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군행리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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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53회 작성일 2018-03-0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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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남, 72세, 양양읍 군행리)
이 글은 초대 양양문화원장 김종극 씨가 생전에 쓴『풍상구십평생행적소회록(風霜九十平生行績所懷錄)』 일기중의 일부내용을 옮긴 글로 자제분인 김구씨가 제공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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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마등령을 넘어 5일 동안 걸어서 춘천에 도착했다.


나는 1905년 강현면 중복리 서당집 김좌배(金佐培) 공의 넷째 아들로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맏형[김종섭(金鍾燮) 서당훈장]에게 한문을 배워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16세가 되던 1920년 맏형의 권유로 남궁억 양양군수가 군행리 구 객사(舊 客舍)에 설립(1905년)한 현산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 12월 4학년 2학기 말 야간에 현산학교가 불에 타고 그 앞에 있던 양양의 명물인 태평루(太平樓)가 전소되어, 3학기부터 구교리에 건설한 새 학교로 옮겨서 다녔다.
그 후 보통학교(현산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때인 1923년 3월 중복리 집을 떠나 설악산 마등령을 넘어 주막여인숙에서 숙식을 하며 5일 만에 춘천에 도착, 그해 4월 춘천사범학교 응시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3월 25일 춘천사범학교 제1회로 졸업하고 공립보통학교 훈도자격증을 취득하였다.
1925년 3월 31일 강원도지사로부터 근무지를 지정받은 울진군 매화보통학교를 시작으로 홍천보통학교, 원주보통학교, 원주황둔간이학교, 춘천학곡간이학교를 거처 1942년 교직생활 17년 만인 37세에 회양군 이포학교 교장과 양양 강현인민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47년 6월 월남 후 강릉성덕학교, 묵호학교, 연곡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6 ․ 25 한국전쟁을 맞았다.



◆ 1950년 6월 25일 남침인줄 모르고 2~3일만 피하면 된다고 했다.


1950. 6. 25 연곡 학교에 온지 10개월 만에 6 ․ 25전쟁이 터졌다. 6월 25일 아침식사 후 학교주변 공지에 깨 모종을 하느라 라디오도 듣지 않고 모종에 열중하였다. 또 안개가 자욱하여 동서를 구별할 수 없었다.
아침 10시가 되니 북쪽 인구방면의 피란민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무슨 영문(令聞)인지 모르고 왔다가 가는 것이다. 12시가 되니 헌병이 총을 들고와서 피란민들을 감시한다. 헌병에게 사유를 물으니 오히려 화를 낸다. 학교 선생들과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 지서에 물으니 괜찮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피란민은 대거 왔다가 곧 떠난다. 시시각각으로 연락하여도 시종일관(始終一貫) 괜찮을 것이라 한다. 저녁 7시가 되니 연락이 오기를 사이렌이 나거든 피란가라는 것이다. 나는 지서에 가니 이미 주문진 경찰서장도 부하를 데리고 피란하는 것이다.
나는 관사에 와서 대강 식사 도구만 가지고 가족을 데리고 피란길을 떠났다. 그때 약 2~3일만 피란하면 된다고 한다. 살림살이 물건은 그냥 두고 문만 잠그고 떠났다. 오후 7시 사이렌이 들린다. 피란보따리를 짊어지고 연곡을 떠나 경포로 향하였다. 밤은 깊어가고 길은 어두우나 연곡 사람의 피란 대 행렬 뒤를 따라갔다. 모두 간단한 보따리다.
6 ․ 25남침인지도 모르고 떠났으며 2~3일만 피하면 된다기에 캄캄한 길을 뒤따라가니 한심할 따름이다. 밤 10시경 경포에 도착하니 학교는 피란민으로 꽉 차있었다. 우리 일행도 교실 1칸에서 뜬 눈으로 새웠다. 헌병이 와서 질서와 안보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새벽 한시가 되니 피란민은 떠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회(下回)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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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극 씨가 생전에 쓴『풍상구십평생행적소회록(風霜九十平生行績所懷錄)』〉



◆ 6월 26일 인민군이 옥계에 상륙 옥계제방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아침밥은 면에서 주먹밥을 주어 얻어먹고 아침 9시쯤 되어 경포제방에 가보니 군대가 왔다 갔다 하며 반격작전을 취한다고 훌레복는다. 피란민들은 모두 강릉 방면으로 떠났다. 우리일행도 사이 길로 강릉교동에 오니 군인 한 사람이 다리를 질질 끌고 쩔룩거리며 온다.
이 군인은 인구방면에서 적군에게 한방 맞은 모양이다. 이 광경을 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피란민의 집결소는 강릉국민학교이다. 우리 일행가족도 학교로 들어갔다. 답답하여 경찰서에 있는 조카 김관수에게 물으니 아직 상황판단을 못하고 정세 불리한 것으로 말한다. 6월 26일 밤은 강릉국민학교에서 신세를 진다.
인생은 먹는 동물이다. 강릉부인회가 총동원하여 주먹밥을 주었다. 면식이 있는 부인이 있어 특대(特待)를 받았다. 통행이 금지되어 우리 안에 갇힌 몸으로 꼼짝달싹 못하고 하루 밤을 새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북한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인구방면으로 육박하고, 강릉 남쪽 해안가 옥계에 상륙하여 옥계 제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우리 경비대는 강릉에 집결하는 중이라 한다. 이때 강릉에는 제8사단이 있었다.



◆ 6월 27일 안인방면을 내다보니 대포소리가 꽝꽝 대포불이 번쩍번쩍한다.


악몽의 첫날이다. 정오부터 강릉 8사단이 대관령 방면으로 퇴각중이다.
군인 모두 위장하고 소개하는 중이고 시가는 조용하고 군대만이 우왕좌왕하고 훌레복는다.
오후 7시 피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구정방면의 처가친척집에 왔다. 구정리에 와서 안인방면을 내다보니 대포소리가 꽝꽝하고 대포의 불이 번쩍번쩍하여 전율과 공포를 느끼겠다. 친척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 최종원 방위대 대위가 피란을 간다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우리도 더 있을 마음이 없어 길을 떠났다.



◆ 6월 28일 정선 임계학교에서 묶다.


아침에 생각하니 어느 방면으로 가야지 생왕방[生旺方:오행(五行)에서, 길(吉)한 방위]이 될지 숙고(熟考)하였다. 그러나 피란민 모두 정선 방면으로 간다. 우리도 구정 앞산 고개 길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오를 때 앞에서 인기척이 나면 모두 쉬쉬한다. 그것은 적의 선발대가 혹은 간첩이 피란을 못 가게 막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온종일 구중 비는 내리는데 옷은 모두 젖었다. 일행은 삽당령(강릉시 왕산면 송현리와 목계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을 넘고 고단을 지나 임계땅에 들어서니 점심때라 시장기가 있어 민가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종일 비를 맞고 오니 오한기도 있었다.
아들 구에게 찬밥을 먹인 관계로 체한 모양이다. 배가 아프다고 한다.

산골짜기에 약이 있을 리가 없어 겨우 응급조치를 하고 떠났다. 다섯 살 아이 구를 업고 길을 걷는 것도 그리 수월치 않았다. 8시경에 임계학교에 가니 학교는 군인이 점령하고 교장을 만나 숙직실을 부탁하니 한 칸 준다.

저녁은 교장이 제공한 식사를 먹고 옷을 벗어 말리고 눈을 붙이었다.
새벽 1시가 되니 지서 사환이 와서 교장을 찾으며 지서장이 함께 피란 가자는 것이다. 그 차에 동승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허사(虛事)였다. 벌써 군인도 떠나고 지서도 철수하니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불안감이 솟아 오른다. 다시 보따리를 싸가지고 길을 떠났다. 신작로(新作路)로 가면 멀기에 구로(舊路) 사이 길로 잡어 들었다. 밤중 침침(沈沈)한 칠야(漆夜)이다. 일행이 십여 명이 되어 무작정 걸었다.



◆ 6월 29일 정선국민학교에서 신세를 지다.


정선읍 국민학교에 도착 신세를 졌다. 캄캄한 침침 칠야령 길을 걸어 여량에 다다르니 뱃사공이 말하기를 이번만 건네주고 뱃길을 끊는 다는 것이다. 배를 띄워놓으면 인민군이 도강에 편리를 준다는 것이다. 간신히 배로 건네 정선학교에 다다르니 피란소가 되어 초만원이 되어서 들어갈 곳이 없다.
교장은 사범학교 동기생인 장도춘이었다. 숙직실에 우리 일행을 할애(割愛)하나 피란민이 막 들어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생불여사(生不如死)이다. 온 사람들도 사기는 땅에 떨어져 안색은 모두 사색이었다.



◆ 6월 30일 위장병에 고생하다.


아침에 친우교장과 장학사 손계주가 찾아와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중식 식사하러 가자고 한다. 나는 주저(躊躇)하였으나 내자의 권유로 국수집에 갔다. 적과 막걸리를 마시고 막국수를 먹었다.
그것이 관격(關格)이 되어 토하고 설사를 하여 매우 신고(辛苦)하였고 엊그제 설사를 하던 아들 때문에 속히 엄마를 데리고 오라하였으나 그 사이에 급하여 한의(韓醫) 집에 가니 의생이 없기에 하도 급하기에 빈방에 누워 고생하더니 의생이 와서 주인 없는 집에 와서 누웠다고 야단법석이다. 내자가 와서 의사를 데리고 와서 주사와 약을 먹었으나 별 효과가 없다. 교장이 와서 학교숙소에 왔다.



◆ 7월 1일 평창 미탄에서 농가 방 한 칸을 얻었다.


아침에 방송에 정선을 떠나라고 외친다. 아침 9시에 경찰서의 스피커에서 정선시민도 소개하니 피란가라고 한다. 나는 우선 여비가 궁색(窮塞)하여 교사 민진기에게 차용을 호소하니 민군이 자기봉급봉투에 반절을 나에게 주어 받고 보니 6,000원이나 된다. 민진기는 과거 묵호에서 같이 근무한 교육동지이다. 피란보따리를 지고 아픈 몸으로 떠났다.
10시에 뱃터 까지 와서 식사를 하면서 방향을 정하여야하는데 어디가야 살 것인가, 제천으로 가야하느냐, 대화로 가느냐 하고 고민하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대화는 70리 산길이며 과거 공비가 왔던 곳이라 이번에도 선발대가 침투할지 모르니 제천방면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사실인즉 원주 황둔산 끝에서 피란할 의도였으나 행인의 말을 수긍하고 중식을 먹고 비행기재(정선과 평창 미탄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고 꼬불꼬불하여 마치 비행기를 탄 것 같아 붙여진 이름)를 넘어 36개 줄행랑을 쳤다. 혹자(或者) 피란민은 남의 감자 밭에 들어가 감자를 막 캔다.
비행기재는 하도 강하기에 앞사람이 방귀가 뒷사람의 입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도 다급하기에 아픈 것도 잊고 급한 재 고개를 넘어 미탄에 왔다.
방을 구하나 쌀쌀하게 굴고 방을 주지 않는다. 겨우 농가 집 방한 칸을 얻어 일박하였다. 이곳도 무서운 산 끝 벽촌이었다.



◆ 7월 2일 아들을 20리 나 업어준 청년에게 감사드린다.


영월 땅 남면 ○○리에 일박하였다. 가족과 함께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영월연당을 지났다. 그때 벌써 큰길에는 지뢰를 묻으려고 국군이 준비하고 피란민의 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아들을 업고 빨리 걸었으나 큰 딸이 아주 걸음을 못 걷는다. 나는 재촉하면서 짐을 받으러 갔다. 한심한 것은 군인 몇이 산꼭대기에 포를 걸고 사격준비를 하나 포가 1문밖에 없어 초라하고 한심한 모습이다.
쌍용을 지나가니 웬 머리를 빡빡 깎은 청년이 우리 아들을 업고 가겠다고 하나 나는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 청년이 한사코 업고 가기를 부탁하기에 한 20리가량 업어다 주니 참으로 고맙기가 그지없었고, 그 청년은 춘천형무소 출가자이라고 한다.
그날 밤은 쌍용 길가의 방을 얻어 일박하였다.
그날 밤 그 동리 청년단장이 찾아와 위문하면서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묻기에 쌀 몇 되만 부탁하였더니 청년이 갔다 무료로 주면서 우리도 피란 갈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분에 후의에 감사하였다. 우리 민족 전체가 나만 살면 된다는 관념(觀念)인데 이 청년과 작일(昨日)의 우리를 부축한 그 출가자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7월 3일 제천에서 기차를 태워줘 죽령을 넘어 풍기에 내려놓는다.


제천에 도착하니 국군이 퇴각중이다. 쌍용에서 한 30여 리를 가니 화물차가 오기에 애원하니 한 10여리 가량 공짜로 태워준다. 나는 원주로 가서 피란하느냐 혹은 제천으로 가느냐의 기로(岐路)에 부딪쳤다. 제천송학면으로 가서 영월 황병산에 가서 숨어볼까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모심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 그자 왈 어디가면 살 것이나 하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데 논에서 농부들이“피란가면 살줄 아나”하고 욕설을 한다. 정오에 제천역에 다다르니 이곳도 소개중이다. 국군이 원주전투에서 고배를 맛보고 지금 퇴각 중 양곡을 수송하느라 야단이다. 양곡만 모두 수송하면 퇴각한다고 한다. 역에서 국군의 동태를 살피니 전투태세는 확고하나 중과부적이라고 본다.
마침 강릉여학교 교련선생이 와서 강릉피란민에게 쌀을 얻어준다고 하기에 큰 딸을 따라 보내니 1시간 만에 쌀 2되를 얻어 가지고 왔다. 이 교사는 큰딸의 은사이며 종군 중이다. 얼마 후에 특무상사 한사람이 와서 강릉여고 학생이 누구냐고 하여 큰딸이 나서니 나는 삼척사람인데 김진만씨의 딸이 강릉여고에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지 혹은 앞으로 만나면 ○○○에 연락하라고 한다.
그리고 기차는 내가 태워줄 터이니 강릉사람은 일렬로 서 달라고 한다.
우리는 제일 앞장섰다. 개찰이 되니 서로 앞을 다투어 탄다. 요행이 우리 일행도 기차를 타고 자리를 잡았다. 밤은 깊어가고 행방은 묘연하다. 8~9시경에 죽령을 넘어 풍기에 가서 내려놓는다. 피란민은 풍기국민학교에 집결시키고 저녁 식사는 주먹밥 두개씩 준다. 매우 크고 풍부한 밥이다.
피곤하고 주린 끝이라 맛있게 먹었다.



◆ 7월 4일 영주에 오니 화물차에 태워 보낸 아이들 행방이 묘연하다.


피란길을 재촉하여 안동으로 갔다. 7월 4일 풍기에 피란 온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쉬고 하루 밤을 지냈다. 7시 주먹밥을 준 후에 부면장이 와서 하는 말이 이 지역도 전투지구니 여러 피란민들은 안동방면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서도 수군수군 저곳에도 수근수군하며 다시 보따리를 짊어지고 안동방면으로 걸리지 않는 다리를 끌고 걷기 시작하였다.
한 5리쯤 가니 피란화물차 한 대가 왔다. 손을 들어 간청하니 어린이만 타라고 한다. 나는 영주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딸 둘과 아들 세 사람을 태워 보내고 우리 내외는 보따리를 이고 지고하여 짙은 안개가 잔뜩 낀 안개 속으로 아픈 다리를 끌고 영주에 와보니 아이들이 없다.
오는 도중에 8사단이 추풍령 반격작전을 한다고 하며 추풍령을 향해 북상하는 도중이다. 포가 7~8문에 8사단이 반격한다고 한다. 일차전투는 춘천에서 2차는 원주에서 패주하고 제3차 반격전은 추풍령에서 한다고 한다. 대로는 북상하는 군대가 길을 매우고 북상중이다.
영주에 와서 보니 아이들이 행방이 묘연하다. 영주 시내를 7~8회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으나 알 길이 없다. 피란 중에는 행동통일(行動統一)을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 한다. 피란처가 안동과 풍천이라 한다. 8월 장마라 비는 억수같이 퍼 붓는다. 우리는 저녁 무렵에 안동에 와서 피란민 수용소인 안동농림학교에 와서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비는 폭포같이 퍼붓는다. 좌불안석이다. 안동여자고등학교도 수용소라한다. 나는 우비도 없이 억수같은 비를 맞으면서 여학교에 갔으나 그 수용소에도 없었다. 다시 안동농림학교에 왔으나 두 내외가 소리 없이 구시렁 거리면서 앓고 있었다.
아이들은 생각하니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죽겠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다. 아들 녀석은 나의 독생자, 어려서부터 나만 따르고 잠도 같이 잤다. 옷은 젖고 아이들을 잃어버리니 잠도 잘 수도 없고 잠도 오지 않으니 두 사람은 궁궁 앓았다. 비는 밤새도록 억수로 퍼 붓는다.
이침에 일찍 각 피란민 수용소를 찾아 헤맸으나 알 길이 없다. 비는 멈추고 하여 안사람을 수용소에 맺기고 나는 다시 영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정거장에 오니 때마침 북진 반격하는 작전기차에 탔다. 이차는 일반인은 태우지 않는 작전으로 북상하는 군대 출격 차다. 때마침 묵호인 김인기 소위를 만났다.



◆ 7월 4일 아이들을 찾아 영주와 안동을 오가다.


이 기차는 10시에 북상하니 나를 기차일각에서 숨기면서 이 기차는 반격 차니 수상하면 총살을 운운한다. 나는 기차일우(기차한쪽구석)에서 꼼짝 달싹 못하고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기차가 떠나기를 고대하다. 10시 차가 떠나지 않고 군인들도 들락거린다. 김인기 소위는 나에게 과일과 식사를 제공하며 밖을 내다보지 말라고 한다. 좀 밖을 내다보았으면 쓸데없는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 고생은 사주팔자라 하겠다. 오후 3시에나 기차가 떠난다.
김 소위 덕택으로 기차를 탔으나 오히려 기차를 못 탄 것이 오히려 이로웠을 것을, 차내에서 하도 지루하여 몇 번 영주로 착각하고 내리려고 하였더니 김 소위가 만약 내린다면 도망병으로 간주하고 총살하니 참고 계시면 영주라 하고 내리시라고 한다.
나는 사의를 표하고 영주에서 내려 영주를 몇 바퀴 돌았으나 찾지 못하고 역에 오니 특무상사가 강릉피란민에게 주먹밥을 준다. 나는 5개를 받아 싸가지고 안동행 기차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도보로 걷기도하고 길을 떠났다.
한 20여리 가량 걸어오니 기차가 안동으로 달린다. 역에 놈들도 피란민이 귀찬으니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우리 민족이 친절성(親切性)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이민족 장래를 낙심(落心)하고 밤길을 걸었다. 영주에서 안동이 100리 인데 생소한 산길이라도 그러나 무섭지 않다. 그런 생각이 없고 빨리 안동가기만 마음을 먹었다. 밤길이나 달이 나를 비춰줘서 고마웠다.
머리 숙여 자연에 감사하면서 60리 밤길을 걸어 밤 1시경에 합천이라는 역에 와서 안동행 기차 편을 물으니 역원 놈이 화를 내면서 가라고 한다.
나는 갈 데가 없어 역에서 기다리는데 순경이 나에게 남침상황을 묻는다.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 역원이 화를 내면서 나가라고 내쫓는다. 나는 할 수 없이 여인숙에 와 일박을 청하니 이 밤중에 무슨 숙박이냐고 거절한다.
나는 밖에 마루에서 좀 쉬어 가자고 이것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 민족은 하도 시달려 살았기에 남을 도울 줄 모른다.
고대부터 계급관계(階級關係)가 심하여 천시(賤視)를 당하고 또 일본식민지하에 받던 수모(受侮)가 독립 후 까지 계속하여 민족상조(民族相助)의 애(愛)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면사무소를 찾아가 일박을 요구하니 이불 2개와 담요 2장을 주며 저녁 식사를 이야기한다. 나는 고마우나 불필요하오니 잠만 자고 가겠노라고 하였다. 밥도 먹을 생각이 없어 피곤하여 그냥 잠을 잤다.

아침 새벽 5시경에 안동을 향해 걸었으나 초행이라 방향을 알 수 없어 철로길 앞에 가는 사람에게 여보여보 안동 가는 길이 어디요 하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다. 가까이 가서 어깨를 치니 그 사람은 귀머거리였다. 도리어 묻는 자가 바보였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안동에 가까이 왔다.
나는 병이 있다. 성질이 조급한 것이요. 또 신경질이 화근이 될 때가 많았다. 대국적 기질이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는데 심성이 급하여 스스로 사서 고생하였다. 12시경에 안동역 앞에 오니 내자가 기다린다. 어제 아이들은 내가 영주로 떠나기 전에 내자와 만났으며, 내가 영주로 떠나려고 할 때 둘째딸이 역에 가서 아버지를 수도 없이 불러보았지만, 그때 김인기 소위가 기차한 구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지 말라고 하여 쓸데없는 고생에 발까지 곪아서 고름이 나서 질질 끌고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았다.



◆ 7월 5, 6, 7, 8일 안동에서 아들 딸을 재회하니 목숨부지가 천만다행이다.


잃은 가족은 찾으니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며 천사를 만난 기쁨이다. 누가 나의 이 심리(心理)와 이 기분을 알리요. 참말 재생의 기분이다. 앞으로 어떠한 불편이 있더라도 각자행동은 않기로 하였다. 발이 곪아서 촌보(寸步)를 걷지 못하여 다시 병원에 가니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나는 역심(逆心)이 나서 너희들도 한번 피란 맛을 보라고 짜증을 냈다. 나는 수용소에서 외출도 못하고 또 폭염에 교실 내에서 신음하고 피란민들은 운동장에서 식사를 지어 먹었다.
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생활하니 병자도 많이 생기고 또 적리환자[赤痢患者:이질병자]도 많았다. 의사란 작자도 할 수없이 와 보는 체 하고 간호부도 피란민 대우는 고사하고 인간이하로 깔보는 것이다. 하루는 단양에서 마지막 기차의 피란민이 안동수용소에 왔다. 단양 또바리굴(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산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양의 철로 터널)에서 기차가 전복하여 특히 어린이가 밟혀 죽고 질식하였고 나온 사람들은 모두 시커먼 깜장이가 되었다.
참으로 피란민은 2중고라 하느님도 돌보지 않고 버린 것이다. 그 형상 이 비참하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이더라. 그래도 아들딸들을 만나고 목숨만 부지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안동은 옛 문화도시에 구경할 곳이 많으나 발이 아파서 꼼짝달싹 못하니 살아도 죽은 사람 같더라. 피란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나를 헛소리와 허위조작사(虛僞造作事)라고 할 것이다. 그럭저럭 4~5일은 휴식하니 안동도 작전지구라 하여 철수명령이 내렸다. 북괴의 속도전과 한국군 무력(無力)을 직감하였다.



◆ 7월 9일 피란 중 인데도 남녀동석을 거부하는 동네이다.


살기위해도 가야하겠다. 기차를 타고 십생지(十生地)를 찾아 떠났으나 겨우 영천에도 내려놓는다. 이곳 영천 역전은 피란민으로 곽 차 요지부동이다. 비는 내리고 들어앉은 곳이 없으니 피란민들의 설움이야 오죽하리.
하늘을 우러러 보고 불운을 한탄할 따름이다. 발을 들어놓을 틈도 없는데 어찌하리. 남녀노소 없이 동석하려 하였으나 경상도는 반향[班鄕:양반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라 노부들이 동석합석을 불응하고 남여동석을 비평하기에 밖에서 비를 맞고 하루 밤을 지냈다.



◆ 7월 10일 영천도 위험지로 경주방면으로 떠나다.


이곳 영천도 작전지의 하나로서 피란민을 기차에 실어 경주방면으로 소개시키는 것이다. 우리 일행도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기로 하였다. 기차는 고도 경주에 내려놓는 것이다. 이후 일행은 계림초등학교 수용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수용소 소장과 반장이 정하여지고 모두 질서 있게 피란민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많은 집단(集團)이라 좀 불결하며 사람이 많아서 소연(騷然)하였다. 하지만 피란생활 중 경주에서 가장 많이 지체(遲滯)하고 또 강릉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난중이라 고도관광(古都觀光)도 싫고 단지 먹는 것 생각뿐이다. 먹어도 배가 고프고 소화가 잘 되는 편이다. 근일(近日) 개월간두유(箇月間逗留)하게 되고 강릉친구도 많아 소일에도 걱정이 없었다. 하루는 그릇을 준다고 하여 군청에서 갔더니 양재기 몇 개씩 주더라.

그때 장학사가 나를 보고 이 지역 향촌(鄕村)에 가서 교장이라도 하라고 하나 나는 만승천자(萬乘天子)를 준다하여도 귀찮다. 그때 대구에서 피란민공무원에게 봉급을 준다고 하여서 가족은 수용소에 남기고 대구 달성군청으로 4.5명이 함께 갔다. 역시 보행이라 이곳도 작전도로라 어떤 때는 상당히 우회하여 걸었다.



◆ 7월 20일 대구 달성에서 봉급을 탔다.


강원도 직원 공무원이 와서 강원도 공무원에게 봉급을 준다. 공무원증을 대조하고 주는 것이다. 수천 명이 와서 우굴 우굴 한다. 나는 6만원의 봉급을 타니 숨이 잘 쉬어지고 다액(多額)에 흡족하였다.
이북 포로 구경하니 눈, 코, 같은 한국동포에 눈, 코, 입 얼굴 하나도 다름이 없고 단지 사상적 상반된 싸움으로 양민만 괴롭힌다. 인민군대의 포로는 18세 청년이고 인민군 지휘자는 25세가량의 청년에 다리에 총탄을 맞고 혈액이 낭자하고 나머지 소년은 남한에서 붙잡은 소년 13명이다.
“여보게 저포로가 내 아들이라면 가 만나보겠느냐?”하니 모두 그까짓 죄인 놈 새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내 아들이라면 가 만나 보겠다. 하니 모두 비웃더라. 일선에서 징발한 소년들이 불쌍하다. 공산전쟁은가증스러움이 충만하다.
그 후 평상시가 되어 내가 설문(設問)을 반복하였더니 나중에는 만나본다고 하더라. 이것은 이념투쟁(理念鬪爭)의 고류(泒流)로 민족상쟁(民族相爭)으로 통합야욕(統合野慾)의 투쟁(鬪爭)인 것이다.
대구 동촌에 오니 헌병이 증명을 보자고 하니 나는 교장이 발행한 나의 이름이 증명서를 보이니 헌병 왈 이것이 무슨 증명이야 대통령 증명도 불필요 하다고 한다. 나는 괘심(掛心)하다마는 대통령도 쫓겨 다니는 판이니 일개 헌병도 함부로 말하니 나라도 망하는구나 하고는 구원 받을 도리가 없음을 슬프게 생각하였다. 적에게는 약하고 동포에게 강한 것이 그때 군(軍)의 자세였다.
대구에서 한 50여 리를 와서 사과밭 옆 여인숙에서 묵었는데 100원에 사과가 10개인데 매우 싸다. 저녁에 사과김치가 매우 맛이 좋아 이것으로 대구사과가 유명한 것으로 알았다. 이튼 날 길을 떠나 평탄대로(平坦大路)를 걸으니 힘들고 지루하고 잠시 피란 중임을 모르는지 배가 고프다.
길가에는 난리중이라 음식점도 없다. 한군데 조그마한 시장이 있다. 점심때라 먹을 것은 소적과 강보리밥이다. 다른 사람은 강보리밥을 먹고 나는 소적을 먹고 떠났다. 20리쯤 오니 소적 먹어서 배는 고프다. 메밀은 영양가가 낮기에 배가 빨리 고프다 고 여겼다.
당시 가족은 경주 동쪽 20리 밖에 이산(離散)하고 있어 경주에 오니 가족과 피란민은 소개 되었다. 그때는 벌써 기계 안강전투가 시작하여 매우 위험하다고 하며, 동해안에는 북괴 김무정(金武亭)이 이끌고 온 대 부대와 김석원(金錫元)장군에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치열(熾烈)한 전투가 벌어져, 이 전투에 산천이 둘러빠졌다고 한다. 많은 포격으로 전차, 자동차가 부서지고 사람과 말의 시체가 즐비하게 죽어 아비규환(阿悲叫喚)의 생지옥(生地獄)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경주의 피란민을 가장한 빨갱이가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후방을 교란시키고 인심을 현혹시켜 전세를 유리하게 할 위험이 있기에 소개 시켰다고 한다. 와 보니 가족이 없어 낙담하였다. 아는 동지가 우리가족은 여기서 약 20리 되는 덕소방면으로 갔다고 한다.



◆ 7월 25일 경주시장서 붉은 시루떡을 사가지고 덕소에서 가족을 만났다.


한 5일간 대구에 갔다 온 것이 여삼추(如三秋)이다. 경주시장에 가서 붉은 시루떡을 사가지고 도보로 덕소란 곳에 와서 가족을 만났다. 이곳에서 묵호 사람들 7.8명이 노변 민가에 피란을 와서 숙박을 한다.

밤에는 모기, 이, 벼룩, 빈대에 뜯기고 하여 잠도 못자고 마당에 황덕 불을 하여놓고 쉬었다. 나중에 안 것이 이곳이 과거 빨갱이 소굴이며 불국사지 반란 때 원천지라고 하여 한 23일 두류(逗留)하니 겁이 나고 공포를 느꼈다.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 이곳 청년과 경찰관이 와서 우리 큰딸에게 농을 하며 놀려대는 불측한 행위를 하고자 한다. 나는 하도 아니꼽고 더러워서 상대도 않고 잠잠하게 지냈으나 괘씸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도저히 피란생활이 힘들어 울산으로 향하였다.



◆ 8월 3일 울산 수용소의 객이 되다.


울산에 오니 마침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인이 쓰던 다다미방이었다.
그 한 칸을 자리 잡고 식사도 지어 먹었다. 그러나 또 모이고 모이다보니 초만원이다. 나는 그때 관수 조카가 울산에 왔기에 경찰 가족 증을 만들어 주고 또 경찰관 수용소에 들어갔다. 모두 남자는 경찰관이기에 전투에 나아가고 부녀자만 남았다. 나도 노인이라 그 속에 끼여 밤이면 마당에 자고 비가 오면 방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잠을 잤다. 경찰들도 전선에서 공비 또는 게릴라, 빨치산들은 토벌하다가 휴가를 얻고 돌아온다. 그러나 참으로 집단생활이라 곤란한 점이 많았다.
수용소내의 남성들은 놀고먹기에는 국가적으로 손실이며 또 일손이 모자라는 전시라는 까닭으로 남자 되는 사람들은 도정공장(搗精工場)에 징발(徵發)되어 부역(夫役)을 시키는 것이다. 나도 공장에 나아가 작업을 하니 먼지가 몸에 덮어져서 죽을 지경이다. 일이 끝나면 울산 앞강에 가서 목욕을 한다.
여기도 미군들이 목욕을 하며 나에게 영어를 아느냐고 묻는다.“노-오”하니 일본어를 하는가 한다.“이 예스”하면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빨가숭이가 된 껌정흑인은 괴한 같이 흉악한 몸이더라.



◆ 8월 4일 영천(永川)을 침공 당해 대구 경주도 전투지역으로 들어갔다.


강릉사람으로 두 형제가 피란을 나와 모집을 기피하며 요리조리 피하며 숨어 있다. 나는 멋도 모르고“군에 나가는 것이 영광이 아니냐.”하니 그 자 왈(曰)“이때에 나아가 싸우다 죽는 것은 개죽음이 아니야”하면서 “당신은 군대에 갈 나이가 지냈으니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말라고”핀잔을 준다. 나는 창피를 당하여 적면(赤面)하였다. 여하간 피란은 살라고 나온 것 인데 홀치기를 당하여 죽은 무명용사도 많았다.
우연한 기회에 노상에서 이상국 선생을 만나 반갑기 한량(限量)이 없다.
중식을 같이 하고 피란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사람과 묵호학교에서 같이 근무를 하면서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다. 이 선생은 연애를 하던 애인이 피란 중에 실종되어 삼지 사방으로 찾아 해매는 길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병영학교에 김명권 선생이 근무 한다고 하고, 또 울산에 해군오장 최 군을 소개한다고 했다. 김명권 선생도 묵호에서 같이 근무하였으나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 신이 아니면 모를 일이다.
놀기가 심심하여 작은딸을 데리고 병영학교 김명권 선생을 방문하니 참 반가워한다. 묵호 학교 때 이 선생은 말없이 묵묵 착실(黙黙着實)하고 말없이 근무하던 인격자이며 작은 딸의 담임이었다.
병영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마지막 집단 주둔지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김 선생과 하루 밤을 자면서 과거지사에 꽃을 피웠다. 이튼 날 울산으로 올 때 김 선생이 면(棉)담요 두 장과 작은 딸과 아들의 운동복을 사주었고, 우리 식구들에게 점심도 사주고 또 돼지 뒷다리 하나를 사주었다.
우리 식구는 피란 중 굶주릴 때라 포식을 하고 감사를 표했다. 인간은 많이 알고 많이 교제를 하여 친분을 넓이는 교제 성이 필요하다. 김 선생 말이 부산에 자기 처남이 살고 있으니 부산에 가시거든 찾아 달라고 한다.
그 후 부산에 가니 부재중이라고 한다. 아무튼 김 선생에게는 묵호와 울산에서 많은 신세를 입었고 진실하고 성실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던 인물이나 동란 후 그 종적을 알 수 없다.
영천 침공으로 대구, 경주도 전투지역으로 들어갔다. 우리 국군의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불리하여 국군과 UN군은 밀리어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생사 판가름의 때가 왔다. 수용소에는 경찰관이 총을 거꾸로 메고 와서 자기가족에게 소곤소곤 하는 모습이 위험상태인 것 같다.
밤새도록 북상하고 학도병들은 퇴각을 하여 전세가 불리함을 말하는 것 같아 울산에서 더 두유(逗留)하기가 무서워 남하하여 부산방면으로 출동하기로 하였다.



◆ 9월 중순 부산 금사초등학교 수용소로 피란하다.


울산역에 와서 차표를 구하려 하니 공무원 단신으로는 되나 가족은 매표를 거절한다. 역에서도 경찰관이 집총경계(執銃警戒)하고 역은 미군이 관리한다. 하여 애원해 보지만 불청(不聽)을 한다.
기차표를 단념하고 부산행 자동차를 탔다. 구월 중순이라 금풍(金風)도 불기 시작하고 광야에는 황금물결이 친다. 세상의 회전이 빨라 추풍이 부니 연곡에 둔 살림 사리도 걱정되고, 또 장기전이 되면 겨울 살길이 연상(聯想)된다.
자동차는 신작로(新作路)를 굴고 굴어서 동래에서 20여리 동쪽 산골에 있는 금사국민학교로 도보로 가라는 것이었다. 동래는 도시이나 금사는 벽촌이다. 금사에 오니 벌써 만원이다. 살길을 모색(摸索)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 무슨 냄새로 이곳이 만원이 되었는지 의구심을 금치 못하였다.
의외로 강릉사람들도 많이 집결하여서 쓸쓸함이 좀 가셨다.
처음에는 주먹밥을 주더니 나중에는 현물로 주어 솥을 걸고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었다. 여기서 친한 친구인 정선교장이 장자를 데리고 왔으나 부인은 사정이 있어 동행을 못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5일간 생활 하였더니 겨울의 입문이라 피란민은 부산으로 집결하라 한다. 부산에 오니 군경유가족은 특별조치로 민가에 할당하여준다. 우리는 남포동 중국요리집의 방 한간을 배당 받았으나 중국 놈 주인이 지랄을 한다. 서로 언쟁을 하여 보았으나 이방인이라 헐 수 없어 관계당국에 불편을 호소하니 남포동 항구 여관 2층 다다미 방 한간을 얻었다.
잠은 2층에서 자고 밥은 아래층 한 옆에서 먹으니 이게 무슨 꼴 인고 인간이 이렇게 하대를 받고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 할 수 없이 단지 하늘에 맡길 밖에 도리가 없다고 무고를 빌었다.

그러나 피란민수용소에 가보니 우리의 형편은 천사 같은 예우라고 생각하고 감사에 뜻을 표하였다. 여관집 주인은 별개 이국인(別個異國人)들이 왔을 것이라고 여기더라.



◆ 5일간의 공무원 강습에 이승만대통령과 신익희씨 특강이 있었다.


여관방에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무료하여 국제시장구경을 갔다. 남포동은 부산에 명동이라 매우 복잡하며 인구가 집중되어 서울 명동보다 더 혼잡하며 견물생심(見物生心)이다. 여기서 의외로 일가 동생 되는 정훈장교인 김종상과 김종계 군을 만났다. 서로 정담을 나누니 김종상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제5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중이다.
나는 군인 가족증(軍人家族証)을 얻어 배급미(配給米) 3합(合)에 부식비(副食費)와 시탄비(柴炭費)를 받았다. 이 사람은 양양 도리초등학교 교사로서 해방직후 강연이 불순하다고 구속되는 것을 유보하여 주었더니 월남하여 군에 입대한 정훈장교인 육군소령이고 김종계 군은 일본에서 대학을 수업하고 귀국하여 천재적 철학가로 존경을 받다가 월남하였다.
피란민이 모두 부산에 집중하니 부산시 당국은 골치가 아플 것이다. 강원도 난민으로 작업반을 조직하니 일당을 5백 원씩 주었다. 모두 골을 싸매고 덤벼들어 인원이 초과되자 공무원 신분으로 제한(制限)하자 나도 빗자루를 들고 어정어정하다가 일당을 받았다.
목적은 구제사업의 일조로 소일 겸 도로청소부를 한다. 그러나 일반 피란민의 불평이 자심(滋甚)하다가 격투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청소를 하다가 중단을 하였다. 부산의 취지는 강원도 피란민인데 그 인원이 하도 많아 공무원에 한 하 다 보니 사건이 벌어져 중단되었다.
며칠 후 나는 하도 심심하여 이상국이 소개하던 최경석 군을 만나러 해군본부를 찾아가 해군 오장(伍長)인 최경석을 만났다. 최경석은 묵호학교 졸업생으로 나를 모교의 교장으로 친밀감을 갖고 대하니 천리 타향에 봉고인(逢故人)의 감(感)이러라. 나는 그로부터 백미 2입(叺)을 받으니 참으로 은인을 만났다. 그중 1입인 한가마를 팔아 손님 대접을 하기로 하였다.
전세가 유리하게 되니 수복을 전제하는 강습을 개최하였다. 피란민은 모두 청강하였다. 이승만대통령과 신익희 씨의 특강이 있었고, 문교부장관 주최로 5일간 열렸다. 대통령의 신변보호도 말이 아니다. 즉 국가가 있으면서 대통령이 무었을 하며 정부가 어디 있는지 참으로 한심하더라.

강의 취지는 공무원의 국가보호에 대한 강습이며 수복 후 자세 등이었다. 이 대통령은 연합군의 지지와 전쟁 완승에 협조 할 것. 특히 도로변의 비료(肥料)와 UN군이 똥 냄새로 전쟁을 못 하겠데 라는 말과, 문교부장관인 백낙준 박사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은 참으로 신기하여 염병(厭病)이 나지 않았다.



◆ 경남도청(慶南道廳)의 한국정부(韓國政府)


하루는 경남도청에 가니 대한정부 간판이 붙어있다. 하도 기이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두루 살피니 대통령 실과 각 장관실에는 의자만 서너 개 있을 뿐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한심하더라. 해군본부가 그렇고 정부기관이 이러니 나라의 형편이야 난난중(亂難中)인 것이 직각적(直刻的)으로 품기며 무야유유야무(無若有有若無)의 경지 러라. 도청에 갔다가 돌아오니 아들이 출타하였다. 부인께 물으니 얼마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나는 부인을 책망하고 부산 제일극장에 가보니 없다. 나는 낙담(落膽)을 하였으나 아들 녀석은 나를 보며 요리 조리 피하며 나를 놀린다. 그 때가 5살 때라 나를 놀리는 것이 재미가 있는지 얼마 후에 찾았다. 부산은 매우 복잡하여 인파가 넘쳐나고 특히 명동은 인파가 심하다. 데리고 들어 와서 외출을 하지 말라고 듣지 않기에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할 때가 많
았다. 그때 두 딸은 양복 가게에서 단추 다는 일을 했다.
할 일이 없어 먹고 노니 참으로 답답하다.
그때 미공보원이나 구경하기로 하고 아들과 둘째딸을 데리고 갔다. 전쟁에서 노획한 총, 칼, 식품, 복장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전차와 대포도 진열되어 있었으나 마음이 없으니 똑똑히 볼 생각도 없다.
단지 시간을 보내기위해 이곳에 왔으나 전리품(戰利品)을 보고 우리 국군과 정부가 옛 부터 당리당락(唐梨當落)과 권리(權利) 싸움질만 하고 국방을 등한시 한 민족인 것이 여실(如實)히 보였다.
외침(外侵)에 쪼기기만 좋아하고 군비는 외면(外面)하는 통일정신과 국가수호에는 외면하여 피란생활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고 위정자(爲政者)와 국민을 교훈한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과거 묵호학교 시절의 후원회장인 민병걸 씨를 만났다. 당시 민씨는 묵호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부산에 와 고급생활을 하는 재력가 양반이다.
참으로 반가워 바닷가 대포 집에서 빙어회로 한잔하니 기분이 형천(衡天)한다. 일배일배부일배(一盃一盃復一盃)하니 만취에 내 세상이 되었다.
피란 시 사람 만남이 제일 기분이 좋은 일이다. 특히 과거 인연이 있는 친구는 말 할 것도 없다. 헤어질 때 삼치 한 마리를 사주기에 집에 와서 가족들과 포식을 하니 동난 중에는 먹는 것이 제일이더라.
기자감식(飢者甘食)의 이(理)를 알겠다.
하루는 어슬렁어슬렁 송도 구경을 갔는데 유명하다는 송도도 전시라 한적하였다. 단지 점포와 음식점이 즐비하고 해안의 명사(明沙)와 산 봉오리에는 창송(蒼松)이 청청(靑靑)할 뿐 피란중이라 피서객이 없어 한산하기만 하니 업자들은 울상이더라. 이곳도 피란민이들 끌어 분비고 있었다.



◆ 부산시민의 궐기대회(蹶起大會)와 육군병원 방문


부산 역전 대 광장에서는 궐기대회(蹶起大會)가 있어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승만대통령의 국민결의 훈시가 있고, 부산시민의 궐기사가 있었다.
일국의 대통령이 출어(出御)에 경비가 단조롭고 기마순경(騎馬巡警)이 1명뿐 이니 한심한 행차이다. 이때 김시현(金始顯)의 저격사건도 일어났었다.
김종상 소령이 육군병원에 부상치료중이라 위문 차 갔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제○동이라 하기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리다가 찾았는데 병실은 장교 환자라고 해서 가마니 위에 담요 두 장씩 주고 졸병은 그냥 가마니 위에 뒹굴고 있었다.
장교는 치료하여 주었으나 졸병들은 피투성이 옷에 그냥 아이구아이구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 중에 지휘자들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인간 차별대우가 그리 심하단 말인가? 누가 나라를 위하여 출전(出戰)을 할 것인가 일편(一片) 한심한 일이다.
김 소령은 경상(輕傷)이고 치료도 하여준 까닭에 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위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부상한 졸병이 나를 보고 인간차별대우와 계급적 취급이 전상자 구별이 이와 같이 심하다고 하며 이 같은 처사에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그 전상자가 나를 보더니 안동에서 나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그는 안동에서 홀치기를 당하여 총도 쏠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선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여 이 꼴이 되었다며 치료를 한 번도 못 받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불상하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그는 아직도 피 묻은 옷 그대로 누워있었고 나를 보고 평안도민회를 찾아가 이 사정을 알려 달라고 한다.
나는 사방으로 다니며 도민회를 찾았으나 찾지 못해 미안한감을 느꼈다.



◆ 유언비어에 현혹(眩惑)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길거리에 나가니 반가운 소식이라 하며 김일성이가 손을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아는가 하니 역 부근 벽보에 그렇게 붙었다고 한다. 하도 고마워서 역으로 가니 모두 허언(虛言)이다. 그 출처는 모르나 모두들 당분간 좋아했지만 환희는 순간이고 고민은 더욱 심하였다.
벌써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한다. 만약 부산이 함락되면 발동선으로 일본에 망명하기 위하여 발동선을 사 놓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산자(有産者)는 당시 이런 준비를 하고 대기하였다고 한다.
속담에 불상한 것은 원산(元山) 돼지라는 격언은 아니다. 피란민촌의 생활 상태는 불상하나 별로 돕는 자가 없는 것 같더라.
우리는 최경석 군의 지원으로 궁색하게 지나지 않았다. 겨울 내복도 준비되고 또 과동부식대(過冬副食代)도 있었다. 그저 친지를 만나면 반가웠고, 하루는 도 학무과장 김영한과 강릉 장학사 최준길을 만나 시장 안 헐쭘한 음식점에서 그저 막걸리와 중식으로 그럭저럭 나의 체면을 세웠다.
평상시 같으면 이런 대접을 받으면 콧방귀를 칠 것이나 피란중이라 이 때에는 기자감식(飢者甘食)일 것이라 생각한다.
난민에게 신탄[薪炭: 땔 나무와 숯 또는 석탄]을 현물로 준다면서 동래에 가서 타라고 한다. 나는 한번은 아들을 데리고 온천 겸 장작을 타러 가서 장작을 현장에서 팔아 그 난리 통에도 온천에 들어가니 매우 뜨겁더라.
피란덕분에 온천욕을 다 해보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그래서 다음에는 가족들과 2~3차례 배급을 탈 겸 해서 온천욕을 할 수 있었다.



◆ 전쟁(戰爭) 중에는 헌병(憲兵) 이 제일이더라.


하루저녁에는 우리 숙소로 최경석 해군 오장이 찾아왔다. 헌병은 시내를 순회하면서 불심검문을 한다. 전란 중에는 헌병의 위치가 좋은 것 같다. 이 헌병은 우리 방에 들어와서 너 웬일이냐고 최경석을 보고 묻는다.

이때 최경석이 나는 지금 모교 교장선생님을 방문 중이라 하니 이 헌병도 코가 깨지게 인사를 하면서 본인도 묵호학교 졸업생이라고 한다. 그가 나아가더니 중국요리와 정종을 사가지고 와서 잘 먹지 못하는 술에 만취하여 기분이 충천(衝天)하고 의기양양하여 피란 중임을 잊고 나에 독무대가 되었다.
술이 덜어지자 포도주 5병을 사왔다. 매우 호화판으로 노는 헌병의 권리가 당당함을 느꼈다. 그는 최경석 군과 같이 나가면서 나중에 다시 도와주겠다고 한다.
김종상 정훈장교와 이상국과 최경석을 초대하여 피란중이라 장만할 것도 없이 청요리 5접시와 정종 2되를 사서 모두 흥겹게 먹었다. 최경석은 귀대를 하고 2사람은 여관방 한간에서 취하여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아침 일찍 가보니 이게 웬 일인고 방에다 한가득 토하고 달아났다. 박덕(薄德)한 사람은 이런 법인가 주인 모르게 청소를 하느라고 고생했다. 과식은 병에 원인이 되니 동난 중이라 위장에 기름기가 없어 그런 것이리라.



◆ 11월 10일 수복명령이 내렸다.


1950년 9월 15일 UN군이 맥아더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낙동강전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으로 진격하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그리하여 공무원은 수복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부산역으로 모여 신고하라고 한다. 단 본인에 한하여 수복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부산역에 가서 신고하고 가족들은 추후 안용준의 발동선으로 귀향하기로 하고 단신으로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작은딸을 데리고 초량진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2시에 출발한다는 기차는 4시가 되어도 요지부동이고 시간만 자꾸 흐른다. 또 내가 먼저 수복을 한다 해도 그저 초등학교 교장일 것이다.
그저 가족을 부산에 남기고 홀로 떠난다는 것은 자기만의 도생(圖生)이 아닌가.
그러다가 지난번 피란길에 가족과 헤어져 노심초사(勞心焦思)했던 일을 생각하니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또 나중에 아내와 가족들이 발동선으로 만경창파에 맞기고 떠난다는 것이 매우 불안하여 가족과 떨어져서는 안 되겠다고 맹세하고 용기를 내고 최 장학사에게 가족과 함께 수복한다고 하고 하차를 하니 마음이 가뿐하여 생기가 난다. 트렁크를 짊어지고 20리 길을 걸어 남포동 숙소로 돌아오니 마누라가 깜작 놀라며 반긴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인민군들이 강릉을 재습(再襲)하여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조상이 솔밭에 들어서 음조(陰助)한 덕택이라고 생각되었다.



◆ 1950년 11월 30일 묵호 땅에 상륙, 12월 1일 강릉 땅을 밟다.


삼척 운수국(運輸局) 수송선이 부산에 대피중이다. 운수국에 김복택이라는 수양누이 아들이 근무하고 있어 그를 찾아가 운송선이 묵호에 복구할 때 동승할 것을 부탁하고 고대하고 있다가 11월 29일 수송선에 올랐다.

삼척 운구국 수송선은 전세(專貰)‘에레베스’호였다. 김복택이라는 조카 덕에 배를 탔는데 거개(擧皆)가 묵호에 사람들이라 서로가 잘 도와준다.
2시에 떠난다는 배가 오후 9시게 떠나게 되어서 무료(無聊)하여 부두에 나가니 묵호에서 알고 지내는 김 군이 나를 오라고 한다. 그는 해군의 취사부(炊事夫)로 나에게 솥쟁이(누룽지)를 준다. 먹어보니 설탕을 넣고 끊인 솥쟁이라 과자보다도 맛이 있어 우리 가족은 그것만 먹다가 고구마는 쉬어서 버렸다.

배는 밤새도록 캄캄한 창해(滄海)위를 운행하니 밖은 볼 수도 없고 또 보이지도 않고 파도가 잔잔하여 멀미도 나지 않는다.
단지 구룡포 쪽에 오니 배가 약간 동요한다. 30일 오후 묵호항 부두에 도착하니 강릉을 떠 난지 만 5개월에 그리운 강릉 땅을 밟게 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하여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5개월 동안의 고생과 고난 등은 말할 수 없으나 그래도 우리는 남보다 편한 피란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배에서 내려 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진화 철공업사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임지로 갈 예정이다. 묵호도 인민군치하에 있어서 많이 황폐하고 함포사격의 흔적도 남아있다. 전쟁이란 이렇게 매정하고 무서운 것일까. 산천도 부서지고 가옥도 파괴되어 어수선하다. 전쟁을 일으킨 동족상잔의 괴수인 김일성은 만주(滿洲)에 도피하였다고 한다.
묵호 지서에 족제(族弟) 김종환이 있기에 고향소식도 듣고 조카의 안부도 알고자 들리니 김 군이 어떤 여자를 심문하는데 그 여자의 말이 청산유수라 순경이 쩔쩔맨다. 이북문제를 가지고 심문 조사를 하는데 이론이 정연하고 사상문제를 언급하니 무소부지(無所不知)라 하도 잘 알기에 어디 여자이냐고 물으니 죽왕면 야촌(野村)이라 한다.
김 교주의 딸이 아니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잘 아느냐고 하기에 친구의 딸이고 내가 보 할 터이니 보내달라고 하니 형님이 보증한다니 내 보내겠다고 한다.
이 여자는 김일성대학에 다니고 전란 후에는 대한민국 간호장교로 육군중령으로 제대한 자이며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묵호에서 걸어서 이틀 후인 12월 1일에 강릉에 왔다. 처가친척인 최하규 할아버지 댁 뒷방 2칸을 빌려 투숙을 하였다.
강릉에 들어와 보니 선발대로 온 사람들이 인민군 재침공으로 많은 자가 사상 당하였다고 한다. 나는 선발대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고 조상이 솔밭에 든 까닭이다. 나는 부산에서 선발대로 오기 싫어 도중하차한 것은 조상의 음조(陰助)가 아닌가 하고 감읍(感泣)한다.



◆ 1950년 12월 2일 수복 첫 회의와 주영학교 부임


12월 2일에는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나의 임지의 사령장을 주니 주문진 주영(注榮)학교였다. 나는 내심 불평만만(不平滿滿)이였다.
피란을 아니 간자는 임지를 잘 하여주고, 또 부산까지 피란을 가서 문교부(文敎部) 강습 시 수복을 하면 원상복귀하고 임시피란교장으로 학교 관리 책임을 맡기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최준사 장학사가 독단적으로 발령한 것을 분개하니 회의 후 나를 보자고 하기에 만났더니 이러 이러 하기에 더 큰 학교인 주영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나는 부산에서 정부의 구두 지령에 모순이 아니냐고 지적을 하니 할 수 없이 단번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또 부역(附逆)을 한 자도 있다는데 하니 그 자의 임지를 시정한다고 한다. 나는 주영보다 전 임지였던 연곡이 좋다고 하니 무가내하(無可奈何)이다. 나의 진언에 좌천한 사람이 있게 되면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전 임지였던 연곡학교장 관사에 오니 나의 세간은 간데없고 이불과 종이 부스러기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연곡 사람들이 간장과 된장을 갖다 주고, 내가 심었던 감자는 직원이 파먹고 감자 2가마를 주었다. 그리고 세간을 정리하고 단신 주영학교로 부임하였다.
6 ․ 25때 가장 파괴가 심한 학교인 주영학교는 개교 첫날 280명 그 다음부터는 7~800여 명이 모이고 직원은 전부터 직원들이 모였다. 나는 강릉에서 통근을 하기로 하고 민가를 얻어 자취를 하였다.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전선에서 나는 대포소리가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불안하게 만든다.
하루도 몇 차례씩 사다리 비행기가 삼대 편성 12씩 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니 너 나 할 것 없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불안한 기분으로 근무하니 이것이 풍진세상(風塵世上)의 모습이다.



◆ 학생들의 폭발(爆發) 사고가 발생하다.


하루는 오후 2시경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소리가 난다. 무슨 까닭인지 놀란 가슴을 달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와 자기 집아이들을 찾는다. 이 사고는 경찰서 자리에서 학생들이 포탄 뇌관을 빼다가 폭발이 일어나 학생들 4~5명이 폭사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아직 하학(下學)이 되지 않아 학생들이 모두 재교(在校)하였다.
하학이 되어 폭발현장에 가보니 죽은 아이들을 찾아 가지도 않고 거적을 덮어 놓았다. 사지가 삼지 사방에 날아가 구별도 할 수 없이 무참하게 죽었다. 전시에는 참으로 불상한 것이 인생이라 할까. 6 ․ 25전란으로 인한 피해자가 무려 200만 명이 된다하니 얼마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 피란을 갔다 와서 4년 만에 고향인 양양을 찾았다.


1950년 12월 10일경 고향의 형제 친척을 찾아보고 또 남하 할 때 남긴 물건을 가지러 큰 댁 을 방문하고자 간신히 38°선을 넘어갔다. 38°선의 출입은 엄중하여 헌병의 감시가 심하였다. 기사문의 지붕은 풀이 나있고 엄동에도 베옷을 입고 있었다. 참으로 이북 공산당 정치가 얼마나 참혹한 생활을 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큰댁을 방문하니 형들이 나를 부뜰고 모두들 울며 보지도 못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천진 고모 댁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 이튼 날 백운(白雲)이 분분(紛紛)한데 고모님이 밖에 가갔다 오시더니 큰일이 났다고 한다. 왜 그럽니까? 하니 원산(元山) 방면에서 피란민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가담하여 대거 남침 북괴군을 원조차 한국에 투입하였기에 이북에서 피란을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조반을 얻어먹고 속히 강릉으로 나가기를 결심하고 큰댁에 인사를 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36계 줄행랑으로 강릉에 왔으나 교육이고 무엇인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전세는 점점 불리하여 국군과 UN군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암록강 강계까지 진격한 우리 국군은 전진천리(前進千里), 후퇴만리(後退萬里) 전세가 역전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메가드’장군은 만주(滿洲)에 원자탄(原字彈)을 한 개 투하하자고 하는 것을‘토로만’대통령의 불허로 전국(戰局)은 새로 전개(展開)되어 2차 피란길이 되고 말았다.



◆ 1951년 1월 4일 제2차 피란길


이북의 피란민이 내려오고 38°선 이북이 소개(疏開)되어 수천, 수만 명이 바다에서 배로 철수를 하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까지 육박하니 강릉에도 1 ․ 4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1월 5일 첫날은 강동신 씨 댁에서 1박하고 떠났다.
1월 6일 때는 엄동이라 월동을 위해 이불 솜 같은 것을 만이 지고 길을 걸었다. 날세는 춥고 추워서 걸음이 잘 걸리지 않아 이불 솜 위에 아들을 업고 옥계에서 밤 재를 넘을 때 몇 번 엎어졌다. 도보로 묵호에 와 1박을 하고 삼척으로 향하였다. 묵호도 모두 피란한 까닭에 매우 쓸쓸한 무인지경이다.
1월 7일 삼척에 최하규씨 일행과 그 집 사위집에서 1박하였다. 그때 사위는 경찰에 매우 풍족하게 살았다.
1월 8일 또 다시 봇 다리를 지고 삼척 근덕에 와서 다른 피란민과 같이 한방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밥은 밖에서 취사를 하고 방에서 밥을 먹었다.
근덕 학교에는 군인들이 후퇴하여 와서 책상과 걸상을 부세서 태우고 불을 쬐고 있었다. 이것이 망국하는 시초가 아닌가 여겨진다.
1월 9일 길에는 눈이 깔리고 후퇴하는 군인차가 길게 늘어선다. 힘들게 영을 걸어서 호산에 오니 누가 나를 보더니 코피가 난다고 하여 시냇물에 가서 씻으니 유혈성천(流血成川) 이라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호산에서 큰길은 차단되어 피란민은 바닷가 민가에 모였다.
호산서 한 5마 정(町) 길, 어둡고 컴컴한 길로 민가를 찾았으나 초만원이다. 우리들은 늦게 도착한 까닭으로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엌에서 자겠다고 하였으나 다행히 어린이들을 위하여 방 한 칸을 구하여 들었다. 이 튼 날도 또 다시 울진으로 향하였다.



◆ 울진에서의 피란생활


1월 10일 고개 길에는 군인차가 길을 막아서 옆으로 돌아서 울진에 오니 이곳은 계엄지구가 되어서 민간인은 투숙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옛친구를 믿고 왔으나 허탕 이었다. 다시 걸어서 근남면 수산리에 와서 아는 김이원 선생을 찾으니 방은 만원이고 고간 방 하나를 준다.
할 수 없이 이곳에서 유숙(留宿)을 하니 불상한 거지 신세였다. 이해의 기후는 피란민을 죽이려고 기온도 차고 눈이 많이 왔다. 수산리에서 떠나 매화리로 향하였다. 성류굴 고개 좁은 길목에서 군인이 용품을 조사하여 뺏는 것이다.
우리도 군용 담요와 군인 외투를 갖고 있었으나 요행 뺏기지 않고 매화리에 이르러 최현곤 면장 댁에 들리니 방 한간을 준다.
매화학교는 내가 춘천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1925년 3월 1일자로 울진 매화학교로 첫 발령을 받고 약 4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이 지역 인사들은 대부분 다 알고 지낸 터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최 면장은 재직 당시 면서기로 있던 구면이며 그의 춘부장과는 친교가 특별하였다.
우거(遇去)의 친교로 방에 불을 때 주셔서 일야(一夜)의 여독을 풀었다.
매화는 재직 시 4년 이상 지방인사와 졸업생들도 많이 알아서 마음이 든든하였다. 하루 밤 신세를 지고 그 이튼 날부터는 살길이 막연하다.
1월 11일 매화리에서 두유피란(逗留避難)키로 하고 윤방구 면장을 앞세워 방을 구하였으나 이미 초만원이다. 할 수 없이 냉방을 한간 얻었으나 불도 드리지 않고 조석으로 냉방에서 지냈으나 달리 방법이 없다.
과거 친지인 윤호달, 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