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월리 김충호

페이지 정보

조회 1,391회 작성일 2018-03-09 15:31

본문

■ 김충호 [(남, 80세, 양양읍 월리) 현재 속초시 금호동]
■ 면담일 : 2017. 5. 4


109 (1).jpg



◆ 인민군들이 탱크를 아카시아 숲속에 감추어 놓았다.


나는 지금은 속초시 금호동에 살고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남대천다리건너 월리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7살 때 구꾸민 가꾸(소학교)에 다녔다. 해방되면서 다시 인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북한 교육을 5년 받았는데, 그때 월리에서 학교로 건너다니던 남대천다리는 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리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특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은 바람에 날려 갈까봐 겁을 먹고 학교에 다녔는데, 그렇게 5년간 학교를 마치고 9월에 초급중학교에 진학 하였는데 그때 15여 명의 동네 친구들과 같이 다녔다.
1950년 3월부터인가 그때는 양양 남대천 변에 제방 둑은 없고 철망으로 제방 둑을 대신했고 아카시아 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당시 인민군들이 기차에 탱크를 수십 대 싣고 와서는 아카시아 숲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못 보던 탱크가 나무숲에 있으니 시간이 나면 가서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 그때는 천이 귀했던 때라서 인민군이 쓰다 버린 발싸개를 주어서 씻고 실로 꿰매서 신고 지가다비(찌까다비)도 구멍이 뚫린 곳을 잘라내고 꿰매서 신으로 신고 다녔다.



◆ 아침에 일어나니 작은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그 탱크가 어디론지 다 사라져 버렸다. 시내에 가서 들으니 우리 군대가 남조선을 쳐 내려가서 부산만 점령하면 통일 된다고 선전이 대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둘째형이 집에 오더니

“아버지 저 인민군대에 가겠습니다.”
“야 ! 니가 뭐 군대이야.”
“아버지, 지금 가야 북조선이 남조선을 다 차지할 수 있어요.”
“니는 어려서 안 돼!”
아버지와 형의 그런 말이 오가고 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작은 형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형의 나이는 16세였다. 그 당시 그렇게 인민군으로 나간 사람들 중에는 도중에 내려서 다시 돌아와 군청에 다닌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작은형을 생각하곤 했다.
전쟁 중에도 우리는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면 게시판에 인민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벽보가 붙어있어 계속 이기는 줄 알았다. 그러던 중 비행기 폭격이 심해지면서 마을사람들은 굴을 파놓고 비행기 소리만 나면 굴속으로 숨었고, 비행기 폭격으로 학교가 불타면서 흐지부지 학교에 못 가게 되었다.
그해 10월이 되면서 우리는 국군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동네 빨갱이들은 다 북쪽으로 피란을 갔고 나는 남쪽 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른들 틈에 끼어 구경하러 시내에 나가보니 푸른색 옷과 둥그런 철 모자를 썼는데, 사람들은 국군을 보며 만세를 부르자 나도 만세를 연호했다.


109 (2).jpg


〈면담중인 김충호씨 〉



◆ 눈이 쌓여 봉긋한 곳을 파서 무나 감자를 꺼내 먹었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소문만 듣고 학교에 나가게 되어서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다. 교과서는 선생님만 있고 우리는 공책에 베껴서 공부하며, 12월까지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1월 초가 되면서 소문이 뒤숭숭하더니 피란을 가야 한다고 하여 이불과 쌀을 준비하여 동생과 나도 짐을 지고 아버지를 따라 피란을 떠났다.
손양면 금강리 기와집에 가서 묵었는데 밤에 소변보러 밖에 나오니 양양 쪽이 낮처럼 환하게 시내가 불타고 있었는데, 이 불은 국군이 인민군들이 추위를 피해 들어가 기거하지 못하게 집들을 다 태워버리고 후퇴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시 피란을 재촉하며 가는데 길이 안 좋아 철길을 따라 걷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집이나 들어가 밥을 해먹고 날이 밝으면 떠나고 하여 삼척 효가리 까지 갔는데 발이 다 얼었다.
처음엔 시리다가 나중에는 감각이 없었고, 강을 건널 때 마다 다리가 없어 물에 빠져 건너다보니 발이 얼어 1.5~2도 정도의 동상이 걸렸는데, 지금도 추우면 발이 퍼렇게 된다. 그러다가 눈이 쏟아지면 빈집에 들어가 눈을 피했으며 집 주변에 눈이 쌓여 봉긋한 곳을 파면‘무’나‘감자’가 있어 그것을 꺼내 먹었다.
그렇게 겨울을 떠돌다 1951년 봄이 되어 양양으로 돌아오니 집은 형태도 없고 재만 남아있었다. 아버지와 재를 긁어내고 함석을 주어다 움막을 지었다. 농사를 지어야 하니 아버지가 어디서 구했는지 볍씨를 얻어다 못자리를 만들고 농사준비를 하였다.



◆ 박태송이라는 어른과 인연이 되어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 즈음 학교를 연다고 하여 갔더니 중학교 1학년에 다니라고 한다. 위로 2~3학년은 없고 1학년이 60명씩 3개 반인데, 학교는 건물도 없었고 책도 없어 선생님들은 가리방(줄판)을 긁어 등사하여 교과서로 사용했다.
교실이 없으니 넓고 평평한 곳을 찾아다니며 바닥엔 가마니를 깔고 궤짝 같은 것을 책상삼아 1~2시간동안 국어와 수학을 배우다가 학교 짓는데 동원되었고, 당시 미군이 제공하는 좋은 목재로 학교가 지어지게 되자 학교는 하루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3년을 다니고 나니 1955년 2월 양양중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식 전에 이미 다른 학생들은 양고로 가느니 강릉으로 가느니 하며 진학 희망을 적는데 나는 진학을 못한다고 이야기 했다.
졸업식에서 나는 3년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았다. 학사보고에 다른 학생은 고등학교 입학이라고 써져 있었는데 나는‘가사’라고 적혀있었다. 우리 집은 1954년 9 ․ 13수해를 입어 집과 논밭을 모두 잃고 학교에 내는 공납금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어서 나는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은 사진을 찍고 어수선한데 친구가 스피커에서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전해준다. 나는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시며 어떤 어른을 보고는“이 학생이 김충호 라는 학생입니다.”하면서 선생님이 나보고 인사하라고 하신다.
선생님은“충호야, 이 분이 너의 고등학교 전 학년 학비를 대 주기로 하셨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나니 그 어른께서 나를 강당 뒤편으로 데려가서“그래, 니가 김충호냐? 내가 너를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 까지 공부를 시켜주마, 오늘부터 짐을 싸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기거 하도록 해라.”하고 지원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 어른이 박태송씨 이다.

졸업식장에 홀로 참석하신 어머니께 이 같은 정황을 말씀을 드리니 나는 물론 이지만 어머니도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도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다. 집에 와서 그날 저녁에 어머니가 싸주신 홑이불 한 채를 싸들고 박태송씨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남대천 다리를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 바로 북진 양조장인데 넓은 벌판 같았다.

이렇게 하여 졸업식장에 참석하신 박태송이란 어른과 인연이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분은 북한에서 월남하실 때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들을 두고 월남하시어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가사를 돌본다는 말을 듣고 나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 보은을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 1982년에 충정장학회도 만들었다.


졸업을 앞두고 담임을 맡은 이운종 선생님이 나를 불러“공부를 잘하는데 왜 고등학교를 못 간다고 하느냐?”고 물어서“지난해 수해로 집과 논밭을 모두 잃어버려서 도저히 고등학교를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백찬오 교장선생님도“똑똑한 아이를 고등학교를 못 보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육성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졸업생 진학상황이 보고되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는 학생이 서너 명 된다고 하였단다.
이 자리에서 당시 양조장을 하시던 박태송 사장에게“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는 학생을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니 박태송씨가 흔쾌히 승낙하고“내가 학생 한명을 도와 줄 테니 누구를 도와주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하여 이운종 선생님께서“김충호라는 학생이 공부도 잘하는데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진학을 못 한다”며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나는 졸업식장에 참석한 박태송씨가 즉석에서 나에게 학비를 대 준다고 한 줄 알았는데 사전에 학교에서 추천을 한 사실을 후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들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양조장 일을 도와드렸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 학비까지 대 주시어 내가 약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약사가 되기까지 나를 도와 주셨다.
나는 그 보은을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 1982년에 충정장학회도 만들었고 1969년부터 속초라이온스클럽 활동을 시작하여 1976년 속초회장을 역임하였고 1990년 강원지구 라이온스클럽 총재를 맡아 활동 등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한 은인이 되어주셨다.
고 박춘섭, 박태송 씨의 체험수기 이 글은 김충호씨가「설악신문」과 자서전의『사람이 재산이다』를 참고한 증언 내용입니다.



◆ 나와 형님은 고향에서 국군 수색대와 치안대 활동을 했다.


우리 가족은 인공치하에 함경북도 경성군 무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형님이 김일성을 나쁘게 말하다가 청진교도소에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형님과 우리 가족은 요주의 인물로 주목되어 어디 가서 마음대로 말도 못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1950년 6월 전쟁 발발하자 김일성군대는 기세 좋게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으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압록강에 인접한 중국접경지대에서 유엔군과 대치하게 되면서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를 당시 나와 형님은 고향에서 국군 수색대와 함께 치안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 상황이 바뀌어 국군이 남으로 후퇴할 때 우리 가족은 월남을 결심하고 달기(썰매처럼 소가 끌고 다니는 기구)에 식량을 싣고 명천까지 내려와 하루 종일 걷다가 해가 지면 집을 찾아 들어가 잠을 자고 다음날 일어나 다시 걸어서 성진 이명령 까지 내려왔다.
인민군이 2km 근방까지 쫓아오게 되자 도저히 가족과 함께 월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길주군 동해면에 고성철이란 사람의 집에 가족을 두고 전쟁이 끝나면 만나기로하고 형님과 나는 국군 수색대와 같이 이명령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이 내려오는 것을 저지하려고 경계를 서고 있는데 새벽에 갑자기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 형님과 나는 각자 다른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


산 고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성진 항구까지 약 4km는 되는데 바로 눈앞에 적군이 처 들어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느냐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치안대장이 개별로 행동하여 성진 항구까지 도착하라고 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정신없이 부둣가에 도착하니 LST 배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미 배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라 사람을 밀치고 겨우 올라탔다. 어떤 사람은 올라타려고 밧줄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때 형님은 운 좋게 피란민을 가득 태운 LST를 타고 며칠 만에 도착한 곳은 경남 방어진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배를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마침 부둣가에 목선이 하나 있는데 궤짝을 싣는 것을 발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캄캄한 바다에서 그 배를 향해 뛰어 들어 가니 좁은 배에 사람이 서로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때 서로 밀고 부딪치고 하다가 어떤 부인의 발을 밟아 아프다고 야단을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배 아래에 밀가루 포대를 깔고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데 헌병인지 군인인지 나에게 내리라고 한다.
그때 헌병을 껴안고 난 치안대를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내리면 죽는다.
나는 남쪽에 가면 젊으니까 군대도 갈수 있고 국가에 헌신할 수 있다고 큰 소리로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군인도 난처했는지 배 한쪽 구석에 가서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배가 웅~ 하고 소리를 내며 떠날 때 그 소리 듣고 이제는 살았다 하고 안도의 숨을 쉬고 배 안에서 감격해서 울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달래는데 바로 어량면 수남리에 살던 장기치라는 사람인데 치안대에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으로 서로 잘 아는 처지라 동반자가되어 같이 월남해 그와 원주로 갔는데, 그때 내 나이는 24세에 단신으로 월남하게 된 것이다.



◆ 원주 시장에서 우연히 동생을 만나 형제가 상봉을 했다.


LST를 타고 월남했던 형님은 그 후 서울로 올라와 그냥 밥을 얻어먹으며 생활하다가 원주로 내려와 시장에서 돌아다니다 우연히 동생인 박춘섭 이를 만났다. 이것은 천우신조요 조상이 돌본 것이라 생각했다. 형제는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어떻게 든 먹고 살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원주에는 이주일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이때 장기치는 이주일 장군을 따라갔고 우리 형제는 어떻게 수소문 끝에 조카인 박승하가 수도사단 1연대 중대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카가 주문진에 있다고 해서 밤에 부식차를 타고 강릉을 거쳐 주문진에 가서 조카를 찾으니, 양양에 있는 조카와 연락이 되어서 조카가 월리에서 차를 보내주어 양양으로 들어와 조카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 나무로 만든 함지박을 쓰고 공습지역을 벗어났다.


그러나 전쟁이 한창 이라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군복을 입고 군인을 따라 다니며 취사 노역을 해서 밥 먹는 건 걱정이 없었다. 어떤 때는 전투를 하는데 일선고지에 올라간 군인에게 밥을 공급해야 하는데 주먹밥을 만들어 지고 가는데 지고 갈 사람이 없으면 피란 온 사람을 불러서 지고 올라갔다.
다음날 새벽에 먹을 밥을 전날 오후 3∼4시에 해서 총을 메고 운반하는데 중간에 암호가 바뀌기도 하여 암호를 대는데 엉뚱한 거를 대서 아주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가다보면 조명탄이 펑펑 쏘아 올라가는 최 일선을 쫓아 다녔는데 그때 죽었다하면 개죽음인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요행히 살아나기도 했다.

양양 인구 지경리로 후퇴명령이 내려서 현지에 도착했는데 비행기 표식이 잘못되었는지 밥을 먹다가 비행기공습을 받아 솔잎이 많은 데는 불이 나기도 하는 상황에서 나무로 만든 함지박을 쓰고 공습지역을 벗어나왔다.
그때 기관총 맞았으면 즉사할 수도 있는 그런 난리를 다 겪고 살아났고, 대관령과 연곡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이 경기도 가평까지 내려 왔다는 통신을 듣고 부산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진격하여 진부령에서 전쟁 지원을 하다가 1953년 7월 휴전이 되어 후방으로 나왔다.



◆ 소금장사와 화랑담배 장사를 하다가 술장사를 시작했다.


군에서 나오니 뭘 먹고사나 그래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소금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 수복지구는 군인이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된장, 고추장을 다 사서 먹었고 피란 갔다 온 사람들이 당장 나물이라도 무쳐 먹으려면 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강릉에서 군인 차에 소금을 싣고 양양에 들어오면 잘팔렸다.
소금을 팔아 돈을 가지고 묵호에 가서 화랑담배를 사 가지고 와서 군부대에 가 팔면 잘 사는데 그때는 군인들에게 화랑담배가 보급이 잘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술장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냐하면 강릉 금학동 집에 피란을 하고 있는데 주인집 할머니의 권유로 당시 가지고 있던 300원으로 쌀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강릉 구정면 대관령 가는 길에 누룩 파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차도 없이 걸어가서 누룩을 사서 짊어지고 다시 금학동까지 걸어서 왔다.
그 할머니는 쌀을 찌고 누룩을 빻아서 버무려서 막걸리를 만들어서 윗물인 청주는 바께스에 담아 강릉시장에 나가 팔면서 강릉에서 술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형이 인천인가 어디 갔다가 뭐 좋은 사업이 없나 찾아보고 돌아와서는 술장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강릉에서 술을 만들다가 규모를 좀 키워야겠다고 해서 양양에 집을 하나 세를 내어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기로 하고 기술자도 영입했는데, 성이가 씨이고 이름이 창인 그 사람을 기술자로 영입해서 판자에서 함석을 벗겨내고 보일러를 만들어서 술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처음에는 술을 만드는데 엉터리였다.



◆ 북진상회 북진양조장을 동광상회 동광양조장으로 바꾸었다.


밀을 벗겨내서 보일러에 넣고 열을 가하니 판자에서 벗겨낸 함석이라 김이 새고 말았다. 증류식으로 소주를 만들려면 밀 빻은 걸 반죽해서 발효시키고 다시 끓여 김을 냉각시켜야 한다.
그런데 김이 다 빠져나가는데 어떻게 소주를 만들어? 분쇄기나 제분기도 없고 처음에는 소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제대로 몰라 밀을 통으로 그냥 넣었다.
그때 이웃 다리 밑 이 씨네 할아버지가 술 만드는 걸 보고는 하는 말이 “함경도 놈들 재간이 용하긴 용타, 술은 술대로 나오고 밀은 밀대로 나온다.”하며 비웃기도 했어. 그러니 처음에는 술이 아니라 거의 맹물을 갔다 팔아먹은 셈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소주를 만들게 되었고, 그때 나는 군복을 입었으니까 소주를 드럼통에 담아서 지나가는 차를 손을 들어 세우면 태워주어서 주문진에도 가고 강릉에도 가서 호수를 뽑아서 나눠주고 팔아 달라고 하면서 거래처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북진(北進) 양조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던 중 양양시내에 백주에 간첩이 나와 한 놈은 사살되고 한 놈은 생포되었다. 바로 우리 집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 북진상회라는 상호를 쓰면 어느 날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동녘 동(東)자 빛 광(光)자를 써서 동광상회라고 상호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양조장을 형님과 같이 하다가 나중에 형님이 처남과 둘이 공장에 있게 되자 형님이 한곳에 여럿이 있으면 나중에 형제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나보고 도매점을 개설해서 나가 팔라는 거야? 그래서 형님은 술을 만들고 나는 판매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하게 되었다.

동광 양조장에서 술을 생산하고 동광상회에서 판매하게 되자, 우리 형님은 돈이 좀 생기니까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속초 청호동과 지금의 고성군 죽왕면, 토성면이 모두 양양관할이라 그때 그 지역의 어려운 분들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 형님이 동해일보를 창간했다.


형님은 1952년 4월 15일 황폐한 수복지구 주민들에게 복구의 힘을 복돋워 주기 위해 국민회 속초지부 회관에서 동해일보 신문사 창립식을 갖고 4월 17일 등사판으로 밀어 500부를 발행했다.
창립 당시 사장은 김진익(후에 대포국민학교 교장)씨가 총무국장은 박천복이 맡았다. 당시 강원도에는 강원일보, 속초에 동해일보, 강릉의 강릉일보 3개 신문만 있었고, 얼마 후 형님은 1952년 8월 1일 동해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발간하다가 1953년 6월 18일부터 활자로 된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1953년 8월 5일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형님은 1955년 7월 1일 강릉일보사 사장도 겸임하였고, 동해일보는 행정수복 후인 1954년 11월 17일까지 발행하였으나 1955년 공보처의 발행허가를 받지 못해 중단되었다.
1954년 6월 25일자 동해일보 기사를 소개하는데, 그해 5월 10일에 세워진 수복기념탑에 새겨진 장호강 시인의 시(詩)인 모자상부(母子像賦)가 실렸다.
이 시에는 어머니와 아이인 철이의 대화가 나온다.

어머니! 우리 집 앞뜰 복사꽃도 이젠 피었겠지?
아무렴 제비도 처마 끝 깃에 나래를 슁리꺼야.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살아계실까.
아무렴 너를 만날 때까지는 살아 계셔야지.
그러나 1983년 4월 27일 강풍으로 파손 된 것을 복원하여 1983년 11월 17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장호강 시인이 모자상부 글을 새로 썼다.
그 후 형님은 1956년 5월 1일 양양군 군민회장에 피선되었고 1960년 7월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낙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