 넣어 질매에 싣고 올라가니 날씨가 추워 주먹밥이 모두 얼어 있었다.
이렇게 집에도 못가고 5일 동안 밥과 탄약을 날랐는데, 얼마 후 공산군이 다시 쳐 내려온다고 하여 국군이 후퇴를 하면서 동네마다 불을 질러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다 피란도 못가시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내 나이가 15세였다.
사촌이 HID 부대에 있어 그를 따라 피란을 떠났는데 강릉 강문에서 피란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군인이 소를 잡아먹고 머리를 버렸는데 그 것을 솥을 걸고 삶아 먹기도 했는데 겨울이라 소머리가 며칠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맛있게 먹은 것은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 따발총을 맨 인민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큰 외삼촌을 만나 다시 저녁부터 걸어서 고향으로 들어오던 중에 따발총을 맨 군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작은 외삼촌을 빈집으로 데려가서 간첩이라고 잘못 알고 취조를 했는데 다행이 오해가 풀려 나오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걸어서 양혈리에 오니 날이 훤하게 새는데 인민군은 초소에서 졸고 있었다. 우리는 이 동네 할머니가 있는 집에 들어가 아침밥을 얻어먹었다. 그러나 낮에는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그 집에 숨어 있다가 해질녘에 용천 외가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서선리 집에 왔다. 집은 모두 불에 탔지만 어제가 보름이었다며 그나마 불에 안탄 이선형 집에 모여서 두부를 해먹었다.



◆ 할머니는 우리가 모두 죽었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3월이 되자 국군이 다시 들어왔다. 그때 국군 HID가 나를 보고“너 화일리에 가서 인민군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와”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화일리로 가서 숨어서 보니 인민군은 20명 정도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내려오다가 권총을 찬 인민군 대장과 마주쳤다. 그가 한 사람씩 서라고 하고는 “너희들 왜 여기 왔는지 솔직하게 말하라”라고 하여 우리는 왜왔는지, 누가 시켰는지 다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따라 오라고 하여 둔전리 쪽으로 길도 없는 산으로 가는데 어떤 노인을 잡아와서는 그 노인을 안내자로 앞세워 송암산으로 올라가다가 다행인지 우리(서선리 2명, 장승리 3명)를 보고 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돌아서면 권총으로 쏠까봐 돌아서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뒷걸음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다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돌아왔다. 집에서는 할머니가 우리는 모두 죽었다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 산위에 떨어지는 보급품은 국군이, 산 아래는 인민군이 받아먹는다고 했다.


1952년 3월 강릉 안인에 피란을 갔다 와서 국군만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가면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군이 와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여 논화리로 가니 거기는 이미 짐꾼으로 모집한 사람들이 수십 명이 있었다. 내 옆에 연곡이 자기 집이라 하는 아저씨가 전선을 지고 앞에 가면 그 뒤로 군인은 손으로 줄을 잡고 풀어가며 전화 줄을 땅에 깔면서 설치한다.
나는 선임하사 배낭을 지고 대공포판(4~5m×1m 크기의 두꺼운 천으로 비행기가 아군을 알아보라고 펴놓는 표지판)을 말아 매고 따라갔다. 백담사 쪽에서는 11사단이 패하여 외설악산으로 넘어온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대공포판을 보고 보급품을 떨어뜨리면 산위에 떨어진 것은 국군이 받아먹고 다른 쪽에 떨어진 것은 인민군이 먹는다고 했는데, 골짜기에는 인민군이 있어 내려가지 못했다. 그 당시 수도사단 1연대 10중대 화기소대에서 내가 짐꾼으로 일을 하던 부대는 전진을 못하고 대관령으로 후퇴한다고 했다.
그 후 우리 부대는 설악산 둔전리 안 골짜기에서 적군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아군의 총알이 떨어져 총을 쏠 수 없게 되었는데 미군 고문관이 권총을 중대장에게 주며 자기가 잘못하여 보급품을 못 받아 이 지경이 되었다고 자기를 쏘라고 했다. 하지만 중대장은 쏘지 못했다. 그때 미군의 군법이 엄격하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