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연창리 김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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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31회 작성일 2018-03-0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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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희 (여, 84세, 양양읍 연창리)
■ 면담일 : 2015.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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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맹 퇴치를 위해 말곡리에 가서 연극을 했다.


나는 현북면 하광정리에 살았었는데 왜정 때 아버님께서 일본말을 배우지 말라고 해서 잔교리에 있는 서당을 몇 년 동안을 걸어서 다녔다.
그 후 현북 인민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학교를 다녔는데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30분을 걸어서 다녔다. 그때 군행리에 사시는 오제정 선생님이 피아노를 키면서 노래를 가르쳤고 또 학교에서는 문맹퇴치를 위해 말곡리 마을에 가서 연극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연극에서 어머니 역할을 한 것 같다.
6 ․ 25전쟁 당시 현북 발개미(하광정리)에서 살았다. 6월 25일 새벽 3시경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오전 8시가 되자 인민군들이 벌써 인구까지 밀고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한 며칠 동안은 인민군들이 새까맣게 남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 현북중학교에서 미군기가 불 폭탄을 쏘아서 화상을 입었다.


그 당시에는 현북중학교가 지금의 현북면사무소 자리에 있었고 그때 내 나이는 18살이었고 중학교 2학년이었다. 1950년 추석 때 전쟁 중에도 학생들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운동장에서는 10여 명의 인민군들이 볼을 차고 있었는데, 오전 9시쯤 미군비행기 1대가 학교상공을 맴돌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미군기 4대가 학교를 공습하기 시작하였다. 순간 학교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인민군들은 산꼭대기 토치카로 올라갔으며 선생님들이 방공호와 산 쪽으로 대피하라고 소리를 쳤다.
아수라장속에서도 인민군들은 총질을 해댔으나 비행기들은 끄떡도 하지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그 와중에 1학년 학생들은 산속 토치카 쪽으로 올라가 대피를 하고 일부 선생님들과 우리 2학년 학생들 약 50여명은 방공호로 대피를 하였는데 그때 미군기들이 주로 방공호로 불 폭탄으로 공습하여 수많은 학생들과 일부 선생님이 화상을 입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는 그때 머리카락이 모두 그을려 지고 상반신을 거의 다 화상을 입었는데 몸은 화끈거리며 달아오르고 불 폭탄을 맞아 딘데가 얼마나 에린지머라고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그때 화상을 입은 상처자리가 온몸에 아직도 크게 남아있다.



◆ 단가에 실려 손양인민학교에서 1박을 하고 강현면 적은리로 들어갔다.


미군기들이 돌아간 후 화상을 입은 사상자들을 실은 단가가 북으로 이송을 하는데 국어선생님과 수학선생님도 머리까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임시로 콩기름을 바르고 단가에 실려서 북으로 들어가다가 손양인민학교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강현면 적은리 개인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 할머니가 삶아주는 감자가 몸이 엄청 아픈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가 데리러 와 집에 와서 피마자 잎을 붙이고 그랬는데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후 국군들이 진격해 들어왔는데 우리 집 사촌이 월남을 해서 국군으로 있었는데 그때 우리를 보고 의무대에 가면 페니실링이 있어 그걸 바르면 금방 나아진 지다고는 했지만 그 페니실링 1병이 쌀 5말 값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화상을 입은 수많은 환자들 중에 5명인가가 살아났는데 나하고 전종빈만 아직 살아 있고 전병관은 얼마 전에 죽었다.



◆ 조부 대상인데 돼지를 잡아 매달고 술을 담가놓고 피란을 나갔다.


음력 동짓달 11월 26일이 우리 할아버지 대상을 지내려고 술을 담그고 돼지를 잡아 메달아 놓고 제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피란을 나가라고 해서 대상도 못보고 그랬는데 어디쯤을 나가다 보니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어떻게 요란하게 쏴 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 다니다가, 밤재를 넘어 옥계까지 피란을 나갔다가 눌러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니 그 당시 피란통에 마을 인민위원장과 일부 사람들은 남으로 피란을 나가지 않고 북으로 들어갔다.